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 CRITIQUE

김선영 |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원
이혜원 | 독립기획자
홍예지  | 미술비평
박영택 |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사라졌다 나타나는》
경기도미술관 8.8~10.20

김선영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원


《사라졌다 나타나는》 경기도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경기도미술관

나의 결함에 연결되는 예술 경험

“독서에서 최고의 순간은 생각이나 느낌,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만 그렇다고 느꼈던 것을 책을 보다가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지. 만난 적도 없고 이미 죽은 사람의 글에서 바로 그걸 발견하는 거야. 마치 책 속에서 손이 나와서 내 손을 잡아주는 것 같이 말이다.”
-앨런 배넷, 연극〈히스토리 보이즈〉중-

아마 모든 예술에서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한다. 어느 감정과 생각의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난 작품 너머로 나를 마주하는 작가를 통해 기쁨과 동시에 위로를 받는 순간 말이다. 작품은 필연적으로 작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작가의 내면뿐만 아니라 관객과 연결된다. 의외의 순간에, 예기치 않은 생각과 감상으로 나의 시야와 감각이 확장되는 순간은 작품에서 ‘손이 나와서 내 손을 잡아주는’ 순간일 것이다. 그 순간이 가능한 감상의 지점에 대해 생각해 본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와 같은 결함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줘.” 괴물은 인간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배척당한다. 혼자이기에 불행하며, 불행하기에 악하고, 악하기에 복수를 원한다는 괴물은 그렇게 ‘괴물’이 되었다. 괴물의 절망은 자신의 결함에 그 누구도 연결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결함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 개개인이 쌓은 경험의 흔적이자 나라는 틀이라고 생각한다. 괴물의 말처럼, 나를 고독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결함이지만, 관계는 그 결함에 당신이 연결되어 시작되기에 어떤 의미에서 결함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에 힘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결함’과 주파수를 맞추는 작품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전시는 기획자가 해석한 ‘결함’이 가지고 있는 결핍과 비어 있는 상태, 그렇지만 개인을 고유하게 만들고 곧 연결되고 채워질 수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상태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에 대한 그림에서 시작했다.

경기도미술관의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 《사라졌다 나타나는》에서는 낯섦과 새로움을 모색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전시 제목인 ‘사라졌다 나타나는’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가능성과 동시성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앞뒤가 없다. 소멸과 생성이 하나로 일어난다는 개념은 ‘플랑크의 별’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들춰보던 카를로 로벨리의 『모든 순간의 물리학』을 다시 읽은 어느 날, 책의 한 페이지에서 발견한 ‘플랑크의 별’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다가왔다. 물론 나의 좁은 식견과 일천한 경험치로는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어떤 책들은 나름의 이해, 공감과 동감 그 어딘가에서 한참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또 어떤 책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완독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질척거리기도 한다. 내게 물리학과 천문학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분야 중 하나이기에 책 읽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는 분야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기에, 플랑크의 별이라는 개인적 견해의 오독과 오해를 가득 안고 그 개념이 나에게 준 울림을 곱씹어보았다. 소멸처럼 보이는 순간 다시 폭발하고 생성되는 가능성의 별. 그간 결함에 대해 생각한 지점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하였고 플랑크의 별에 기대어 전시를 시작했다.

플랑크의 별은 루프 양자 중력 이론에서 거대한 별이 블랙홀로 응축하다가 입자 크기 정도로 작아진 별을 말한다. 한계치 크기에 도달한 플랑크의 별은 이내 폭발하여 새로운 별들로 탄생한다. 전시는 플랑크의 별이 소멸하기 직전 대폭발을 일으키는 도약의 ‘가능성’과, 또 별의 죽음 끝에 새로운 별이 시작된다는 끝과 시작을 함께 내포한 ‘동시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작품 하나하나를 플랑크의 별로 보고, 완전함보다는 불완전함 속에서 움트는 창조의 순간과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그리고 그 동시성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했다.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감각을 극대화하여 ‘나’는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최지목, 상대적이고 불확실한 생각과 그런 생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과 인식을 보여주는 강수빈,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떨림이 관객의 울림으로 치환되어 우리가 이 공간 안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레이코드, 지인, 낱낱이 부서져서 작아지고 소멸하는 과정에서도 새로 드러나는 면면을 끄집어내 들여다보는 권현빈, 축적된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내면의 생동하는 풍경을 다시 그리는 이혜인, ‘나’의 끝이 ‘너’의 시작이고 ‘너’의 끝이 곧 ‘나’의 시작인 우리의 관계와 그 삶의 순환을 돌아보는 장서영의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업에 대한 오랜 고민과 탐구가 담긴 작품을 통해 주제적, 형식적으로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동시적인 다중 가치와 감각들을 담아내고자 했다. 예술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과 태도들, 가치와 생각들, 감각들 사이에서 창조된 작품들을 소멸 직전 새롭게 생성되는 가능성인 플랑크의 별로 은유하고자 했다. 작품들을 통해 흩어지는 감각을 붙잡으려는 노력, 보고 인지한 것과 실재의 괴리를 줄이고자 하는 노력, 혹은 전체를 해체하려는 노력, 낯설게 감각하는 방법 등을 통해 현존하는 방법과 그 개인적인 경험일 수도 있는 감각과 기억을 공유하고 확장하려는 노력 등이 전시 안에서 관객들의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기를 바랐다.

