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석 Jaeseok Lee
이재석: 링커, 분해/
병치에서 결합/연결로
ARTIST
이재석/ 1989년생으로 대전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작가는 군대에서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체와 물체의 구성요소가 지닌 유사성을 주제로 한 작업을 수년간 지속해 왔다. 목원대 서양화과 학사와 동대학원 미술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챕터투(2023),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2021 )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갤러리바톤(2023),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2022), 서울대학교미술관(2022), 스페이스K(2020), 대전시립미술관(2019) 등의 기획 전시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캔버스에 아크릴릭 193.9 × 112.1cm
이재석: 링커, 분해/
병치에서 결합/연결로김주원 | 큐레이터, 상명대 겸임교수
〈Linkage(○―○―●―○―○)〉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 × 130.3 cm 2024
의인화된 사물과 기계화된 신체의 분해, 해체, 그리고 이것들의 낯선 병치로 초현실적 풍경을 펼쳐왔던 이재석의 회화는 최근 들어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최근작〈Linkage(○―○―●―○―○)〉(2024)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겹겹의 산을 화면 전체에 올오버로 그린 회화〈Linkage(○―○―●―○―○)〉는 작가가 고수하던 고정된 단일시점에서 벗어나 복수의 위치, 복수의 시점이 동시에 공존하는 화면 (mapping)으로 전면화되었다. 모든 위치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도형식의 화면이다. 그래서 화면은 납작하게 패턴화, 단순화된 산과 골짜기, 하천 등의 지형으로 위계 없이 이루어져 추상적 회화처럼 보인다. 한편, 화면 아래 근경은, 마른 흙바닥과 여름풀 꽃 한 송이를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어떤 생명도 자랄 수 없는 척박하고 마른 흙, 수분 없는 땅에서 힘겹게 홀로 핀 개망초는 멀리 보이는 산골짜기 하천 등의 집단적 짙은 푸르름 사이로 강조되고 있다. 이재석 특유의 장기인 트롱프뢰유 기법의 활용 역시 여름풀 꽃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배가시켜 화면은 더욱 신비롭고 초현실적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 비행기에 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종류의 그림이었다. 기구를 타고 구름 높이 위로 올라갈 때 … 고요한 파란 하늘이 얼핏 스치는 안개 사이로 보이는 … 높이까지.”
무한히 단조로운 평면과 비장한 여름풀 꽃의 정교한 묘사가 대비되는 화면 속 공간은 작가에 의해 고안되고 구성된 대안적 현실이자 장소이며 우리가 고투(struggle)하며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은유다. 그러고 보면 컴퓨터 게임기를 켜면 언제고 마주할 수 있는 또 다른 현실, 가상의 공간, 장소와 같다. 비행기 탄 사람만이 볼 수 있고 그릴 수 있는 이재석의 산, 골짜기, 하천 등의 지형으로 납작하게 맥락화된 공간은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 (linkage)된 기호 (○)와 기호(○)로 인해 무한히 펼쳐질 월드 와이드 웹(www, 이른바 web)이라는 또 다른 현실과 장소를 가시화한다.
잘 알다시피 1989년 이래 열린 웹에 의한 가상공간은 스위치를 켜고 버튼 혹은 엔터 키를 누르면 여지없이 열리는 또 다른 현실이자 장소이다. 초현실주의 미학을 활용해 과장된 성적 이미지와 공상과학적 형상, 컴퓨터 게임 이미지는 가장 손쉽게 마주할 수 있다.
