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예은 Ye-eun Min

민예은: 절단한 ‘집’이
가시화하는 평행세계

ARTIST FOCUS

민예은 / 1986년 출생인 작가는 ‘집’의 시각성에 주목하여, 이를 잘라내고 떼어내고, 붙이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에서 연출되는 시공간적 상황을 제시하고 그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설치작가다. 프랑스 클레르몽 메트로폴 고등 미술학교 석사 졸업 후, 인천아트플랫폼(2021), 천안시립미술관(2020), 대안공간루프(2019)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포도뮤지엄, 2024), 《HEXED, VEXED and SEXED》(West Den Hagg, 헤이그, 2023) 등 다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5 시테 국립 레지던시 입주작가, 2020 천안시립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다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때〉 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4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포도뮤지엄 전시 전경 2024 사진 제공 : 작가

민예은: 절단한 ‘집’이
가시화하는 평행세계

김주원 | 큐레이터, 상명대 겸임교수

민예은은 냉전 종식 이후 가속화된 문화의 혼성적인 편성이 윤곽을 드러내던 1990년대에 초중고를 다니고 2000년대 초반 프랑스로 건너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화의 세계화와 지방화가 공존하는 전지구적 분위기 속 한국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성년이 된 19세부터 프랑스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개인적 경험은, 민예은 작업의 기저에 ‘이주’, ‘문화적 교차’, ‘크리올(Creole)’이나 ‘잡종성’, ‘혼종성’ 등이 깔린 이유이다. 이러한 개념은 민예은이 작업을 하며 자본과 정보, 사람, 상품 등 전지구화의 여러 차원이 서로 밀접하게 어우러지면서도 어떤 개인들의 다양한 시간과 기억이 묻어있는 공간/장소로서의 ‘집’을 주목하게 했다. ‘집’과 집 안의 가구, 커튼 혹은 블라인드, 전등갓, 시계, 타일, 캘린더 심지어 벽지 등은 어떤 시간과 공간을 살았던 이의 정체성의 지표이자 자아와 타자의 영역성과 충돌하는 경계 막이라는 점에서 작가에게 유효한 모티프가 되었을 것이다.

 〈가구 오두막〉 가구, 목재, 선박용 합판, 유리, 시멘트, 철판 380 × 500 × 400cm 2013~현재

〈카라반〉왁스, 나무, 철망 260 × 150 × 180cm 2015

〈카라반〉 (부분)

중심의 병렬, 주변의 집합
작가의 본격적인 ‘집’ 작업은 〈가구 오두막〉(2013~현재, 브르타뉴)을 시작으로 〈카라반〉(2015, 뉴욕), 〈라비하마 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2019, 서울), 〈말로 전달되지 않는〉(2021, 인천),〈뻬이약아산쌩마땅쉬흐우스트하남삐프리악이브리쉬흐센세네…〉(2022, 인천),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2024,제주) 등이있다. 이들 작업은 집의 형태를 온전히 갖추거나 최소화, 파편화, 혹은 파편들의 증식과 재구성의 형식으로 구분된다.

집의 형태를 온전히 갖춘 〈가구 오두막〉은 프랑스 북서부 끝 대서양과 맞닿은 브르타뉴에서 2013년 여름부터 제작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가깝다. 지역의 건축가, 엔지니어, 시공 기술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지은〈가구 오두막〉은 400×500×380cm 크기의 규모로 거주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지역의 특성상 겨울이면 잦은 비로 범람하는 강물을 고려하여 지반에서 1m 올려 지었다. 〈가구 오두막〉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지역 주민이 기증하거나 벼룩시장 등에서 사들인 70여 가지의 ‘중고 가구’로 구성된 집은, 흥미롭게도 집의 외벽이 누군가(들)의 집 내부에서 사용되던 거울, 문짝, 장롱 등의 전체 혹은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외부를 향해 노출된 내부, 역전된 안과 밖, 집합된 개인(들)의 서사와 기억/언어, 교착된 시간(들)의 흔적 등은 ‘크리올(Creole)’이나 ‘잡종성’, ‘혼종성’ 등과 상상된 ‘신화’와 순혈적 ‘전통’의 관념적/실존적 위계의 (불)확정성에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더불어 중심의 병렬, 주변의 집합을 통해 중심과 주변의 역전과 도치, 그 전복은 변화무쌍한 동력을 지닐 수 있음을 역설한다.

