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공유의 수평적 연결

장승연 미술비평

Special Feature

<연구>와 <나눔>의 공유<장> 만들기

지식의 범주나 경계를 규정할 수 있을까? 정보나 기술을 얻을 때도 지식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인식과 이해같이 형용하기 어려운 깨우침 또한 지식에 해당한다. 물론 이 모호한 단어에도 명확한 지점은 있다. 지식은 배움이든 실천이든 어떠한 ‘과정’을 경유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는 지식의 의미를 단지 고정된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미술 분야에서 목격하게 되는, 지식을 향한 다양한 배움과 나눔의 과정은 나 자신이라는 중심의 내부를 채우는 것을 향하기보다는, 그 외부로 지속되는 순환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유동적인 순환의 과정에는 종종 ‘공유(共有)’라는 이상적인 단어가 따르곤 한다. 공유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대상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정보와 의견, 감정에 이르는 비물질적 상태를 함께 나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상적인 추구로만 들릴 수도 있는 이 단어는 미술계에서만큼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빈번히 일어난다.

이 글에 주어진 임무는 한국 현대미술 현장에서 펼쳐진 지식 공유에 대한 의지와 그 실천의 장면들을 시대적 흐름에 따라 짚는 것이다. 함께 배우고 나누려는 의지가 두드러지는 순간들을 엮어서 일종의 수직적인 연결선을 그리는 것이 가능할까? 사실 이러한 시도가 꺼려지는 이유는 선형적인 서술이 종종 저지르는 일반화의 오류들, 그 과정에서 누락되는 섬세한 차이와 특수성이야말로 더욱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특집 기획의 의도는 바로 그 차이들을 살펴보기 위한 서두를 마련하려는 것이자, 오늘날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한 새로운 지표를 찾아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획 의도에 동참하며, 우선 이 글에는 ‘지식 공유’라는 다소 넓은 주제로 새로운 역사적 연대기를 서술하려는 야심 찬 의지는 전혀 없다는 점을 밝힌다. 그보다는 지식 공유라는 주제에 따라 떠오르는 몇몇 특정한 사례들을 건져 올려서 이리저리 재배치하는 ‘제안’에 가까운 글이 될 것이다.

지금 미술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지식의 배움과 공유의 시도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시기,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사례를 찾는 것은 남아있는 기록과 자료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미술사적 관점으로 볼 때, 1990년대는 이 글이 좇는 미술계 지식 공유의 장면이 가장 뚜렷하게 가시화되었던 흥미로운 시기다. 전시와 출판 기획으로 미술계에 새로운 자극을 던진 현실문화연구를 바로 그 좌표로 삼아보자. 출판모임으로 결성된 현실문화연구는 전시 《압구정동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갤러리아백화점, 1992)와 동명의 단행본을 기획, 출간했다. 전시와 책 모두 압구정동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이미지와 텍스트로 정면 돌파했다. 그 기획의도는 현실의 온갖 이미지가 예술을 능가하는 시대 자체를 그대로 전시와 책으로 드러내고자 한 데 있었다. 범람하는 이미지 시대에 미술의 권위, 나아가 기존 출판의 총체적 형식과 전형성을 위반하는 파격적인 전시와 출판을 선보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문화연구의 활동으로부터 지식 공유의 의지와 그 실천이라는 주제를 선형적으로 훑어볼 수 있는 특정한 관점들을 도출해보면, 우선 출판모임으로서, 현실문화연구의 출판은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관습적인 인식에서 탈피한 새로운 실험에 가까웠다. 텍스트와 도판의 위계적 관계부터 단일한 저자라는 기존의 권위를 공동의 목소리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미술이론가와 평론가, 기획자, 작가부터 다른 분야의 전문가까지 함께한 것이다. 책이라는 결과물은 그 공동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1990년대의 주요 매체로, 이 시기에는 출판에서 웹사이트까지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확장되던 지식 공유 플랫폼에 대한 확장 현상이 두드러졌다. 현실문화연구가 개설, 운영한 ‘스키조’는 국내 최초 온라인 저널을 표방했고, 포럼A가 지면에서 온라인 웹페이지, 특히 악명 높던 ‘게시판’으로 실시간의 발언장을 제공했으며, 작가 및 전시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플랫폼이 유행처럼 앞다투어 개설되었다.

