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파이,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 YPC SPACE

강재영 기자

Special Feature

미술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 모두 모여
STUDIO PIE 

파이(위)와 취미가(아래) 로고가 있는 간판 제공 : 스튜디오 파이

스튜디오 파이(STUDIO PIE) @delicious.pie
https ://studiopie.net/

스튜디오 파이(이하 파이)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13년 우연히 취미 미술 강사를 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대학원 시절 지인 중 한 분이 취미로 미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직장인 몇몇이 공간을 만들었는데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가르치게 되었다. 학부 시절 입시 미술을 가르칠 때와 달리 수강자 각자의 개성과 능력을 끌어내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그러던 차에 수업을 들었던 분들이 이참에 직접 학원을 차려 보면 어떻겠냐 권한 게 계기가 되었다.

어떤 이들이 강의를 듣는지 궁금하다.
연령대로는 20대와 30대가 가장 많다. 직장인도 많이 온다. 특히 전시나 영화관람을 좋아하고, 문화생활에 관심 있는 사람이 다수다. 미술 관련 직종, 예를 들어 출판사에서 디자인 업무를 하는 사람들도 수업을 찾는다. 특정 작가를 따라오는 사례도 있는데, 예전에 노상호 작가가 수업할 때는 이른바 ‘팬심’으로 수강 신청한 사람들도 있었다. 수업 하나를 듣고 흥미가 생겨 계속 수강하는 경우도 있다. 회사에서 필요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있고, 퇴사 후 한두 달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는 이들도 있다. 서울이 아닌 수도권, 혹은 다른 지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강하러 오시는 분도 더러 있다.

최근엔 작가가 되고 싶어 그림을 배우러 오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튜터가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분들을 대할 때 어려움이 있지만 가르치면서도 배울 수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개설되는 수업의 종류는 어떤 것인가? 강사진은 어떻게 구성하는지와 수업료 책정 방식도 궁금하다.
튜터가 자신의 전공이나 다년간 작업을 통해 쌓은 기술을 가르치는 동양화, 채색화, 모형복제, 색연필화, 뜨개 수업 등이 있다. 주로 취미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재료에 대한 호기심과 기술의 특성을 파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내가 진행하는 드로잉 수업도 여기에 포함된다. 기술뿐만 아니라 방향성을 제시하고 스스로 창작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수업도 있다. 새로운 질서, 미술 글쓰기 워크숍, 새롭게 개설한 추상 수업 등이 있다.

내가 주로 진행하는 작품반의 경우는 강의가 아닌 개개인을 위한 맞춤 수업이다. 각자가 배우고 싶은 방향에 맞게 커리큘럼을 만든다. 가벼운 취미부터 작가 지망까지 수강 목적이 다 다르다. 파이에서는 창작활동을 하는 튜터가 수업을 만들고 진행한다. 그것이 파이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동료 작가 중에 수업을 만들고 진행할 수 있는 분들에게 먼저 수업을 제안하기도 하고 이미 워크숍 경험이 있는 경우 파이의 조건에 맞게 조정해서 바로 개설하기도 한다. 혹은 파이로 먼저 제안이 오는 경우도 있다. 모든 수업은 파이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고려하고 튜터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섬세하게 다듬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익성이다. 파이는 외부 제도나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튜터들의 지속가능한 작업 활동에 보탬이 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수업료를 책정하고 있다.

파이 운영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는 데 여러 고민이 있을 듯하다.
일과 작업의 균형이 깨질까 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점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나의 작업 방식이 가르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고 그게 수업의 특색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도 생각해서, 가르치는 일도 작업하듯이 해보려 한다. 실제로 작업할 때 이미지를 생성하는 방법을 설계하는 편인데 가르칠 때도 수강자의 성향을 파악해서 알맞은 방식을 적용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곧 개강할 ‘관찰과 표현 : 추상, 다르게 느끼기’는 2020년 서울시립미술관 참여 프로그램으로 기획했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미술관이 문을 닫으며 실현하지 못했지만, 그때는 작가로서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내 작업의 과정을 공동의 창작으로 구현해보려 한 시도였다. 당시에는 파이에서 이런 수업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연결된 것이다. 앞으로도 이처럼 파이와 작가로서의 내가 자연스레 섞이게 될 것 같다.

