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추니엔:시간과 클라우드》
아트선재센터
2024.6.4~8.4
Exhibition Focus
〈타임피스〉 43개 평면스크린, 애플리케이션 및 영상, 30초~무한상영 2023~2024
《호추니엔 : 시간과 클라우드》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뜬구름 잡기
곽영빈 미술비평, 예술매체학
공기와 공, 0과 무를 어떻게 느끼게, 들리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시간과 클라우드》는 말 그대로 ‘뜬구름 잡는’듯한 이 질문에 감히 답하려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도다.
예술이 ‘뜬구름 잡는’ 일로 치부될 때마다 나는 「어느 이카루스의 탄식」에서 보들레르가 “구름을 껴안느라… 두 팔이 부러졌다”고 절규하던 시구를 환기하곤 한다. ‘(인 )문학이나 예술 하다간 굶어 죽는다’는 뜻이라고 냉담하게 직독직해할 이들조차, 자신의 ‘클라우드’에 수년간 저장됐던 수백 기가, 혹은 수백 테라바이트의 사진과 동영상 자료가 사고로 증발한다면, 팔뿐만 아니라 다리가 사라진 것 같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아니 이제 ‘뜬구름’이란 우리 각자의 기억과 삶, 아니 역사와 시간의 집적 그 자체와 다름없게 됐다는 의미에서. 자신보다 믿음직스러운 노래방 기계 덕분에 ‘최애곡’ 가사를 까먹기 시작한 인간들이, 시간을 통째로 클라우드에 외주(外注 ) 주면서 어색해진 스스로의 삶을 익숙하게 마주하는 일상을 곱씹으면서. 호추니엔이 국내에서 최초로 갖는 개인전인 《시간과 클라우드》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근원적인 의미에서 ‘뜬구름’ 같기만 한 시간의 간극과 역사적 궤적을 정치적이고도 방대한 방식으로 천착해온 작가의 작업을 압축적이고도 밀도 있게 제시한다.
작업들은 연대기적으로 읽기 좋게 배치되어 있다. 가령 지하에서 상영되는 초기의 오디오비주얼 이미지 작업들(〈뉴턴〉(2009), 〈굴드〉(2009~2013),〈지구〉(2009~2011),〈미지의 구름〉(2011) )을 먼저 보고, 2층과 3층에 각각 설치된 신작인 〈호텔 아포리아〉(2019), 그리고〈시간의 T〉와〈타임피스〉(2023~2024)를 이어 보는 방식인데, 이러한 큐레이션과 관람방식은 시간이 갈수록 ‘발전’하고 나이가 들어가며 ‘성숙’하는 예술가라는 이미지와 적절히 부합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명성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시간적 순서의 투명함과 연대기적 성장의 자명성이야말로 본 전시를 포함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호추니엔이 근원적으로 문제시해온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가령 ‘전근대적(前近代的/pre-modern)’이라는 표현은 ‘근대적(modern)’, ‘근대성/현대성(modernity)’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성취’로 간주되는 한 부정적인 함의를 띨 수밖에 없다. 독일의 대표적인 철학자 하버마스의 ‘아도르노상’ 수상 연설문 「근대성 : 미완의 기획(Modernity : An Incomplete Project)」(1980)은 이러한 가치판단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는데, 일찍이 「근대란 무엇인가?」(1948)에서 일본의 중문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양의 근대[가] 유럽이 강제한 결과”라면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나의 판단도 역시 유럽적인 것이 아닌가”라고 자문했던 것은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에 놓인다.1
1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백지운 옮김 『일본과 아시아』 소명출판 2004 p.18, p.28
〈뉴턴〉(스틸)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4분 16초 2009
〈미지의 구름〉(스틸) 단채널 프로젝션( 16 :9포맷) 컬러 5.1 서라운드 사운드 28분 2011
제공 : 작가, 키앙 말링게
