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보고ㆍ10ㆍ다

3.21~4.16 SeMA 창고
정수경 | 미학

전시가 열린 SeMA 창고는 불광역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을 은평구 혁신파크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창고’와 ‘혁신’이라… 그 기묘한 조합의 울림이 만들어낸 다소의 상념들을 헤아리다보니 어느덧 창고 앞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창고의 생김새. 한눈에도 수십 년의 세월을 짐작게 하는 붉은 벽돌 단층건물의 흰 방범창살과 연한 청회색 페인트로 덧칠된 커다란 나무문은 산뜻한 산수유색 전시 현수막을 크게 내걸고 활짝 열려 있음에도 발걸음을 잠시 주춤하게 한다. 대안공간의 역사도 20년이 다 되어가고 미술관들마저 대안공간을 운영하는 마당에 이 무슨 새삼스러운 구태인가 싶겠지만, 대안적 공간들은 여전히 기대 어린 긴장감을 일으키곤 한다. 공간이 도전하기 때문이다. 보존해야 하고 보존하기로 결정된 낡고 오래된, 그리고 애초에 전시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공간을 어떻게 미술 전시 공간으로 살려낼 것인가. 낡은 시약창고 공간이 그렇게 던진 도전에 난지 10기 작가들은 어떻게 응했을까?
궁금증을 안고 들어서는 이를 처음 맞는 것은 회색 가벽에 걸린 임현정과 허수영의 커다란 회화들이다. 무덤덤한 회색은 낡은 창고의 거칠고 붉은 골조를 부분적으로 감싸 안으며 긴장을 살짝 누그러뜨린다. 그러나 이 가벽에는 급변하는 전시공간의 성격과 충돌하는 회화의 시각성에 관한 깊고 오랜 고민이 녹아들어 있을 터. 여기서 회색은 협상의 색상으로 와 닿는다.
그 왼편으로 난 통로를 따라가면 몇 개의 스크린이 하얀 가벽을 따라 설치된 공간이 나타난다. 영상작품들이 맞이하는 이 공간은 너무 환해서 생경할 지경이다. 긴장하지 말라 말이라도 걸 듯, 권용주와 박보나의 작품은 압도하기보다 차분히 다가오는 크기로 설치되었다. 이곳이 낡고 오래된 창고였음은 유난히 환한 빛이 의아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을 때 비로소 각성된다. 당연히 있을 것 같던 슬레이트 지붕 대신 엉성하게 얹힌 목재들 사이로 봄 햇살이 눈부시다. 후면의 문 뒤에 감추어진 ‘ㄷ’자 모양의 좁은 공간에는 권혜원의 영상이 삼 면의 틈새 없이 가득 채웠다. 3채널의 비수평적 배치는 공간의 특정한 생김새를 살려내는 동시에 ‘버려지는 장소들’이라는 영상의 테마와도 공명을 이루며 시각적 울림을 한층 키워낸다. 이에 뒤질세라, 신형섭의 모기 세레나데가 기묘하게 치고 들어온다. 협상에 이은 진입의 면모가 엿보인다.
다시 돌아 나와 중앙에서 오른쪽 후면에 있는 좁은 통로로 들어가면 시약창고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선반들이 유난히 높은 천장까지 가득 차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드디어 도전하는 공간이다. 박윤경과 옥정호, 도로시엠윤, 염지혜의 작품이 맞이한다.
좁고 길고 높고 선반으로 가득한, 못조차 박지 못하는 공간. 무엇보다 강한 입체감으로 다가오는 선반들의 공간 속에서 평면작업들은 어떻게 공간에 밀리지 않고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고민의 흔적들이 드러난다. 박윤경이 이 다소 산만하고 복잡한 공간을 반투명한 자기 작품이 창발하는 공간체험유희를 극대화하는 요소로 끌어들였다면, 도로시엠윤은 선반이 만들어내는 어둠을 물리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Myself 네온시리즈’의 최적화된 배경으로 활용해냈다.
