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쿤스트독갤러리 2.7~2.20
‘사별삼일(士別三日)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필자가 2012년 서울 사이아트갤러리에서 열린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란 동일한 제목의 전시를 봤기 때문일까? 이번 전시를 보기 전부터 작가 허구영의 전시는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게 했다. 더욱이 1990년 초반에 그가 보여준 일련의 그룹전 기획과 그를 통한 여러 가지 담론들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신선함과 미술을 대하는 반문(反問)들을 가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바, 그의 태도를 존경해왔으며 언제나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분명 필자는 더 좋은 전시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작가 작업의 문맥(context)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왜 아직도 그러한 담론에 매달려야 하는지? 한 부분에 대한 미련이 그의 전체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많은 상념이 그의 작업을 정체(停滯)하게 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말한 ‘갸우뚱한 균형’은 주체 안에 내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닌가? 쿨하게 ‘작업은 개인적인 차원이다’라고만 말하고 전시를 통해 수정된 항해의 과정들이 전혀 없다면, 관계하지 않는 타자를 상정해 놓았다면 왜 전시를 하여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사견을 피력하려는 것인지? 이러한 의문점에서 그를 움직이지 않는 그로 볼 수밖에 없다.
왜 필자는 이렇게 비관적이어야 했을까? 그것은 전시장에서 2014년의 허구영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캡션이 없는 작품들이 때 묻고 허름한 전시장 벽체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서로 어울리기보다는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불친절이 의도된 것이라면 그 배후를 알아차릴 때 쾌감이 있을 진대, 이번 전시에서는 놓인 것이 없는 잔칫상을 보고 주인의 배려를 책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그가 파놓은 함정에 누구도 빠지지않고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푸념만 늘어놓는 뻘줌한 광경만 노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나는 것은 그가 작업실에서 만들어낸 그의 의도(언어로서)들을 네오룩과 갤러리 홈피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니다. 그런 것 없이 전시현장에서 그의 생각들이 요해(了解)되지 못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의 생각이 뒤틀어지고 비껴가는, 그렇게 사고에서 도주하는 작업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함정에 안 빠지고서 그의 작업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조차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라고 하는 말조차 삼가는 그의 작업, 이번 전시만큼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전시는 그 현장에서 보여주어야만 한다. 작업실의 수많은 고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죽지도 않고 다시 환생하지도 않는다. 전시장이라는 현장에서 무엇을 기획하고 무엇을 제공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사고와 거리두기, 자신과 작품의 거리두기, 작품과 관객의 거리두기에서 그의 입장은 오해되고 그의 욕망은 희석되고 관객은 그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ps. 닷새를 고민한 이 치기어린 후배의 보챔은 그가 만든 함정인가?
윤제・포천아트밸리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