2015년 제작한 〈카라반〉은 형태가 최소화된 ‘집’이다. 애초에 사막이나 황무지를 횡단하며 국가 간, 민족 간, 지역 간 상거래로 교류하던 상인 그룹을 뜻하는 카라반은 오늘날 이동식 집의 전형으로 지칭되고 있다. 작가는 뉴욕 트라이앵글 아티스트 워크숍(Triangle Artists Workshop)에서 자신의 숙소였던 실제 ‘카라반’을 보다 단순화해 〈카라반〉으로 제작했다. 실제 ‘카라반’이 있던 흔적을 따라서, 같은 장소에 설치된 작품 〈카라반〉은 시간과 온도 등 조건에 민감한 왁스를 얇게 발라 굳혀 만든 여러 장의 판으로 구성되었다. 뜨거운 낮과 추운 밤의 기온 차는 왁스로 지어진 〈카라반〉의 형태를 점차 변형시킨다. 햇빛에 녹아내리다가 어두운 밤엔 굳고 다시 녹아내리다가 굳는 〈카라반〉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흔들리고 재구성되는 정체성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민예은의 〈카라반〉은 녹아내리는 얇은 왁스 판으로 만든 ‘집’이라는 점에서, 고정되고 단단한 ‘집’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절단한 집이 가시화하는 평행세계
민예은은 2019년을 전후하여 현재까지 새로운 형태로 ‘집’,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절단한 ‘집’, 집의 파편/조각과 그 내부를 만들고 있다. 예컨대,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는 150×240×150cm 크기의 직육면체를 여섯 개의 동일하지 않은 조각으로 잘라 공간에 설치한 작업이다. 여섯 개의 파편으로 절단된 조각들은 특정한 좌표 없이 표류하듯 공간에 놓여 있다. 파편 조각 안쪽은 누군가의 ‘집’(내부) 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몇몇의 물건들이 부착되어 있다. 이것들은 여러 경로로 작가가 수집한 물건들로써, 화장실 타일, 괘종시계, 디지털 시계, 거울, 창틀, 하루에 1장씩 떼는 일력(日曆) 등이 그것이다. 각각의 생산연도와 트렌드가 상이한 물건들은 보는 이의 연령대에 따라 향수와 선망, 회고와 고고학적 지식 사이를 자극한다.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는 일종의 지역 기반 하이퍼 로컬(hyper-local) 플랫폼에서 거래 혹은 나눔의 형태로 유통되던 중고 물품들을 수집하여 제작하였다. 지금이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이 중고 거래, 지역 정보 교류와 같은 비즈니스 모델과 결합하면서 하이퍼 로컬 서비스가 활성화되었지만, 이 작품 제작 당시에는 지역 · 동네를 기반으로 형성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구입하거나 무료로 나눠준 물건을 수집했다. 이 물건들은 누군가에겐 쓸모와 기능을 잃어 가치가 훼손되거나 유행과 시대성을 잃어 폐기처분된 것들이다. 산업혁명 이후 넘쳐나는 물건들은 자본의 논리와 맞물리면서 일상 속 많은 것의 가치 효용과 폐기를 빠르게 위계화해 왔다. 여기서 민예은의〈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는 가치의 위계화에 제동을 걸고 이러한 폭력적 위계를 해체, 번복하고자 제안하고 있다. 평론가 정현의 표현대로 “독해할 수 없는 이 길고도 끝나지 않는 제목” 역시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목은 하이퍼 로컬 플랫폼 사용자들의 아이디를 무작위로 조합한 것인데, “아마도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부서진 공간의 아상블라주 작업보다 더 작업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민예은이 줄곧 ‘집’의 안과 밖의 구분이 갖는 경계를 뒤집어 온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버려진 물건을 수집하고 재구성한다는 행위는 훼손된 의미와 가치의 복원, 그리고 폐기된 시간의 회복을 위한 시도와 다름없다.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 새롭게 벌려진 공간 사이로 매번 다른 장면으로 다가서는 평행하는 세계가 열릴 수 있다. 위계 없이 평행하며 파편화된 조각 ‘집’ 사이를 걷거나 서서 두리번거릴 관람자의 가슴은 뜨겁게 또는 서늘하게 흔들린다.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
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19

