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 성 낙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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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낙 희 | Sung Nakhee
성낙희는 1971년 태어났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회화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개인전 〈#1〉(2002 아트선재센터), 〈모션〉(2006 원앤제이갤러리), 〈위드인〉(2010 두산갤러리), 〈멜드〉(2014갤러리 엠) 등을 가졌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한결같은 꾸준한 붓질로 천천히 변화하며 ‘추상화’의 지평을 탐구하고 있다.
‘회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성낙희의 개인전 〈Modulate〉가 페리지갤러리에서 3월 5일부터 5월 9일까지 열린다. 점ㆍ선ㆍ면을 이용해 화면 속에서 리듬과 화음을 만들어내던 작가가 어느 순간부터 더 거대하게 증폭되는 음—어쩌면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을 화면에 연주하더니 이번에는 소리가 공간을 구축해내는 듯한 연작 〈Sequence〉를 선보인다. 화면은 작아도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있는 여지는 더 커졌다.
그림에 기댄 글, 글에 기댄 그림
맹지영 |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큐레이터
그림에 대한 글은 매번 실패가 전제된 시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김없이 또 그림에 언어를 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림에 대한 글은 나에게는 그 그림을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이며 그림을 내 언어 안에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닌 그 그림으로 다가가려는 나름의 방식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글은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마련이고 때로는 필자의 주관적 세계가 글에 투영되어 이미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림은 태생적으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과 의식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비언어적 언어이기에, 그림에 대한 글은,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혼자 설 수 없으면서도 가장 독립적으로 단단하게 설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림의 이미지가 추상에 가까울수록 글이 홀로 설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는 추상 이미지 해석의 주도권이 관객에게 있어 보다 자유롭게 그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추상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그려온 작가 성낙희의 그림과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눠왔다. 한작가의 작품세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시각과 해석도 달라져 왔다. 마치 한 사람을 알아가듯 시간이 지날수록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요소들로 인해 그림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해석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다지면서 나름의 생각을 굳혀나가기도 했다. 성낙희의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 사이 그림들에서 나는 화면 안의 기하학적 형태의 이미지들이 주도하는 대로 따라가기 바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운동감에 이끌려 음악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에 주목했다. 그래서 2012년 그의 동생 성낙영(나키온)과 한 2인전 〈Stuffs!〉에서 그의 작품을‘이미지 음악’이라 부르기도 했다. 2000년 초반부터 그림뿐만 아니라 벽면 드로잉을 종종 해 오던 그는, 이미지가 그림 안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고 전시하는 장소에 맞춰 벽면과 바닥을 질주하고 있었다. 되돌아 보면 당시 작가는 자신이 느끼고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잊힐까 무섭게 “연주하듯” 쏟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는 그 빠른 속도를 맞추지 못해 표면적으로 읽어내는 데 바빴던 것 같다. 그런데2018년 〈Transpose〉 연작과 2019년 〈Sequnece〉 연작을 보고 당시 일련의 그림들이 이 연작들이 나오기 위한 전주나 안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첩된 과거
〈Transpose〉 연작은 그의 구작들에서부터 줌인(zoom in)이 된 공간이었다. 성낙희는 그의 과거작들을 보면서 2018년 〈Transpose〉연작, 그리고 2020년 페리지갤러리 〈Modulate〉 전시에서 선보인 〈Sequnece〉 연작을 그려 나갔다. 여전히 화면 속 이미지들은 리듬감을 품고 있었지만, 과거와는 달리 그런 음악적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서 그림의 표면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 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 화면 안을 점유하는 공간들 사이에서 머물게 하며 화가의 움직임, 붓질을 따라 멈춰서거나 이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작품들에서 일부의 형태가 확대되어 보임을 감지할 수 있었던 〈Transpose〉 연작의 초기에는 직선과 곡선의 사용이 다소 경직되어 보였다. 그러나 연작의 후반으로 갈수록 면적을 분할하고 배치하는 것이 과감하고 자유로워지면서 성낙희 특유의 위트 있는 구성과 예측하지 못한 색의 조합, 붓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Transpose 2〉와 같이 예외적으로 화면 안의 공간을 극단적으로 응축시킨 작품도 등장하지만(아마 2017년 〈Amplitude 2〉로부터 비롯된 작품으로 추측해본다), 과거와 달리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분주하게 시선을 옮기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 전체의 면적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율했음을 느린 속도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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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미술 > vol.423 | 2020.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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