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대 Hyung-Dae Kim
회화와 판화를 교차하는
반세기의 추상 여정
ARTIST
1936년 출생, 서울대 회화과 학사, 연세대 미술교육 석사 졸업. 중동학교 미술교사, 경기공업전문학교 공예과 전임 강사, 한양대 강사, 이화여대 서양화과 교수 역임. 대한민국민예술원 회원(2024 ), 황조근정훈장(2002), 공간 국제판화대상전 대상(1982), 대한민국미술전람회 6회 특선 입상(1961~1968). 《한국현대미술가 시리즈 : 김형대 회고전》(국립현대미술관, 2016), 《김형대 1961~2003》(가나아트, 2003), 목판화 30년 회고전 《김형대》 (토탈미술관, 1998), 《김형대 목판화 개인전》(시로다화랑(シ口夕 廊), 도쿄, 1984 ) 등 15회 개인전 개최. 광주비엔날레 2000 특별전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 프로필》(광주시립미술관, 2000), 《한국작가 초청전》(UNESCO, 1995), 《제4회 중국 국제판화전》(타이베이 시립미술관, 1985) 등 다수의 기획전 참가
〈생성시대〉캔버스에 유채 145 × 97cm 1996
회화와 판화를 교차하는
반세기의 추상 여정심지언 | 편집장
1961년 제1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환원 B〉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화려하게 등단한 김형대는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 작품으로 국전에 입상한 최초의 작가이다. 초기부터 줄곧 추상을 탐구해온 김형대의 화업은 회화와 판화를 통해 구현되었으며, 두 장르에 걸쳐 평면 추상을 전개했다. 반세기가 넘는 그의 화업은 1960년대 국전을 무대로 한 앵포르멜 회화 시기, 1970년대 이후 작업의 전환점이 되는 목판화 시기, 1980년대 중반 이후 독특한 전면 추상회화의 시기 세 단계로 구분된다.1 회화와 판화를 오가며 본인만의 조형 세계를발전시켜온 작가 김형대는 올해 대한민국예술원의 신입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오는 9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전과 키아프 출품을 준비하고 있는 노화가를 만나 그의 60여 년 화업을 함께 돌아보았다.
대학 재학시절 아카데믹한 구상회화 일변의 화단과 교육환경에 만족하지 못해 홀로 추상미술을 탐구하셨는데, 당시 추상미술을 어떻게 접하고 실험하셨나요?
군 제대 후인 1959년에 『라이프』 잡지에서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등의 작품을 접했고, 극장에서 나오는 대한뉴스에서 잭슨 폴록이 물감 뿌리는 모습을 보면서 추상미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죠. 그때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권옥연 선생이 프랑스 전후 미술, 앵포르멜 미술을 강의하며 당시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셨어요. 그렇게 비구상 계열의 작품을 접했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인물화, 정물화, 풍경 등 구상 중심의 수업 일색이었죠. 그래서 수업 마치고 혼자 추상미술을 시도했어요. 1960년대에 번역된『추상회화의 모험』이라는 책을 1000번 넘게 보면서 조르주 마티유, 루치오 폰타나 등의 작품을 보고 또 보고. 그만큼 추상회화를 갈망했는데도 그때는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대학교 3학년인 1960년에 벽동인(壁同人)의 멤버로 활동하셨습니다.《벽》전에 참여하신 배경과 당시에 출품한 작품이 궁금합니다.
벽동인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발상지라 할 수 있어요. 제대하고 서울대 3학년 때, 2년 후배인 58동문들과 함께 공부했는데 학교에서 혼자 작업하는 내 모습을 보고 후배들이 제안해서 함께했죠. 벽동인은 나까지 10명이었는데, 대개 평면 작업을 했고 추상 경향이었죠. 저녁이면 10명의 동인이 모여 추상미술이 무엇인지 계속 토론하며 각자의 실험을 했고, 1960년에 정동고개 야외에서 전시를 했어요. 기성세대의 작품과는 좀 다른 추상 경향의 작품을 선보여 관람자들이 낯설어했죠.
