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 CRITIQUE

이인범 | The Space 138 큐레이터, 아이비리(IBLee) 인스티튜트 대표
이한범 | 미술비평
정소영 | 기자
강재영 | 기자
《곽남신_ 덫에 걸린 그림자》
스페이스138 4.20~8.30

이인범 The Space 138 큐레이터, 아이비리(IBLee) 인스티튜트 대표


《곽남신_덫에 걸린 그림자》
스페이스138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왜, 그는 ‘그림자’를
그토록 중시했을까?

지난 6월 1일 《곽남신_ 덫에 걸린 그림자》가 개막했다. 개관 3년째지만, 스페이스138이 세상에 명함을 내밀 채비가 된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지금 이 시점에 곽남신 같이 진지하게 주목해 보지 않으면 안 될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달리 생각하면 곽남신 정도의 작가 전시라면 국공립미술들의 몫이지 스페이스138 급이 넘볼 일일까 하는 자의식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 좌우로 패 갈린 정치인들에 휘둘리고, 자본에 맥없이 혼비백산하는 우리 미술판, 복지나 구휼 프로그램 수준의 정부 문화예술정책이나 미술관들에 막연히 기대만 할 일도 아니니 거칠지만 나서게 된다.

전시는 모두 29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절망스러운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번뇌하던 홍익대 미대 재학시절에 그린 〈자화상〉(1972)부터, 그의 데뷔작이자 세속적인 의미에서 출세작으로 꼽히는 그림자 연작들 가운데 하나인 〈투영〉(1982), 그리고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고 난 뒤 그린 〈누구세요〉(2023),〈무제〉(2024) 같은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50여 년 동안 작가로 살며 곽남신이 실천한 예술세계 전모를 가늠해 보자는 취지로 구성되었다. 대작도 꽤 포함되어 작가가 어떤 작업에 열정을 쏟았고 노심초사했는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쉽게도 공간 사정으로 한때 몰입했던 오브제나 설치작업, 그리고 블랙박스가 요구되는 네온 라이트 작업이 빠졌지만 말이다.

왜 곽남신인가?
곽남신의 삶과 예술은 미술사적으로나 개인적 품격의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포인트로 다가서는 몇 가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미술의 흐름 굽이굽이 마다 작가로서 그의 실천적 행동들이 의미심장했던 만큼이나 고희의 나이에 들어선 지금 이 시점에 원로 작가 곽남신의 삶과 예술에 관한 원근법적 조망은 이래저래 절실해 보인다.