결론의 일부를 미리 적시해 두자면, 호추니엔의 작업 전반은 0(zero)과 무(無), 공(空)이나 흰색(white), 또는 시간과 구름처럼 대개 투명하고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온 세상과 우주의 ‘기원(Origin / Ursprung)’이라는 문제가 아시아의 불투명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 (비)가시화되었는지를 계보학적으로 재구성해온 지난한 시도라 요약할 수 있다. 그가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시간대를 도쿄의 시간대에 맞추려고 한 사실”을 환기하면서 “제국주의의 도구로 시간이 사용된 것”이라 강조했던 것은 이 때문이며, 아무런 대사 없이 새하얀 백색을 배경으로 흰색 머리와 눈썹, 눈을 가진 아시아인 남성이 등장하는〈뉴턴〉과〈굴드〉는 유전자 돌연변이인 백색증(albinism) 때문에 대부분의 비서구권 사회에서 오히려 ‘백안시(白眼視)’된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그가 ‘백인’이라는 아이러니를 전경화한다. 이는〈미지의 구름〉에서 파편적으로 소환됐던 ‘투명인간(Invisible Man)’의 역사적 계보와도 그 중핵에서 공명한다. 수많은 전구가 매달린 지하실에서 어슬렁대는 인물의 이미지는 『라이프』지 최초의 흑인 사진기자였던 고든 파크스(Gordon Parks)가 1952년 사진으로 구현하고, 이후 제프 월(Jeff Wall)이 〈랠프 앨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을 따라, 프롤로그(After ‘Invisible Man’ by Ralph Ellison, the Prologue)〉(2001)에서 특유의 방식으로 재전유했던 것으로, 실은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단지 사람들이 나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뉴욕에서 내 동굴보다 밝은 곳이 있을까…지하 동굴엔 정확히 1,369개의 전구가 매달려 있다”라며 자신의 (비 )가시성을 곱씹던, 미국의 흑인 소설가 랠프 엘리슨(Ralph Ellison )의 자전적 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Invisible Man )』 ( 1952 )을 수원(水源)으로 삼는 계보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디오비주얼 최신작인 〈시간(타임 )의 티(T for Time )〉와 〈타임피스〉가 알파와 오메가, 또는 ‘기승전결’이라는 선형적 이야기의 순서나 우로보로스와 같은 원형적 시간관들을 대립시키기보다 ‘프리 재즈’와 더불어 무장해제시키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루핑과 알고리즘, 스크린의 병렬적인 배치를 통해 위계적인 질서를 무화시킨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실지로 한국의 표준시가 일본의 표준자오선인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바뀐 건 한일강제합병 이후인 1912년 1월 1일로, 1954년 동경 127.5도로 잠시 바뀌었던 표준시는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 후 동경 135도로 재변경되는데, 이는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국과 일본의 시간이 다르면 일본서 주둔하다 투입될 미군의 전쟁 수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2
2 「우리나라는 왜 일본과 똑같은 표준시 쓸까」 『중앙일보』 2014.9.28
〈호텔 아포리아〉 6채널 프로젝션 (4 :3포맷, 컬러, 24채널 사운드)
팬, 조명, 변환기, 컨트롤시스템 84분 1초 2019
사진 : 박홍순
물론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작업이 2층의 〈호텔 아포리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많은 이들이 투박하게 오해하듯 그것이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작업의 성취는 오히려 위에서 환기한 연장선에서, 즉 대개 비가시적이고 형체도 없으며, 만지거나 잡을 수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무(無)’나 ‘바람’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지극히 활동적이고, 나아가 정치적인 것으로 작동했는지를 매우 적확하게, 감각적으로 구현해낸 지점에서 음미되어야만 한다.