파이의 활동은 영리를 표방하고 있지만, 미술인들이 전공하지 않은 다른 재료를 경험하는 감각 공간이며, 소소한 인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정서적 공간으로 보이는데,  새로운 작업을 위한 경험 공간으로 파이를 바라볼 수 있나?
파이와 취미가를 함께 생각하면, 질문과 같은 일이 자연스레 일어났던 것 같다. 취미가는 파이의 공간 일부를 점유하면서 시작했는데 반년 뒤인 2017년에는 파이 위층에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위층에서 전시가 열리다 보니 수강생들도 미술 전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전시를 보고 와서 느낌을 공유하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동시대미술 작가들과 심리적으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취미가를 계기로 알게 된 작가들이 파이에서 토크나 워크숍을 하기도 하고 그걸 기반으로 수업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또 튜터로서가 아니라 수강자로서 수업에 흥미를 갖고 파이를 찾기도 한다.

파이는 작가들이 전공하지 않은 새로운 재료를 경험하고 자신의 작업에 적용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면 작업을 하던 작가가 캐스팅이나 도자 수업을 배우기도 하고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서양화의 기본인 명암법을 배우기도 한다. 민구홍의 ‘새로운 질서’는 시각디자인 전공생들이 많이 수강하는데, 코딩 기술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새로운 글쓰기를 배우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웹에서 시각화하는 등 대학에서는 들을 수 없는 수업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상당히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공간을 운영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꼼꼼하고 신중한 편이라 몰아치듯이 급하게 일을 추진하지는 못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해야 할 일들을 꾸준히 챙기면서 시간을 내어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는 편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서서히 변화가 드러나도록 말이다. 다소 느리지만, 그 덕분에 더 많은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일의 방향을 고민할 수 있다.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면?
여기서 오랫동안 수강한 분들은 내게 각별한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튜터 중에는 학생 때부터 시작해서 현재 작가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의 성장을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고 꾸준히 좋은 수업을 진행해 줘서 감사하다.

수업 장소로 활용되는 스튜디오 파이 공간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제도 안팎에서 달라졌으면 하는 것은?
좋은 수업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 튜터와 수강자 서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되면서도 꾸준히 모집이 될 수 있도록 수요가 있어야 하고, 타 유사 공간이나 미술대학에서 진행하는 수업과는 다른 차별성도 필요하다. 어떤 수업은 매 기수마다 트렌드를 반영하여야 해서 튜터가 부담스러워했고, 어떤 수업은 튜터가 대학 강의 방식에 익숙해서 그런지 비전공자 수강생들이 어려워했다. 어떤 수업은 정말 흥미로운 콘텐츠인데 한국에서는 수요가 너무 적었다. 몇 기만 진행하고 종료한 수업이 제법 있다. 그래도 만들어 보고 싶은 수업이 더 많다. 튜터로 섭외하고 싶은 작가, 구상 중인 수업이 머릿속에 많은데 몸이 하나라 아쉽다.

앞으로의 수업 방향성은 취미로만 치중하지 않고 ‘대학시절 이런 수업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싶은, 기존의 제도에서는 소화하지 못하는 부분을 겨냥하려 한다. 인터뷰하면서 든 생각인데 만약 파이와 같은 대안적인 미술 교육이 성공한다면, 미술 대학이 좀 더 분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파이의 앞으로 10년은 어떤 모습이 될까?
올해가 10주년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도 파이에서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고 고민을 나누며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 작가로서의 경험도 쌓이면서 점점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래서 ‘티타임(가제)’이라는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튜터와 수강생의 깊이 있는 대화 시간을 주선하는 건데, 창작 활동을 지망할 때의 막연함과 불안을 나 또한 잘 알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되는 왕도는 없지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동료나 선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동료들에게, 또 미래의 수강생이 될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올해 홈페이지의 소개글을 바꾸며 파이의 방향성을 다시 생각했다. 나는 파이에 오시는 분들이 미술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르길 바란다. 미술의 역할이 바로 그런 힘을 기르는 데에 있다고도 생각한다. 특히 현대미술은 단순히 ‘좋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왜 좋은지 반성하면서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감상뿐만이 아니라 뭔가를 창작하는 행위는 더욱 그러하다. 자신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술로 시작했지만 저마다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영향이 남길 바란다.