출판을 지식 공유의 주요한 실천 방법론이자 매체로 본다면, 현실문화연구의 활동으로부터 수직의 연대기를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실문화연구 동인들이 그들이 참여했던 연구모임으로서 분과별로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그 저술을 펴낸 미술비평연구회( 1989~1993 ), 그리고 민중미술 계열 이론가인 성완경과 최민이 펴낸 무크지 『시각과 언어』 ( 1982 )를 꼽을 수 있다. 늘상 그러하듯 여기에 진영논리를 덧붙이는 대신 오직 연구와 모임, 출판의 관점에서 시계를 좀 더 앞으로 돌려보자. 그 경우 한국 현대미술사 안에서 전위, 실험, 개념과 같은 용어를 소환하는 ‘한국아방가르드협회’(Korean Avant Garde Association, 이하 A.G), ‘Space and Time’(이하 S.T)의 협회지 형식의 부정기간행물 발간과 전시 병행 활동으로까지 가 닿을 수 있다. 미술단체 A.G는 협회지 AG를 발간하며 미니멀리즘, 대지미술, 개념미술, 테크놀로지 아트 등 1960~1970년대 서구 미술사조와 당대의 경향과 이론을 번역, 소개했다. S.T 또한 개념미술과 관련한 텍스트의 연구, 토론회와 작품 평가 모임을 겸했고 모임의 이름을 딴 부정기간행물을 발간하여 해외 이론 등을 번역 소개했다. 이때 출판은 지식 공유라는 과정을 담아내는 주요한 장(場)인 것이다.

기존 <인식>에서 <이'탈'>하기

‘왜?’라고 묻는 것은 ‘어떻게?’라는 질문보다 때때로 더 넓은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 출판이라는 구체적인 매체적 관점에서 지식 공유 실천의 방법적 모색을 살펴보면, 그 과정에 담긴 지식에 대한 절실함이 포착된다. 앞서 언급한 출판 사례들은 미술을 이해하는 다양한 이론적 기반부터 급속도로 변화해가는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 그에 대한 이론적 규명의 절실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특히 공유의 방식을 통하여 가능한 변화에 대한 의지는 현실문화연구가 수용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라는 연구 방법론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이론적 실천’의 의의를 되짚어 볼 수 있다.

대중문화 및 대중매체의 부상과 함께 일상의 영역이 된 문화적 경험을 하나의 표상체계로 접근하며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현실문화연구의 지식 공유 방법론은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이론적 방법론인 문화연구를 수용한 것이다. 영국의 문화연구는 1990년대까지 서구 전역으로 확산되며 학계의 주요한 연구적 동향으로 부상했고, 국내에도 활발한 포스트 담론의 수용 속에 소개되었다. 물론 당시 문화연구는 각 지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학문, 제도적, 구조와 관점에 따라 변주되는 상황이었지만, 현실문화연구의 방식은 탈중심의 이론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추구한 영국 문화연구의 대표 이론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의 영향을 상기시킨다. 홀은 수많은 문화적 맥락의 상이성과 차이를 고려하여 단일한 문화연구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며 복수형의 ‘Cultural Studies’로 명명하고, 자신의 연구가 개인의 성과물로 수렴되지 않도록 공동저서의 형식으로 출판, 소개했다. 사실상 또 하나의 중심을 이루는 지식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그 중심이 되기를 스스로 해체해버리는 탈중심적 이론적 실천은 문화연구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의 확산 물결 속에 함께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현실문화연구를 비롯한 1990년대 국내 지식 공유의 방식은 포스트 이론과 담론의 수용과 이해 속에서 자연스레 진행된 탈중심적 실천으로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진다.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기의 ‘탈’ 방식은 오늘날 지식 공유의 실천 과정의 기반이 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비엔날레라는 대규모의 제도적 틀 안에서 지식 공유의 의지가 꿈틀거렸던 순간을 상기해 본다.《미디어시티서울 2016》에서 최태윤과 함양아가 각각 기획, 진행한 〈불확실한 학교〉와 〈더 빌리지〉프로젝트로, 이는 각 작가의 프로젝트형 작업이자 비엔날레의 교육 프로그램인 메타 프로젝트로 기능했다. 비엔날레 개막에 앞서 약 한 달간 지원자 중심으로 워크숍 프로그램을 진행한 후, 그 내용을 자연스럽게 전시 일부로 흡수, 확장해 소개하고 별도의 출판물로 정리한 것이다. 특히 두 프로젝트는 워크숍의  표를 교육이나 학습과 같은 용어로 부르기를 지양하고, ‘배움’ 나아가 ‘상호 간의 배움’을 지향했다. 바로 이 점에서 지식의 순환과 공유에 대한 이 글의 주제와 연결된다.

