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9.3~2025.3.3
Exhibition
샤오루〈15번의 총성… 1989년부터 2003년까지〉(사진 왼쪽)
디지털잉크젯프린트, 총탄으로 구멍을 뚫음 160 × 69.2cm(4 ) 2003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퍼포먼스 및 설치의 기록 2003(2024 인화)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2024
제공 : 작가 ⓒ 샤오루
아시아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와 연대양은희 | 미술사
이 전시는 문화적 ‘서발턴’으로서 아시아
여성 작가의 정체성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설
때 발견되는 공통의 주제들과 연대감을
확인시켜준다
이번 전시에는 일본 작가 타나카의 기념비적인 작품 2점이 전시됐다.
1956년 제2회 구타이 미술전에서 90개의 전구와 100여 개의 진공관을 연결해 만든
〈전기 드레스〉(사진 오른쪽 )는 안전상의 이유로 당시 사진으로 대체됐다.
타나카 아츠코 〈지옥의 문〉(사진 가운데 ) 캔버스에 비닐, 아크릴릭
331.5× 245.5cm 1965~1969 오사카국립국제미술관 소장
2009년 7월 말부터 8월까지 세계 각국에서 온 여성작가들이 인천아트플랫폼에 모여들어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멜라티 수료다 (Melati Suryodarmo )는 붉은색 조명이 켜진 한 공간에서 대형 유리 한 장을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퍼포먼스 〈사랑해요(I Love You )〉(2007 )의 다른 버전을 선보였다. 홍등가를 연상시키는 붉은 조명이 강렬한 방에서 투명한 유리와 검은 옷을 입은 수료다모의 긴밀한 움직임이 관객을 몰입하게 만들었다. 다른 공간에서는 태국 작가 아라야 라스잠리안숙(Araya Rasdjarmrearnsook )의 〈두 개의 행성(The Two Planets )〉(2008 ) 시리즈가 전시되어 있었다. 여성과 남성이 섞인 몇 명의 농부들이 낮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밭 한쪽에 앉아서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갈레트의 무도회〉와 같은 서구의 유명 회화 작업 복제본을 마주한 사진 작업들로 서구 명화와 아시아 노동자의 문화적 거리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인도네시아의 욕야카르타에 거주하는 멜라 야르스마(Mella Jaarsma )의 인터랙티브 작업 〈지퍼존(Zipper Zone )〉(2009 )은 관객이 지퍼를 열고 자신의 신체를 대면 남성의 신체로 보이도록 만든 설치였다. 태국 작가 피나리 산피탁(Pinaree Sanpitak )은 인천에 오지 못했으나 여성의 가슴을 형상화한 ‘가슴 탑’ 틀을 몇 개 보내왔고 관객들은 그 틀로 맛있는 빙수를 만들어 먹으며 모성애를 인류애와 접목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생각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필자가 기획한 2009년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한 50여 명의 해외 작가 중 일부였다. 이들 외에도 미국 페미니즘 예술가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 ) 등 수많은 국내외 여성 작가들이 본전시와 특별전을 통해 작업을 선보였다. 여성 작가뿐만 아니라 올루 오귀베(Olu Oguibe ), 마종일과 같은 남성 작가도 참여하여 여성과 미술의 접목을 시도하는 자리를 빛낸 바 있다. 2011년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는 제인 파버(Jane Farver)의 기획으로 ‘미지의 대지’라는 주제 아래 오노 요코(Yoko Ono ), 차오페이(Cao Fei ) 등을 선보이며 국제적 이목을 끌었으나 2013년부터 이전과 같은 국제전시를 만들 예산과 동력을 상실하면서 이 비엔날레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15년이 흐른 2024년 가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위에 언급한 작가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접속하는 몸 :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에 피나리 산피탁은 예의 ‘가슴 탑’ 이미지를 담은 회화 작업을, 멜라 야르스마는 여전히 인터랙티브 작업으로 옷에 대한 사색을 담은 〈문제가 되는 치마〉(2023 )를 선보이고 있다. 아라야 라스잠리안숙은 바닥에 놓인 시신들에게 죽음에 대해 강의하는 퍼포먼스 영상 〈수업〉(2005 )을 선보이고 멜라티 수료다모는 닫힌 공간에서 인도네시아 전통 궁술로 활을 쏘는 퍼포먼스 영상 〈공허한 것들의 거래〉(2016 )를, 차오페이는 자신의 대표작 〈RMB 도시에서의 삶〉(2009 )를 통해 미래의 도시와 인간을 보여준다.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업과 유사하거나 그보다 과거 또는 현재로 확장되고 있다.
