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아트스페이스 휴휴2.7~3.7
지난 1월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cricurartist)의 작품과 이광기 작가의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 려봐라>의 합작에 대한 사전 협의 문제가 불거진 것. 이광기 작가는 오래 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려봐라’라는 문구가 적힌 테이프를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에게 보냈는데 그는 이를 하나의 개념적 오브제로 간주하여 자신의 작품에 차용했다. 그런데 개념적 오브제로 사용하더라도 이광기 작가와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작가들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다행히 전시 오픈식에 이광기 작가가 참석하고 전시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해는 풀렸고 테이프 작업을 현장에 설치하면서 전시는 더욱 풍성해졌다. 사실 이번 일은 자그마한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이를 통해 개념적 오브제의 존재를 새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이번 전시가 교환가치를 거부하는 개념적 오브제들의 향연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작가 본인이 그동안 집에 모아 두었던 물건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이 오브제들은 애초에 교환가치가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윤진섭 개인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하는 순간 자본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빛을 발하게 된다. 이는 예술 행위에 의해 작품에 의미가 부여되는 현대미술의 메커니즘과도 맥이 닿아 있지만 우리 삶에서도 그러한 지평은 열리곤 한다. 특히 개인의 추억을 되새기는 사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존적 가치를 지닌다.
사실 삶의 주름을 촘촘히 들여다보면 자본의 가치를 뛰어넘는 보존적 가치가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이라는 이름 뒤에 도사린 자본의 막강한 힘에 모종의 복종을 맹세함으로써 이러한 보존적 가치들을 망각하거나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특히 예술작품의 경우 예술시장에서 가격이 책정되고 일정한 금액으로 거래되는 순간 그 예술작품의 가치는 오로지 교환가치에 근거해서 판단된다. 기존의 보존가치가 강조되는 개념적 작품이라 할지라도 돈으로 환원되는 순간 가치의 기준이 순식간에 전치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자본에 잠식되지 않거나 저항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교환가치를 훼손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전시가 흥미로운 건 자본에 대한 예술적 저항을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가 온몸을 바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 진행되면서 전시장의 오브제가 지속적으로 변하도록 설정한 행위 역시 자본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예술 수행의 전략이다. 또한 한 큐(韓 Q), 왕치(王治,Wangzie), 윤진섭을 비롯해 20여 개의 예명을 사용하는 것도 예술가의 명성이 작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는 예술계의 섭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자본에 저항하는 예술 행위를 수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온전한 삶의 가치를 보존하고픈 희망 때문이 아닐까. 50년 이상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는 이종누이의 삶(사진)과 자신의 피(혈당 체크 후 남은 피 묻은 솜들)를 병치한 작품은 이종누이의 혹독한 삶을 자신의 아픔으로 애도하기 위한 것이지 관례적인 예술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는 무관하다. 이번 전시는 자본으로 환원되길 거부하고 삶의 역사를 빌려 예술의 가치를 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의미성을 가진다. 그러나 관례를 떨쳐버리는 전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일쑤다. 과연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고를 수 있을까.
김재환・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