한편, 작품은 불안감을 조성하는 기울어진 벽들 사이사이로 설치하였다. 기울어진 벽에 막혔다가 돌아 나오는 발걸음 끝에 새로운 공간이 다시 펼쳐지고, 새롭게 혹은 다시 마주하는 작품들을 통해 묘한 긴장감과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이는 부족하게나마 삶에서 예술을 통해 확장되는 세계를 시각적, 공간적 감각으로 은유하고자 했던 지점이었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결함’이 있는 상태이자 동시에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다. 또 각자가 쌓아온 경험의 흔적이자 고유함을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작품 역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시선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예술세계에서 하나의 순간이자 어떤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를 함께 만든 모두가 각자가 가지고 있던 결함에 서로가 연결되어 우리의 관계를 이 전시에서 함께 만들었듯, 관객들도 이번 전시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품에 주파수를 맞추어 보고 스스로 주변의 새롭고 낯선 의미들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나타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전시를 준비해서 운영하는 동안, 마치 발아할 수도, 발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씨앗을 심는 마음이었다.

《빛나는 도시, 어두운 황홀경–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서울시립미술관 SeMA 벙커 9.12~10.3

이혜원 독립기획자


《빛나는 도시, 어두운 황홀경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서울시립미술관 SeMA 벙커 전시 전경 2024
제공 : 서울시립미술관, 임장활

환영(幻影): 헛보이는 미혹하는 괴이한 도시의 그림자

전시의 시작은 인터넷에 떠도는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Cyberpuck Dystopia )’ 서울의 이미지였다. 사이버펑크는 ‘하이 테크, 로우 라이프(High Tech, Low Life)’로 특징지어지는 디스토피아 SF의 하위 장르를 말한다. 주로 첨단기술에 지배당하는 암울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불균등한 개발은 서울을 미래와 과거, 최첨단과 낙후함이 공존하는 도시로 만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서울의 마천루와 네온사인 가득한 뒷골목은 인터넷, 게임, 영화 등의 시각문화에서 ‘네오 서울(Neo Seoul )’, ‘사이버펑크 서울’ 등으로 불리며, 수많은 2차 창작 이미지로 유통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평양 역시 ‘네오 평양’, ‘사이버펑크 평양’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지하듯,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 아래 북한은 오랫동안 디스토피아로 재현되어 왔다. 세계 최빈국, 폐쇄국가, 공포정치로 유지되는 독재 국가로 말이다. 그런데 근래 북한이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로 재현되는 배경에는 또 다른 맥락이 있는 듯하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 같은 우주 발사체 개발, 사이버 공격 같은 북한의 기술 범죄들은 SF 영화를 떠오르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더욱이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 최근 평양에 조성된 미래적인 도시 풍경은 이런 상상을 증폭시키는 듯하다.