이재석은 자신이 중학생 시절 게임을 만드는 프로그램에 오랜 시간 몰두했던 경험이 있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인디-게임 회사로부터 제안을 받은 이재석은, 게임 속의 배경, 맵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도트를 찍어 만든 텍스처 타일을 가상의 그리드 위에 배치하고 그 위에 레이어를 만든 후 나무나 풀, 바위 등과 같은 오브젝트를 배치하는 매핑 제작 방식은 항공사진 등으로 만드는 지도제작 방식과 유사하다. 당시의 이 경험은 물리적 공간을 묘사하는 미술가들의 원근법적 관습을 활용하되, 웹/게임에서만 열리는 완벽한 3차원적 환영과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모티프의 결합을 뚜렷하게 대조시켜 화면의 미학적 충격 효과를 증폭시키는 자신의 화면 구성 방식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캔버스라는 화면 안에서 나의 시각으로 바라본 가상의 공간과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는(작동하는 듯이 보이는) 이미지들을 보여줌으로써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2 이재석의 전략적 의도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서 이재석은 화면 속 상징적 모티프로서의 복수 혹은 단수의 자연 혹은 사물 등을 기호로서 좌표화한다. 이들 기호는 작가에 의해 의미 혹은(점)선으로 연결되고, 작가는 현실과 가상, 세계와 세계를 구성하는 링커(linker, linkage editor)가 된다. 구심으로서의 기호(●)가 끌어들이는 중력은 화면 속 지형을 전방위로 연결(―)하는 기호(○) 의 반복적 등장으로 가시화 된다. 마치 거미의 거미줄처럼, 별과 별자리처럼 세계는 그렇게 끝없이 열리고 있다. 전지적 링커 시점으로 맵핑되어 구성되는 게임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현실 세계와 동질적이기도 하지만 이질적이기도 하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시각 반경은 게임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게임 속 화면 이미지의 특성은 이재석 회화 화면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재석의 회화 대부분은 세계의 골격 혹은 모티프의 배치를 결정짓는 ‘규제적 선’들, 즉 그리드 (Grid)가 엄격하다. 초기작인〈fragment〉(2016),〈나열된 부품들〉(2018),〈신체 덩어리들〉(2018)은 물론이고, 링키지 기호가 등장하는 최근 작업〈Linkage(○―○―●―○―○)〉을 포함하여〈사정거리_3〉(2021),〈이어진 섬〉(2022),〈소나무〉(2022),〈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2022),〈별자리_2〉(2023) 등도 예외는 아니다.
〈fragment〉,〈나열된 부품들〉,〈신체 덩어리들〉은 마치 프라모델의 낱낱의 부품과도 같은 조각, 분해된 인간 신체와 기계/도형들로 화면을 채우는가 하면, 신체는 기계/도형으로, 기계/도형은 신체로 변환되었다. 이와는 달리 〈사정거리_3〉을 비롯한〈이어진 섬〉,〈소나무〉,〈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별자리_2〉등은 분해, 해체, 배열되던 여러 모듈 대신에 서로 관계짓고 연결되는 숫자, 문자, 별, 동그라미 등의 기호가 등장한다.
전자의 경우, 사각 프레임 화면 안의 신체와 기계/도형의 수평적 배열에서 보이는 모듈적 규칙성은 두 가지를 함의한다. 첫째는 인간 신체와 사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며, 둘째는 산업화, 국민국가화, 정보화 등 근대적 시스템의 매혹적인 질서가 지닌 모순의 인식이다.