일찍이 청년기에 작가가 그림자 그림으로 성취한 가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작가로서 화려하게 출발했으면서도 왜 그는 스스로 그 성공을 단절하며 좁은 길을 선택했을까? 그러한 판단으로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럼에도 왜 평생 그림자는 그에게 예술적 화두로 지속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도달한 경지는 어디쯤일까? 그의 삶과 예술이 우리 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는 어떤 것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작가로서 곽남신의 출발은 빛나는 것이었다. 미술계에 얼굴을 처음 드러낸 것은 1970년대 말 80년대 초,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회전하며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의 그림자를 연필로 재현한 드로잉을 발표하면서다. 그 출현은 뭇 신인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의 데뷔는 당시 움트던 몇몇 민전이나 곪아 터지다시피 한 국전 같은 공모전도, 동인 그룹전을 통해서도 아니다. 당시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소개하는 흔치 않은 전시들 예컨대, 《Korean Drawing Now》(뉴욕 브루클린미술관),《한국 현대미술 – 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동경도립미술관 외 5개 도시 미술관),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교토시립미술관 ), 《Nouvelle Ecole de Seoul》(타이베이시립미술관 ) 같은 전시들에 초대, 출품하면서 비약적으로 이뤄진다. 그렇게 단번에 미술대학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는 그것도 한 나라 미술의 당대성을 드러내는 대표작가 반열에 전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흥미롭게도 곽남신을 작가로서 입적시킨 이 그림자 연작의 발생적 기원은 1970년대의 이른바 ‘단색화’ 작가들이다. 미국의 모더니즘이 국제적으로 위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1970년대 후반 한국미술계를 집단적인 획일주의로 몰아간 그 백색 모노크롬 작가들이 이슈로 삼았던 회화의 평면성이나 물성에 대한 생각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업으로 승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스스로 자신의 출세를 담보해 주었던 이 작업들과 과감히 단절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자 그리기에 태생적으로 잠재된 자기 소외와 모순을 뼈저리게 자각하면서다. 그 일차적인 대응이 파리 장식미술학교 판화과에서의 지극히 생경하기만 했던 새로운 기법 수련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그의 예술적 선택과 실천은 아예 일종의 전향에 가깝다. 거기엔 몸담은 삶의 현실과 균형 잡기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술적 실천에서 일체의 관념 대신에 매체란 무엇이며 형식적 새로움이 지닌 중요성은 어떤 것들인지 파고든다. 인간들이 몸담아 사는 삶의 현실에 응답하는 것은 어떤 예술인지를 과제로 삼아 모더니스트들이 부정하고자 했던 이미지를 자신의 예술적 실천과 사유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드로잉, 회화, 프린트, 오브제, 설치, 릴리프, 조각, 영상 등 장르의 경계를 광폭으로 넘나든 곽남신의 예술적 실천과 흔적은 그러한 전향의 결과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들이 때로는 외면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 속에서 그동안 숱하게 만나곤 했던 나른한 형식적 유희들과 쉽게 구분되는 것은 놀랍다. 이 작업들이 더더욱 즐겁게 다가서는 것은 예술의 본질과 무관한 채 좌우,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같은 진영 논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그 틈에서 애써 예술적 규칙과 가치를 모색하는 가운데 그가 아슬아슬하게 일궈낸 철학적인, 그렇지만 대단히 장인적이기도 한 풍모 덕택이다. 그렇게 예술에서마저 우리를 숨막히게 옥죄곤 했던 전체주의적 행태들을 한 줌의 저항도 없이 수포로 돌리는 힘이야말로 이번 전시로 기대하고자 했던 가치 아니었을까?

‘덫에 걸린 그림자’
곽남신의 삶과 예술은 결국 모더니즘의 계보보다 훨씬 더 뿌리깊은 회화의 전통적 관행이 되었던 ‘재현’에 기댄 초기 그림자 연작에 크게 신세를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그림자가 긍정적 측면만큼이나 잠복된 자기모순으로부터 싹트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자기 콤플렉스 혹은 트라우마, 그것은 진지한 예술가에겐 그저 한낱 조건이었을 뿐, 플라톤의 『국가』에서의 동굴의 우화나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회화의 기원으로 기술되고 있는 그림자와 그림을 둘러싼 이율배반적인 입장 차에서 잘 확인되듯이, 그가 태초부터 예술로서의 미술에 운명적으로 떠맡겨진 보편적이고 철학적 문제에 눈떴다는 것은 그저 흘려들을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초기 그림자 연작들과 일종의 미학적 단절을 결단하고 자기 부정을 거듭해 가는 그의 예술적 실천을 단지 그 개인의 삶과 예술을 토대 지우는 사적 체험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이 나라 예술을 혼돈에서 이제 다 같이 규칙으로 삼을 만한 그 어떠한 것을 모색해 가는 하나의 도정으로 보고자 한다면 곽남신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지 곰곰이 따져 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설혹 개방적이고 가파른 형식적 실험으로 일관했던 그가 도달한 곳이 동어 반복적으로 그림자의 그림자, ‘덫에 걸린 그림자’이자 허상에 불과할 뿐이란 깨달음으로 다시 거듭해서 되돌아오는 일이더라도. 색즉시공 공즉시색.