1960~70년대 국전에서 6회 특선을 수상하는 등 국전을 중심으로 초기 경력을 구축하셨습니다.
처음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을 받았을 때 학교가 난리가 났었죠. 대학신문에 기사가 나서 꽤 유명세를 탔어요. 학교에서도 국전을 권장하기도 했고,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라 매해 정말 성실하게 국전을 준비했어요. 겨울이면 캔버스를 맞춰서 봄부터 10점의 작품을 제작해 그중 3점을 골라 출품했어요. 당시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는데, 급여와 작업실이 제공되어서 안정적인 환경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죠.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빨리 추천 작가가 되어 결혼하겠다는 포부로 열심히 준비했고 또 좋은 성과를 얻었어요.
〈후광 01808-130〉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 × 227.5cm
제공 : 작가
국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등단한 후 1970년대 초 목판화를 시작하며 화업의 두 번째 단계를 맞으셨습니다. 추상미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목판화와 한국 고유의 소재에 주목하셨는데, 목판화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독학으로 목판화 기법을 터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추상회화를 하다 보니 우리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양화되어 가는 것이 싫더라고요. 무엇보다 유화는 겨울에 물감이 마르지 않아 작업을 할 수 없는데 김종학이 판화는 1년 내내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 겨울에 판화를 시작했죠. 또 1970년에 동아국제판화제에서 판화의 원화를 보고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이전에는 판화를 하나의 장르로 보지 않았고 제대로 된 판화 전시도 접하지 못했죠. 그 전시를 여러 번 가서 보면서 판화라는 장르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목판화를 시작했는데 한국판화협회가 생겨서 윤명로, 이상옥, 김종학 등과 함께 판화를 했어요. 그리고 1969년 경기공업 전문학교(현서울과학기술대 )에 강사로 갔는데 교내에 목공장이 있는거예요. 그래서 물 만난 고기처럼 목판화를 맘껏 했죠. 당시는 나무가 귀했는데 용산역에 미국에서 냉장고 등을 들여올 때 겉에 포장해온 나무를 구할 수 있어서 그걸 얻어다가 에칭 프레스에 여러 차례 찍어 보니까 나뭇결이 남으면서 요철이 생겼어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목리(나이테)를 발견하면서 목판화에 주력하게 되었어요. 재료부터 기법까지 수없이 찍어가며 혼자 익힌 거예요. 그리고 이탈리아 카르피판화트리엔날레( 1972 )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 작품이 이탈리아 판화 잡지에 실렸어요. 해외에서 나를 알아주니 용기가 나서 그때부터 판화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거예요.
1970년대에 고집스럽게 판화에 매진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목판화에서 색을 구현하는 선생님의 독창적인 방식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색판화를 판 하나로 찍어서 하얀 부분에 물감을 칠해서 채색 판화라고 했는데, 나는 판을 색별로 만들었어요. 제일 처음에 검은색을 찍고, 그 위에 붉은색을 찍으면 묘한 색이 나와요. 그리고 또 그 위에 노란색을 찍어요. 그러면 색이 밑에서 배어나는 효과가 생기는데, 이걸 직접 개발한 거거든요. 그래서 ‘김형대식 목판화’ 특허를 내려고 했는데 예술은 특허가 안 된다고. 보통 판화는 밝은색부터 어두운색 순서로 찍어요. 그런데 나는 그걸 거꾸로 해서 진한 색 위에 밝은색을 겹쳤어요. 그래서 색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죠.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빛이나 여름 한복의 얇은 천 사이로 비치는 살결처럼 색이 비치면서 중첩되는 효과를 참고한 거였죠.
198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후광〉시리즈는 회화와 판화를 오가는 김형대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연작입니다. 제목으로 사용하는 ‘후광’은 종교적인 의미인가요? 아니면 빛과 색의 중첩에 대한 개념인가요?