〈불확실한 학교〉에서 최태윤은 탈제도적 배움의 장으로서 그가 공동 설립한 시적연산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의 커리큘럼을 토대로 장애인 예술가 및 관련 활동가를 위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온라인 출판, 웹사이트 및 스토리텔링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장애인의 배움의 권리를 보장하는 자리가 아니라, 장애에 관한 관습적인 이분법적 시선의 전환을 꾀하는 자리로서 그는 대안적 학습의 방법론으로 부상하던 ‘탈학습(unlearning)’을 언급했다. 이 워크숍에서는 그의 설명대로 장애를 포용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탈학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함양아는 비엔날레 속 하나의 ‘환경’으로서 배움의 장을 시도하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 임시공동체 학습마을 〈더 빌리지〉를 기획 운영했다. 워크숍에 참여한 이들은 주로 중 · 고등학교 미술교사, 미술관 교육 담당자,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예술가, 기획자들로, 이 대안적 배움의 자리에서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경계 없이 나눔이 펼쳐지는 이 임시공동체에서 배움이란 창의적인 것이고, 순환하는 것이다.

두 프로젝트는 대안적 방식의 배움을 통하여 삶과 사회, 이를 관통하는 인식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할 수 있음을 시도했다. 이들이 펼친 지식 공유의 의지는 장애나 교육이라는 구체적인 주제를 넘어 사유와 감정, 경험의 공유로도 확장된다. 지식을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닌 함께 나누는 것이고 순환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원래 알고 있던 것을 위반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익숙함보다는 불편함을 끌어안고, 단단해지기보다는 유연하게 흐트러지기를 제안하는 것. 그렇게 낯설음이 증폭하는 순간, 알고 있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앎이란 곧 수평적 연결과 확장, 과정이라는 단어와 조금씩 맞닿기 시작한다.

2018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진행한 ‘탈학습 워크숍’에서 최태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 개념, 가치관의 경계를 발견하고 이에 대해 질문하며, 학습에 대해 각자가 가진 방식으로 함께 나누어보는 시간을 다시 한번 제안했다. 이 워크숍에서는 학습과 탈학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탈학습은 하나가 둘이 되어 나눠지는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학습은 둘이 하나가 되어 합쳐지는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지식의 공유와 순환이란 이처럼 나눠지다 합쳐지고 다시 나뉘는 감각을 느껴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러한 감각을 ‘탈’의 관점에서 짚어본다면, 앞서 언급했던 1990년대의 지식 공유의 실천들 역시 2000년대의 경향과 결은 다르지만, 그 지향점은 어느 정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위계적 질서와 관습적 인식에 도전하는 탈주의 실천으로서 1990년대 공동연구에 기반한 전시와 단행본들 사이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어떤 수평선들을 가늠해 본다. A.G와 S.T가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미술과 끊임없이 수평적으로 닿고자 했던 실천들 역시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오늘날 미술 분야에서 지식의 공유와 순환의 경험을 활발하게 시도하고 또 유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경유해 온 이론적 실천, 대안적 배움, 창조적 학습, 탈학습 같은 거창한 단어들 없이도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술이란 모두의 공유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을 가로막고 있는 어떤 경계로부터의 탈주를 끊임없이 이끌고 있는 이 공유지를,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질문의 수평선으로 연결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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