길쭉한 공간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사위가 온통 선반으로 둘러싸인 가장 거칠고 산만한 공간이 관람자를 맞이한다. 그에 맞장이라도 뜨듯, 강렬한 외관의 작품 몇이 거기 자리 잡았다. 임흥순, 배윤환, 성유삼 그리고 이정형의 작품들은 맞춤옷이라도 입은 양 공간과 어우러진다. 성유삼과 배윤환의 검고 어둡고 강렬한 작품들이 창고의 드센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이정형의 작품은 너무 녹아들어, 원래 작품이 지녔던 파열의 힘이 좀 약화되는 느낌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공간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홍승희와 신현정의 작품이다. 홍승희의 백색 오브제들은 마치 오래 비울 집의 가구에 흰 천을 씌워 놓은 듯한 모습, 그래서 잊힌 어떤 사물들의 세월을 화석화한 듯한 인상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화이트큐브는 줄 수 없었던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상념을 오래된 창고 공간이 비로소 그녀의 작품에 제대로 가져다준 듯하다. 신현정의 작품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공간에 개입한다. 그 여린 천들이 길게 늘어져 미약하게 흔들리는 모양이 강한 공간과 강한 작품들의 대결 속에서 공간을 진정시키고 달래는 듯하다. 동시에, 잘 들여다봐야만 보이는 곳곳의 빛바랜 자국들은 SeMA 창고의 세월에 대한 은유 같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아차! 놓쳤던 무엇인가가 새롭게 눈길을 잡아끈다. 마치 처음부터 그 공간에 속한 것인 양 너무도 자연스레 칸칸이 놓여 있어 무심히 지나쳤던 푸른 화분들. 허태원의 〈염리동 블루스〉다. 작가의 고민과 재치가 동시에 느껴져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샌다. 순간, 작가들이 공간과 밀당하며 보냈을 설치의 시간들이 눈앞에 선연하게 펼쳐진다.
신진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의 운명이란 한결같다. 시내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둘레둘레 서성대야 하는 운명. 그러나 때론 그 운명이 아직 길들지 않은 신진작가만의 도전정신에 합당한 공간들을 선물하기도 한다. 주변부인 까닭에 재개발의 논리를 비켜갈 수 있었던, 삶의 오랜 시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SeMA 창고 같은 공간들이 난지 10기와 같이 패기 찬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과 만났을 때, 작가는 응전 가운데 성장하고 공간은 젊은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얻는다. 이런 것도 하나의 혁신, 그것도 꽤나 괜찮은 혁신 아닐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고, 어두움과 밝음이 함께 있고, 공격과 달램이 밀당하는 곳, 그곳은 더 이상 창고도 아니거니와, 전시장에 불과하지도 않다. 그곳은 작품을 매개로 삶의 에너지가 피어나고 확산하는 공간이다.
난지 10기 리뷰전 〈보고ㆍ10ㆍ다〉는 디스플레이에서 아카이빙으로, 아카이빙에서 에디토리얼로 이행하는 전시형태의 진화과정을 한 번에 보여주었다. 그 모든 과정이 아티스트 큐레이팅에 의한 것이며, 심지어 작품 설명글 작성도 작가들이 직접 했다는 점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다변화된 프로그램들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이제 난지 10기 작가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지만, 전시장에서 본 그 찬란한 햇빛이 비껴드는 어느 봄날이면 SeMA 창고에서 만났던 그들의 그 에너지가, 그 작품들이 다시 보고ㆍ10ㆍ을 것 같다.

