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극 유머속의 진심

김범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2023. 7. 27 – 12. 3
리움미술관

멀티버스를 넘나들며 딸 조이를 구하기 위해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는 엄마 에블린과 그 가족의 이야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개봉과 동시에 호평받으며 큰 화제를 일으켰다. 다중 우주의 여러 삶을 뛰어넘던 주인공과 딸은 소란스러운 여정 중에 문득 ‘돌’이 되어버린다. 발아래 펼쳐진 광활한 암벽을 내려다보며 침묵만이 감도는 가운데 딸 조이는 에블린에게 번잡스러움은 잊고 “그저 돌이 될 것 Just be a Rock”을 요청한다. 모녀가 겪었던 세상의 모든 것은 아득해지고 둘은 돌의 형태가 되어 본래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모험은 계속된다.)

돌 두 개가 산 위에서 대화하고 있다. Courtesy of A24 Films

김범이 가르쳐주는 ‘바위가 되는 법’은 에블린과 조이가 도달하려 한 베이글의 빈 구멍, 공 空의 상태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가공된 정보와 편향된 섭취, 극단화되는 시청각 자극으로 포화한 일상 속 현대인에게 그의 가르침은 역설적이다. 작품명 이자 전시의 제목 《바위가 되는 법》은 김범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1997)에 수록된 글의 제목이다. 이 책은 생존을 위한 자기 변화와 가변적인 인간의 모습을 주제 삼아 독자에게 다양한 생물이나 사물이 되는 법을 지시한다. 수업을 듣는 사물과 바위가 되려는 인간, 어디론가 달려 나간 사나운 개와 해결해야 할 미로가 등장하는 부조리극은 매일 같이 속도전을 치르는 우리에게 김범이 예술로써 내놓은 잠재적인 응답이다.

전시 전경. 사진: 문혜인

작가의 지시는 바위 되기에 그치지 않는다. 관람객에게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예술 세계를 넘나들 것을 독려한다. 영화에서 멀티버스 간 이동을 위해 립밤을 씹어 먹는다던가, 신발의 좌우를 바꿔 신는 것 따위의 비일상적인 행동이 필요했듯이, 김범은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찾아 다소 엉뚱하고 실험적인 역할을 제안한다. 어설픈 글자로 쓰인 파란 하늘을 보라는 지시문을 읽거나, 고이 접은 주머니 속에 숨겨둔 개인적인 메시지를 상상해 볼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려 캔버스에 남겨진 여백을 채운다. 김범에게 회화는 오리거나 글씨를 쓸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인 동시에 감상자의 심상을 매개로 비현실적인 차원에 돌입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시각적 요소를 제한하는 시도는 현실과 비현실이 포개진 중간적인 상태를 제시한다.

김범, 〈풍경 #1〉, 1995, 캔버스에 마커, 56 x 81.5cm. 개인 소장. 제공: 리움미술관. ⓒ김범. 촬영: 이의록, 최요한.
Kim Beom, Landscape #1, 1995, marker on canvas, 56 x 81.5cm. Private collection. Courtesy Leeum Museum of Art, Seoul. ⓒ Kim Beom. Photography by Lee Euirock and Choi Yohan.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2002, 혼합 매체, 가변 크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문혜인

작가의 엉뚱한 시도는 사물로 향한다.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는 작품의 말장난 같은 제목대로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그리고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를 나란히 제시한다. 교묘하게 해체되고 뒤바뀌어 결합한 이 세 가지 사물은 우리가 사물에 대해 가진 일반적인 상식을 배반한다. 현실과 상상, 상식과 비상식 사이에 놓인 사물은 나아가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그것의 실체가 과연 일치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정체란 무엇으로 규명되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망치는 임신해버리고, 매일 자라던 식물의 잎은 사실 신문과 잡지의 콜라주 조각이다. 백조인 줄 알았던 하얀 부유물은 단지 스티로폼에 불과하며, 심지어 백조를 흉내 낸 팔의 형상임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우리의 천진난만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본능적이고 유희적인 표현 방법으로 혼란한 세계 속에 ‘눈’을 뜨기를 제안한다.

에블린은 이마 가운데 장난감 눈알을 붙이고 문제해결을 위한 제3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 Courtesy of A24 Films. 

불확실한 관념과 의미들 사이에서 고심하는 예술가의 노력과 애환은 추상화 그리는 방법을 가르치는 튜토리얼 영상, 〈”노란 비명” 그리기〉에 축약된다. 그림 아저씨, 밥 로스를 떠올리게 하는 영상에는 작가가 직접 출연해 여러 노란색의 조색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색상별로 다양하고 약간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비명을 담아 캔버스에 한 획씩 칠해나간다. 악! 아으악! 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캔버스에 쌓인 노란색은 하나의 추상화로 완성된다.

김범 특유의 재치와 해학으로 가득한 전시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를 요구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적회의를 떠올리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 바로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임을 노란 비명을 내지르는 김범의 모습에서 상기해본다. 익숙함을 경계하며 실체의 진실성을 고민했던 김범에게 ‘소리 지르는 나’의 떨리는 목젖은 의심의 여지 없는 진실한 울림이었을 것이다. 현실과 상상, 상식과 비상식을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그러나 꽤 즐거운 탐구 과정은 김범과 함께하는 하나의 여행이며, 김범의 예술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세계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 모든것으로 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ALL AT ONCE!

김범, 〈백조〉, 2004, 스티로폼, 모터, 프로펠러, 무선 수신기, 목재, 72 x 79 x 31cm. 개인 소장. 사진: 문혜인

전시전경

글, 사진: 문혜인
자료 제공: 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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