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평(非批評)의 시대:
이른 도착, 공백, 숲속의 빈터

안진국 미술비평

Special Feature

SNS는 오늘날 미술계를 바꿔 놓았다. 미술가들의 온라인 전시장이자 포트폴리오이자 홍보 및 소통 창구인 인스타그램은 여러 방면에서 미술계를 변화시켰다. 기획자와 큐레이터는 이곳을 통해 작가를 섭외하고, 갤러리스트나 컬렉터는 이곳에서 작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미술비평의 자리 역시 SNS의 자장 안에서 그 특성이나 성격이 변했다. 지금 한국의 미술비평은 ‘숲속의 빈터’에 있다. ‘이른 도착’과 ‘공백’을 거쳐 도달한 곳이다. 비평을 이곳으로 떠밀었던 것은 단연 SNS다. 비평이 원했던 곳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른 도착’과 ‘공백’보다는 더 나은 자리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숲속의 빈터를 떠올려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어쩌면, 사실은, 이 빈터가 ‘공백’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른 도착 : 선도록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다원성과 상대성이 강조되면서, 그린버그가 누렸던 비평의 왕좌는 사라졌다. 이제 미술비평은 여러 목소리 중 하나에 불과하고, 이 때문에 ‘비평의 죽음’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국내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넷 보급과 맞물려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부는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과 PC 보급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 PC방이 하나둘씩 생겨나더니, 1998년 출시된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해 시작된 ADSL1 서비스로 PC방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시기 탄생한 것이 ‘네오룩(neolook.com )’이다. 1998년 시작된 네오룩은 초창기에 메일링 서비스였다. 현재는 전시 아카이브와 검색에 주로 사용되지만, 2010년대까지만 해도 전시 홍보가 주목적이었다. 전시 메일링은 보통 전시 일주일 전에 발송되었는데, 이때 작품 사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전시글이었다. 당시는 여전히 우편으로 도록을 발송하던 시기였는데, 도록에도 잘 촬영된 작품 사진과 좋은 글이 필요했다. 도록 발송은 2009년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점차 확산되는 시기까지 이어졌다. 무선 인터넷과 SNS가 온전히 활성화되기 전이었기에, 메일링과 도록 발송은 전시 홍보를 위한 일반적인 프로토콜이었다. 이 시기에는 국공립 미술관도 선(先 )도록을 발간하며 전시를 홍보했다. 미술 관계자들의 주소 라벨지가 유료로 판매됐을 정도로 도록 발송은 중요한 전시 홍보 수단이었다. 도록도 전시 시작 최소 일주일 전에 미술 관계자들에게 도착해야 했다.

그렇다면 전시글은 언제 쓰이고, 왜 쓰이는가? (큰 틀에서 ‘전시글’을 ‘비평글’로 간주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둘은 다르다. ) 이 시기 전시글은 전시보다 훨씬 먼저 도착해야 했다. 도록 디자인과 인쇄에 대략 2주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면, 전시글은 전시 시작 3주 전에는 마무리돼야 했다. 전시글은 홍보용 메일링과 도록 발송 시기에 맞춰 작성되는, 전시 홍보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기능했다. 이것이 ‘주례사 비평’이라 희화화되던 비평의 모습이었다.

공백 : SNS & DIY
비평은 죽었지만, 그래도 유령처럼 여기저기 떠돌았다. 그러나 SNS의 활성화로 비평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2014년에 기가인터넷 전국망이 상용화되고, 스마트폰 가입자가 4천만 명이 넘어서면서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었다. 무선 인터넷은 어디서나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됐고, 트위터(지금은 X),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SNS는 언제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온라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메일링 서비스로 대량으로 유포되는 메일은 스팸 처리되기 시작했고, 제작 비용이 많이 드는 선도록은 일주일 안에 쓰레기통에 박혔다. 비용과 파급력 면에서 SNS는 압도적이었다. 도록에 인쇄된 탁한 작품 이미지보다 작더라도 스마트폰 화면에서 발광하는 작품 이미지가 훨씬 더 생생했다. 게다가 전시가 개최되기 훨씬 이전부터 공들여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이때부터 전시는 간략한 작품 배치도와 짤막한 작가노트만 있으면 충분했다. 인쇄물은 전시장에 비치할 리플렛이나 엽서 정도만 있으면 됐다. 작품 이미지는 SNS에 있으니, 그곳에서 보면 됐다. 이런 변화는 2014년부터 활성화되어 2016년 《서울 바벨》로 분수령을 이룬 신생공간 세대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적극 활용했으며, DIY(Do it yourself) 정신이 강해 전시 기획, 글, 홍보, 마케팅까지 작가 스스로 직접하는 걸 선호했다.