《빛나는 도시, 어두운 황홀경》은 한반도의 두 도시 서울(남한 )과 평양(북한 )을 ‘재현된 이미지’로 탐구하는 전시다. 전시는 두 도시라는 장소가 실제 혹은 가상의 디스토피아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양상에 집중한다. 두 도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상기한 이미지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해 온 양극의 시공간이지만, 두 도시 모두 전후 근대적인 수도로 발돋움하는 시작점에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유토피아적 모더니즘 도시 계획 ‘빛나는 도시(The Radiant City )’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유토피아로 기획된 두 도시가 디스토피아적인 도시로 재현되는 현상은 탐구해볼 만한 질문들을 던진다. ‘도시의 어떤 특성/조건이 디스토피아적 재현을 야기하는가?’ ‘어떻게 이러한 이미지가 생산되고 유통되는가?’ 그리고 ‘그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탐구하기 위해 전시는 세 층위의 구조로 기획됐다. 먼저, 관련 주제를 다룬 논문집인 기안 프라카시(Gyan Prakash )의 『누아르 어바니즘 :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2024 )을 번역하며 이론적 배경을 탐색했다. 이어서, 번역 결과물을 공유하고 전시의 주제를 도출하고자 전시 사전 프로그램으로 ‘파멸의 꿈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그리고 ‘네오’ 서울과 평양’(2024 ) 세미나와 워크숍을 진행했다. 본 전시는 네 명(팀 )의 작가들과 앞선 논의를 신작으로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전시가 펼쳐지는 SeMA 벙커는 물리적 장소를 넘어 전시의 개념적 중심에 있다. 벙커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이 전시는 벙커의 역사적 맥락과 전시 구조를 연결하고자 했다. 2005년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 중 발견된 벙커는 1970년대 군사정권 때 조성된 곳으로, 북한 공작원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등 연이은 안보위기에 대통령 경호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여의도는 군사정권의 열병식 장소이자 일제가 세운 공항이 있던 곳으로, 벙커는 식민, 냉전과 분단, 군사독재, 도시개발, 자본주의 등의 상징과 역사가 담긴 한국 근현대사의 블랙박스와 같은 곳이다. 본 전시는 벙커라는 블랙박스를 환등기 삼아 영사하는 환영(幻影 )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마주하는 작품은 팀 트라이어드의 〈도시재생장치#4 : 환상통〉(2024 )이다. 팀 트라이어드는 도시의 데이터를 시청각적으로 재구성하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블랙박스, 즉 전시장 중간에 암실로 조성된 이 작품은 남북으로 놓인 벙커의 허리를 휴전선처럼 수평으로 분절한다. 암실에는 남쪽과 북쪽에 놓인 두 프로젝터가 대치하듯 서울과 평양의 데이터를 빛과 소리의 스펙트럼으로 투사한다. 스펙트럼의 이미지는 스크린 대신 포그머신의 연기에 맺히며 재현이 실체 없는 투사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는 일방향적인 투사로 그치지 않는다. 관객의 움직임이 연기의 흐름을 바꾸면, 역으로 스펙트럼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품은 물질과 비물질, 현실과 비현실을 가로지르는 체험을 제공한다.

암실의 어둠을 지나면 네스토르 시레 & 슈테펜의 〈붉은 시대〉(2024 )가 펼쳐진다. 두 작가는 SF 창작물이 현실을 반영하고 형성하는 양태를 추적해 왔다. 본 전시에서는 유명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서 재현된 한반도의 모습을 다룬다. 게임에서 2024년의 한반도는 통일 전쟁의 여파로 온 국토가 붉은 핵물질로 뒤덮인 ‘붉은 시대’에 접어든다. 이 설정에 매료된 게임 팬덤은 이를 게임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모드를 만들어 공유했는데, 작가들은 이를 활용해 붉은 한반도의 풍경을 영상 설치로 구현했다. 이를 통해, 서구 하위문화에서 아시아의 도시들이 소환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붉은 잿더미 뒤편의 긴 벽면에는 철거 중인 대단지 아파트의 영상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재앙에 감응하는 이미지를 탐구해 온 정유진은 〈신두꺼비〉(2022 ), 〈사각의 정글〉(2024 )과 함께, 신작 〈로봇은 호의로 미소짓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의해 웃는다. 최근의 인간들도 그렇다〉(2024 )를 선보였다. 작가는 오랫동안 살았던 정든 집이 ‘더 나은’ 주거지로 재탄생하기 위해 파괴되어야 한다는 모순에서, 또한 공사 관계자로부터 서울에 이 정도의 구역이 파괴되는 것은 전쟁 후 처음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에서 디스토피아적 감각을 느꼈다고 한다. 작가는 영상 중간중간에 AI로 생성한 디스토피아적 도시 이미지의 파편을 끼워넣고, 그 도시 이미지의 외곽선을 본떠 만든 패널을 통해 아파트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형적인’ 디스토피아적 도시의 모습에 대해 묻는다.