가령 교토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와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등은 현기증 나는 철학적 곡예를 통해 각각 ‘절대무(絶對無)’와 ‘공(空)’, ‘종(種)’의 개념을 조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동양의 수냐타( sunyata)와 서양의 불사조(pheonix), 예수와 바쇼, 독일 시인 에두아르도 뫼리케와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동서양의 참조점을 넘나들면서 해당 개념들을 ‘실체( substance)’에 근거한 서양철학과 근대성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로 제안했다. 이들의 논의에 비판적이었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동양의 일반적 성질”이란 것이 “실체적인 것으로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선을 그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형(型)이 없는 것이 일본형”이고, “개성이 없는 것이 일본의 개성”이라는 자신의 코멘트조차 위와 같은 역설을 통해 또 다른 ‘니혼진론(日本人論 )’ 또는 ‘동양적 근대성의 본질론’으로 재통합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3
이렇게 이들의 철학은 ‘근대의 초극(近代の超克)’이란 기치 아래 제2차 세계대전, 아니 ‘태평양전쟁’이라 명명된 일본의 식민주의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는데, 이를 호추니엔은 – 호세 루이스 게린(José Luis Guerín )이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와 나눈 영화편지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 자신의 무덤에 ‘무(無 )’라는 한 글자만 남겨둔 것으로 유명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속 풍경신들과 절묘하게 접속시킨다. 여기서 ‘풍경’이란 ‘바람(風 )’을 ‘본다(景 )’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호추니엔이 오즈에게서 인용하는 장면들 대부분은 사람 없이 빨랫줄에 널린 빨래와 굴뚝의 연기, 또는 바닷가의 파도처럼 대개 지극히 평온하고 무해하며 – 비평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가 자신의 선구적인 만큼 편향적인 연구서 『Transcendental Style in Film : Ozu, Bresson, Dreyer』 ( 1972 )에서 강조했던 의미에서 – 초월적인 ‘일상’과 자연의 기호로 독해되던 것들이다. 하지만 호추니엔은 이들이 따로 또 같이 증거하는 바람의 존재를 섬뜩하게 변형된 ‘가미카제(神風 )’개념의 역사, 즉 13세기 말 몽골의 두 차례 침공을 막아주었다는 의미에서 ‘신이 보내준 바람’이라 불렸던 민속전통이 2차대전의 무모한 자살공격을 부채질하는 ‘바람’으로 소환되었다는 사실과 절묘하게 병치시킨다. 여기에 2층 모서리에 자리 잡은 부스 속 강풍기가 주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바람은 말 그대로 ‘화룡점정’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각각의 부스 안팎을 넘나들면서 관객들이 몸으로 느끼는 바람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특히 관람객들이 앉아있는 부스와 그 안에서 반복되는 오즈의 영화 속 공간이 자살공격을 앞둔 젊은이들이 묵었던 일본의 전통 여관 기라쿠테이와 겹쳐진다는 사실은, ‘일본(인 )론의 교과서’로까지 불리곤 하는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 )의『공기의 연구(空氣の硏究 )』 (1977)를 우리의 당대로 첨예하게 재소환한다. 2층 작업 전체를 채우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들이마시던 무색무취의 공기가 그 무엇보다 정치적인 것으로 변환되던 이 순간은, 팬데믹 시기 이후 두 번째로 대기를 섬뜩하게 감각한 순간이었다.
공기와 공, 0과 무를 어떻게 느끼게, 들리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시간과 클라우드》는 말 그대로 ‘뜬구름 잡는’ 듯한 이 질문에 감히 답하려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시도다. 프랑스의 탁월한 미술사학자이자\ 이론가였던 위베르 다미쉬(Hubert Damisch)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지오토에서 세잔에 이르는 구름의 이론(Théorie du nuage de Giotto à Cézanne)』 (1972)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빌려 규정했던 것처럼, “표면 없는 몸(corps sans surface)”인 구름을 눈과 귀는 물론, 뺨과 손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4
3 다케우치 요시미 앞의 글 『일본과 아시아』 p.34, p.59, p.169
4 Hubert Damisch Théorie du nuage de Giotto à Cézanne : Pour une histoire de la peinture Paris : Seuil 1972 p.170
〈호텔 아포리아〉의 바람이 부는 순간의 모습이다
사진 : 남서원 제공 : 아트선재센터
인터뷰
호추니엔
(Ho Tzu Nyen)노재민 기자
호추니엔은 역사적, 철학적 텍스트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싱가포르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이다. 그는 도쿄도미술관(2024), 일본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2021),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2015)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 싱가포르 파빌리온, 제12회 광주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2년 전 아트선재센터는 ‘호추니엔 비평사전 : 동시대성과 지역성’을 주제로 싱가포르 미술관과 함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은 싱가포르 미술관의 전시 《호추니엔 : 시간과 호랑이 (Ho Tzu Nyen : Time& the Tiger)》 (2023)와 이번 아트선재센터의 전시로 이어졌다. 월간미술은 이번 전시를 위해 내한한 호추니엔을 인터뷰했다.
사진 : 남서원
제공 : 아트선재센터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축하한다. 최근에 작업한 〈시간(타임 )의 티(T for Time)〉(2023)와 〈시간(타임)의 티 : 타임피스(T for Time : Timepieces)〉 (2023)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하나의 시간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42가지의 에피소드가 랜덤으로 상영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달라.
