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우 : The Place of Memory
2018. 2. 21 – 3. 14
세움 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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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점은 도심의 상공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 주택가 위로 이동한다. 눈 아래 마당 딸린 이층집이 늘어서 있다.위에서 보니 어느 집이나 비슷해 보인다. ∙∙∙∙∙∙ 그것은 여느 때와 똑 같은 하루일지도 모르고, 온갖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경이로운 하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으로선 누구에게나 아직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한 장의 백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애프터 다크’. 무심한 듯, 영어 단어를 번역도 하지 않고, 한글 발음으로 투박하게 옮겨 쓴 이 소설은 어느 새벽의 도시 이야기이다. 글을 끌어가는 화자가 있고, 주인공 남녀가 등장하지만 사람들은 서사의 요소가 되지 못한 채 마치 허공의 입자처럼 떠돌 듯 존재한다.
이 소설을 읽은 게 먼저였는지, 장은우 작가의 그림을 본 게 먼저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글과 이미지가 머리 속에 뒤엉킨다. 장은우의 풍경은 상공에서부터 골목의 구석까지 초점을 잃은 듯 훑다가 결국은 시각이 포착한 모든 장면을 포용하고, 평면 위에 펼쳐진다. 비슷한 구조와 자재로 만들어진 집들은 도시 골목의 흔한 모습이라 낯설지 않다. 사람들이 구상적인 형태로 등장하지 않지만, 익숙한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비슷한 일상, 하지만 어쩌면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는 어떤 삶의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한다.
익숙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유는 장면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고요하게 정지된 것 같은 장면에 비해 한지를 겹겹이 올리는 과정은 너무나도 역동적이다. 한 조각의 종이는 하나의 기억을 덮어 과거의 일부를 제거하는 듯 하면서, 중첩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추상과 구상, 동양화의 재료와 서양화의 기법 그 어느 중간 지점에 있는 장르의 이 회화는 기억을 담보로 한 상상과 적나라한 잿빛 현실 사이 어디쯤을 떠오르게 한다. 아침도, 밤도 아닌 그 사이 새벽의 시공간.
하루키의 마지막 문장처럼, ‘공간의 기억’에는 다음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 (세움 아트스페이스 출처) 글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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