동료 작가들에게는 미술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길 권하고 싶다. 입시 미술 강사 경험과는 달리,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술을 가르치면 오히려 배우는 점이 많다. 우선 미술은 가르치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하고 있는 미술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된다. 어려운 미술 용어를 쓰지 않고 쉽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어렵듯 말이다. 나도 그들이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내 작업을 비롯한 동시대 미술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파이의 수업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고 작업활동에 경제적인 보탬일 수도 있다. 이런 모델이 창작자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

수평적 기술문화를 만들자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

맥박 속도 기록 장치,〈하트-빛(HEART BEAT)〉워크숍
사진 : 현준영 제공 :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 @womanopentechlab
https://womanopentechlab.kr/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의 시작이 궁금하다. 공간을 열고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 모임의 취지와 목표는 무엇이었나.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이하 기술랩)을 운영하고 있는 전유진이다. 영화음악을 시작으로 사운드아트와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업을 해왔고, 서울익스프레스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7년에 문을 연 기술랩은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느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미디어아트는 최신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장르지만, 그 안에서 젠더 편향성과 기술 관점의 부재를 깨달았다.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기술문화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 기존의 편향된 기술문화에 수평적이고 대안적으로 접근하자는 취지에서 ‘여성을 위한’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개인적인 경험도 중요한 계기였다. 을지로라는 남성 중심적 환경에서 창작자로서 겪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고민을 가진 여성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선언적인 의미로 시작했다.

첫해에는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와서 지식을 공유하리라 기대했지만, 대부분 기술에 해박한 남성들이 모였다. 내가 원했던 것은 기술에 두려움을 가진 이들이 기술을 흥미롭게 느끼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기에, 2년 차에는 방향을 수정했다. 비남성 젠더를 대상으로 소규모 기술 연구 모임을 시작했고, 수평적인 기술문화를 경험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기술을 배우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개설되는 워크숍의 종류도 궁금하다.
〈기술 연구 모임〉은 2017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다. 서울뿐만 아니라 광주와 부산에서도 열었다. 6개월 동안 9명의 참여자가 꾸준히 활동하며, 부산 예술공간 영주맨션에서 결과 전시를 열 예정이다. 대표적 워크숍으로〈저항하는 기술 The Resisters〉가 있다. 전기, 조명, 용접, 3D 모델링 등 창작에 필요한 기술을 8주간 집약적으로 배운다. 전기도, 조명도, 용접도 작품을 완성하는 데 유용하나 학교에서 배우긴 어렵다. 유튜브나 다른 자원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함께 배우고 나누는 경험이 기술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자신감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작년 광주에서 처음 시작한 〈신디사이저 클럽〉은 반응이 좋아 올해 부산에서도 진행하고 있다. 전자음악을 탐구하는 모임으로, 6주 동안 신시사이저(Synthesizer)로 만든 소리를 발표하고 쇼케이스를 연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기술을 통해 새로운 창작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의 참여자는 대부분 미술이나 예술계에 종사하는 창작자들이다. 강사진은 프로그램마다 다르게 구성되며, 실질적인 창작 활동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중심으로 기획된다.

워크숍을 운영하면서 태도에서 달라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느낀 기술의 젠더 편향성이나 미디어아트에서의 기술 관점의 부족함을 빨리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선언적인 형태로 워크숍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선언만으로는 지속적인 커뮤니티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참여자의 요구를 파악하고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기술랩 운영과 함께 창작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어려운 점은 없나.
처음에는 작업과 기술랩 활동을 명확하게 구분하려 했었다. 내 작업은 작업이고, 기술랩 활동은 시민으로서의 사회 참여라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그 구분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예술이나 워크숍 활동도 일종의 교육이고, 예술과 교육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예술을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과 구분 짓는 것이 오히려 예술의 정의를 한정 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굳이 작업과 이런 활동을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생계와 관련해서도 초기에는 기술랩을 운영하면서 자원을 투자하는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교육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미술관 워크숍 등을 맡아 진행하며 기술랩이 더 알려지고, 교육의 장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생계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생계와 창작을 모두 이어가기 위해 여전히 음악 작곡일과 미디어 아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묻는데, 사실 내년 계획조차 세우기 힘들 정도로 항상 불확실한 상태다.

나는 사실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회의론자에 가깝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활동을 시작했고, 그렇기에 ‘함께하자는 판타지적 실천’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변화는 ‘판타지’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실천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내가 하는 활동의 본질이다.

