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VIEW
염치
한참 쓴 글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몇 번째.
그날 기자는 취재를 위해 이동 중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사고가 일어났음을 전해들었고, 분명히 구조 작업을 벌여 인근 항구로 이송 중이라는 보도를 접했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닌 듯, 그냥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취재에 나선 것으로 기억한다. 2년이 지난 지금, 300명이 넘는 이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선생, 누군가의 친구….
일면식도 없고, 인연을 맺은 이도 없지만 어디서 그저 스쳐 지나며 일상을 누릴 수 있었던 이들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 전시장에서 관람객으로 만났을 수 있었을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로지 사진으로만 미술관 앞에 있는 분향소에서나 만날 수 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밑바닥을 봤다.
살아있는 자들의 세치 혀로 누군가는 망자와 그 유족을 모욕했다. 누군가는 그럴 듯한 말로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음에 수렴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발언은 정치적이라고 했고, 위로는 배와 함께 침몰했다.
그러니 애당초 망자와 유족을 위로한답시고 허락된 지면에 이 글을 쓰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경기도미술관 앞 분향소를 다시 본다.
2주기 추모전은 <사월의 동행>(경기도미술관, 4.16~6.26)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황석권 anarchy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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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적률 게임
원고 청탁을 위해 리슨투더시티 박은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가는 지금 옥바라지 골목에 철거가 진행돼 내일 통화하자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최근 리슨투더시티는 지역 주민, 예술가들과 함께 옥바라지 골목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이다. 우연찮게 이번 호에 소개되는 작가 이정배의 <씨앗 프로젝트>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보이고 있다. 1908년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서대문형무소는 독립투사들이 모진 고문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투쟁했던 곳이자, 광복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열사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치른 곳이다. 이들의 가족들은 형무소 맞은편 자리에서 옥바라지하며 그들과 함께 고통과 설움을 나누었다. 바로 그 장소가 옥바라지 골목이다.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이 골목에는 100년 가까운 세월과 수많은 이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며칠 전 방문한 옥바라지 골목은 을씨년스러웠다. 아파트 재개발로 철거가 예정된 이 구역은 현재 대부분 빈집으로 곳곳에 출입금지 띠가 둘리어 있었다. 하지만 18가구 약 40여 명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재개발 반대 여론을 수용해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재개발 조합과 종로구가 이에 반발해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한편 이번 5월 28일부터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의 주제가 ‘용적률 게임’으로 정해졌다. 용적률은 대지 면적에서(지하 제외) 건물 각층의 면적을 합한 총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용적률은 건축물이 높아질수록 늘어나는 수치다. 최근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에 들어설 현대자동차 신사옥의 높이가 105층으로 알려졌다. 국내 최고층인 123층의 롯데월드타워에 비하면 낮은 편이지만 어마어마한 높이다. 서울시가 용적률을 800%로 올려준 대가로 현대차로부터 1조7000억 원을 기부받는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땅의 효율성을 따지자면, 땅값이 올라갈수록 용적률 싸움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적 가치도 현재 롯데캐슬 아파트 네 동과 저울질 중이다. 씁쓸하지만 용적률 게임은 한국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이슬비 drizzles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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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말해요
지난 해 말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Face with Tears of Joy)〉이었다. 얼굴 표정을 설명하는 이 표현이 한 해 동안 사용이 크게 급증하거나 이슈가 된 단어로 선정됐다니 어딘가 미심쩍다. 그러나 이 단어를 표현한 그림문자를 보면, 누구나 ‘아하!’하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다. 픽토그램의 하나인 이모지(Emoji)가 언어표현으로 인정된 이 사례는 ‘문자’의 범주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겐 ‘이모지’보다 ‘이모티콘’이란 말로 익숙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모티콘이 부호를 조합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면 이모지는 그림문자에 가깝다. 스마트폰 사용으로 메신저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긴 문장으로 적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단순한 아이콘을 한 번의 터치로 표현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국내 메신저 카카오톡에 따르면 매월 카카오톡 사용자들이 메시지에 주고받는 이모지 수는 약 20억개라고 한다.(《앱스토리》 2016년 2월호 참조) 엄청난 수치가 증명하듯 이모지는 어느새 생활 속 문자가 되었다. 공산품이 된 이미지에는 개성이 드러나는 글의 뉘앙스는 없다. 그러나 그림문자는 계속해서 알파벳을 확장하고 있다.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메신저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이모지 사용을 넘어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기도 한다. 간혹 이모지를 직접 제작하는 경우까지 있다.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이모지 폭이 넓어지면서 그림문자는 점차 일차적이고 단순한 표현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최근 미국의 웹디자이너인 벤 길린(Ben Gillin)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소재로 한 이모티콘 킴은지(Kimunji)를 제작해 무료 배포했다. 언뜻 정치적 풍자로 보이지만 실상 그의 화살은 “미국 헐리우드의 모델 겸 배우인 킴 카다시안의 엉덩이 등 신체 부위를 500여개의 이모지인 ‘키모지(Kimoji)’에 열광하는 대중에게 있다. 언어유희를 통해 만들어진 이 이모지는 정치인과 연예인을 연결해 놀이를 제공함과 동시에 가벼운 사회적 풍자를 제시한다. 깊고 무거운 장편의 비평문에서 짧은 단상을 적는 SNS의 글을 넘어 이제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기 표현이 이뤄진다.
임승현 shlim98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