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 CRITIQUE
박주희 | 아트스페이스3 큐레이터
심상용 | 서울대미술관 관장
권정현 |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fe,yi》
아트스페이스3 3.26~4.23
박주희 아트스페이스3 큐레이터
흩어진 과정, 이전의 만남
《fe,yi》 전시를 준비할 때쯤 보았던 문장, 소리, 누군가의 마지막 공연을 소개하며 글을 연다
1 “‘날아가기’가 하나의 비상과 또 다른 비상을 즐기면서, 의미의 경찰들을 따돌리면서 두 개의 비상 사이에 행해진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동문선 2004 p.34
2 샹탈 아커만의 첫 단편영화인 〈Saute ma ville〉( 1968)에서 서사 없이 흘러나오는 사운드는 정해진 길을 완벽히 이탈했고, 자신의 존재감을 여한 없이 드러냈다. 자유로운 소리를 들었다.
3 성수동에서 8년간 운영되었던 ‘게토얼라이브’의 마지막 공연 〈마무리 그리고 변화와 시작〉을 보러 처음 그곳에 방문했다. 게토얼라이브를 이루고 함께 상황을 만들어왔던 예술가들이 모여 마지막과 시작을 응원하는 즉흥 음악 공연을 펼쳤다.
누군가에 의해 연출된 것도 아니었고, 어딘가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예술가들이 마음껏 발산해 내는 에너지와 감정을 가까이서 느끼고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참여자들은 게토얼라이브가 “떠나는 것, 사라지는 것, 영원히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한 명씩 예술을 향한 애정과 생각을 자신감있게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중 나는 ‘자유로운 표현 방식을 향한 지지’와 ‘사명감을 동기로 게토얼라이브를 지금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예술은 결론이 없어도 된다’는 말에 다시 한번 예술의 본래 의미를 떠올렸고, 미술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과 초심자의 나를 상기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당당했고, 공기는 뜨거우면서도 느슨했다.
하나로 귀결되는 지배적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행위와 기획된 것에 맞추어 정리하고 깎아내고 도려내는 자세에 대한 의문이 내 안에서 맴돌았다. 미술은 도저히 정답이 없고, 단일한 방향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계속 길을 잃고 싶었고 자주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전시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잠시 여기 머물 뿐이다. 그래서 전시가 구성되고 작품을 담아내는 과정을 되돌아보고 주목했다. 전시를 만들기 위해 마주했던 여러 갈림길과 수많은 과정과 대화가 증발하지 않고 조금은 머무르길 바랐다.
전시 제목인 《fe,yi》는 영어 ‘fey’와 중국어 ‘fei’의 합성어이다. 영단어 ‘fey’는 ‘약간 특이한, 비현실적인’이라는 뜻이다. 또, [fei]로 발음되는 중국어 ‘飞’(날비(飛)의 간체자)는 ‘날다’라는 뜻을 갖는다. ‘날아가는 것’은 자유로운, 열린 주체, 연속적인 움직임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를 품고 있다. [fei]는 중국어의 4가지 성조 중 평성(1성)으로 숨을 길게 내뱉어야 하는 긴 단어이다. 제목에도 여러 차례의 이유와 긴 과정을 의도하였다. 서문에서 “전시를 위해 존재했던 과정을 조금씩 쪼개어 드러내고자 했다.”한 것처럼, 시시콜콜할 수 있지만 우리가 나누었던 형체 없는 대화와 만남을 여기에 기록하고자 한다.
제갈선의 노트는 무척 아름답다(시간이 된다면 그의 웹사이트에서 작가 노트를 꼭 읽어보시길). 그는 자주 메모하는데, 그의 작품처럼 글도 파편화된 듯한 호흡을 갖고 있다. 글에서는 알 수 없는 어떤 고통과 차가운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베를린에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7시간씩 뺄셈을 해야 했다. 수첩에 서울의 시간과 베를린의 시간을 적어 계산하곤 했다. 보통 서울 시각 오후 5시, 베를린 시각 오전 10시에 만났다. 그의 작업에 대한 궁금증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작품이 주로 푸른빛을 띠는 이유를 물었다.
장도은 〈우는 여자〉
천, 자석, 솜 110 × 30 × 25cm 2022
윤정민 〈새 이야기2〉
철, 한지, 레진, 흑연 25 × 13 × 35cm 2023
《fe,yi》 아트스페이스3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명확히 지시하는 이유는 없지만 신체의 유한함 너머를 그리고 있기 때문일까. 푸른빛의 물감은 상처 속 붉음과 먼, 죽음과는 거리가 먼 색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가 제시하는 ‘대체-신체(txt-body )’로서 텍스트는 화면 안에서 곡선으로 휘어져 있고, 쪼개져 있다. 해체된 정도가 깊어질수록 텍스트의 의미는 멀어지고, 추상 이미지처럼 변한다. 왜곡된 텍스트처럼 약간 어긋나게 작품을 걸었다.