이곳이 미술인들에게 새로운 작업을 위한 경험공간이자, 인적 교류가 있는 정서적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나? 지식 공유나 배움-탈배움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나?
사람들이 워크숍에 참여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기술을 배우고 싶은 갈급함으로 오고, 또 다른 이들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기술을 다루고 싶어서 온다. 이렇듯 다양한 요구와 내 방향성을 조율하는 것이 좋은 워크숍의 핵심임을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나도 많은 배움을 얻었다. 〈기술 연구 모임〉도 그 과정에서 발전했다. 참여자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프로그램을 조정하게 됐다. 각자의 주제를 다루면서 공통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피드백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결국, 워크숍은 서로 배우는 장이자,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맞추어가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미술계에서 함께 한다는 경험을 쌓는 게 어려워 보인다. 어릴 때부터 경쟁을 당연하게 배우다 보니, 많은 이들이 동료이자 친구 이전에 이미 경쟁자로 느끼는 것 같다. 또한, 미술계는 프리랜서가 대부분이라, 조직이나 체계가 없기에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게 어렵다.

〈저항하는 기술 The Resisters〉에서도, 기술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또래 동료들과 연결되는 경험을 중요히 다뤘다. 참가자들이 지원 동기를 말하며 또래들이 졸업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지원했다고 했을 때 놀랐다. 함께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나는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동료 예술인들과의 관계에서 큰 위로와 힘을 느꼈다. 동료들이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이 장을 만들어가는 동반자로 여겨지면서, 창작이 덜 외롭고 편해졌다. 젊은 미술인들도 이러한 경험을 나눴으면 하는 바람에서, 함께하는 커리큘럼뿐만 아니라, 수업 후에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꼭 만든다. 인적 교류를 위한 긍정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점점 강하게 느낀다.

기술랩을 운영하며, 작가의 성장을 지켜보게 된다거나, 기술랩을 좋아하는 이들의 유대-문화가 형성된다거나, 혹은 기술랩 활동 이후 미술장 내에서 변화했다고 느껴지는 게 있을까.
처음엔 나조차도 공동체 활동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부정적인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술랩에서는 함께 할 때 더 즐겁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다. 스크루드라이버 사용법을 배우는 것도 같이하면 훨씬 재미있다. 여기서 알게 된 친구들과 여전히 연락하며 무언가를 같이 하고, 행사에도 함께 다니는 걸 보면 정말 뿌듯하다.

기술랩이 미술계에 변화를 일으켰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기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직접 창작을 하거나, 기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관점을 담은 작품을 만드는 젊은 창작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신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기술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미디어아트 작품도 많아지고 있다. 기술에 대한 관점이 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기술랩에서 워크숍을 경험한 작가들이, 전시나 공연만이 작품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워크숍을 통해 작품을 발전시키고 피드백을 받는 법을 깨닫고 간다. 참여자들이 워크숍을 기획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사람들을 모아 대화와 교류를 만드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활동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기술랩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공유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고민을 나누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것이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공유가 내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더 확고하게 만들 기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기술랩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무언가 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나.
시작할 때는 페미니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술랩을 운영했지만, 한국에서 젠더 이슈를 다루고 이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단어가 불러오는 이분법적 구분이 오해를 일으켰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굳이 ‘여성’이라는 명칭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기술 소수자’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모두를 위한 기술’이라는 표현 역시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모두 기술을 배워야 한다기 보다는, 이미 우리가 매일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기술에 관한 생각을 키워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프로그램 대부분은 무료로 진행했는데, 지원사업 덕분에 가능했다. 만약 유료로 진행했더라면, 기술에 대한 심리적 장벽에 더해 수업료가 부담될 것이다. 이러한 창작자와 공생을 도모하는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재밌는 미술을 계속-같이-다르게-새롭게 하는
YPC SPACE

와이피씨스페이스(YPC SPACE) @ypc.seoul
https://yellowpenclub.com/

온라인 활동을 하던 YPC가 오프라인 공간을 열고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유지원 시작은 글쓰기 모임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 외에도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미술 현장의 일을 글로 나눴다. 2016년엔 이렇게 모인 글을 공유할 플랫폼으로 웹사이트를 만들고 ‘옐로우 펜 클럽(이하 ‘YPC’)’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던 중, 2019년 이태원 ‘오퍼센트’에서 석 달 동안 공간을 사용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서 YPC에서의 경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우리 셋뿐 아니라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과 모여 함께 글을 쓰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권정현 우리가 ‘오퍼센트’에서 진행했던 글쓰기 워크숍을 스튜디오 파이가 눈여겨봤고, 파이에서 워크숍을 해보자고 제안해 왔다. 파이에서 여섯 번의 워크숍을 진행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었다.

