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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도르노 연구자인 이순예는 지난해 출간한 저서 《 예술과 비판, 근원의 빛》에서 이 같은 물음을 부제로 달았다. 저자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문명 비판적 시각을 발판 삼아 독일 철학적 미학의 발전 과정을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탐구한다.
저자는 21세기로 접어든 현 시점에서 ‘근대의 원형’을 다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까닭은 현재 인류가 겪는 문제들이 바로 근대의 결과물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을 모두 분석할 수 있다는 도구적 사유에 토대를 둔 근대 과학주의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인간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부작용과 모순, 환경파괴 등 문명의 피로감을 양산했다. 이를 극복할 방안으로 저자는 칸트에서 비롯된 독일 비판철학의 전통에 주목한다. 이때 ‘비판’은 ‘영역을 구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저자는 “일찍이 칸트의 비판철학은 이성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구분하고 이성을 막다른 지점까지 밀고나가 한계지점들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계몽의 용기를 역설하는 문장으로 시작해 당시 군주인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문장으로 끝나는 칸트의 1784년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중요하게 분석한다. 이 논문으로 오늘날까지 칸트가 계몽의 대상과 주체를 두고 일관되지 못한 논지를 폈다는 논란이 일고 있지만 이에 대해 저자는 “한마디로 자유는 바라면서도 사회 혼란은 막고 싶은 철학자의 생각”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치하 계몽 절대주의 체제에서 생존권과 자유를 유지할 방도를 고민했다.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분하라’는 칸트의 주장을 우리는 권력과 자본의 지배를 받는 공적 관계에 너의 인식을 모두 넘겨주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 있다. 칸트가 제기한 ‘영역부분’의 요청을 푸코는 ‘지배받지 않으려는’ 비판의 태도가 발현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칸트가 살았던 프리드리히 대왕 치하의 시대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개인을 포섭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 계몽의 용기보다 체계로부터 벗어나 개별성의 영역을 지켜내려는 선긋기에 더 많은 이론적 노력이 기울여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탈근대 담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권위주의의 해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개별성을 발판으로 근대 과학주의를 극복하겠다고 나섰다가 개인의 부족에 발목이 잡힌 채 결국 체계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했다.” 탈근대 담론의 가장 큰 문제는 “공동체 구성과 개인의 행복 사이의 긴장관계를 없애버린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회는 질서와 자유의 연대로 유지되는데, 오늘날 권력층은 더욱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담론은 현실과 분리되어 담론이 권력의 자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말로 권력을 전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의 회복은 시민들 각자가 사회 활동의 토대로 책임감을 가질 때만 기대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역설하며 “누구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국가와 사회라는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자기 계몽의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이유에서 저자는 예술을 재계몽의 담당자로 설정한 아도르노의 철학에 기대를 건다. “아도르노는 예술만이 체계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이성의 자기반성을 매개할 수 있다는 칸트의 관점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넘어오면서 예술이 종교, 윤리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성을 획득한 것은 예술작품이 활성화시키는 반성능력이 사회 통합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분열된 채 살아가는 개인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거울 구실을 하는 ‘허구’로서, 개인이 자신을 회복하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예술이 대중에게 다가간다는 미명아래 분열 자체를 실체화하고 조각난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술이 갈수록 체계를 한층 공고화시키는 역군을 자처한다” 며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이 왜곡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저자는 관객 참여형 예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내가 마치 작품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의 구성원이 된다는 확신을 주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적 발상이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이 세상이 설명 가능하고, 내가 참여하면 뭔가 이루어진다는 환상을 주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의 핵심은 긴장이다. 요즘 예술계에서도 유행하는 힐링열풍은 문제를 왜소화게 만드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저자는 예술이 삶의 고통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몸이 기억하는 고통을 표상가능한 형태로 현실세계에 불러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분열된 존재로 추락시키는 체계의 폭력성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기 분열’이라는 근대적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게 만든다.”
이슬비 기자

이순예는 1958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와 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예술, 서구를 만들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여성론》, 《발터 벤야민》, 《부정변증법 강의》 등이 있다. 미학과 예술론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