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김종길 l 미술비평 – 샤먼 리얼리즘, 흩어짐과 한 몸의 미학
김종길 l 미술비평
집안에 누가 아파요. 그럼 누굴 찾죠? 물론 의사나 약사 죠. 그런데 100년 전으로 올라가면 어땠을까요? 한의사 나 한약방? 물론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샤먼을 찾기도 했 죠. 누가 아프다는 것은 반드시 몸의 신체적 병리현상으 로만 파악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작동한다고 보았기 때 문이죠. 그렇다면 그 ‘다른 무엇’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샤먼은 ‘아픈 그’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 후경(後景)으로서의 영계를 살폈어요. 아픈 ‘그’는 오 직 그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 아버지,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로 이어지 는 숱한 삶의 알고리즘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샤먼은 ‘그 ‘가 아니라 그와 그렇게 연결된 알고리즘의 다른 부분을 굿으로 풀어 서 ‘그’를 치유합니다. 이것은 외과적 수술이나 약리적 신체반응으로 낫게 되는 육체적, 혹은 물리적 치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일 뿐 만 아니라 비과학적이고 초월적인 몸의 치유현상이라 할 수 있지요. 최근 작가 박찬경은 ‘아시아 고딕’이란 개념을 유포시켰어요. 우 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개념을 탄생시킨 배경입니다. 그는 이렇 게 말하더군요. “우리는 근현대를 겪으면서 죽은 사람도 많고 원귀 도 많고, ‘상처’ 관념이 널리 퍼져있는 나라예요”라고. 이 말은 우리 삶의 후경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망가져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후경 이 병들었으니 그 후경의 표상현실인 전경(前景)이 온전할 리가 없 겠죠.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뒤에도 군부독재와 살인적인 파괴적 근 대화를 겪어야 했던 자본주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단지 현실 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너머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삶의 사회적 환경은 물론이요, 그 삶의 주체인 민 중의 의식과 태도조차 깡그리 지우고 주입하고 다시 부수고 세우기 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몰아쳐 왔으니까요. 박찬경의 말을 다시 인용해서 묻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지역문화, 전통문화를 이토록 더 낯설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 은 서구인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국적인 느낌은 아 니에요. 프로이트가 말하는 ‘운하임리히(unheimlich)’, ‘두려운 낯 설음’이라는 개념에 오히려 잘 맞아요. 그러니까 친숙하기도 하지만 뭔가 두렵고, 체험에 남아있지만 여전히 뭔가 이질적인 대상이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친숙한 것이 아주 잊어버릴 정도로 억압되었 을 때,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되돌아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세계는 사실 공간만 동일 할 뿐 결코 동일적 장소성의 역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할 수 있어요. 역사 부재의 상실공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므로 어쩌면 유령일지도 몰라요. 죽 어서 환생하지 못하고 영계를 떠도는 중음신(中陰身)들 이 현실의 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깊게 침윤되어 있어서 자주 사건의 주체로 부상하는 것도 그런 문제죠. 그러므로 억압된 것, 즉 트라우마로 되돌아온 부재와 상실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이냐 하는 의문에서 우리는 21세기 예술가/예술의 의미 를 재사유할 수 있다고 봐요.