위 성유삼 〈파도〉(왼쪽) 스폰지 폼 200×200×85cm 2016

CRITIC 이주요, 정지현 도운 브레익스, 서울

3.24~5.14 아트선재센터
김해주 | 독립큐레이터

전시는 몇 주에서 몇 달까지 긴 시간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관객들은 그 시간의 총량을 의식하지 않는다. 전시의 경험은 각자가 그곳을 찾아가서 본 만큼의 시간으로 결정된다. 날씨처럼 매일 바뀌는 것이 아닌 전시의 시각적 경험은 그 기간 중 언제가 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주요, 정지현 작가가 함께 만든 〈도운 브레익스, 서울〉에서 전시를 경험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여기서 전시는 작품의 종착지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고 살아가는 생애의 한 기간에 속할 뿐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처럼 작품 각자의 맥박이 느껴지는 이유는 먼저 그 형태와 배치된 방식에 있다. 전시장 곳곳에 놓인 사물들은 안정된 위치를 점하고 있기보다는 터미널에서 대기하고 있는 승객들처럼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퀴가 달린 것은 물론, 목재와 가는 철재 등의 재료로 만든 것들도 그 크기에 관계없이 운동성을 드러낸다. 공간 안에 점점이 흩뿌려진 수많은 사물과 장치, 드로잉은 그 사이사이로 여러 길을 내고 있고, 보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풍경과 형태를 드러낸다. 그 배열에 따라 관객도 여러 동선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대기 상태의 사물들은 정지해 있어도 움직임을 품는다. 구름처럼 떠 있는 이 움직임의 전조가 작품이 갖고 있는 시간성을 지시한다.
전시가 작품 생애의 한 단면임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지점은 실제 전시 안에 다양한 활동들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전시 기간 내에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는데, 이 퍼포먼스의 시간에만 작품들이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시간에도 작품들을 둘러싼 일들이 일어난다. 두 작가는 전시장 한켠에 커튼을 치고 작업장을 마련해 놓고 그곳에서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동시에 사물과 장치를 새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완성된 전시의 보완이나 변형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전시를 그 자체로 생성되거나 생활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분류와 분리의 원칙, 매끈하고 깔끔한 외관, 완벽성, 관객들을 안내하는 방식 등 전시라는 매체가 쌓아 온 일반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거나 이를 의식하지 않는 형태들이다. 대신 성근 조합, 빗금, 교차선, 튀어나온 각목, 각을 맞추지 않은 요소들, 돌출 같은 배합과 구성의 감각이 드러난다. 이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전시를 유지시키는 것은 실을 잣는 것처럼 두 작가의 손끝에서 연속되는 만들기의 습관, 즉 형태와 이미지를 생성하는 즐거움이다. 사물들은 그 형태를 제시할 뿐 아니라 그 안에 각자의 이야기와 만들기의 연대기를 운반하며 뉴욕의 퀸즈 뮤지엄에서 광주비엔날레를 거쳐, 지금 아트선재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작품이 가진 시간을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영속성이 없는 사물, 결국은 부식되거나 부서질 물체임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장이나 보관을 위한 제도나 공간의 부족뿐 아니라 그 사물이 갖고 있는 필연적인 노화와 죽음에도 관련돼 있다. 이 전시는 곳곳에 극장과 연극의 요소들을 은유하고 있지만, 여기 놓인 사물들이 특히 배우와 겹치는 것은 그 부분이다. 결국은 둘 다 죽는 신체라는 것. 이곳이 극장이라면 이 무대에 백스테이지라는 개념은 없다. 주로 등장과 퇴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장면의 시작과 끝은 맞붙어 있고, 막은 스스로 공간을 가르며 움직인다. 공연자와 관객의 구분선도 수시로 바뀌는 유동적인 것이 된다. 한편, 이 전시와 연계해 만들어지는 퍼포먼스는 여러 관계의 연결이기도 하다. 전시를 함께 만든 두 작가의 긴밀한 협업, 결코 각자의 소유를 내세우지 않는 전시 내에서 사물의 존재 방식, 그리고 퍼포먼스를 통해 기존의 작업들을 장치 삼아 결합하는 다른 작가(황수연, 이이내, 이혜인, 은재필, 정유진)의 작업과 맺는 관계, 그리고 이 신기한 사물과 행위로 채워진 공간을 경험하는 관객들과의 관계이다. 이 여러 층위의 관계 맺음이 결합하면서 전시는 동트기 전의 시간, 고정된 의미에 닻을 내리지 않는 모험의 시간을 만든다.

위 4월 21일 아트선재센터 2층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현장

CRITIC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3.31~6.24 하이트컬렉션
조은비 | 독립큐레이터

