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성 : 드로잉 실험실
2017.11.9~2017.12.9 인사미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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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과정 성과보고 첫 번째 전시로 선정된 이의성의 전시에서는 〈드로잉 실험실〉제하에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목으로 유추하여 각종 드로잉에 대한 실험인가? 상상하였으나, 결론적으로는 드로잉을 통한 실험일 경우가 더 많았다. 작가가 지적하듯 laboratory( 실험실), 즉 노동에 대한 발언을 드로잉을 통해펼친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전시된 총 13점 중 전시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으로는 〈30g 선 드로잉〉(2016), 〈드로잉의가격〉(2016, 2017) 그리고 〈생산적인드로잉〉(2016)을 꼽을 수 있다. 좌대 위에 놓인 〈30g 선 드로잉〉에서 작가는 나뭇조각으로 만든 30cm 자에 대고 흑연 스틱으로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다. 결국 흑연 스틱이 으스러져 총 30g의 흑연 가루가 된 상태에서 작업이 완결된다. 노동의 결과인 선이 가루에 가려져 잘 안 보인다는 점이 아쉽지만, 드로잉의, 아니 모든 시각예술의 기본 단위인 줄긋기의 노동집약적 성질을 잘 꼬집고 있으면서 동시에 예술 / 노동의 결과적 허무함을 여실히 하는 드로잉 실험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드로잉은 명사이지만 행위에 대한 진행형(~ing)이기도 하다.
〈드로잉의 가격〉 역시 〈30g 선 드로잉〉 같은 건조한 실리주의적 이상을 표방한다. 상하로 펼쳐지는 5개의 액자 속에는 각각 하나에서 5개의 돌멩이 드로잉이 숫자 교본처럼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다. 액자마다 오른쪽 아래에는 하나의 돌멩이를 그리는 데 걸린 시간(각 1시간)과 제작 당시 영국의 최저시급을 반영한 드로잉의 가격이 적혀있다. 돌멩이 드로잉 하나면 10파운드, 두 개면 에누리하여 19파운드… 이런 식이다. 과거에 이우환 작가의 붓 자국이나 김창렬 작가의 물방울이 많이 그려진 작품일수록 더 비싸다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점이나 물방울의 개수가 작품가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언정,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작가가 작품에 쏟는 물리적 시간과 이미지 개수라는 정량적 기준보다도 작품에 담긴 개념, 정열이나 숭고함이라는 신화를 좇기 때문이다. 단지 신화의 생성은 노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벽면 아래에는 각각의 드로잉을 그리는 데 사용된 5개의 흑연 스틱이 그린 돌멩이의 수만큼 짧아진 상태로 놓여있다. 시각화된 노동의 양이다.
지하 1층의 〈생산적 드로잉〉은 〈드로잉의 가격〉에 등장한 돌멩이의 대형 드로잉이 벽화로 자리 잡아, 일견 동시기에 금호미술관에서 개최되던 ‘B컷 드로잉’에서 볼 법한 전형적 벽화 드로잉 작품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실험실’인 만큼 상식적인 드로잉이 등장할 리는 만무하다. 설치작업의 일부인 이 드로잉을 통해 작가는 예술품의 제작에 동반되는 노동의 가시성에 질문을 던진다. 예술 창작에도 노동은 분명 발생하는데 그 과정(고됨)이나 결과(환금성)가 여타 노동에 비해 불투명하다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작가는 흑연가루로 직접 캐스팅한 곡괭이를 사용하여 마치 채광작업을 통해 돌멩이를 캐내듯 벽면에 돌멩이를 그렸다고 한다. 최소한 예술작업에 소요되는 육체노동이라는 측면은 부각시킨 셈이다. 단, 탄광굴에서 실제 곡괭이를 사용하는 노동을 떠올리면 〈생산적 드로잉〉 자체가 예술과 노동에 대한 커다란 아이러니로 작용하게 된다.
〈노동의 무게〉는 엄밀하게는 드로잉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시장에 팽배한 실험정신에 입각하여 접근한다면 작가의 일상의 습관(daily practice)이라는 측면에서 드로잉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벽면에 가지런히 진열된 약 40점의 목재 도구는 작가가 하루 하나씩 수집한 나뭇조각을 각종 도구의 형상으로 깎아낸 것이다. 작가는 단순히 나뭇조각을 깎는 데 그치지 않고 작업에 할애된 시간, 깎기 전과 후 나무의 무게, 깎아낸 나무의 양을 도구별로 막대그래프로 제시함으로써 투여된 노동력을 가시화하고 있다. 제작에 동원된 노동과 물리적인 부산물들을 정밀하게 수치화한 자료들은 전체 공간에 논리 정연한 긴장감을 부여해 실험실다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으나, 목재나 합판을 깎아 모양만을 갖춘 망치나 끌, 송곳들의 반실용주의적 본질을 연결시킨다면 예술품과 노동 사이의 부조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작가의 ‘실험’들은 대부분 예술 창작의 이면에 숨은 노동의 평가절하에 대한 염려에 기원하고, 이를 농수공산품에 적합한 기준(무게)이나 임금(시간)으로 환원하여 제시하고 있다. 시장경제하에서 가능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양날의 칼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문제는 무게나 시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의 가시화이다. 마르크스의 논리에 따르자면 미술품을 생산하는 예술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하에서 결코 승산이없다. 좋은 작품을 생산해서 많이 판매되면 될수록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멀어질 뿐 아니라 미술제도에 의해 착취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예술품 창작의 근간에는 미켈란젤로가 쪼아대는 대리석의 원가나 고흐가 쌓아 올린 물감 가격의 실리적 가치를 초월하고자 하는 기대치가 있다. 이 추상적 개념만이 우리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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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신영 | 서울대학교 미술관 연구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