《질문의 책》
아트스페이스3 5.24~6.8

이한범 미술비평


글쓰기와 전시:《질문의 책》기획에 관하여

처음 내게 전시 기획 요청이 왔을 때, 먼저 의아했다. 나는 전문적인 전시 기획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시와 얽혀 있는 일들(그것을 보고 글을 쓴다거나, 그것에 관한 책을 만든다거나, 그것에 참여해 강의나 대담을 한다거나)을 하지만 그건 전시 그 자체를 만드는 것과는 무관한 활동이다. 전시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만들어 가고 있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그런 일을 직업적 정체성으로 의식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건 언제나 전시의 외부임을 자각한다. 전시의 엔지니어링을 아는 것과 그것을 직접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틈이 있다. 그 간극의 너비만큼 전시 기획 요청은 내게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다만 너무 섣부르게 선을 그어 거부하기보다는, 나는 내게 던져진 그 엉뚱한 상황을 며칠간 즐겼다. 불현듯 전시의 의미에 대해서 숙고해보게 됐고, 인상 깊이 기억하는 전시들, 전시의 기획자들을 돌아보게 됐고, 내가 해오던 일, 할 줄 아는 일이 어떤 잠재성을 가졌는지를 되물었다.

내가 존경심을 품은 몇몇 뛰어난 전시 기획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전시가 매우 특수한 사건을 위한 인공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진력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큐레이터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바로 그 사건이 가능하게 하는 조형적 역량을 가지고 있고 또 끊임없이 훈련한다. 그런데 내가 그간 그들을 살피며 알게 된 것은, 이 조형적 역량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작품에 대한 비평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은 작품이 잘 표명하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잠자고 있는 불투명한 얼굴을 깨워 내어 그것을 조형의 재료로 삼는다. 전시 기획자의 조형적 능력이란, 작품이라는 사물을 이러저러하게 배치하여 그럴듯하게 이어붙이는 모자이크 같은 것이 아니라, 작품의 어떤 순간들을 붙잡고 다독여 리듬을 상상하는 역량이다. 수없이 많은 이질적인 순간들의 뒤죽박죽과 시끄러움을 모종의 운동으로 형성해 놓기란 아득히 어려운 일인 것이고, 나는 그런 작업에 대해 경외해 왔다.