전시장 곳곳의 푸른 스크린은 반재하의 신작 〈96년 8개월의 크로마키〉(2024 )다. 반재하는 ‘유통’과 ‘분단’이라는 키워드를 주로 탐구해 왔다. 본 작품은 ‘지상낙원’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던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在日朝鮮人北送事業 )’의 역사와 관련 이미지를 살펴본다. 작가는 북송 재일교포 탈북민 인터뷰와 당시 ‘유토피아’로 선전된 이미지를 활용한 선택지 게임을 선보인다. 특히 ‘크로마키’라는 영상 합성 기술을 통해 역사 이미지와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도하는데, 이는 과거의 시간을 벙커에 현전하게 하는 통로로 사용된다. 또한, 화면에 끼어드는 이미지의 파편들은 북송이라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추동한 트리거가 도시 이미지와 영상에 대한 매료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선택지 게임에서 북송자들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된다. 게임은 관객에게 선택이라는 액션을 통해 그 어떤 매체보다 역사의 증언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몰입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본 전시는 장소가 이미지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영향 관계의 복합성을 드러내면서 그 관계와 연결된 조건들을 가능한 한 선명히 펼쳐내고자 했다. 우리가 장소의 이미지를 만들고, 다시 그 이미지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우리는 현실에 대한 파악을 통해 대안적인 인식의 구축을 시도함으로써, 도시라는 이미지, 나아가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구축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IBK 아트 스테이션 《최성임: 도시정원(CITY GARDEN)》
IBK 기업은행 9.26~10.18

홍예지 미술비평


《도시정원》 IBK 기업은행 전시 전경 2024
사진 : 박홍순

정원의 쓸모

정원이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정원은 아픈 자를 위한 쉼터다. 정원은 상처 위에 지어진다. 정원이 있는 곳은 우리 사회의 환부다. 자연의 섭리대로 돌아가는 곳에는 자연이 필요 없다.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은 정원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 자기가 머무는 곳이 자연이기에. 자기가 곧 자연이기에.

을지로 한복판, IBK기업은행 본점에 인공 정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까!’하는 기대보다는 ‘어떤 아픔이 고여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면 찾아가 보자. 정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자.

그들의 걸음걸이, 의복, 표정을 살피자. 로비에 맴도는 기운을 느끼자. 리듬을 주시하자. 이 장면은 조화로운가? 어긋난 곳은 없는가? 흐름을 타자. 빙글빙글 도는 회전문을 통해 쏟아지는 사람들. 우측에서 좌측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한 손에는 휴대전화, 다른 손에는 커피가. 빳빳한 셔츠 깃에 밴 담배 냄새. 매운 찌개 냄새. 다들 지나가기 바쁘다. 스쳐 지나간다. 들쭉날쭉한 흐름 가운데 멈춰 선 이방인. 그의 직업이 미술비평가라고 했던가? 혼자 뭐 하고 있나? 지금은 점심시간. 로비는 한가한데 사람의 마음은 바쁘다. 우두커니 선 비평가는 사방을 빙- 둘러보며 자기 같은 사람이 또 있는지 살핀다. 육중한 기둥 아래 마련된 작은 쉼터. 여기 앉아 머무는 사람이 있을까? 두꺼운 원형 기둥마다 최성임이 늘어뜨린 볼풀공이 대롱대롱. 촌스럽게도 비평가는 시골 보리밥집에서 본 구슬발을 떠올리며 꼬르륵거리는 배를 감춘다. 그의 머릿속에 떠도는 연상과는 상관없이, 기둥에 드리운 오색 공 꾸러미는 몹시 세련된 미감을 지녔다. 매끄럽고 깨끗하고 산뜻하다. 로비의 럭셔리함과 의외로 잘 맞아떨어진다. 볼풀공들은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불규칙적으로 흘러내리며 경쾌한 리듬을 자아낸다. 공들끼리 맞부딪치면서 통통 소리가 난다. 그래서〈나무들의 울림(Resonance of Trees )〉이라는 제목이 붙었을까?