현실은 응어리진 사건들로 넘쳐나는 아수라판이에요. 아수라판 의 현실계는 온갖 상징이 유예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서 ‘돌상징(굳 어서 관념이 되는 상징)’이 되는 사건의 연속이죠. 그렇다면 이때 예 술가/예술은 어떤 태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인데, 저는 일민미술관에 등장했던 애니미즘의 이미지들처럼 ‘돌상징’에 국한 된 미학적 상징어가 아니라 미학전야(美學前夜)의 ‘활어(活語)’로 서 공수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전경이 눈앞의 현 실이고 후경이 현실의 이면에 그림자처럼 투영된 세계일 때, 아수라 판은 전후경이 맞붙은 세계이니 그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자는 오 직 샤먼밖에 없으니까 하는 이야기죠. 바로 그 샤먼이 21세기 예술 가의 예지적 정체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전경의 현실을 인식하는 것처럼 후경을 인식해서는 안 됩 니다. 하나의 후경에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 나선형이 몽타주처럼 펼쳐져서 풍경을 이룹니다. 현실에서 투영된 초현실과 비현실의 상 징계가 황홀하게 생성되는 세계가 바로 후경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후경의 세계가 표상되어서 전경을 이룬 것이 또한 현실이기도 하고 요. 둘은 어느 하나가 진실이거나 원본일 수 없는, 그러니까 어떠한 차이도 없는, 어미탯줄의 아이배꼽이니까요.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이 현실계의 전경을 가능케 하는 후경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주 체가 바로 예술가 샤먼, 샤먼 예술가인 것입니다. 샤먼 예술가들은 끊어지고 이어지는 시간들의 빈틈에서 삶의 진리를 엿봅니다. 후경 은 카오스로 가득하지만 그 가득함에 코스모스가 있습니다. 후경이 전경으로 잠시 건너올 때는, 후경의 힘이 전경으로 뻗칠 때는 샤먼 예술가들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소 름을 몰고 오는 노래와 접신의 공유 속으로 밀어 넣는 흥얼거림이 그들의 입에서 터지죠. 후경의 리얼리즘은 샤먼의 입에서 비로소 형 상화되고 그것은 그래서 ‘샤먼/리얼리즘’이 됩니다.
미(美)는 미의 개념이 섰을 때 미 자신이 스스로를 해체분열하는 지속적 생동(生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샤먼 예술 가들은 오랫동안 그런 미의 구조를 신앙에 가까운 정신성으로 유지 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도(石濤)가 자신의 화론에서, 아득한 옛 날에는 법(法:美)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큰 통나무조차 흩어지지 않 았는데, 통나무가 한 번 흩어지자 드디어 법이 섰다고 말한 까닭이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미학은 ‘흩어짐’ 즉, 해체분열의 새로운 전위 를 통해서 탄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20세기 동아시아의 미학이 서구와 충돌하면서 크게 상실한 것은 화법이나 화구, 화인과 같은 형식적 틀거리가 아니라 석도가 말했듯 이 일획(一劃)에서 발생하는 한 번의 흩어짐 즉, 태박일산(太朴一散) 의 미학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20세기 초반, 서구미학이 물밀어들자 수백 수천의 역사를 견뎠던 그 미학정신은 일순간에 무 너져버렸어요. 그것은 과거가 되었고 ‘근대’를 표상하는 그 어떤 미 학 속에서도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근대인들은 어두운 중세 의 그림자 속으로 그것을 밀어 넣은 뒤 돌상징으로 만들어버렸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서구 근대미학이 결코 돌 상징의 그런 고루한 것이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보세요. 다다(Dada)의 미학이 추궁했고 플럭서스(Fluxus) 미학이 또한 현 실과 초월의 경계에서 가 닿고자 했던 그 미학들을. 그들은 동아시 아가 상실했던 샤먼 예술가들의 영혼을 불러들여서 온갖 ‘흩어짐’의 전위적 미학을 터뜨렸잖아요. 요제프 보이스는 물론이요, 백남준의 네오 샤먼적 리얼리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돌상징의 미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가서 새 칼을 담금질하듯 불로 달구질하여 시퍼렇게 벼렸던 자, 그 시퍼런 칼날 위에서 새로운 미 의 황홀과 우주를 집전하는 자의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정체성은 오 직 샤먼에게 있었어요. 샤먼은 최초의 미학자였고 미의 담지자였으 며 미의 대리자였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는 시의 운율로 최초의 텍 스트가 된 공수의 신화를 터뜨렸고, 그 텍스트를 바람에 흩트리면서 춤을 추었으며 청동거울과 북소리로 이 현실과 저 현실 너머의 영계 를 맞붙여 불렀어요. 문학이, 연극이, 미술이 자유자재로 미분하고 적분(微積分學, calculus)하는 이 카오스모스적 판타지의 세계야 말로 가장 순수한 미의 대학이지요. 이제 21세기는 대샤먼의 시대가 도래하는 시대일지 몰라요. 인류가 처한 작금의 위험사회와 위기상 황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죠.
