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전수천 타계 1주기 – 내가 기억하는 전수천

글| 정연심 홍익대 교수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2009)에 출품한 〈 선은 정지를 파괴한다 〉(부분) 앞에 선 생전의 전수천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2009)에 출품한 〈 선은 정지를 파괴한다 〉(부분) 앞에 선 생전의 전수천

1998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전수천 선생님이 미국의 대륙 횡단 기차 프로젝트를 준비하는데 뉴욕에서 일할 큐레이터를 찾고 있다고 하셔서 처음으로 뉴욕에서 만나게 되었다. 설명하는 목소리가 작아서 사실 처음에는 선생님의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뉴욕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다. 선생님은 무빙 드로잉 프로젝트를 설계하시면서 미국 기차에 흰 천을 씌워서 쉬지 않고 대륙을 횡단하는, 커뮤니티의 장으로서 기차를 생각하셨다. 이 무빙 프로젝트는 사실 기획 단계부터 ‘안전성’을 이유로 한 장애물이 많았다. 그럼에도 루이지애나에 있는 기차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선생님과 함께 안전 테스트를 하기도 했고 또 다른 분들과 함께 뉴욕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까지 대륙 횡단을 시도하기도 했다.

 〈 움직이는 드로잉 〉(2005) 프로젝트. 미국 워싱턴에서 출발해 LA에 도착하는 횡단열차에 흰 천을 씌워 대륙을 캔버스로 삼고, 열차를 붓 삼아 펼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 움직이는 드로잉 〉(2005) 프로젝트. 미국 워싱턴에서 출발해 LA에 도착하는 횡단열차에 흰 천을 씌워 대륙을 캔버스로 삼고, 열차를 붓 삼아 펼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선생님은 정말 진솔한 작가였다. 그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성향이 일본에서 학부를 나온 영향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니, 한국의 선후배 사이 같은 끈끈한 느낌은 없을 수 있지만, 작가로서 나는 그게 오히려 참으로 편했다. 선생님은 늘 나보고 “연심 씨, 한국의 큐레이터들은 해외에 작가를 소개하는 것에 너무 소극적이다”라는 말도 주저 없이 하셨다.

전수천의 무빙 드로잉은 본래 2001년 9월 13일에 진행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그 해 9 · 11 테러 사건이 터지면서 취소되었다. 그 이후, 2005년에 비로소 기차가 뉴욕 펜스테이션에서 출발하게 되었는데, 당시 열차 출발 칸에 ‘전수천의 무빙 드로잉’이라는 사인이 나왔을 때 참여자들은 모두 가슴이 뭉클해져 할 말을 잃었다. 벌써 14년 전 이야기이다. 나는 그 이후, 미국 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2009년 홍익대로 오게 되었다. 다시 서울에서 선생님을 뵙고,  평창동에 있는 작업실에 놀러가기도 했다. 서울에서 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게 지냈고,  선생님은 애초에 꿈꾸었던 부산 – 서울 – 평양-베를린을 횡단하는 유로-시베리아 프로젝트를 실현하려고 고군분투하셨다.  사실, 2~3년 전만 해도 나는 선생님과 함께 외교부 담당자 등을 만나러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니 당시 남북관계가 너무 얼어있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작가에겐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리얼리티를 깨버리는 절대적인 힘이 있다. 이것은 바로 상상력이고 불가능한 일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선생님은 작업 앞에서는 순수하고, 욕심 많고 야심찬 청년이었다. 그리고 집요함이 있었다. 나는 그게 전수천의 작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2014년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 작가 재조명_긴 호흡전〉에 출품된 전수천의 〈 아우라를 그리는 연습 〉 설치광경

2014년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 작가 재조명_긴 호흡전〉에 출품된 전수천의 〈 아우라를 그리는 연습 〉 설치광경

한국에 온 이후, 선생님은 홍대 인근 호미화방 앞에 오실 때마다 내게 연락을 했고, 호미화방 앞 일본 라면집에 가서 간단하게 라면을 먹고 헤어지곤 했다. 2018년 4월 나는 선생님과 오랜 만에 다시 호미화방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런던 전시 준비 등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선생님은 ‘앞으로 2년가량 더 작업을 하고 그 이후로는 조금 쉬고 싶다’고 하셨다. 이번엔 라면집 대신 고깃집을 찾았다. 선생님께서 이번에는 라면 대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자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5월에 마지막 통화를 했다. “연심 씨, 내가 오프닝에 못가면 나 대신 런던 오프닝에 갈 수 있을까요.” 그게 마지막이었고, 나는 작년 광주비엔날레 준비 중에 선생님의 부고를 받았다. 우리 모두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못했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된 선생님의 전시를 통해 그의 실험정신이 길이 기억되길 바란다.


故 전수천은 1947년 태어났다. 도쿄 무사시노 미술대학, 와코대 예술학과,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1995), 상파울루비엔날레(1996) 등에 참가했다. 한예종 명예교수, 대안예술학교 비닐하우스 AA를 설립(2013)하고 교장직을 지냈다. 2018년 9월 4일 타계했다.


< 월간미술 > vol.416 | 2019.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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