유지원 각자 바빠지면서, 계속 만날 방법을 고민하는 중에 물리적 공간이 있어야 우리 이야기가 쌓이겠단 모두의 합의가 있었다. 2021년 겨울, 모임 공간을 찾을 때, 우리의 핵심은 프로그램, 특히 함께 글을 쓰는 것에 있었다. 찾다 보니 전시를 겸할 수 있는 지금의 공간을 만들게 됐다.

이아름 다른 미술공간과 차별화되는 정체성은 ‘프로그램룸’에 있다. 공간이 넓지 않지만 일부러 벽을 쳐 만들었다. 배우고 글쓰는 콜렉티브로서 우리 역량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 찾는 사람은 주로 어떤 이들인지, 어떤 고민에서프로그램을 만드는지 궁금하다.
권정현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이들이 찾아오지만, 대체로 작가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초기에 진행된 워크숍은 3~5회에 걸친 다회차로 진행됐고, 과제를 제시해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했다. 그래서 방학 중인 학생들이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다. 처음 ‘오퍼센트’에서 모임을 열때는 명확한 커리큘럼에 따르기보다는, 공간을 점유하고 우연한 만남을 기대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때의 정신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없어도 사람들을 맞이하고,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공간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

유지원 프로그램이 전시로 구현되는 경우도 있다. 전시 《바깥 일기》(2022, 권정현 기획)와 《교착 상태 : 아카이브적 여정》(2022, 유지원 기획)도 워크숍에서부터 시작됐다.

이아름 신청자수와는 상관없이 내가 파고들어 함께 얘기하고픈 싶은 주제를 찾는 것이 보람이었다. 더불어 YPC의 시작점이 글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글쓰기 워크숍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 하나의 글을 만들기 위해 소통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지금의 내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도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유지원 어떤 사람이 참여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야마나카 수플렉스’처럼 우리와 비슷한 취지와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떤 이든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YPC에서 진행하는 모임의 주제나, 방향성은 무엇인가? 이곳에서 지식 공유나 배움탈배움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가. 혹은 이를 생존 모색이라 볼 수 있을까?
권정현 교육이라기보단 자연 발생적 활동을 함께하자는 생각이 컸다. 공간을 운영하고, 찾는 이가 많아지며 약간 변했지만, 여전히 그 본질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교육 서비스는 아니다. 미술 맥락 안에서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즘 비슷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는데, 이와는 다르다고 본다. 스페이스는 미술 실천과 탐구의 장이다.

유지원 우리 활동은 명확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다. YPC도 그랬듯, 활동 자체로 우리 정체성을 증명해 나가고 있다. 단순히 교양 서비스가 아니라,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작은 균열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우리는 각자 학문적 배경이 있지만, 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스스로 연구하고, 건강하게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 모임은 그런 중간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미리 준비된 지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주제를 탐구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 활동이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생존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수업료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 모임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생존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이아름 주제와 방식에서 이론과 실천의 중간지대를 지향하는 것 같다. 학술 현장에서는 다뤄지지 않는 주제들, 혹은 직관적으로 관철하기에는 토대가 필요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 프로그램 진행자도 ‘선생님’보다는 자신의 연구를 구축하는 과정에 있는 이로 고려하는 편이다. 미완의 아이디어가 스페이스를 통해 발전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발화하는 것을 기대해 본다. 우리가 교육자 입장이라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얻어가는 것이 더 많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공간의 대표 프로그램이 된 〈귀여움 연구 모임〉도 개인적으로 주제를 탐색하고 동기부여를 위해 시작했는데, 참여자들과 소통에서 기대 이상으로 많이 배우고 논의를 확장 심화할 수 있었다.

〈대화 : 인도네시아 콜렉티브 리서치〉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공 : YPC SPACE


공간에서 하는 일이 미술계 내부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지점이 있다면?