종교적 의미가 큽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지만 어릴 적부터 불교에 매력을 느꼈어요. 특히 불교의 색채가 작업에 영향을 주었죠. 예술 하는 사람들은 종교나 믿음 등에 대한 영향이 있어요. 제가 목판화에서 ‘후광’이라는 제목을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빨간색 위에 하얀색이나 노란색을 찍으면 핑크색과 비슷한 제3의 색이 나오는데, 그걸 한지에 찍어 들고 비춰보니 밑의 색이 올라오더라고요. 이때부터 제목에 ‘후광’을 썼어요. 그러니까 두 가지가 모두 맞다고 할 수 있죠.
〈후광-1〉목판화 49.8 × 39cm 1980 E.D 20
〈후광 97-804〉목판화 45.5 × 60.5cm 1997 E.D 27
유화 작업을 하시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아크릴에 모델링 컴파운드를 섞어서 썼는데, 재료를 변경하면서 시도한 실험은 어떤 것이었나요?
1981년에 이화여대 어학연수단 미술 담당 교수로 한 달간 영국에 머무르게 되었어요. 그때 테이트에 가서 외국 작가 작품도 보고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면서 뭔가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죠. 그래서 유화에서 아크릴로 재료를 바꿨는데 물감의 마티에르나 질감을 살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던 중 모델링 컴파운드를 알게 돼 섞어서 함께 사용하니까 투명한 색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티에르를 살려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수성 아크릴 물감의 혼색 없는 겹침 효과를 살려내 판화에서처럼 뒤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과 같은 후광효과를 회화에서도 구현하게 되었어요. 이때부터 회화에서 색채 추상의 〈후광〉 연작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작업에서 회화와 판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습니다. 작품세계의 두 축을 구성하는 회화와 판화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저는 둘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재료가 다를 뿐 회화라는 큰 틀 속에 있죠. 처음에는 서양화에서와 비슷하게 목판 작업도 했어요. 그런데 하나는 물감으로 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나무를 파서 찍는 것이다 보니 점점 차이가 생겼죠. 그런데〈후광〉회화 연작에는 다색판화의 영향이 99%예요. 그러니까 한 줄기에서 퍼져나갔지만 결국 다시 만난 거죠. 평면 시각예술이라는 틀 안에서 재료나 장르에 구분 없이 모두 회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후광 22-0112〉캔버스에 아크릴릭 150 × 150cm 2002
〈후광-08-424〉캔버스에 아크릴릭 140 × 140cm 2008
제공 : 작가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던 1970년대는 단색화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이에 반해 초기부터 줄곧 다색의 색상을 사용했는데요, 색은 선생님의 작업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부터 색을 좋아했기에 다른 사조에 신경 쓰지 않고 내 방식대로 색을 사용했어요. 작가는 물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거잖아요. 어릴 적 본 조계사의 단청, 어머니가 운영하던 포목점에서 본 천연색의 옷감 색상, 여름이면 어머니가 자주 입으시던 비취색과 연분홍 한복의 은은한 색상, 이런 것들이 나의 색채 감각을 형성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뭘 하건 나는 색을 사용해서 그림을 계속 그렸어요. 홀로 캔버스에 두꺼운 재료와 색상을 여러 겹 쌓아 올리는 데 집중했는데, 한국의 직물이나 파도, 물결 같은 것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쌓아 올린 색들이 투명하고 부드러운 후광과 같은 효과를 내는 거죠.
올해 예술원 회원이 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무거운 짐을 지고 오다가 내려놓고 경치 좋고 바람 부는 곳에 앉아서 쉬는 기분입니다. 예술계로부터 인정받은 것 같아 참 좋고, 화가로서 명예를 얻은 것 같아요. 계속 낮은 자세로 좋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1 권영진 「김형대 : 추상평면 탐구, 반세기의 여정」『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김현형대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2016 pp. 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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