이른바 신진작가를 발굴, 소개하는 형태의 전시는 기관마다 상이하지만, 대개 공모제 혹은 추천제로 이뤄진다. 공모제가 지원자 중에 선택된 소수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추천제는 말 그대로 공인된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니, 방식상의 차이가 있더라도 사실상 “간택된” 자가 누리는 기회의 독점과 선??/??후배라는 위계에 내재된 배타성은 불가피하다. 하이트컬렉션이 지난 4년간 선보인 젊은 작가 연례전은, 이쯤 들 법한 추천제를 둘러싼 관객의 궁금증에 대해 기획자 스스로가 다시금 입장을 밝혀두었다. 그는 이 전시가 구조상의 추천제 너머, “추천인-피추천인의 관계에서 감지되는 작업의 상관관계나 미술에 대한 관점의 차이” 역시 드러낸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기획을 익숙한 추천 구조로 보는 것은 협소한 시각일 테고, 일종의 메타 기획의 차원으로 바라보면 전시를 둘러싼 더 풍부한 시선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이트컬렉션 측은 매해 추천인 작가를 선정하는 기획자의 기준점과 더불어 전시 키워드를 제시한다. 2014년 〈미래가 끝났을 때〉가 매체의 구분 없이 동시대 젊은이들의 “우울한 현재가 미술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파악했다면 2015년 〈두렵지만 황홀한〉은 매체를 회화로 한정했고, 지난해 〈언더 마이 스킨〉에선 “강력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지닌 작가”를 추천인으로 선정해 그들이 추천한 젊은 작가들에게서 역시 유사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 전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추천인(권경환, 권오상, 우순옥, 이주요, 정희승)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참여작가들(강희정, 김세은, 노혜리, 박천욱, 서정빈, 이준용, 장종완, 전명은, 한우리, 황효덕)은 그 어느 해보다 매체에 있어 다양한 스펙트럼을 넘나든다. 추천인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특정 매체에 대한 자기 확장과 변주를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기성 작가들의 개별적 특성은, 곧 그들이 추천한 ‘다음’ 세대 작가들의 특징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여기에 기획자는 전시를 포괄하는 키워드를 미래를 둘러싼 몇 가지 태도로 세분해 “또 다른 날(새로운 날), 반복적인 하루(똑같은 날), 자신과 타인에게 주어지는 삶의 여러 가지 기회(또는 외면)” 등으로 상정했다. 미래라는 낱말이 지시하는 가능성, 앞날, 다음 단계와 같은 희망적인 메시지보단 그를 둘러싼 이면(裏面)을 다룬다는 점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작가들의 매체에 대한 적극적인 재구성과 그를 바탕으로 한 자기 인식이다.
가령, 서정빈은 전통 조각의 재료적 속성으로 인한 한계를 돌파하고자 건담 프라모델의 구조적인 메커니즘을 작업에 대입해 조각의 내부 구조와 움직임을 구현하는데, 이러한 일종의 자가 응용은 조각 매체에 대한 고민을 담으면서 동시에 그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 같다. 김세은 역시 추상회화의 전통적인 요소들과 무관하게 자신이 선택한 대상을 확대??/??응시하는 방식을 구축하는데,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은 “그리는 대상을 향해 스스로 움직”임으로써 추상적인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전명은은 찍는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사진 안에 상이한 매체와 감각 등 ‘다른 세계’를 끌어들이고, 이는 곧 사진 매체 자체를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황효덕은 작업 제작 과정에서 현실적인 상황에 맞춰 변형하거나 그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물리적, 정서적, 신체적 영향 관계 속에서 작업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비물질적인 상태나 현상, 그에 따르는 불가능한 상상을 물리적인 조건 안에서 구체화하는 일이다. 이준용 역시 드로잉을 선택하게 한 자신의 물적 토대와 이에서 비롯한 특유의 테크닉을 발굴하는데, 이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대한 작가의 불가피한 반응임과 동시에 저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대적하는 저항, 곧 “상상력”의 표출이기도 하다.
지면 관계상 일부 작가의 작업에 한정해 거칠게 살펴봤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이들 작업에선 개념이나 내용보다 매체 자체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전유와 이종(異種) 혼합 그리고 자신의 감각과 행위에 집중하는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매체 사용과 그 전환은, 추천인 세대의 매체적 관심과는 분명 다르다. 매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 ‘이면’에 참여작가들은 모순된 상황 속에서 절단된 파편들을 접합하면서 연결과 어긋남, 전환과 전복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유희한다. 그렇게 자신이 고안하고 재구성한 장치나 도구들을 작업을 위한 파편이자 요소로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 안에서 하나의 경향을 이루는, “핵심으로 가지 않고 에둘러가는” 형식적인 태도는, 다소 멜랑콜리한 이 전시 제목을 상기시킨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꽃잎의 홀짝에 기대는” 행위는, 절실한 바람을 담고 있으면서 그 선택을 우연에 맡긴다는 점에서 일견 체념적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러한 자기 불확신은 더 이상 앞날을 내다보며 삶을 기획할 수 없는 시대에 주술과도 같은 연약한 희망에 기대려는 정서적인 생존 전략이 아닐까. 미래(未來)는,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의 미술하기는 부재하는 내일이 아니라 충실한 현재를 뒤섞으며 펼쳐지고 도약한다.