울림(resonance )은 공명(共鳴 )인데, 함께(共 ) 우는(鳴 )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모니터 속에서 작가는 기둥 밑에 앉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바깥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왜 그럴까? 인공 나무라서 그런 걸까? 작품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왜 아무 울림도 못 느끼게 되었으며, 잠깐이라도 멈춰 설 여유조차 없게 되었는지 듣고 싶을 뿐이다. 쉬어 가라고 만든 정원에서 쉬지 못하게 된 연유를 묻고 싶을 뿐이다.

내 아픔이든 남의 아픔이든 찬찬히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아픔이 아픔을 알아보고, 함께 울고 웃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여기, 우리가 머무는 시공간은 어떤가?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은 뿔뿔이 흩어진 입자처럼 아무런 의미를 띠지 못한다. 망에서 빠져나온 볼풀공들이 온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들을 망연히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각각의 공들이 우리와 같다면? 인연이라는 망에 들어가 오색찬란한 조화를 이루고 있던 우리는 어느 틈에 혼자가 되었나? 깨져 버린 균형과 무질서에 어떤 위안도 얻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우르르 몰려가지만 서로 공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슴을 두드린다.

전시 리플렛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들의 울림〉 속 볼풀공들은 “이어지고, 뻗어 나가는 생명 순환의 의미”를 띤다고 한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공의 흐름을 보며 내리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은 생명이고 생명은 곧 사랑이다. 사랑은 돌려받을 것을 고려하지 않고 온전히 내어 주는 흐름이다. 자연의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가득 찬 곳에서 빈 곳으로 저절로 흐른다. 또한 나무처럼 대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해타산적인 인간의 사랑은 쉬이 흐르지 않는다. 자본의 순환은 또 어떤가? 말이 순환이지 고인 물과 다름없다. 막힌 흐름을 어찌할 방법은 없나?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내려가는 볼풀공을 보며, 흐르지 않는 인간 세상의 에너지를 생각한다.

여기, 자본의 정원에 심어진 생명의 나무는 어떤 노래를 들려주고 있는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공들.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무들. 자연은 언제나 자연이다. 망가지고 무너져도 다시 회복한다. 흔들림조차 아름답다. 모든 변화에 열려 있는 나무는 자신을 뒤흔드는 바람에 기꺼이 순응한다. 받아들인다. 그렇게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들이 음악이 된다. 인간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장면이다. 본래 자연의 자식인 인간은 언제나 자연을 꿈꾼다. 자연에 무언가 특별한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탐욕을 걷어 냈을 때 비로소 보이는 생명의 온전함이다. 평소에는 그 온전함을 느낄 수 없기에 유사 자연에서 위로를 구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좋다. 문제는 감응이다. 굳어진 몸과 마비된 감각으로 자연을 만날 때, 자연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줘도 우리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받으려면 열려 있어야 하고 생명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이 모든 과정이 어색하기만 하다.

최성임이 나무를 만드는 데 사용한 볼풀공은 어린이용 풀장에 사용하는 바로 그 공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릴 때 우리는 어땠는가? 볼풀공이 상기시키는 감각을 느껴 보자. 어린아이는 볼풀장에 풍덩 뛰어든다. 피부에 전해지는 공의 탄력을 느끼며, 온몸을 튕기면서 논다. 공 속에 파묻힌 아이들을 보면, 완전히 뛰어들지 않고는 놀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노는 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은 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며 풀장 바깥에 선다. 바깥에서는 공명할 수 없다.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작가가 조성해 놓은 정원도 마찬가지다. 기둥의 주위를 맴돌기만 해서는 안 된다. 쏟아지는 볼풀공들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몸을 눕혀야 한다. 구불구불 뻗어 나가는 볼풀공의 흐름을 느끼며.

마음 놓을 곳 하나 없는 도심 한복판에서 예술은 자연의 위로를 대신한다. 최성임의 나무들은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열려 있지 않고 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쉴 곳이 있어도 쉬려는 사람이 없으면 더 이상 쉼터가 아니다. 도시정원의 의미가 충분히 살아나고 작품의 생명력이 오롯이 전달되려면, 작가와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몸과 마음을 여는 의지가 필요하다. 거창한 노력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휴식이 필요할 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된다.

