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ART JAKARTA

Jakarta
강재영 기자
World Report

티스나 산자야 〈쐐기(Ganjel)〉 캔버스에 드로잉, 사운드, 페인팅, 나무조각 설치 4 × 2m
2024 아트 자카르타 설치 전경 2024

생동하는 공생의 모델
강재영 기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계에서 점차 주목받고 있다. 이제는 서구 열강을 글로벌 노스(Global North)로 보고, 이에 대항하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는 새로운 이분법으로 묶어 언급하기도 한다. 지금 이들 국가의 예술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아세안(ASEAN) 경제연합을 통한 가파른 경제 성장으로 국제적인 존재감을 알리는 등 외적 요인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논리에 기대거나 시장에 편승하기보다 각 국가가 지닌 근대 식민역사와 서로 다른 인종 정체성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서사를 만들어내고, 이를 소비할 수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지가 있다. 지난 10월 4일부터 6일까지, 글로벌 사우스의 미술 현장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아트페어 2024 아트 자카르타에 다녀왔다.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지만 약동하는 글로벌 사우스 중에서도 인도네시아가 떠오르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의 예술은 미술가, 갤러리, 컬렉터가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움직이는데, 이는 작가와 작품 중심으로 작동해온 전통적인 미술의 생태계 구조를 재검토할 수 있는 대안적 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00년 자카르타를 기반으로 조직되어 인도네시아 각지 예술가들이 결합하여 활동하는 미술 콜렉티브 루앙루파(ruanrupa )가 2022년 카셀 도큐멘타 15의 첫 번째 아시아 출신 감독이자 그룹 감독으로 보여준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룸붕(Lumbung, 쌀독 )’이라는 인도네시아 농경 문화를 유비한 구조의 전시를 만들어 여러 파장을 만들어냈고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을 향한 관심 폭과 영향력은 더욱 두터워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이들에 대해 잘 모른다. 서구권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 동아시아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글로벌 사우스를 구성하는 나라의 역사와 자연, 언어와 문화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전시《남동아시아 오역하기 : 7개의 구멍》(3Q, 2024 )도 이러한 몰이해를 지적하고 있다. 이번 방문을 통해 기자 역시 그동안의 무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자카르타에서의 며칠간, 후덥지근한 날씨를 애써 8월 한여름 서울의 감각과 연동시키며, 딱 두 시간의 시차만큼 일찍 눈떠 매일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아야 할까. 이곳을 1980~1990년대 개발도상국이었던 서울과 비교하는 게 과연 온당할까. 오토바이가 더 적어서, 차가 덜 밀려서, 걷기 좋아서 서울을 ‘더 좋은 도시’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무어라 장르를 정의할 수 없는 문장에 대답을 고르지 못한 채, 루앙루파와 카셀의 인상을 상기시키며 2024 아트 자카르타가 열리는 자카르타 국제 엑스포(JIEXPO )에 도착했다.

상생하는 플랫폼으로서 아트페어 모델
생동하는 도시 자카르타. 예술도 그 온도만큼 뜨거웠다. 2024 아트 자카르타는 작년에 비해 넓어진 공간에도 관람자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찾기 위해 눈을 밝히며 전시장을 종횡무진했다. 일반적으로 아트페어, 특히 VIP 시간대에 방문하는 연령대는 구매력이 있는 중장년층인 경우가 많은데, 20~30대가 인구구조 대부분을 차지한다는1 젊은 자카르타를 반증하듯 언뜻 보기에도 낮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총 12개 국가 73개 갤러리가 참여하여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갤러리 부스를 중심으로 행사를 후원하는 기업과 예술가의 협업을 소개하는 하이라이트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갤러리는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의 동시대 시각예술 경향을 조망할 수 있는 작업을 소개하는 스팟, 휴식과 예술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플레이, 민간 소장품을 소개하는 AJX 섹션 등이 그렇다. 올해 새롭게 등장한 섹션은 자카르타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 각 지역에서 예술 교육, 예술 굿즈 제작, 예술가 지원 콜렉티브, 예술출판활동 등 작품 판매만으로 담을 수 없는 로컬 아트의 활동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신(Scene ) 섹션이었다. 새롭게 마련된 공간에는 마치 자카르타 거리 야시장을 정갈하게 옮겨놓은 듯한 식당과 카페들, 강연과 프로그램이 펼쳐지는 공간이 함께 구성되어 인도네시아와 글로벌 사우스 문화예술을 동시에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여기에 디렉터 톰 탄디오가 말하는 ‘농크롱(Nongkrong )’, 즉 어울려 노는 분위기 속에서 스며들 듯 감각을 깨우는 그만의 소통 방식이 녹아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국제 아트페어와 비교할 때 작은 규모이지만 3일간 3만8000여 명이 방문하여 인도네시아 미술장이 지닌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페어 마지막 날엔 자카르타 지역 갤러리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이 판매되어 빨간 스티커를 붙인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공식 리포트는 없었지만 톰 탄디오가 한 인터뷰에서 최근 미술시장에 드리운 그림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것에서 지난해보다 낮은 판매 실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트 자카르타가 꿈꾸는, 아시아의 미술 허브로서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포부에 걸맞게 다양한 국적의 예술인들이 뒤섞여 들뜬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는 성공한 듯하다. 한국에서는 띠오, 백아트, 비트리갤러리, 아트스페이스 하우스, 예화랑, 이젤리(가나다순 ) 등 6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또한, 아트부산 대표 등을 중심으로 한국 컬렉터도 다수 방문하여 전시장을 관람하는 등 아트 자카르타가 아시아를 움직이는 힘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this/PLAY’가 로카와 협업하여 연출한 〈Naked Tone〉을 관람객이 체험해보고 있다