〈뻬이약아산쌩마땅쉬흐우스트하남삐프리악이브리쉬흐센세네…〉 역시 ‘집’으로 상정되는 직육면체의 해체와 파편화, 이를 통한 안과 밖이라는 구분의 경계를 뒤집는다는 점에서 〈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의 작업구성 방식과 구조에서 유사하다. 위의 두 작업은 지속적인 증식과 결합,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2024)로 설치되었다. 여기서 증식과 결합, 재구성의 과정은 민예은이 전략적으로 가시화하여 펼쳐 보이고자 하는 세계로 수렴된다. 그것은 결국 시간차를 두고 생산, 유통, 사용되었던 물건들을 한 공간 안에 부착하여 상이하고 부적절한 것들의 관계 맺기에서 비롯되었다.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는 불안하지만 초월적인 미적 아름다움이 대비되는 풍경이다. 이것은 아마도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발생하는 그림자들 때문인 것 같다. 여러 각도의 그림자‘들’이 하나의 공간에 동시에 드리워져 연출하는 초현실적 풍경은 실존으로 하여금 자신은 물론 시공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의심하게 한다. 하나의 빛과 특정한 좌표가 실종된 이 공간에서 우리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림자‘들’에 시선을 돌린다. 이것은 마치 독해할 수 없는 이 길고도 끝나지 않는 제목 같지 않은 제목, 명제 같지 않은 명제의 나열을 읽는 것과도 같다. 하나라고 여겨왔던 그림자와 같이,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제목은 다섯, 열, 스물, 서른 등등으로 무한히 증식될 가능성을 품고 하나 이상으로 늘어서 있다. 이는 광장에서 선언만이 역사가 아니라 작은 중얼거림‘들’도 역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뻬이약아산쌩마땅쉬흐우스트하남삐프리악이브리쉬흐센세네…〉의 경우, 작가가 물건을 수집한 실제의 ‘장소’, 지역명의 조합이라는 점이다. 이들 장소는 작가에겐 일상적 공간이자 경험과 기억으로 익숙한 곳이지만 그 장소에 대한 경험이 없는 다수의 관람자에게는 경험이 부재한 장소 없는 공간으로서 사이버스페이스 혹은 가상현실과 같을 수 없다.

“뻬이약-브르타뉴/아산-충남/쌩마땅쉬흐우스트브르타뉴/하남-경기도/삐프리악-브르타뉴/이브리쉬흐센파리근교/세네-브르타뉴…”

장소 없는 공간으로서의 마을과 도시의 이름을 짝지어 붙여 읽어 보라! 불규칙한 운율이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초현실주의 시(詩)와 같다. 마치 민예은의 공간처럼 말이다.

〈뻬이약아산쌩마땅쉬흐우스트하남삐프리악이브리쉬흐센세네…〉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2
《SPACE SYMPHONY》 파라다이스 아트스페이스 전시 전경 2022

〈뻬이약아산쌩마땅쉬흐우스트하남삐프리악이브리쉬흐센세네…〉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2
《SPACE SYMPHONY》 파라다이스 아트스페이스 전시 전경 2022

 “198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나는 한국과 프랑스라는 두 문화를 동시에 접했다. 하지만 내가 프랑스로 유학을 갔던 19살에야 비로소 일상에서 사용하던 많은 단어가 프랑스어임을 발견했다. 뗄레꼬망드(리모컨), 샤리오(카트), 빠노(자동차표지판) 같은 단어들. 프랑스에서 10여 년을 머물며, 내가 한 국가의 문화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 자신처럼 애매모호한 위치, 끼어 있는 듯한 상황을 ‘생각의 혼혈’이라 부르며 내 작업에서 풀어갔다.” – 작가 노트