장도은은 실기실에서 처음 만났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의 자리만 유독 햇빛이 비쳐 인체조각들이 빛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의 조각은 접합과 재조합이 가능하기에 그 지점을 전시장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이동 가능함을 설명해 주는 짧은 만화형식의 책을 만들까 고민하였는데, 결국 전시는 공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느낄 수 있는 풍경을 만들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그만의 영역을 구상하였다. 높이 15cm, 너비 5m 가량의 넓고 낮은 삼각 좌대를 제작했다. ‘3’은 평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다각형이 될 수 있는 최솟값이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관계가 일어나는 경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조각 개념과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낮고 넓은 삼각 좌대는 이전 전시에서 사용되었던 목재를 재사용한 것으로, 쓰임의 지점이 《fe,yi》로 이동하였다. 그의 조각은 삼각 좌대 내에서 누군가에 의해 자유롭게 이동되고 해체 가능했다.
윤정민은 집에 작업실을 두었다. 그의 집에는 유난히 방이 많았는데 그중 거미를 위한 방이 있었다. 거미를 한참이나 관찰했고, 탈피한 허물도 처음 보았다. 그는 거미가 작은 공간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신작 〈부딪힌 새 줍기〉도 집과 관련이 있는데, 집 창문으로 달려든 직박구리가 유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고 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생을 마감한 직박구리가 약 2m 높이를 가진 거대한 조각으로 탄생하였다. 직박구리의 죽음이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니 마음이 이상하다. 우리는 조각이 드로잉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각 5점을 도화지와 같은 흰 벽 가까이에 놓고, 조명을 통해 벽에 그림자가 지게 하였다. 벽을 배경으로 둔 조각과 벽에 드리운 그림자가 모두 드로잉처럼 보였으면 했다. 조각이 놓인 전시장 장면은 그림자가 중첩되며 무대와 같았고 연극적이었다.
문유소의 작업실에는 작품이 빼곡히 놓여있다. 크고 작은 작품이 작업실에 있었는데, 작업실 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빈틈없이 들어찬 건물들과 중첩됐다. 작품을 살피다 5cm 정도 되는 작은 작품을 보았는데, 그도 오랜만에 그 작은 작품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작업실을 열어 소개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여러 회화 방법론을 탐구하여 지금까지 총 4개의 시리즈를 해냈다. 이번 전시에 시리즈 작품을 모두 소개했는데 그의 행적이 한곳에 모였을 때 어떤 상호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매번 전시를 할 수 없을뿐더러 언젠가는 사라지는 전시이기에, 하나의 시리즈만 소개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던 것 같다.
김주현에게 만남을 요청하였을 때 그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다이브 서울’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었다. 다이브 서울 전시장에 하얀 의자를 놓고 둘러앉아 작품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캔버스를 수평으로 눕혀 물감이 흘러내리게 하기를 수백 번 반복한다는 이야기와 물감이 캔버스 바깥으로 떨어질 때 바닥에 우연하게 생기는 자국도 작품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화를 하면서 그의 작품이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놓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작품을 바닥에 기울여서 놓아야 할까를 고민하였고, 그다음에는 캔버스 크기에 맞춰 낮은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작품을 눕혀야 할까도 고민하였다. 여러 고민 끝에 드로잉 중 2점 〈Bark #2〉와 〈Seashore〉을 선반에 수평으로 놓았다. 작업 과정이 전시장 디스플레이 방식에도 반영되고, 전시장과 작업 과정이 연결되길 바랐다.
팸플릿도 전시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팸플릿은 다층적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열려 있길 바랐다. 해독이 어려울 수 있는 중국어 번역을 시도했는데 뜻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미지로 읽히길, 하나의 겹으로 바라봐주길 바랐다. 일반적으로 팸플릿을 제작할 때 낱장 종이에 작품 사진이 그대로 인쇄되는데, 이 방식은 작품을 가두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작품 사진을 별도로 인쇄하여 낱장 종이 위에 붙였고, 언제든 원할 때 작품 사진을 뜯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장을 나와서 누군가는 작품 사진을 뜯어내어 다이어리에 꽂아놓거나, 책장 위에 놓기를 바라며 작품이 자유로이 이동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디자이너는 작품 사진을 보고 서문을 읽고 작품과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는 종이를 선별해 주었다. 각 작가의 작품 사진마다 종이 질감을 달리하였는데, 이는 작품에 개별성을 더욱 돋아주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전시 제목이 갖는 여러 뜻 중 “날다”의 이미지와 같이 마치 날갯짓을 하듯 누군가의 손에 머물길 바랐기 때문에 얇은 종이를 선택했다.