작품이 만들어 내는 울림에 감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저 안타깝다. 무엇보다 비평가 자신도 다를 바 없다. 심신이 피로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장면을 가져다 놔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잠시나마 도시정원을 거닐며 감각을 열어 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진정한 쉼이 필요한 순간이구나, 깨닫게 해 주고 나란 존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돌아보게 해 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오히려 도시정원 안에 있을 때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더 좋아지는 전시였다. 북적거리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아까 봤던 풍경을 마음에 그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나무의 일부가 된다면 어떨까?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플라스틱 망 안을 훑고 내려온다면?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공의 표면이 자꾸 생각난다.

《생명광시곡, 김병종》
문화역서울 284 9.10~10.24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생명광시곡, 김병종》문화역서울 284 전시 전경 2024
제공 : 한국공예 · 디자인문화진흥원

산문 정신의 그림

1950년대 이후 서구의 미술은 사물의 재현에서 정신의 표현으로 선회하는데, 이러한 미술 개념은 이미 동양에서는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동양 미술에서의 ‘정신’이란 몸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이르게 되는 경지를 말한다. 그러니까 동양 회화에서 그리기와 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붓의 놀림이란 우주적인 힘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깨닫게 되는 주객합일의 경지를 지향한다. 그러니까 동양화의 선은 형태의 단순한 윤곽선이 아니라 ‘사물의 내적 선’을 포착, 대상과 작가에게 편재하는 ‘기’를 표현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듬과 생명력을 가짐으로써 순수한 정신적 리듬과 진동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이고 획이다. 1960년대에 이응로와 서세옥은 이러한 동양의 전통 예술관과 그 근본으로서의 인간관을 통해 당대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동양화적인 추상미술을 만들어내려고 한 존재다. 특히 서세옥의 그림은 추상화된 대상의 이미지와 정신성의 증거로서의 운필만이 남는 그림, 인간을 재현한 최소한의 구상적 이미지와 그 흔적인 추상적 붓 자국이 혼재하는 그림을 그렸다.

서세옥의 제자인 김병종의 그림은 스승의 그림을 좇는다. 서세옥의 구상적이고 삽화적 성격이 강한 1970년대 그림에서부터 이후 얼굴을 단순화한 그림으로까지의 여정을 복기한다. 더구나 그는 서세옥의 고전에 대한 박식함과 문기를, 논리성을 지향한다. 서세옥이 모든 것을 점과 선으로 요약하고 이를 통해 자연의 근원적인 질서와 관계를 탐구하려 했으며 또한 수묵의 고전적인 텍스트를 비대상적 회화로, 수묵화의 묵점과 묵선으로 환원하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김병종은 여전히 형상을 빌어 자연현상에서 받은 인상이나 이에 대한 산문적 그리기를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유년시절 경험한 자연을 호출하고 숲과 생명과 기운을 어눌하고 익살스러운 도상으로 호명한다. 자연을 서술하는 표현수단이 수묵인 것이 아니라 먹 그 자체를 조형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서세옥에 반해 김병종은 자신의 자연체험을 부단히 조형화하는 선상에서 먹과 여타의 재료가 기능한다. 그는 그림에서 여전히 인지 가능한 대상과 그것들로 인해 환기되는 문학적인, 이야기를 거느린 서사성에 매달린다. 그것이 그에게 문기 짙은 문인화와 같은 선상에서 기능하는 동시에 수묵의 정신성을 유지하면서도 실험적인 작업의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해줄 수 있는 한편 토착적인 동양화가 될 가능성 또한 열어준다.

김병종의 그간의 화업을 집약한 아트아카이브 형식의 회고전인 이번 《생명광시곡, 김병종》은 1990년대 작품에서 최근작에 이르는 긴 여정을 보여준다. 그 세월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과 출간 한 책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그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병행하고 그 둘은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진행된다. 그림이란 풀어내는 것이고 글쓰기는 쪼아대는 것이라면서 이 두 영역을 오고 간 그간의 여정을 그는 설명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마련한 출구는 여행이 되고 여행은 그에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긴밀하게 통합되는 장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경지로 나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산문적이고 삽화적인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김병종의 그림들은 일반적이고 무난한 장식성을 거느린다. 삽화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해서 위력적인 그림으로 나간 경우는 황창배에게서 엿볼 수 있다. 이번 그림을 본 첫인상은 서세옥의 초기작품과 변종하의 그림들을 섞어 놓은 듯하다는 것이다. 둘 다 감각적인 동시에 장식적이며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의도된 어눌함으로 그려낸 편이었다. 김병종의 그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