유사한 점은 또 있다.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의 영어 명칭은 ‘Incheon Women Artists’ Biennale’고 서울관의 전시는 ‘Connecting Bodies-Asian Women Artists’다. 두 전시 모두 페미니즘 미술을 표방하지 않고 ‘여성 예술가’라는 폭넓은 범주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 미술에서 페미니즘 담론이 지난 40여 년간 불굴의 여정을 계속했으나 소수의 작가에 국한되어 보다 많은 여성작가들을 포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용어에 대한 경계심과 냉소가 사회에 확산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성으로서의 작가의 존재가 처연히 드러나는 작업을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위 두 전시는 그 증거이다.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가 전지구적 규모로 여성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은 장이었다면 서울관의 전시는 범위를 아시아로 좁혀서 아시아에서 활동하거나 아시아 출신 여성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위 비엔날레가 동시대 미술의 현장 속에서 1970년대 이후 여성 작가의 현재를 점검하고자 했다면 후자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에서 전개된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적 작업도 다수 포함하고 있어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서울관의 전시와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가 15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여성 작가’, ‘아시아 여성 작가’라는 범주를 내세우며 여성의 신체는 여성 문제의 시작이자 귀결점이라는 본질적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배경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는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이 유럽과 미국을 넘어 아시아 등 비서구권으로 확산된 과정에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미술이 과거와 다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냉전 구도가 붕괴되자 그동안 지정학적 주도권을 휘두르며 문화계까지 장악했던 유럽과 미국이 타자의 미술로 시야를 넓혔고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와 더불어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미술이 부각되었다. 또한 일본의 호황기에 설립된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문화 주도권을 꿈꾸며 만든 한국의 광주비엔날레, 소박하게 출발했으나 1990년대 후반 이후 글로벌 규범을 따르며 성장한 타이베이 비엔날레 등 아시아 지역의 비엔날레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동시대 미술의 지형에서 동아시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쿠보타 시게코 〈뒤샹피아나 :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裸婦 )〉(사진 왼쪽 )
영상 설치 4채널 영상, 컬러, 무음, CRT 모니터 4대, 합판
5분 21초 168.3× 78.7 × 170.2cm 1976/2019 SD 영상과 슈퍼
8mm 필름을 비디오로 변환 제공 : 쿠보타 시게코 비디오아트 재단
ⓒ 쿠보타 시게코 재단
번째는 포스트콜로니얼 연구와 페미니즘이 접목되며 아시아 여성이 고유한 주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문화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은 저서 『Can the Subaltern Speak?』 ( 1988 )에서 서발턴( subaltern ) 개념을 제시하면서 경제적 하위 계층을 지칭하던 기존의 개념을 활용하여 가장 하위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인도 여성의 지위를 담론화했다. 이 개념은 이후 전지구화와 신자유주의 현상 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단순한 노동력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아시아 여성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젠더와 계급의 교차점에서 첨예한 이슈로 주목받는다.