이재석은, 작은 부품들의 구조적 완결이 총의 기능을 강화하듯이 신체 내부 여러 장기의 정상적인 작동만이 건강한 신체를 강화함을 주목하고 있다. 근원적으로 전혀 다른 총과 인간 신체는 작가에 의해 구조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세계로 유비 (analogy)된다. 그래서 ‘나열된 부품들’과 ‘신체 덩어리들’은 같은 위계에서 분해되고 잘린 채 배열되고 있으며, ‘작업실 풍경’ 속 ‘자화상’은 붉은색 도형/도구의 집적물로 대체되고 있다. 이렇듯 이재석의 일군의 회화는 총과 도형/도구/기계 등으로 대변되는 ‘사물’들을 의인화 내지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전면화하면서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시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재석의 회화가 지닌 초현실적 뉘앙스의 환영적인 면모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이미지, 즉 현실의 병치, 그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관〉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 × 130.3cm 2021
한편, 이재석은 ‘집단’이나 ‘전체’라는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규율, 통제, 관리 시스템 등이 표면화한 매혹적 면모 뒤편의 ‘개인’ 혹은 ‘부분(fragment)’을 주목한다. 화면 안의 크기와 형태가 다른 신체의 부분들은 작가 자신의 신체 관절 혹은 특징적 신체 구조의 부분들을 참고하여 변형, 조각된 신체 덩어리들이다. 사각의 프레임과 그리드의 그물망에 순응적인 이 신체 덩어리들은 비정형의 조각이지만 매끄러운 살갗을 지녀 그로테스크한 환각적 장면을 유도하기도 한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온 근대적 시스템의 그리드적 실천이 한편으론 악몽처럼 개인과 그 일상의 차이를 폄하하고 폐기하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랫 동안 많은 이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어 온 근대적 시스템의 모순을 작가는 냉소적이지 않고 중성적으로, 비참한 현실이지만 아름답고 숭고한 초현실, 비현실적 환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재석은 초현실주의자들의 ‘회화를 넘어서’는 모든 기법들, 즉 콜라주, 프로타주(문질러서 만든 이미지), 그라타주(긁어서 만든 이미지) 등과 의미적으로 유사하거나 형식적으로 다른 기법을 채택하면서, ‘회화를 넘어서’려 했던 초현실적 회화들과는 달리 ‘회화다운’ 회화를 지향하고 있다.
주로 캔버스 위의 유화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온 작가는 화면 안에 의도적으로 모순적인 이미지들을 콜라주 했다. 일반적으로 모순적인 이미지들의 병치는 심리적 동요와 불안, 그로인해 열려진 환상적 환영의 세계를 충동적으로 개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재석의 경우는 다른 차원에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캔버스천 뒷면에 아크릴 물감으로 여러 번 덧칠해 물감 본래의 광택을 최소화한다. 고전적 회화 기법과 친밀한 연대를 보이는 듯한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실험이라 할 것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의도적인 광택의 최소화는, 모순적 공간을 동화하는 깊이있는 차원의 색채를 특징적으로 얻어내고 있다.
이재석은 최근, 물기 없는 되직한 흰색 수성페인트로 서너 차례 반복적인 밑칠로 불균등한 두께를 만든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이때 회화의 표면은 되직한 페인트의 반복적인 밑칠로 인해 계산되지 않은 불균등한 텍스처를 지니게 되고 불안하고 우연한 투시법이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다.
고전주의 회화와 컴퓨터 게임 이미지의 견고하고 안정적인 그리드를 고수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화다운’ 회화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러한 기법적 시도들은 고전적 회화와 또다른 현실과 세계를 확장하는 현대사회의 정보시스템에 대한 이재석의 경의와 응답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재석 회화의 미덕을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아방가르드의 시끄럽고 공격적인 실험에 의해 폐기되었던 회화의 전통적 가치의 복구 가능성을 웹에서 생성, 전송되는 이미지에서 찾아 ‘회화다운’ 회화를 논증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조립 설명서〉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5 × 112.1cm 2021
〈Dancing〉
캔버스에 아크릴릭 42 × 30cm 2018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8 × 227.3cm 2022
한편, 이재석의 회화 화면이 보여주는 특징은 여전히 ‘공통점이 없는 두 현실의 병치 혹은 결합’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20세기초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시구 “잘려진 테이블 위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을 떠올리게 하는 이재석의 아름다운 (깊이의) 회화는 분명 초현실적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예컨대, 프라모델 같이 단편화, 부품화, 사물화된 살덩이들과 붉은 피가 도는 혈관을 지닌 부품, 도구, 사물들이 한 화면 안에 단독으로 혹은 병치되고 있는가 하면, 사물이자 신체이고 신체이자 사물인 해골, 잘려진 신체와 연결된 도구, 구두, 나무 바닥, 흰 천, 도형들은 형식적 내용적 단절 혹은 연결과 재구성을 통해서 배치되고 있다. 최근 별 모양 혹은 흑백의 동그라미, 빛으로 터지는 흰 구, 심지어 게임 속 움직이는 버그 등의 기호가 등장하는 화면 역시 의인화된 자연과 사물을 다양한 현실과 방식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은 외견상 서로 무관한 두 개의 현실이다. 즉 사물 vs 신체, 도구/도형 vs 피/혈액, 돌/숲(자연) vs 해골/마네킹(신체/사물), 자연 vs 기호, 별 vs 곰, 해 vs 달 등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별개의 현실이자 실존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고전적이지만 불안한 투시 원근법과 중력으로 화면 안에 배치되었다. 이렇듯 이재석의 생경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들의 불안한 병치와 비이성적인 서사의 본격적인 출발은 그의 군복무 시절의 일련의 사건과 경험이었다.
