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씩 넘기며 만나는 시공간의 파노라마

ART BOOKS

하도경 기자

한 장씩 넘기며 만나는 시공간의 파노라마
낱장의 공간이 얽히고설키고 쌓여 서사가 되고 세계가 된다. 그림책은 여러 연속적인 장면 안에서 이야기를 구축해간다는 점에서 시공간적 틈을 만들어내며,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문자 텍스트와 그림이라는 시각적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생성되는 ‘통합’ 텍스트로서 독자성을 지닌다. 그림책의 매력은 주어진 요소의 한계를 잘 활용하는 전략과 방식에서 나온다.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기 위해 종이의 물성과 페이지의 넘김 행위, 제본 방식과 색채, 소재, 운동, 판형, 팝업 요소 등 구조적 요소를 최대한 활용해 대화를 건넨다. 구성요소들의 미묘한 변화만으로도 이야기의 색채와 대화의 분위기는 바뀐다. 글을 이해하기 어려운 어린이들이 펼치는 교육용 책 이상으로 그림책이 주는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이번에는 그림책의 용도를 넘어서 그것 자체가 지니는 가능성을 재고하게 하는 책 네 권을 선정했다.

춤을 추었어
이수지 그림 · 안그라픽스
66쪽 · 2024
30000원

장과 장 사이에서 한 아이는 눈을 뜬다. 눈을 뜬 아이는 동그란 점(공)과 지휘봉을 든 채 단 위에 선다. 아이는 이내 공을 던지고 튕기며 펼쳐지는 악보와 풍경 속을 거닐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춤추며 나아간 아이는 여정을 통해 곤충과 물고기, 꽃과 나비, 새 등 온갖 대상들을 만나고 친구가 된다. 그러나 강력한 바람이 불고, 크고 작은 군 비행기들이 하늘을 관통한다. 전쟁은 느닷없이 터지고 삶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묘사한 듯하다. 불꽃놀이가 벌어진 이후 아이는 검은 바다를 건너기 위해 노를 젓는다. 그리고, 마침내 여백과 동시에 다양한 친구들과 다시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아이는 다시 공을 발견했지만, 그것은 미동이 없는 채로 바닥에 놓여 있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일컬어지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의 신작이다. 모리스 라벨의 춤곡인 〈볼레로(Boléro)〉의 구성에 맞춰 아이의 춤과 여정을 그렸다.

볼레로는 스네어 드럼의 반복적인 리듬에 두 가지 같은 선율을 여러 악기가 추가되며 연주하는 단순한 구조다. 희미한 드럼 소리로 시작하지만, 악기가 추가되면서 소리가 켜켜이 쌓이고 커지는 크레셴도 구성이 이어지다가 최후에는 그 소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듯 끝나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 같은 구성에서 그림책의 고전적 서사 흐름을 읽어냈다. 18개의 구조를 차용해 18가지 빛깔의 풍경을 담았다.

이 책에는 어떤 글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에게 자연과 평화, 전쟁과 파괴라는 상반되는 가치를 제시하며 들리지 않는 선율을 짐작게 한다. 책을 펼치면 단순한 선과 색채가 수직으로 뻗으며 장과 장 사이를 연결하고 또 확장한다. 한 면에는 접지 방식을 활용한 잠재적인 공간이 숨어있다. 이곳에도 선율은 뻗어있다. 여백이 많고 단순하게 표현했던 방식은 점차 어두운 먹이 가득한 공간으로 변모하고, 어둠으로 가득 채운다. 선율과 서사 그리고 각 페이지 사이의 운동감을 부여하는 방식에서 독보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존 버닝햄 글/그림 · 이진수 옮김 · 비룡소
50쪽 · 1996
13000원

깃털이 없이 태어난 기러기 ‘보르카’가 어떤 고난을 겪으며 자신의 생에 적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영국의 저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인 존 버닝햄(John Burningham, 1936~2019)이 펼쳐낸 그의 첫 번째 그림책이자, 케이트 그리너웨이상 수상작이다.

책은 기러기 생애 주기에 따라 탄생과 이동이라는 변곡점으로 서사를 구성하는데, 보르카는 의인화되어 있다. 책은 장애가 있는 아이가 사회에 나아가며 어떤 문제와 마주하게 되는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모습까지도 비유한다. 그럼에도 책은 교훈적인 메시지까지 놓치지 않는다. 주인공 자신의 방법으로 길을 찾아 나서면서 보르카는 환대하는 이들과 조우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무엇인지 나아가며 이야기는 문을 닫는다. 동정과 가여움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태도.