위 박천욱 〈주체롭게 자라다 2〉 화분, 인공식물, 의자, 전등, water aperture 170×150×90cm 2017

CRITIC 윤동천 일상_의 Ordinary

4.12~5.14 금호미술관
현시원 | 독립큐레이터

왠지 윤동천의 전시를 다시 보는 리뷰에는 다른 미술사학자나 비평가가 쓴 문장을 끌어오고 싶은 충동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보리스 그로이스 (Boris Groys)가 쓴 ‘예술의 진리(The Truth of Art)’에 적혀 있는, 예술이 삶을 보다 나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오래된 문구를 꺼내 쓰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대신 나는 작가가 전시장에 올려놓은 여러 개의 질문과 샘플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축이 ‘질문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뒤돌아본다. 작가는 30년 넘게 현대미술을 하는 자신의 입장을 ‘질문하는 자’로 일관성있게 끌어온다. 동시에 일상의 사물들을 연장 삼아 미술 작품을 가지치기 한다. 거대한 사이즈와 색면 등 현대미술의 외양을 관습적으로 두르는 것으로서 관습을 파기하는 작품, 신발과 밧줄 같은 일상의 사물을 전시장 좌대 안에 결박시킨 작품들은 한 사람이 하지 않은 것 같은 여러 개의 미술적 자아를 보여준다. 그것은 작가와 미술이 단일한 주체임을 넘어서 여러 개의, 최대한 많은, 눈앞에 공존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매개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으로 읽힌다. 각종 미술담론에 부합하는 외양 안에 ‘미술적인 것’을 위반하고자 하는 내면을 가진 윤동천의 작업들은 한 작가의 미술보다 ‘일상’을 다시 보기를 권한다. 현대미술에 관한 독특한 학습법을 제안하는 텍스트 북이나 도판 같기도 하다.
작가는 먼저 도대체 삶과 부합하는 미술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이 질문은 자기회기적이거나 자기반영적이지 않다. 대신 너무 많은 일상의 사물, 삶, 사회적 사건, 개인의 스마트폰에 깃든 기억들이 건조하게, 마치 시치미떼듯 전시장에 등장한다. 정확히 말해 전시장에 있는 그것들은 세속성이 아닌 범속성으로서의 예술이다. 윤동천의 개인전은 여러 개의 질문과 시간을 거닐며 타인들의 질문을 향해 나아간다. 전시장 입구 벽면에는 선언처럼 “일상은 모두에게 공유되어 특별함이 없는 것을 뜻한다”는, 1987년에 그가 쓴 문장이 붙어있다. 한편 전시장 종착지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Q. 살면서 가장 감동스러웠을 때는?’이라는 질문에 덜 다듬어진 목소리로 내뱉는 이름 모를 이들의 목소리다. 목소리는 어떤 미술 재료보다 날것 상태로 들어와 있다. 작가는 여러 개의 Q를 자신의 작업을 통해 세계에 던진다. 작가가 타인에게 이렇게 난해한 질문을 던지는 의도는 무엇일까. 재기발랄하고 위트 있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던 작가는 지금 세계를 올려다보고 또 내려다보는 악동일까 천사일까, 일상을 믿는 것일까. 배반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노란 방에 있는 노란 리본과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의 헤어롤 등의 사물, 그리고 〈위대한 퍼포먼스〉라고 명명된 한국 현대사를 구성한 강력한 정치사회적 증거들은 작가 윤동천이 본 집단 이미지이자 일상에서 집단의 삶을 가시화하는 역사가 되었다.