세 번째는 2000년대 들어 미국 페미니즘 미술계가 시도한 글로벌 확장이다.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미국 페미니즘 미술은 사실상 그동안 담론과 실천 측면에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주디 시카고, 캐롤리 슈니먼부터 ‘왜 위대한 여성 작가가 없었는가?’라는 글로 유명한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 )까지 모두 페미니즘 미술 담론의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족적을 역사화한 전시 《WACK! Art and the Feminist Revolution》(2007, LA현대미술관 )과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의 전시 《글로벌 페미니즘(Global Feminisms : New Directions in Contemporary Art)》(2007 )은 21세기에도 페미니즘의 도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글로벌 페미니즘》은 미국 여성작가부터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출신의 여성작가를 망라하는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모색하여 여성의 ‘타자성’이 인종이라는 또 다른 ‘타자성’과 접목될 때 지역마다 특수한 페미니즘이 대두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전시 제목 그대로 여러 지역에서 전개된 복수의 페미니즘을 점검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는 여성을 내건 최초의 비엔날레이자 인천 지역의 여성작가들이 주도한 행사로 아시아에서 열리는 축제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었다. 주최 측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시아 미술, 아시아 여성, 글로벌 페미니즘이라는 화두가 부각되자 서구와 미국 중심의 미술에서 탈피하는 탈서구의 맥락에서 아시아 비엔날레이자 여성작가를 선보이는 비엔날레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에 관해 작가는 “여성 신체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국가가 식민화 하는 것”에 반발해 생리대를 이용한 작품을 발표했다.
아라마이아니 〈마음의 생식능력을 막지 마시오〉(사진 오른쪽 )
생리대, 형광등, 나무 의자, 혈액이 담긴 병, 사진 가변 크기 1997
《접속하는 몸 :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은 《글로벌 페미니즘》 전시의 아시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 11개 국가의 여성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작업 130여 점을 6개의 주제 아래 선보이며 국가와 문화 차이, 환경과 언어 차이, 무엇보다도 역사와 시간의 차이에도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접속’ 지점을 찾고 있다. 전시의 부제를 ‘아시아 페미니즘 미술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시아에서 70여 년간 전개된 주요 여성작가들의 역사적 작업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있다. 특히 도록에 실린 각국의 큐레이터/평론가들이 정리한 작가 소개 글은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각 나라의 문화적 맥락을 설명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글의 범위와 어조가 서로 달라 심도 있고 통찰력을 갖춘 아시아 페미니즘 미술사 쓰기로 귀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그동안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작업들과 들어보지 못했던 작업들의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 여성 작가 연구에 귀한 자료들이다. 전설적인 일본의 구타이 그룹에서 활동한 타나카 아츠코(Tanaka Atsuko )의 〈전기 드레스〉( 1956 ) 사진, 〈성기 회화〉( 1966 ) 퍼포먼스를 벌인 구보다 시게코, 거리에서 퍼포먼스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수하르토 정권하에서 투옥되었던 아라마이아니(Arahmaiani )의 작업들, 인종과 문화적 차이 속에서 고통의 언어를 다루었던 차학경, 1989년 총을 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중국공안뿐만 아니라 전위예술 현장을 놀라게 했던 샤오루(Xiao Lu ), 인도네시아 여성운동 이야기와 노래를 목판화로 기록하는 피트리아니 드위 쿠르니아시(Fitriani Dwi Kurniasih ) 등 주목할 만한 작가들의 기록 사진과 실제 작업을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문화적 ‘서발턴’으로서 아시아 여성 작가의 정체성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설 때 발견되는공통의 주제들과 연대감을 확인시켜준다. 주디 시카고와 학생들이 캘리포니아에서 진행한 〈여성의 집(Woman House )〉( 1972 )을 촬영하며 미국 페미니즘 미술의 발아를 목도했으며 이를 계기로 고국 일본으로 돌아가 여성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길을 가게 된 이데미츠 마코(Idemitsu Mako ), 네덜란드 출신으로 학생시절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가 토착 문화에 매료되어 1983년 정착한 후 지금까지도 독재와 차별에 맞서는 인도네시아 예술인들과 연대하고 있는 멜라 야르스마는 일부 사례이다.
각국이 처한 상황의 차이 속에서 가부장제의 억압, 교육의 차이, 경제적 지위, 문화적 편견 때문에 말할 능력을 갖지 못했던 동료 아시아 여성들에 주목한 이들도 있다. 1990년대부터 여성의 노동과 공예에 주목하여 워크숍 등을 통해 돌봄, 교육 등의 가치를 알리는 태국의 페미니즘 공동체 ‘우머니페스토(Womanifesto )’, 여성 노동력을 수출하는 필리핀의 식민지적 현실을 글과 작업으로 드러내는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Imelda Cajipe Endaya ) 등은 용기와 도전의 페미니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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