《질문의 책》 아트스페이스3 전시 전경
2024 사진 : 함정식 제공 : 이한범

하루아침에 내가 그 조형적 역량을 가질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작품을 다루는 일’이라는 측면에서는 내가 해왔던 작업과 또 그렇게 멀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는 작품의 그 숨은 얼굴을 글이나 책과 같은 형식으로 다루는 방법을 보다 의식적으로 해왔을 뿐이다. ‘일’은 비슷하지만 전문적인 ‘기술’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차이는, 큐레이터가 작품 그 자체를 다룸으로써 작품의 일시적인 장소를 만든다면, 나는 작품을 다룸으로써 작품이 없는 장소를 만든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작품에 관여하는 시간성, 그리고 다루는 허구의 양태가 완전히 이질적이다. 하지만 ‘큐레토리얼’이 작품을 다루는 기예에 관한 것이자 그 기예의 미학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이 일어나는 담론이라면, 그건 단지 전시라는 형식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큐레이터는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큐레토리얼에 참여한다는 것이 보다 적확한 이해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나는 큐레이터와는 다른 기술로 큐레토리얼에 참여해 왔다. 전시의 관습에 있어 내 역량이 어떻게 겹쳐 있고 어긋나 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내가 전시를 기획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됐다. 무언가는 포기하고 무언가는 더 활성화함으로써. 포기할 것이 큐레이터의 전문적인 조형 역량인 리듬으로 충만한 시공간이라면, 활성화할 것은 작품의 깊숙한 곳에 파묻힌 얼굴을 끌어내어 외부에 놓아두는 비평적 과정이다. 그리고 요즘의 관행에서 후자는 쉽사리 건너뛰어 버리는 단계이기도 하다. 참여 작가 모두와 처음으로 모인 날, 나는 먼저 그들에게 기획자로서 내가 가진 한계와 특수성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전문적인 전시 공학을 훈련하고 그것을 다루는 기획자가 아니며, 전시 기획자보다는 편집자가 작품을 다루는 방식으로 전시를 만들어 나가려 한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번 전시에서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은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가 아니라 작품에서 숨은 얼굴을 끌어내 사물과는 다른 존재 방식으로 가시적이게끔 놓아두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건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일이다. 이해하려는 욕망 없이 다가가 보고 다가간 만큼을 말해보는 기획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내가 작가들에게 제안한 것은 생산이 아니라 다가감이었다. 이런 제안을 할 때, 나는 작품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편집자가 잘하는 것은 작품을 안정화시키기보다는 분탕 쳐 뿌옇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야기를 불러 이끌어내어 사람들이 보게끔 어딘가에 두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이라는 사물이 우리에게 비가시적이게 되는 암묵적인 시간을 상상하는 일에 더 애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건 전시를 빌미 삼을 뿐 책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책이 아닌 책’이라는 게 어떤 모습이 될지는 모른 채여서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모두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래서 작품을 사이에 둔 대화가 시작됐다. 서신을 종종 주고받았고, 네다섯 번씩 만나며 5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첫 모임에서 나는 작가들에게 아마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글을 많이 쓰게 될 가능성이 큰데 괜찮냐고 물었다. 글쓰기는 괴롭고 어려운 일이니 양해를 구해야 했다. 다만 우리가 써야 할 것은 작품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작업에 결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생각하는 것, 작업의 어떤 순간들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7명 작가 저마다 책이 하나씩 만들어져 전시장에 놓였다. 전시장이 가장 우위에 있는 결과물이 되는 제도에서 전시와 함께 생산되는 텍스트는 대개 전시장을 위해 봉사하는 부가적인 것으로서 기획된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부연하거나 설명하거나 보완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건 글쓰기의 역량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 텍스트를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운반체로 여기는 편협함이라고 종종 생각했다. 진정한 글쓰기는 작품의 사물성과 경합한다. 그러니 나의 제안이 충분히 의미 있으려면, 내가 그들에게 의미나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작업의 시간을 함께 방랑하며 언뜻언뜻 비치고 무심히 지나치는 순간들을 의미심장한 흔적으로서 붙잡아보는 모험 같은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런 대화로 이끌어가기란 대단히 어려웠지만, 무엇보다도 정말로 모험하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글쓰기는 작품에 관여하는 이들이 작품에 대해 함께 방랑하게 할 수 있는 특수한 방법이고, 이것은 전시에서 새로운 틈을 벌인다. 거기서 사물은 쉬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돌이켜 보건대, 《질문의 책》은 작품의 시간에 글쓰기가 도입되며 가능해지는 전시는 무엇일지에 대한 상상이었다. 작품이 숨겨둔 얼굴, 지나갔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순간, 사소한 흔적, 허구를 불러오는 주문이 바로 글쓰기다. 그러한 글쓰기가 이루어지면, 작품은 더는 물리적 공간에 자리한 물질적 사물로만 국한하지 않게 된다. 나탈리 레제의 『전시(L’Exposition )』가 바로 이러한 문학적 실천인바, 그 자체로 전시인 이 책을 들추면 가까스로 통제할 수 있을 뿐인 작품에 관한 거의 모든 순간이 쏟아져 내리고 그 쏟아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 레제가 비밀스러운 유기1라고 표현한 그 순간들의 집합은 결국 작품의 장소를 형성하고 작품의 의미에 대해 진술하므로, 글쓰기가 하나의 전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 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전시』 봄날의책 2024 p.99

《달리기: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피크닉 4.5~7.28

정소영 기자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
〈러닝 하트 듀오〉
제공 : 피크닉

몸을 통한 사유(思惟)

팬데믹 기간 왕래가 제한되고 봉쇄의 구속을 겪은 결과인지, 요즘의 추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근 일과 여가의 균형을 추구하며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예술계에서도 운동과 함께 인간의 신체성에 주목하는 전시가 두드러진다.

일찍이 철학자 들뢰즈는 전통적인 이성 중심주의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예술에서 변화를 반영하고 신체를 통한 실천적인 방향의 미학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예술에 대한 신체의 개입 또는 반영은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로 이뤄지기도 하고, 기술을 통한 작품 감상 방식의 변화, 감각 변화 현상에 대한 변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기술에 의한 감각 변화 그리고 신체의 훈련을 통한 내적 성찰과 감각의 확장을 ‘달리기’의 행위로 설명한다.