시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시도를 해보았다. 42개의 시간이 모두 다르다. 인간의 심장 박동과 유사한 1초 길이의 비디오 루프도 있고 태양계 항성들의 이동주기에 해당하는 길이인 100년 길이로 돌아가는 것도 있다. 42가지의 에피소드 들은 알고리즘이 재배치하고 있다. 각 챕터마다 3개에서 5개의 서로 다른 버전이 있기 때문에 루핑이 될 때마다 완전히 다른 내용을 보게 된다. 보통 편집할 때 하나의 타임라인(실제 소프트웨어 상에서도 타임라인이라고 불리는 ) 위에 여러 가지 가능성 중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능성을 배치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가능성을 하나로 수렴하는 방식이 점점 폭력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리즘을 활용해서 끊임없이 타임라인을 재배치하고 새로운 형태의 순열을 창조해서 다양한 타임라인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간의 많은 작업에서 역사에 대한 문제를 다뤄왔다. 역사를 얘기할 때 사실 ‘그것이 가정하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도 이어지지만, 역사 연구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자신이 어떠한 가정을 내리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일은 흔치 않다. 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다양한 시간의 한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삶도 다양한 시간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포톤(photon)과 같은 아주 작은 입자들은 중력을 경험하지 않고, 중력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경험하지 않고, 시간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작은 소립자 차원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호텔 아포리아〉와 마찬가지로 두 스크린이 겹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타임)의 티(T for Time)〉의 뒤쪽 스크린에는 유튜브, 비메오, 여러 영화 아카이브 푸티지 등에서 가지고 온 이미지들이 상영되고 있고, 앞쪽 스크린에는 애니메이션 혹은 2차원적인 이미지들을 리애니메이션했다.
3차원적인 오브제로서 스크린을 생각했을 때 내가 항상 관심이 있는 쪽은 스크린 뒤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가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에서 자주 스크린을 레이어로 겹치고 그것이 투과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스크린은 어쩌면 〈호텔 아포리아〉에서 얼굴을 비워 놓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얼굴을 비워놓는 그 자체가 일종의 스크린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지운다는 것은 얼굴을 감추는 것일 수도 있는 한편,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을 투사할 수 있는 스크린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 자신을 거기에 투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이 존재들을 과거에서 데리고 와서 현재에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컴포지팅(compositing)은 2D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월트 디즈니가 완성한 기법이다. 한 플레이트에는 배경을 놓고, 다른 한 플레이트에는 전경을 놓고, 또 다른 한 플레이트에는 극 근접한 이미지들을 놓은 다음, 이들을 한꺼번에 촬영해서 마치 원근법적으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 나는 우리가 과거나 역사라는 개념을 바라볼 때에도 이렇게 이미지들을 겹쳐서 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3D 애니메이션은 3차원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어떤 사물을 만들고 가상 카메라를 활용해서 끊임없이 어떤 움직임을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될 정도) 보여주는 반면, 2D 애니메이션은 어떤 부분이 뭔가 멈춰져 있는 느낌을 항상 준다. 모두 3D 애니메이션을 사용 하고 있는 지금, 내가 2D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갖는 이유다. 그 안에서 어떠한 사물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면 프레임 단위로 움직이는 모습을 다 그려야 하기 때문에 정말로 이 움직임을 원하는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러한 느림이 나에게 소구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 스크린으로 사용할 재료를 찾는 것이 꽤 어려웠다고 들었다. 작품에서 스크린으로 기능하고 있는 재료와 그 특성에 대해 말해달라.
이 종류의 천에 대한 정확한 용어는 ‘스크림 ( scrim )’이다. 스크림의 특수한 속성은 뒤쪽 공간에 빛을 비추지 않으면 불투명해져 벽과 비슷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뒤쪽 공간에 빛을 비추면 반투명해져서 통과할 수 있다. 또한 스크림 자체에 빛을 비추어 스크린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스크림은 일종의 장벽이지만, 막처럼 다공성 구조를 가지고 있어 내부와 외부가 순환할 수 있기에 이 재료에 끌린다. 내부와 외부가 장벽으로 나뉘지만, 그 장벽은 영구적이지 않고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스크림은 스크린이 될 수 있고 무언가를 차단할 때도 사용될 수 있다. 스크린은 투사할 수 있는 표면으로 사용되지만, 뒤에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스크린은 항상 공간에 존재하는 3차원 객체다. 앞과 뒤가 항상 존재한다. 스크림은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활성화하는 좋은 재료다.
12년 전 월간미술과의 인터뷰에서 “내러티브가 어디론가 가도록 하는 환영의 통로라고 할 수 있고, 구조는 지금 여기에 대한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도 유효한 생각인가? 당신의 작품이 여전히 “영화적 환영과 연극적 물성 사이를 왕복하도록 디자인되어있다”고 이해해도 되나?