전시는 이처럼 겹겹이 쌓여서, 전체가 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내 방 책상에 앉아 전시와 관련된 과거를 곰곰이 돌이켰다. 현재와 과거가 머릿속에 중첩되며 다중적인 시간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스케치하듯 적었다. 혹여 기억하지 못할까 하는 마음에 전시를 준비했을 때와 오픈했을 때를 자주 회상했다. 전시는 끝났지만 이번 글에서 복원된 기억은 여러 시간대를 포용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형태의 교점-글과 전시-을 지나 《fe,yi》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김홍주의 드로잉》
성곡미술관 3.22~5.19
심상용 서울대미술관 관장
진화된 회화
감각의 한 유형
김홍주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족적 가운데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 개념미술 그룹 S.T.(Space & Time)에서의 탈퇴다. 약 4년간의 길지 않은 활동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은 S.T.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념주의 노선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김홍주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어떤 식으로건 사실의 세계, 대상의 세계를 회복하는 쪽이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체질(體質), 그가 ‘생활 감각’으로 함축하곤 하는 선험적이고 신체적인 성질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은 질서에 헌신하는 존재다. 당대의 주류 체계를 의심하기보다는 순응하고 따르는 존재다. 하지만, 김홍주는 개념주의의 기세가 충천했던 1970년대의 시류를 따르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화단이 온통 ‘흑 · 백 단색조니 개념이니’를 입에 달고, 얼기설기 편집된 철학적 언설 하나쯤은 옆구리에 꿰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 “유독 그만은 그리는 문제로 파고들었다.”(윤진섭) 자신을 구속하는 틀을 벗어나기 위해 그 틀 안으로 더 깊이 몰입했던 것이다. 먼저는 개념주의 미학에 경사하는 것에 대한 깊은 반성의 산물이었다.
개념주의 노선에 대하여 :
개념주의는 그 한계가 명확한 지성의 작용이다. 지성으로는 신비에 파고들 수 없다.1 시몬 베유(Simone Weil )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지성의 매우 치명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 자체가 이미 신비의 영역이기에, 삶에서 지성의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논리적이고 엄밀한 지성이라도 불가피한 모순에 직면하게 될 때 지성 너머의 개념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지성이 구조적으로 저지르는 오류인 ‘잘못된 복종’의 원인이다. 지성의 몫은 복종하는 것인데, 지성의 복종은 늘 예컨대 권력, 사회적 영향력 같은 것들에 대한 복종으로 일탈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고 의견을 제시하는 지성은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빛일 뿐2, 그것으로는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3
김홍주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머리가 안 되니까 몸으로 때우는 거지요.”4 미술에서 ‘머리’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미학의 종착역은 ‘타성화’와 ‘지루한 동어반복’임에 대한 풍자다. 그 ‘머리’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에 구체성을 상실하고 관념의 늪지로 빠져들어 그릇된 자유를 두고 유희하기 십상이다.
김홍주는 청계천의 고물상을 전전하는 것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구체적인 현실을, 그것이 창문틀과 거울, 차 유리창 같은 남루한 취향의 것일지라도 포용하는 것이어야 했고, 재현적 회화의 전통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고물고물, 곰실곰실한 색 선들의 무수한 수행에서 지극히 ‘2차원적인 질감’이 만들어진다. 조금 뒤로 물러서면 치밀하게 계산된 재현적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세필의 치밀하게 수행된 섬세함과 재현 미학이 벌이는 각축은 “소름이 돋을 지경으로 아찔하다. 생명의 꿈틀거림… 관능의 아우성… 현실과 초현실의 맞물림…”5 왜 아니겠는가. 이 농숙한 세계는 시간과 노동의 기념비적인 협업의 산물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비전을 받아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신체의 호흡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특별히 시간-과정-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그리기의 과정은 대상과 노동과 시간의 고도의 정합적 조율과 조정 자체다.