인간은 달리기 위해 진화해왔다
4개의 섹션으로 구분된 전시는 관객 참여형 작품인 베를린 기반의 아티스트 그룹,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의〈러닝 하트 듀오(Running Heart DUO)〉로 시작된다. 두대의 트레드밀 위에 관객이 올라가 달리기를 시작하면 참여 관객에게 부착된 심장 박동 센서가 운동을 감지하면서 빛과 사운드가 발생한다. 비트감이 실린 일정 간격의 사운드는 러닝머신 위 참여자의 심장박동이자 전시 공간의 사운드로 치환된다. 개념미술에 등장하는 아이디어가 곧 작품이 되고, 관객 참여로 완성되며, 사운드아트에서 공간에 대한 개념이 표현된 전시는 단순하면서도 지난 역사에서 달리기와 예술을 끊임없이 엮어낸다.

수많은 명작의 이면에는 화가의 신체에 대한 철저한 학습과 부단한 습작이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비트루비우스 인간〉은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를 그린 그림으로 세계에 대한 이해가 곧 인간의 신체에서부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다빈치의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이형구의〈호모 푸각스〉는 더 잘 달리기 위해 변형된 인체에 대한 상상을 표현한 드로잉이자 설치 작품이다. 인체 구조와 형상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왔던 이형구는 인간이 신체를 통해 감각하는 현상, 신체가 확장되고 변형되는 세계를 통한 상상, 해부학적 신체단면을 통한 환상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변형된 신체, 상상의 신체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결국은 시작과 끝이 신체로 정의되는 작품은 분리될 수 없는 육체이자 몸의 주인으로서 자기 성찰을 하게 한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마라톤은 기원전 49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가 승리하자 전장에서부터 30km를 달려 승전 소식을 알린 아테네 병사에서 유래했다. 신체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점에서 올림픽의 꽃이라 불린다. 인간의 한계와 자신의 신체적 최선과 최상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있다. 신나리는 〈에픽 런, 스트리트 뷰〉를 통해 전시장 안에 러닝 코스를 들여왔다. 트레드밀 위에서 4채널 비디오로 구성된 코스를 선택해 서울 도심과 호주 해안 절벽, 북극의 경관 등을 보며 달리기를 진행할 수 있다. 게임과도 같은 행위는 마라톤에 대한 체험으로서 작품을 경험하게 된다. 도시와 자연, 경사(傾斜)정도를 설정할 수 있는 코스는 미디어 시대에 현실에 대한 이해와 지각 변화를 작품을 통해 상기하게 한다. 미디어에 의한 간접경험과 기억은 지금의 변화된 감각의 대표적인 사례다. 경험한 적 없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아네모이아’를 통해 탄생한 세기말 패션이나 복고풍은 독특한 사회현상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시도하기 어려운 마라톤을 간접경험하게 하는 신나리의 작업은 이미 운전면허 학원에 도입된 미디어 운전연습 교육이나 필드에 나가기 전 진행되는 스크린 골프의 또 다른 버전인 셈이다.

전시 초입에서 들었던 심장 박동과는 또 다른 박진감으로 전시 공간을 가득 메우는 소리를 따라 들어서면 스위스 예술가 지문(Zimoun)의〈88개의 DC 모터, 코튼 볼, 골판지 상자 60×60×60cm〉를 만나게 된다. 건축적 요소를 이용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지문은 판지와 모터, 공을 이용해 벽처럼 쌓아 올려진 판지에 공이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로 마라톤 경기 출발 총성과 동시에 쏟아지는 함성과 박진감 넘치는 웅장함을 연출했다. 한 번도 마라톤을 경험한 적 없지만 사운드를 통한 가슴 벅참은 이 역시도 경험하지 않은 경험에 대한 환상 혹은 가상으로 예술과 게임에 동시에 존재하는 ‘형상화’를 느끼게 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라톤 선수인 에밀 자토벡이 남긴 말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를 전시 부제로 사용한 《달리기》는 예술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신체에서 시작해 기술과 사회 변화를 통한 변형을 거쳐 다시 몸을 통한 사유를 돌아보게 한다.