대샤먼의 시대에는 예술이 분파되지 않고 총화(總和)로 모이지 요. 그림이다 조각이다 사진이다 영상이다, 아니 문학이다 연극이다 미술이다를 구분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이미 많은 예술가에게서 그런 현상이 도드라지고 있습니다. 미술관의 전시공간이 문학적 텍 스트가 되거나 소극장이 미술의 미디어 공간으로 돌변하는 것은 사 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일 따름입니다. 공간의 문제 혹은 장소 의 문제가 아니라 샤먼 예술가들의 마당이 굳이 공간개념의 한계를 갖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발현되는 것이기도 하죠. 그뿐만 아니 라 현실 속 사건의 현장으로 뛰어든 예술가들은 매우 직접적인 샤먼 예술 굿을 기획합니다. 미는 그곳에서 잉태하고 소진하고 부활하며 익어갈 뿐입니다. 미는 굿의 부산물이 아니라 굿의 응결로서의 눈물 이며 환희이며 소리일 것입니다. 고대 샤먼이 말과 춤으로서 육화 접신의 경지에 들었다면, 이 시대 샤먼 예술가는 창조적 미의 형상 으로서 육화 접신의 경지에 들 것입니다.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미학은 신자유주의 나 초자본주의의 세계가 지향했던 제국주의 지배전략과 유사한 측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서구미학은 한순간에 각각이 고유하게 창조해왔던 균열된 세계의 파편들을 단일구조의 보편미학으로 평면화시켜버렸어요. 그들은 그들의 내부에서 미의 해체와 분열을 지속하면서 쉼 없는 파열음을 확산시켜왔지만, 역설 적으로 그들이 파종한 제3세계의 세계미학은 고루하기 짝이 없었 어요.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제3세계의 예술가들이 다시 단일구조 의 미학체계를 부수고 해체하면서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죠. 어 쩌면 세계미학이 다시 그렇게 균열을 일으키며 파편화된 상태의 천 변만화로서, 어떤 동시대성의 시차를 극복하기 시작했다면 그 순간 은 바로 지금일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육십사괘음양상생지도(六十四卦陰陽相生 之圖)>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주역》의 64괘를 이미지로 표현한 그 그림을 보면, 최근 자주 언급되는 자연 질서의 프랙탈 이미지를 떠 올리게 됩니다. 아니, 그 둘은 완전히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 다. 괘(卦)는 우주만물과 천지자연, 인간의 관계를 꿰뚫어보는 샤먼 의 눈입니다. 64괘는 인간의 생로병사, 길흉화복의 사건들을 상징하 는 기호체계죠. 《계사전(繫辭傳)》을 보면, “역(易)은 천지를 본받은 것이기 때문에 천지의 도(道)를 두루 포섭해 다스릴 수가 있다”고 했어요. 들뢰즈도 그랬죠. 천변만화의 변화 속에 존재하는 한 차이 없는 반복은 없기 때문에 반복은 차이의 반복일 뿐이라고. 아수라판 의 현실도 알고 보면 프랙탈이고, 64괘의 일부분일지 몰라요. 그러 나 64괘에서 숱한 삶의 총화를 읽어내듯이 동일한 사건은 결코 존재 하지 않고, 반복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샤먼 예술가의 미학 굿 판은 바로 그 프랙탈의 세계 속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세계의 사 건들을 미학적 사건으로 전유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살풀이하는, 진오귀굿의 마당이 되어야 할 것이에요. 샤먼의 눈을 뜨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