〈무제〉 종이에 콜라주, 연필, 수채
109 × 78.6cm 1980년대 후반
제공 : 성곡미술관
《김홍주의 드로잉》
성곡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이론에 대하여 :
‘도가적 우주론’ 같은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지적 치장이 아닐까. 그런 것을 거치지 않을 때 이 회화와 드로잉의 활력에 다가설 수 있다. 창의성, 참신함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 담보하는 이론은 없다. 작가에게 이론화된 세계는 무용(無用 )하다. 이론에서 차용한 관점은 위험하다. 사건의 사후 해석인 이론에 매몰되면 개성은 제대로 설 수 없다. 작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 과거로 현재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과거와 미래를 건져 올려야 한다. 예술이 일하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미술이론은 자칫 잘못된 복종이론으로 그칠 수 있다. 그런 접근에 의존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특별히 드로잉의 예술적 기반 아니겠는가. 최대한 신체의 호흡으로, 최대한 관념과 감각의 각축 한가운데 치열하게 머무는 시도다. 정식화, 이론화되기 이전, 가공 이전의 원자재, 날것 상태로 머무는 것에서 얻어낼 것이 있다는 깨달음 같은 것.
감각에 대하여 :
감각은 이성의 철학이 끊임없이 조장해온 편견과 달리 외부의 물리적 자극을 감지할 뿐인 한정된 의식행위가 아니다. 느낌이나 감정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표현에는 조형의 질과 수준을 재는 저울이 있는데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대상이건 추상이건 표현을 빈혈과 빈곤으로 내모는 요인들, 과장이나 결핍, 덧없는 엄숙함이나 장식성을 걸러내고 정화하기 위해서는 이 저울의 계량이 반드시 요구된다. 수학적 정확성을 능가할 만큼 정교한 계량이다. 과도한 개념주의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예술은 무엇인가와 무엇이 아닌가’를 둘러싼 덧없는 논쟁을 고장난 축음기처럼 반복하면서 이 저울이 고장나고 말았다.
감각은 어느 정도 갖고 태어나지만, 학습과 태도를 통해 연마되기도 한다. 감각이 학습되는 것은 아니지만 심화할 수 있고 진화한다. 김홍주의 회화와 드로잉에서 그것의 높은 수준의 진화에 관한 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주섬주섬 회복해야 할 것에 대한 제안이기도 할 터다.
1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21 p.175
2 에릭 스프링티드 『시몬느 베이유』 권은정 옮김 분도출판사 2008 p.19
3 하지만 신비를 표현하는 언어가 적합한지 아닌지 판별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지성은 여전히 중요한 도구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지성은 다른 무엇보다 날카롭고 예리하고 엄밀하고 엄격해야 한다
4 「꽃잎 속, 몸을 꼰 우주가 … 로댕갤러리 ‘김홍주전’」 중앙일보 2005.09.12 https ://www.joongang.co.kr/article/1679116#home
5 앞의 글 2005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수원시립미술관 3.12~6.9
권정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해와 연대를 위한,
다정하게 말 건네기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은 전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몇 겹의 레이어를 들여다봐야 하는 전시였다. 전시 제목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언뜻 봐서는 뜻을 알기 어려운 제목 뒤에서, 전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유심히 찾아봐야 했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1960~1990년대 대한뉴스 영상이다. ‘참여 작가’의 ‘작품’은 아니고, 전시와 연관된 뉴스를 보여주는 아카이빙 자료다. 담배 공장의 여공, 버스 안내양, 여군 등 과거 산업화 시기에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이 나오는 뉴스 자료가 이어서 재생된다. 그제서야 이 전시에서 말하는 ‘여성의 일’이 특정 시기 여성의 노동을 가리키는 것임을 눈치채게 된다.
전시 서문, 보도자료 등에서 이 전시가 ‘여성의 일’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여성의 일’이라 하면 사실 그 범위가 너무 넓어 그것만으로는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여전히 여성에게 전가되는 가사노동, 돌봄노동부터 직장 내 임금차별과 유리천장, 직종에 따른 성별 고정관념 등 ‘여성’과 ‘일’이라는 키워드로 다룰 수 있는 이야기는 너무 많다. 전시장 입구에서 대한뉴스 영상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서문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역사와 사회의 변곡점에서 일해왔던 여성들”, 즉 산업화 시기에 있었던 여성의 노동에 관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수원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수원시립미술관
산업화 시기 여성의 삶과 노동이 그리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영화와 방송,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많이 소개되어 온 주제이고, 노동박물관, 산업박물관 등의 전시를 통해서도 많이 접하게 된 주제다. 미술 분야에서도, 전시 참여 작가이기도 한 임흥순과 권용주의 작품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의 작품에서 소재가 되어 왔다. 널리 알려진 주제인 만큼 전시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풀어낼지가 궁금했다. 또한 다른 매체와는 달리 ‘미술 전시’로서 어떻게 풀어내느냐도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이 전시는 보통의 미술 전시에서 잘 택하지 않는 독특한 방법을 취한다. 역사적 이해를 돕는 아카이빙 ‘자료’를 함께 전시하는 것이다. 산업화 시기 여성의 노동을 보여 주는 아카이빙 ‘자료’와 여성의 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미술 ‘작품’이 전시장에 함께 놓인다. 대한뉴스 영상 자료, 당시 신문기사 자료, 버스 안내양 모자, 화장품 방문 판매원 가방 등의 아카이빙 자료를 통해 관람객이 당대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특정 카테고리의 여성 노동과 연동되는 미술 작품들을 통해 그러한 자료의 표면을 넘어선 노동의 의미와 함축을 만나도록 한다.