이 역사 앞에서 감각을 동원하려면 관람자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윤동천의 질문이 몸을 갖게 되는 것은 먼저 30년에 가까운 긴 기간 동안 작가가 ‘일상’이 무엇인지 질문하고자 한 것에서 획득되는 시간성이다. 미술로 삶에 대해 질문해온 역사가 작가의 작업 안에서 경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시장을 채우는 작업들을 보노라면 연쇄 작용처럼 사물과 사물, 질문과 질문, 연결어미와 어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를테면 관람자로서 이런 유의 말장난, 미술하는 일상은 일상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작가가 다루는 일상의 바운더리는 거의 모든 것에 가깝다. 윤동천은 의도적으로 작업의 대상을 선택하지 않은 채 ‘거의 모든 것’으로 확장하고 수용하는, 다소 무모해보이는 지속성과 확장성을 추구한다. 둘째 작업 과정과 선택의 방식을 그대로 작품 표면에 위치시켜 첫 번째 관객인 작가 자신과 관람객, 미술제도에 내보이는 투명성이 돋보인다. 〈길에서??????-????흘리다 연작〉(2016), 〈길에서-껌자국 연작〉(2016)은 작가의 내적 동기와 규칙에 의해 제작되는 추상회화를 시각적으로 연상시킨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제목이 이것은 일상에서 ‘생산’되었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흘린 것이고 껌자국인 것이다. 이일상의 단면을 미술로 내건 것은 작가지만, 만든 것은 삶이다. 벽면을 가득 채우는 아크릴릭은 〈우리-얽히다/고무줄 드로잉 1〉이라는 이름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두 단어 사이에 놓인 빗금(/)은 작가에게, 미술로 자신을 기만하거나 사기치지 않으려는, 불가능에 대한 군더더기 없고 매우 담백한 선언인 듯하다.
그의 전시에는 질문만큼이나 답변 또한 존재한다. 한 켠에는 작가가 200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연 개인전에서 관람객에게 제공한 설문지가 놓여있다. 설문보다는 선문답에 가까운 내용이 담긴 이 하얀 종이들은 작가가 흑백사진으로 보여준 자신의 작업실(〈산실??-???문호리 54???-????4〉) 틈 어딘가에 자리하였던 것일 테다. 윤동천의 예술하기는 일상의 사물과 사건을 재료로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예술 자체가 일상의 재료가 된다. 재료는 일상을 여백없이 꽉 채운다. 계속 질문하고 답하느라 미술을 뺀 다른 일상이 없을 것만 같다. 예술보다 일상이 보다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전시장 지하 1층에서부터 3층까지를 채우고 있다. 전시장 전관을 둘러보는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개개의 작업들이 전관을 꽉 채우고 있으면서도 ‘꽉 찬 텅빔’을 느끼게 하는 힘의 정체다. 대한민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린 각종 사물들이 유기견처럼 좌대 위에 올라와있는데, 여기에는 서정도 서사도 없다.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그물과 같다. 거대한, 끝없이 물결치는 파도 위에 몸을 튼 그물처럼 계속 이어져 반복된다. 보기에 편한 것만은 아니다. 촛불집회를 위대한 퍼포먼스로 부르는 데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물이 대상을 순식간에 덮어버리듯, 윤동천의 질문은 관람객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을 질문의 범위 안으로 포섭한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심각한 것들이 아닌, 너덜해진 일상의 겉옷을 입은 여러 가지 샘플들이 작가가 꺼내놓은 “일상(Ordinary)” 제제에 포괄되고 윤동천의 헛되지 않은 기대를 품는다. 미술을 잘 사용한 한 예로 꼬마 아이가 그린 그림 몇 점이 액자에 담겨있다. 종이 편지봉투 안에 가가호호 사람 넷이 손잡고 웃는 얼굴들이 그려진 그림.