권정현 미술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지속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가 있다. 기관이나 아카데미에서 다루지 못하는 지식과 실천을 통해 틈을 만들고 있다. 이로써 미술계 내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지원 국내외 미술계 내 콜렉티브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3년째 하고 있다. 해외 초청 인사와 소규모 토크를 자주 열었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보며 우리 역할의 중요성을 느꼈다.

권정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설계와 맥락이 필요하다. 토크를 통해 사람들 간의 연결이 이루어지려면, 세심한 연출이 필요하다. 확실한 건, 만남과 대화 같은 방식의 지식 공유와 배움은 재현할 수 없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활동들이 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열었던 인도네시아 콜렉티브 대화 모임에서도 찾아온 이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아 뒤풀이 장소로 함께 이동하고, 그곳에서 사사로운 얘기를 나누는 등 그 순간만의 특별한 교류가 일어났다.

유지원 우리가 만드는 분위기-에너지가 공간에 축적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그 순간들이 항상 특별하다. 또한, YPC 셋의 합이 잘 맞기에 이런 흐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획자로서 이러한 프로그램이 전시와 다른 점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유지원 만약 프로그램의 방식이 전시에 적용되면 어떤 모습이 될지 고민한다. 얼마 전 열린 소민경 《리플릿 드로잉》속 작품은 작가의 주된 작업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는 주목하지 않을 작업을 발굴하고 보여주는 것이 여기서는 가능하다. 젊은 작가뿐 아니라 실험이 필요한 이에게 열린 공간으로 존재하길 바란다.

권정현 전시와 프로그램은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 YPC의 전시는 일반적인 전시와는 다르게, 작가의 기존 작업에서 색다른 시도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전형적이지 않은, YPC만의 특색을 담은 전시를 계속해서 기획하려고 한다.

이아름 전시와 프로그램이 함께 벌어지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것도 YPC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콜렉티브 리서치 전에서는 여러 부대 프로그램들을 함께 진행하면서 우리의 특색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전시 자체를 잘 만드는 게 우선이겠지만 전시의 주제를 심화-확장할 수 있는 연계 프로그램을 기획해보려 한다. 이것이 또 다른 만남과 시도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공간을 운영하며, 미술계 안팎으로 개선되었으면 하는 점이 있는가.
유지원 주요 제도권 공간에서 우리 웹사이트를 보고 젊은 작가 리스트를 확인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식 협업을 제안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건강한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정현 제도 안팎의 역할이 혼재되어 있어, 외부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 않는 한국의 미술 생태계도 문제다. 기관이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하고, 그 성과를 기관이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활동이 제도권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유지원 영국 콜렉티브 더 화이트 퓨브(The White Pube)는 우리와 출범 시기와 활동방식이 비슷하지만, 그들은 지금 저명한 미술상 심사위원이나 기관의 자문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다른 도시에서 콜렉티브가 대형 전시 예술감독이 되거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례가 많다. 이에 비해 서울 현장에서는 ‘작가’가 아닌 콜렉티브의 기획 및 지식 생산 활동이 그 기여도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권정현 교육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최근에는 기관에서도 6~10명 규모의 소규모 모임이 종종 열린다. 공적 자금으로 운용되는 대시민 기관에서 우리 같은 소규모 공간에 적합한 형태의 프로그램이 혼재되어 일어나는 상황이다.

10년 후 YPC는 어떤 모습이 될까?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권정현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장기적인 비전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웃음). 즉흥적으로 주제를 받아들이며 활동을 이어왔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바로 실행해왔다.

이아름 사실 이렇게 되리라 생각지 않고 했던 것들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다(웃음). 도약도 있었고, 정체기도 있었다. 앞으로도 비슷하지 않을까? 명확한 청사진보다는 당면한 상황에 충실한 것이 우리의 방식인 것 같다.

유지원 10년 동안의 활동도 돌아보면 결국 그 당시의 고민과 삶의 맥락에서 나온 것들이다. 우리 활동은 각자의 삶과 미술계에서의 고민이 자연스레 녹아 들어가는 형태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며, 언제나 콜렉티브 멤버이자 친구로서 삶의 지점들을 함께 나눌 것이다. 상황마다 우리는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시의적절한 활동을 할 것이다. 우리의 방향이 변할 수 있지만, 그 변화에는 항상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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