12년 전의 나에게 감명을 받은 적이 별로 없지만, 12년 전의 나는 좀 더 똑똑했던 것 같다. (웃음) 항상 구조에 관심이 많았다. 나의 프로젝트는 구조적 출발점에서 시작된다. 내러티브는 항상 그다음에 나온다. 역사나 현재의 세계를 이해할 때, 내러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더 큰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날 매체가 가득한 시대에는 확인할 수 없는 모순된 내러티브가 넘쳐나지 않나. 구조가 내러티브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더 큰 구조를 보는 비판적인 시각을 채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작품이 영화제에서도 상영됐는데, 시네마테크와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여줄 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질문 고맙다. 사실 영화관에서 작품을 선보이지 않은 지 좀 되었는데, 그 사실이 내 현재 심정에 대해 일정 부분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시네마는 단일 스크린일지라도 구조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나 이러한 구조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설치에서는 공간적으로 구현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시간을 통해 관객의 기억에 의존해야 한다. 구조를 생각하는 것은 이미지의 흐름을 구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네마의 시스템 자체를 생각하는 것을 포함한다. 상영기와 스크린, 스크린 뒤에 숨겨진 스피커 같은 것들 말이다.
2017년에는 각 전시마다 프로젝트가 얼마나 유연하게 전환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말한 바 있다. 〈지구〉(2009~2017)는 원래 무성 영화로 제작되었고, 현재는 다양한 버전의 사운드트랙과 함께 상영된다고 들었다. 이번 아트선재센터 전시에서는 기존의 작업을 어떻게 변형 혹은 적용했는가?
지하에서 상영하는 네 작품 〈뉴턴〉(2009),〈굴드〉(2009~2013 ), 〈지구〉,〈미지의 구름〉(2011)은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시기의 작업이다. 그 이전 작업에는 많은 텍스트가 있었지만, 2009~2011년에는 이미지와 소리, 음악만으로 작업했다. 그때 나는 언어를 좋아했지만, 언어가 비디오의 다른 요소들을 지배하는 위계가 형성된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 언어를 도입하면 모든 것이 언어의 권위 아래에 종속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어에서 자신을 해방하고 소리, 빛, 이미지, 시각성, 물질성 등 다른 감각을 열어야 했다. 그 시기의 네 작품을 돌아보면 언어의 부재뿐만 아니라 무게, 힘, 밀도 등이 큰 특징으로 부각된다. 이 작품들은 시간을 형태와 밀도, 무게로 표현하는 실험이었다. 그래서 아트선재센터의 지하는 느리고 무거운 작품들을 놓기에 완벽한 장소처럼 보였다. 몇 년간 언어 없는 작품을 실험한 후에는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그 한계를 깨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동남아시아 비평사전〉(2012~)과 함께 다시 텍스트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작업에서 언어를 사용할 때는 항상 노래나 뮤지컬 형식을 차용했다. 〈지구〉는 언어 대신 음악으로만 애니메이션 된 무성 영화인데, 플롯을 설계할 때 언어 없이 작업했다. 비디오 자체는 거의 살(flesh)처럼 느끼는데, 살은 영혼(soul)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이때, 음악이 살에 활력을 불어넣는 영혼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른 음악가들과 작업하는 것은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이다.
“작품이 참조하는 이미지가 나에게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관객에게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이미지들이 나에게 귀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지가 지나가는 하나의 매듭 (node)일 뿐이다. 이 이미지는 나보다 먼저 존재했고, 나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생물권이 있는 것처럼, 이미지도 그들만의 생명을 가지고 존재한다. 이미지는 진화하는데, 자연 선택을 통해 어떤 이미지는 계속 존재하고, 어떤 이미지는 사라진다. 나는 그 과정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이미지를 소유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파운드 푸티지를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지가 나를 거쳐 관객에게 도달하면, 관객은 그 이미지를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데 있어 나만큼이나 중요하다. 이것이 예술적 과정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단지 관객이 이미지를 처리하고 재창조할 조건과 자료를 제공하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이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누가 될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자아라는 것이 과거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넛이라는 형태를 생각해 보면 가장 외곽의 지점이 사실 내부의 가장 깊은 지점이기도 하지 않나. 많은 경우 진정한 자아가 어떤 본인의 내면의 핵심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이 핵심은 오히려 비어 있고, 이 비어 있는 한중간 부분이 접혀져 가장 외곽이랑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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