각 섹션별로 미학적 접근이나 그 영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 있었다. 먼저 하이라이트 섹션에서는 자카르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트 디렉팅 그룹 ‘this/PLAY’와 화장실 인테리어 자재 브랜드 ‘로카(Roca )’가 협업하여 만든 〈Naked Tone〉이 눈에 띄었다. 네모난 샤워 부스 안쪽에 샤워기와 마이크, 카메라가 설치되어 마치 코인노래방처럼 연출된 이 공간은 지역과 문화와 관계없는 ‘화장실에서 노래 부르기’라는 개인적 체험을 재해석한 작업이었다. 관객들의 발걸음이 이 부스 앞에서 한 번씩은 멈췄다. 보편적이고 사적이며 가벼운 경험으로 페어 부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만든 공간 연출은 현대예술에 무감각한 이들도 쉽게 발걸음하고 자신의 경험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간결하면서도 강하게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던, 자카르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우지 하한(Uji Hahan )이 인도네시아의 호텔 브랜드 아르토텔(Artotel )의 지원으로 제작한 〈Pelantang 20-20.000 Hertz〉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확성기(Pelantang )’라는 작품 제목처럼 일러스트가 그려진 거대한 기둥에는 사방으로 스피커가 장착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오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매니저, 청소전문가, 노동자, 기술자 등 행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기둥이 천장을 지지하지 않으면 건물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작업은 25년간 함께한 파트너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티스트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참여자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적힌 작품 설명문을 보면서 자신이 몸담은 생태계를 이들이 어떤 태도로 존중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트 자카르타 전시 전경 2024

스팟 섹션에서도 인류세 시대 지속가능성 문제와 자연과 인간의 공존 등의 주제를 담은 거대한 설치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업은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사회참여 작가인 티스나 산자야(Tisna Sanjaya )가 아트소시에테스(ArtSociates )와 함께 내놓은 〈쐐기(Ganjel )〉였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사회 정치적 상황을 작업의 주된 주제로 삼아왔다. 작업의 중심에는 그가 반둥공과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며 수집한 공문서가 작은 탁구대 위에 쌓여 있고, 그 위를 아이를 목마 태운 사람이 짓누르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지도자, 즉 2024년 대선에서 선출된 대통령과 전 대통령의 자녀를 상징하는데, 그는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 정치 권력이 예술과 교육에 휘두르는 부당한 힘을 비판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품을 판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일 아트페어에서, 가장 반자본적이고 정치적인 예술을 한가운데 전시하는 것, 이것이 아트 자카르타가 다른 아트페어와 완전히 갈라지는 지점이 아닐까.

스테이지 프로그램은 개막식이나 공연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획으로 채워졌다. 자국의 독립출판, 미술 소장품, 미술사, 예술가의 사회적 연대와 같은 동시대 예술을 가로지르는 첨예한 논의들이 이어졌다. 그중 첫날 열린 상영회가 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동남아시아 시각예술계에서 컬렉터로 잘 알려진 멜라니 세티아완(Melani Setiawan )의 삶을 다룬 에르윈 다말리(Erwin Damali) 감독의 〈The Art of Life : The Mother of Indonesian Artists〉였다. 의사였던 그는 1977년부터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작품 수집을 시작했다. 다큐멘터리는 그가 단순히 작품을 구매하고 이윤을 창출하는 컬렉터로서가 아니라, 50여 년간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예술가와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삶 전반을 돌보는, 다큐멘터리처럼 마치 ‘엄마’와 같은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인도네시아 미술장에 미친 영향력을 조명한다. 한 인터뷰에서 ‘친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신의 작품 구입 기준 1순위라고 언급하기도 한 그의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독자에게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었다.

신 섹션 중 자와섬에 위치한 도시 치마히를 기반으로 하는 업사이클링 아이웨어업(IWAREUP) 부스의 모습

2024 아트 자카르타는 메가시티 자카르타에서 예술이 그 장르의 안과 밖을 어떤 방식으로 접촉하고 감각하는지 그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인도네시아가 가진 정체성을 평면에 시각적으로 번안하고 차용하여 자신의 언어를 쌓는 작가부터 예술을 통해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발현하고 실행하거나, 아트신 자체에서 가려진 것들을 적극 드러내고 그 장을 확장하고자 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이처럼 아트 자카르타는 작가와 기업, 주최 측이 협업하여 자본으로 환원되는 부가가치로서의 예술뿐만 아니라, 미술장과 공동체가 선순환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멜라니 세티아완과 같은, 마치 돌보미로서의 컬렉터와 톰 탄디오와 같이 예술과 자본을 그저 교환하려기보다 인간만이 나눌 수 있는 메시지를 길어올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 자카르타가 품은 선명하고 맑은 에너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트 자카르타는 예술가와 기업이 어떻게 결합하여 시너지를 내야 하는지, 아트페어는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상생하는 플랫폼으로서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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