미술 작품도 그 시대 및 특정 종류의 산업 직군과 관계가 있는 작품이 많았다. 젊은 시절 부모님의 사진과 이제는 나이든 부모님과 함께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이 2채널 영상으로 구성된 임흥순의 〈추억록〉(2003)은 그 시기를 거쳐 온 어머니의 삶의 여정을 반추하게 하고, 권용주의 〈연경〉(2014, 2016)은 한국과 태국의 섬유 산업 종사자 2인의 인터뷰를 교차하며 개발도상국 경제 발전의 동력이 된 산업의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만 작가 후이팅의 〈화이트 유니폼〉(2017 )은 열차용 도시락 제조 공장의 노동 현장을 보여 주면서, 여성에게 주어진 직업적 편견과 차별을 드러낸다.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을 찍은 강용석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일상 속 여성의 모습과 풍경을 그린 방정아의 회화는 시대와 사회의 굴곡에 영향받는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한편, 독일 작가 로사 로이의 회화, 태국 작가 카위타 바타나얀쿠르의 영상 작업은 보다 추상적으로 여성의 노동이 지닌 속성을 조형 언어로 풀어낸다. 로사 로이의 회화에서는 여성 간의 연대와 유대가 돋보이고,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한 카위타 바타나얀쿠르의 영상은 반복적인 육체노동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게 한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손의 움직임을 담은 김이든의 사진 작업 또한 여성의 노동을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로 읽혔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 작품과 역사적 자료의 병치는 오히려 전시의 성격을 불분명하게 하고, 미술 작품의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사실과 일대일 대응하여 평면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담고 있는 ‘자료’는 당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당대의 실상이 궁금한 관객에게는 분명 흥미로운 자료들일 테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와 작품이 전시장에 한꺼번에 놓이면서, 전시는 산업박물관의 유물전인지, 현대미술관의 동시대 미술전인지 아리송한 상황을 낳는다. 구체적, 실재적 언어와 추상적 언어는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고 각각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한편, 이 전시는 연계 행사로 10여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임흥순의 〈위로공단〉(2014), 〈려행〉(2016)과 독립영화계에서 크게 주목받은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미싱타는 여자들〉(2020) 같은 독립영화,〈영자의 전성시대〉(1975) 같은 고전영화부터 〈히든 피겨스〉(2016) 같은 최근 상업영화까지, ‘여성’과 ‘일’이라는 키워드와 연계된 다양한 영화를 함께 상영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입체적으로 주제에 접근하도록 한다. 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의 ‘자료’를 찾아 빌려와 전시하고, 다채로운 영화로 구성된 전시 연계 스크리닝까지 준비한, 무척이나 성실하고 꼼꼼한 전시임이 분명하다. 전시를 준비하고 구성한 이들의 노고가 눈에 보이는 전시였다.
그러나 “성별에 구애하지 않는 상호 간의 이해와 연대가 필요”하다는 서문의 말처럼, 전시는 모두의 이해와 지지를 받고자 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나머지, 많은 이야기를 성실하게 전달하는 데 진력한다. 결국 어떤 입장이나 방향보다는, 전시 제목처럼 ‘사랑’이라는 보편적이고 당위적인 결론에 이른다. 이는 주제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관심을 환기하게 되는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할지언정 ‘여성’과 ‘일’이라는 이제는 익숙한 키워드에 더 깊이 접근하고 싶은 이에게는, 또 그에 대한 새롭고 예리한 관점을 제시해주기를 기대하는 이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는 전시였다.
권용주〈연경〉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실크프린트 자카드, 목재, 컬러실, 금속 볼트, 브라켓 등 28분 42초
290 × 145cm, 120 × 10 × 3cm(× 8), 180 × 10 × 3cm(× 4) 2014, 2016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수원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수원시립미술관
카위타 바타나얀쿠르〈셔틀〉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3분 27초 2018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수원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사진 : 노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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