1 나일화 「무용미학에 있어서 들뢰즈(G. Deleuze)의 신체논의와 예술개념의 의미」무용예술학연구 제43집 4호 2013 p.47

 이형구 〈호모 푸각스〉
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4

 지문〈88개의 DC 모터, 코튼 볼, 골판지 상자 60 × 60 × 60cm〉
모터, 판지, 면, 강철, PVC, 테이프, 전선, 전원 공급 장치 가변 설치
2024

《토성의 고리》
부천아트벙커B39 6.5~16

강재영 기자


 손경민 〈How to Catch the Big Fish〉
철, 인조가죽, 샤클, 쇠사슬, 로프, 끈, 펜던트 95 × 150 × 150cm 2023

추론하는 미래의 모양

COVID-19는 기후위기가 더는 미래의 문제가 아님을 강력히 체감하게 했다. 이러한 전지구적 공통경험은 시각예술장 안에서 인간종의 존재론적 차원과 미술관-박물관의 기존 전시 제작-소비 체제 전반을 동시에 파괴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였다. 한동안 인간 문명의 지적-정서적 우위를 과시하는 매체로 활용됐던 전시는 이제 그 수행 자체가 지닌 한계를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국내 시각예술장 안에서도 이러한 영향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과 더불어 열린 《어스바운드》(아마도예술공간, 2020)는 브루노 라투르의 생태 정치학 논의를 기반으로 비인간종과의 공생을 말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뒤이어 《지속 가능한 미술관 : 미술과 환경》(부산현대미술관, 2021), 《포스트 네이처 : 친애하는 자연에게》(울산시립미술관, 2022) 등 미술관에서도 기후위기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고민을 전시를 매개로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토성의 고리》는 이와 같은 ‘기후위기’와 ‘지속가능성’을 다루는 인간 주체의 존재론적 고민을 ‘토성의 고리’라는 수사 아래에 두고 재검토하며 다가올, 소멸하는 미래의 다종다양한 청사진을 그린다.

전시 제목인 ‘토성의 고리’는 W.G. 제발트(W.G. Sebald)의 동명 소설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류희연은 팽창하며 동시에 황폐함을 야기한 서구 문명의 이면을 ‘토성의 고리’에 비유했던 제발트의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직면한 기후위기의 대안처럼 제시되는 ‘지속가능성’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팽창하는 풍경의 이면을 바라보자고 말한다. 전시 작품들은 과거 소각장을 제어하던 중앙제어실, 크레인조종실, 유인송풍실, 1층에서 운영하는 카페 ‘스페이스 작’ 등 부천아트벙커를 구성하는 공간에 구분되어 펼쳐졌다. 각 공간에 놓인 서민우, 손경민, 손혜경, 정서희, 최신영의 작업은 전시 제목처럼 도시를 순환케 하는 마지막, 터미널을 은유하는 ‘고리’, 끝을 시작으로 바꾸는 은유의 기술을 구사한다.

전시는 과거 소각장의 모든 시설의 작동을 확인하고 조종하던 중앙제어실에서 시작한다. 인류세 이후의 세계에 대해 조망한 다양한 인문학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비인간의 공생을 상상하게 하는 손경민의 설치는 게임 엔진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로 우리가 기대하거나 그리지 않는 다른 색깔의 미래를 담은 정서희의 〈LUCA〉(2023)와 어우러졌다. 두 작가는 기능을 잃어버린, 쓰레기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과정을 담은 수직-수평의 컨트롤패널을 배경으로 중첩되어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미래이미지-서사를 상상하게 하는 공간을 연출했다.