작가에 의하면, 그는 학부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군복무 시절 훈련을 받던 중 오른쪽 발목 복숭아뼈가 깨지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 셋으로 조각난 뼈를 보철물과 나사로 고정시킨 수술은 작가에게 생경한 충격과 다른 현실/실존을 일깨워 주었다. 냉기가 섬뜩한 스테인레스 수술대 위 겁에 질린 채 누워있는 다친 신체, 깨진 뼈의 접합을 위해 신체 안에 삽입된 기계 도구와 나사, 수개월 동안 신체 속 자신의 뼈를 대신한 보철물이 주는 지속적인 이질감은 이재석 회화가 서로 다른 두 개의 현실/실존을 임의적으로 병치 혹은 결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름다운 초현실적 서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와 사물의 병치 혹은 연결에 대한 관심의 촉발은 애초에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 1818, 1823)에서 비롯되었다. 이재석의 작업세계에 대한 가장 최근 비평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소설 속 괴물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소나무〉 캔버스에 아크릴릭 90.9 × 65.1cm 2022
“ 놈의 사지는 적당히 균형이 맞았다. 하나 나는
그것만이 아니라 놈을 아름다운 용모로 만들려 했다.
아름답게! … 하지만 이처럼 다채로워 보이는 모습은
희끄무레한 눈구멍에 자리 잡은 그 눈구멍과 거의
비슷한 빛깔의 축축한 눈과 쭈글쭈글한 피부, 그리고
불거진 입술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섬뜩하기만 했다.”3
프랑켄슈타인의 소설 속 서사는 사물/생명없음 vs 인간신체/생명의 절대적 대립을 상정하고 죽은 자의 뼈로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괴물을 만들었다. 이 괴물 이야기는 비인간과 인간, 사물과 신체라는 ‘공통점이 없는 두 현실의 병치 혹은 결합/연결’을 시도하는 이재석의 회화를 상기시킨다.
부러져 죽은 나무토막을 신체 장기처럼 묘사한〈형체〉연작이나 같은 나무토막에 밝게 빛나는 성좌를 그려 넣은〈별자리_2〉는 숫자로 번호매기기, 알파벳과 기호로 나열하기 등과 같이 배열과 결합/연결이라는 통합에의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방식일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2023)은 들판 위에 바람으로 일렁이는 파도 같은 구름 속에 해와 달이 겹쳐져 별처럼 빛난다.
화면 상하, 좌우 등으로 대칭을 이루는 공통점이 없는 두 현실은 일정한 간격으로 병치되던 순간에서 결합/연결되는 전회의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링커 이재석에 의해서.
〈자화상 3〉130 × 8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8
〈겹쳐진 텐트〉 162.2 × 130.3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20
갤러리바톤에서 개최된 개인전 《Exceptionally Complex, Yet Elegantly Engineered》에서 선보인 〈형체〉 연작 2023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