집과 정체성
미술과 정체성 사이의 깊고도 암묵적인 연관성은 미술사 내내 존재했다. 세계가 당신을 어떻게 보느냐, 당신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당신이 다른 이들을 어떻게 보느냐 같은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고대 그리스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가들과 사상과 감정 그리고 창조적 표현에 영향을 미쳐왔다. 작품의 제재와 형식적 특징, 만들어진 재료는 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개인적 차원과 함께 보다 넓은 문화적 차원에서의 정체성의 특질을 드러내 준다.1

비평가 루시 리파드는 1990년에 출판된 책 『혼성의 은총 : 다문화 시대 미국의 새로운 미술』에서 스스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표상하는 현대미술가들의 활력에 주목하면서, “누군가 혹은 무엇과의 관계없이 산출되는 개인의 ‘정체성’이란 거의 쓸모없는 것이다.”고 말하며, 자신의 문화와 연계하려는 작가들의 열망을 적극 지지했다. 리파드는 정체성이 상관적인 것이고, 다른 이들과의 유사성과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더불어 그는 집단 자아(collective self)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시각적 · 언어적 공유 정체성(shared identity)의 이름으로 대리함으로써 표출되는 정체성임을 말하였다.2 루시 리파드의 정체성에 대한 이 같은 확정적 주장은 1980, 1990년대 초반에 열린 무수한 전시들이 주목했던 집단 정체성, 그중에서도 인종, 민족, 젠더,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 규정했던 정체성과 연결될 것이다.

‘집’ 혹은 ‘집’과 관련된 부분들을 주목하며 작업해 온 민예은 역시 유년시절 부모로부터의 영향과 프랑스 유학, 뉴욕 등 다양한 도시에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 등으로 ‘이주’, ‘문화적 교차’, ‘크리올’이나 ‘잡종성’, ‘혼종성’ 등과 대면하게 됐고, ‘정체성’에 대해 독자적인 작가적 입장을 견지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예은의 경우는 루시 리파드 식의 집단 자아나 공유 정체성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작가는 위에서 살펴본 작업들을 통해 이전 세대가 타자화하고 낭만화했던 비실재적 집단 혼성성과 잡종성 등을 실재적 정체성으로 재인식하고 재위치 짓기를 시도하고 있다. 더불어 선형적 위계 속 혼성적 집단 자아들에 덮어 씌워진 단일한 관념적 허구성을 거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적 허구성은 선명함만을 가치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상대적으로 규정이 모호하고 선명치 못한 혼성적 정체들은 타자화되거나 폄훼되었으며 버려지고 폐기되었음이 사실이다.

한국어와 프랑스어라는 두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민예은은 각각의 언어가 풀이하는 한 가지 용어와 개념이 똑같이 일치하지 않음을 인식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두 언어 사이의 공유영역과 그 외 영역이 드러내는 모호한 풍경들 조차 우리 개개가 지닌 정체라는 것이다.

한편, 민예은은 ‘집’의 형태를 주목하면서도 ‘시간’, ‘공간’, ‘언어’, ‘재료’, ‘관계’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직조하며 다뤄왔다. 이 다섯 개의 키워드는 민예은의 작업에서 다수의 입구와 출구가 있는 비계층적 네트워크로 세대와 세대, 장소와 공간, 기억과 미래, 익숙함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시작도 끝도 없고, 정해진 길도 없으며, 경직된 구성과 지배 개념에 저항하면서 이종적인 요소들이 연계될 수 있는 역할들을 하고 있다. 어떤 키워드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민예은의 작업이 보고자 하는 뜨거운 정체는 새로운 관점과 시각을 통해 세계와 나, 나와 나자신, 너와 당신들 사이에서 다시금 등장할 것이다.

*본 원고는 ( 재 )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1 진 노버트슨, 크레이그 맥다니엘 지음 문혜진 역 『테마 현대미술 노트』두성북스 2012(2쇄 ) p.74~75 참고
2 같은 책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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