버닝햄은 보르카가 딛고 있는 화면을 둔탁한 선과 색채 질감으로 가득 메웠고,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보르카의 형제들과 장면들은 과감하게 드로잉만으로 형태를 구성하는 등 강약 조절을 통해 리듬감을 줬다. 책을 펼쳤을 때 보이는 양쪽의 페이지는 연결돼 있다가 서사적으로 대비를 극대화해야 할 때는 분절되기도 한다. 쉽고 반복적인 어휘를 사용하고, 어린이가 그린 그림처럼 의도적으로 결핍된 부분을 남기는 화풍을 통해 간결한 글과 자유로운 그림체가 심오한 주제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담아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불가사의한 V양 사건
버지니아 울프 글/고정순 그림 · 홍한별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64쪽 · 2024
14000원

책을 다시 읽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일단 책을 꺼내 든 뒤 다시 읽는 것이 다시 읽기의 아주 단순한 방법이겠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누군가가 내놓은 서평들을 읽으며 그 책을 더듬어볼 수 있다. 이는 책과 더 멀어지는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책을 누린 자들을 통해 책을 읽어낼 가능성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름드리미디어에서 기획한 ‘초단편 그림소설’ 역시 그 가능성 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소설과 그림이 만나 작품을 어떻게 폭넓게 감상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탄생한 기획의 첫 발자국으로서 이들은 버지니아 울프의『불가사의한 V양 사건』에 고정순의 일러스트를 붙여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사회 진출이 이뤄지던 시절, 전통적인 여성관과 여성을 향한 사회적 기대가 다양해지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다양한 여성이 존재했다. 이들을 다룬 『불가사의한 V양 사건』을 통해 ‘고독으로 물든 현시대에 어떻게 읽힐까?’ 질문해 볼 수 있다. 타인의 무관심에서 비롯돼 지워진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일러스트 작가 고정순은 버지니아 울프의 주제 의식을 재발견했고, 여기에 그림을 덧붙여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글과 그림의 만남은 책이 지닌 다양한 맥락과 해석 가능성을 수정하고 그것을 달리 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고정순은 서사의 독립성을 위해 장면 일부를 전면에 배치하는가 하면, 본문에 다른 종이를 활용하며 선명한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다. 그림 안에 텍스트를 넣었을 때, 장면으로서의 텍스트는 어떻게 수용될까? 1920~1930년대의 시대상과 현시대를 연결하는 다양한 문을 책에서 찾아보자.

브루노 무나리의 동물원
브루노 무나리 글/그림 · 이상희 옮김 · 비룡소
48쪽 · 2009
23000원

동물원을 그림책에 구현한다면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동물원을 거닐며 동물을 찾아다니는 경험을 책 속에서 재현해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이자 작가, 교육자였던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1907~1998)는 이러한 경험을 평면 종이, 지면 위에 세웠다. 원경과 근경, 연속성과 단절성 등 상반된 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하고 위트가 서린 짧은 글과 다층적 그라데이션의 동물 이미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하나의 동물원 체험기를 선사했다.

역동감과 운동성, 현상의 동존성에 주목하고 속도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했던 미래주의에 영향을 받은 무나리는 책을 통해 탐구를 지속했다. 책의 형식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페이지의 형태를 변주하고, 플립북의 방식을 통해 속력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기본 바인딩의 틀에서 벗어나는 설계로 형태의 고정된 역할과 관념해서 탈피하고자 했다. 책은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만지고, 조작하고,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철학을 공유한 것이다. 그는 책과 독자가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설계함으로써 다양한 미적 표현과 그래픽 디자인의 가능성을 탐구했고,이를 통해 그림책이라는 한계를 확장하고자 했다.

책 읽는 자세란 무엇일까? 단순한 디자인과 구체적인 시각 언어를 통해 깊은 차원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낼 수는 없을까? 오랜 역사를 지닌 책이라는 존재의 전 과정(책을 집어 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콘텐츠들의 조합을 읽어내며 느끼고, 다시 책장을 닫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으로써 인지하게 하도록 노력했던 그의 철학은 전자책 등 다양한 매체로 책을 접하게 된 현시점에 다시 거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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