위  윤동천 〈염치〉 캔버스에 혼합재료 193.9×259.1cm 2017

CRITIC 권혁 Controlled and Uncontrolled

4.7~29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오세원 | 씨알콜렉티브 디렉터

권혁은 사유의 운동 “에너지(기??/???氣)”를 흔적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물질과 정신. 그리고 우연과 필연에 응하는 통제와 비통제(controlled and uncontrolled)간 긴장감을 드러낸다. 작가는 거대하여 유의미하거나 또는 미세하여 미비하거나 할 것 없이 생명에너지의 움직임 또는 흐름을 비정형의 물로 형상화하고, 자유로운 증식과 무질서의 질서를 재봉노동을 통해 실의 흔적으로 남기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평면 위의 유동적이며 수용 가능한 물 형상은 퍼짐과 머금음이라는 긴장을, 재봉노동이 생산하는 반복과 차이는 드로잉 작업으로 물화한다. 이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개념산수화나,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폭포 같기도 하며, 바람과 함께 일렁이는 파도의 한복판 같기도 하다. 이렇듯 화면 안의 동적인 붓질과 스티치는 보는 이에게 형상에 대한 몰입감과 다양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실의 겹침·재질감 넘치는 페인팅과 함께 휴먼사이즈를 넘는 화면의 규모 속에, 오랫동안 훈련된 작가는 기술적 완숙이라는 외연에 더해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이 만드는 환경, 환경에 영향 받는 생명의 상호작용 원리를 탐색하는 내연적 깊이를 담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작가가 사용하는 실은 일반적이지 않은, 얇지만 견고한 특수자수 실인데, 이는 엄청난 반복노동에 의해서 미묘한 차이들을 생산해낸다. 외유내강의 바늘과 실이라는 매체가 가진 존재감과 함께 봉합 과정에서 남겨지는 자수와 실오라기 같은 잔여물의 의미들은 이분법적 긴장으로 통합할 수 없는 주변의 모습과 다시 통합하려는 지속적인 운동 에너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사물을 분리하는 칼과는 달리 꿰매고 봉합하여 세상에 해를 입히지 않고 이득이 되는 바늘과 실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작품에 젠더적 의미를 더해, 소수자를 대변하는 페미니즘적 의미화를 가능하게 한다. 작가의 이전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위생대 시리즈나, 한때 성형이라는 폭발적 유행 현상에 대한 부자유함을 고발한 영상에서 작업의 맥락적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상상력이 사라진 사회 현실에서 반복의 견고함과 화면의 미세한 흩날림을 통해 영겁의 시간과 봉제노동이 전하는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탈소외적 노동이라는 창조적 예술작업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간소외를 해체하는 노동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권혁의 노동집약적 작업은 차이를 통해 생존하는 동시대 미술환경에서“다시 노동”이라는, 《다시, 그림이다》(마틴 게이퍼드, 디자인하우스, 2012)라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무질서의 질서, 자유로운 구속의 카오스이면서 코스모스로 사고를 확장하여 살펴본 생명의 본질과 근본에로의 환원은 작가의 오랜 인상주의적 시각실험과 함께 국가·인종·젠더에 대한 존재론적 개념 실험에 의해서이다. 다양한 사회문화와 개별자 간의 인식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대한 작가의 회의는 불변하는 본질 탐구에 나서는 도화선이 된다. 작가는 밀레니엄 초부터 다양한 현상을 드러내는 프로젝트들을 추진했다. 작가는 매우 강렬하여 눈이 부신 반짝임에 매료되어 특수 필름지로 유사 햇빛(사람 크기의 둥근 원판)을 만들었다. 휴먼사이즈 원판을 들고 세계 각국의 거리로 나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며 관객들의 반응을 기록하는 〈움직이다 프로젝트〉(2005?~2006)를 진행했다. 또한 우리나라 화려한 전통 문양을 작은 조각보 형식의 작품으로 만들어 온·오프라인을 통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문양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나누다 프로젝트〉(2008년 갤러리 팩토리에서 결과물 전시)를 기획했다. 문화, 언어, 사고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하여 수많은 차이를 드러냈다. 이러한 다양한 현상들에 집착한 행위들은 최근 본질에 대한 물음과 함께 드로잉과 자수페인팅으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본질, 삶, 생명에 대한 ‘구도자’(사루비아다방의 이관훈 “2014년 권혁개인전 서문에서”)적 물음은 미술사적 문맥과 함께 역사성을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생명을 상징하는 유동적인 물 페인팅과 함께 다양한 숨의 양태를 통해 인간에 대한 관심, 삶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삼라만상 우주의 원리들을 카오스모스(Chaosmos: 카오스(혼돈)와 코스모스(질서)로, 구 천년 역사의 책)와 보이지 않지만 절대성을 가진 진리를 우주 수학의 원전인 천부경에서 속에서 찾아나가고 있다. 작품의 물질화·자본화에 비판적 잣대를 들어대었던 아르테 포베라 작가들의 맥락과 같이 작가는 풍선과 실이라는 매체를 통해 숨을 물리적으로 잡아두어 다양한 생명의 양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물-생명-숨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얇지만 견고하고 단단한 꿰맴 노동의 미학 속에서 작업을 대하는 중견작가의 진지하고 원숙한 태도와 함께 끊임없는 존재론적 철학적 탐구로 이어지고 있다.

위 권혁 〈카오스모스 R255〉(왼쪽) 천에 아크릴, 실스티치 145×235cm 2016~2017〈숨〉(오른쪽) 실, 혼합재료 (각)20×15×30cm 2016~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