제어실을 나와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구)크레인조종실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쓰레기를 태우고 남은 잿더미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작업을 했던 이곳에는 서민우의 〈Bunkering〉(2024)이 자리했다. 작가는 부천아트벙커 주변을 산책하며 채집한 소리와 돌을 재조합하여 소리-풍경을 담은 공간 설치를 선보였다. 소리로 세계를 지각해내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노이즈가 공간을 채울 때, 우리 인식이 배제하는 소음을 감각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존재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려내도록 했다.

조종실에서 나와 2층 복도를 따라 끝까지 걸어가면 소각 후 나오는 유해가스를 처리하고 대기 밖으로의 방출을 제어하던 유인송풍실이 있다. 여기에는 손혜경의〈대성적백〉(2020/2023), 〈황학예우〉(2018), 〈자본의 회전〉(2021)이 삼각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작가는 상품을 자본주의 순환구조의 기본 단위로 설정하고, 모듈화된 이케아 소형가구, 북엔드와 같은 소품과 PVC 파이프 등을 조합하여 레디메이드 풍경을 만든다. 매연을 배출하는 데 사용되던 거대한 유인 파이프 구조물 앞에 놓인 작가의 작업은 마치 미니어처처럼 과거 다이옥신과 미세먼지를 생산해 시민에게 공급했던 소각장의 역할을 겹쳐보게 한다.

 《토성의 고리》 부천아트벙커B39 크레인 조종실
서민우 전시 전경 2024
사진 : 아인아 아카이브 제공 : 류희연

1층 로비에 자리한 카페 스페이스 작의 디저트 진열장에는 최신영이 만든 케이크가 다른 디저트들과 함께 형광빛을 받으며 진열되어 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을 연상케 하는 원색과 도형, 꽃과 나비 모양 장식으로 구성된, 언뜻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케이크 위에는 “미술이 돈이 된다는 걸 왜 보여줘야 하는데”,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하자” 등의 문구가 적혀있다. 직설적인 내면의 외침이나 희망찬 미래를 위한 당찬 포부를 말랑말랑한 생크림 위에서 구불구불한 케이크 글씨로 대면할 때 당혹스러움과 유쾌함이 교차한다.

이 전시에서 비평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은 ‘토성의 고리’라는 메타포와 전시가 지닌 메시지, 개별 작품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관람객에게 전시를 수용하게 하고, 전시장 바깥의 사유로 메시지를 확장하도록 이끄는지 그 역학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획자의 메시지는 명확하고, 작가들의 작업은 기획자의 메시지에 제각각의 매체와 재현/비재현으로 메시지를 강화하기도 하고 혹은 독자적으로 발화하여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하기도 한다.

공간의 선정과 작품의 배치도 눈여겨볼 만하다. 주로 소각장 내 제어실로 활용하던 공간을 주 전시공간으로 삼으면서 시스템과 인간의 관계를 뒤집어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은 영리한 접근이다. 전시가 자본주의의 빈틈을 노리고 기존의 가치를 전도(顚倒 )하도록 유도하고자 하는데 이를 공간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실천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단순히 소각장을 전시공간으로 삼아서 작품이 지닌 자율적 맥락과 해석의 자장과는 관계없이 공간에 복속시켜 작품을 가두는 것과는 완전히 구별되고, 오히려 이를 피하고자 이러한 배치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복수의 미래를 제시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한다’라는 기획자의 의도는 이런 과정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의문점은 메타포가 전시 전체의 의미망과 작용하는 방식이다. 전시는 문명의 폐허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눈으로 소외된 것을 주체로 호명하며 서구 문명을 비선형적으로 다시 바라보는 시점을 만들었다는『토성의 고리』의 일반적 해석에 기반하여 의미망을 쌓아올리고 있다. 한 가지 방향에서의 해석을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접근하다 보니 소설 자체가 가진 여러 해석적 가능성이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듯 보인다. 혹은 더 적극적으로 작품에서 등장하는 상징을 차용했다면 어땠을까? 관람객이 또 다른 감각으로 해석의 차원을 만들어내는 문이 열리지는 않았을까? 부족함이나 아쉬움의 표현이라기보단, 다층적인 의미망을 만들어내기 위한 구조적인 제안과 상상을 요청하는 데 더 가깝다.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