전시 홍보 방식이 바뀌면서 홍보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기능하던 비평가의 전시글은 그 실효성을 잃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그런 자리에 비평가가 쓴 전시글이 놓였다. 비평의 공백이었다.

숲속의 빈터 : 후도록
최근 비평의 자리가 조금 달라졌다. 은폐된 진리가 드러나는 자리, 예술이 시작되는 자리라고 하이데거가 말한 ‘숲속의 빈터(Lichtung )’에 비평이 도착한 느낌이다. 이는 독립 기획자나 개별 작가들이 ‘전시 후 남는 건 도록뿐이다’라는 생각에 공감하면서, 후(後 )도록 체제로 변했기 때문이다. 선도록에서 SNS로 옮겨온 작가들에게 도록은, 큰 비용이 들지만, 전시 홍보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최근 도록은 다시 중요해졌다. 작가들은 SNS에 올린 전시 이미지가 시간이 지나 타임라인에서 사라지면, 어딘가에 있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미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지난 전시를 보여주기 위해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한없이 스크롤하는(넘기는 ) 모습이 궁색해 보이기 시작했다. SNS가 홍보용으로는 좋으나 기록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미술계가 어느 순간 인식한 것이다. 전시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전시의 기록인 도록이 전문 자료로서 재부상하기 시작했다. 홍보는 SNS, 기록은 후도록으로 양분되는 분위기다.

기록을 위해서는 전시 전경과 같은 현상성 있는 사진뿐만 아니라, 전시 및 작업에 관한 글도 필요해졌다. 이 때문인지, 이전보다 전시나 작업에 관한 원고 청탁이 늘었다. 심지어 전시가 끝난 후에도 도록 제작을 위해 글을 의뢰하는 때도 있다. 이전에는 미술계를 조망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최근에는 작가의 작업에 관해 분석한 글의 비율이 늘었다. 이 글들은 대부분 후도록에 실린다. 전시가 열리기 전에 밑도 끝도 모를 전시를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경우가 줄었고, 전시를 보고 난 뒤 글을 쓰거나 마무리하는 상황이 늘었다. 기록을 위한 글인 만큼 작가도 글에 관해 더욱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빽빽한 나무숲 사이에서 숲을 느낄 수 있는 ‘숲속의 빈터’처럼, 이제 비평은 작품들 사이에서 작품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자리에 있는 것 같다.

비평의 쓸모?: 여전히 비비평 2024
아카이브를 위한 후도록 제작으로의 변화가 비평의 필요를 일깨운 것일까? 올해 10월에 미술비평가와 관련 전문가, 정부 부처 관계자 등 30여 명이 모여 ‘미술비평 지원’을 주제로 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참여자들이 이례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여기에서 미술비평 지원 확대의 필요성과 고료의 현실화, 지원 사업의 비평 활동 자율성 확대, 7월 시행된 「미술진흥법」과의 연계 방안 등이 논의되었고, 부처 관계자들은 경청했다. 미술비평을 대하는 자세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전문가의 평가다. 후도록이나 ‘작가 조사-연구-비평’ 사업 같은 작가의 성취를 조명하는 사업에서 비평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이 비평의 쓸모일까? 어떤 씁쓸함이 느껴진다.

이러한 글은 작가가 뒷짐을 지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작성되는 글이다. 나는 이런 글을 ‘온전한’ 비평글로 보지 않는다. 올해는 곳곳에서 비엔날레와 중요 전시가 연이어 열렸고, 아트페어도 끊이지 않았다. ‘2024 올해의 청년작가전’(대구 ) 검열 문제가 있었고, 잊힌 ‘대안공간 풀’의 이슈가 SNS에서 재점화되기도 했다. 미술계의 크고 작은 사안에 대한 비판이 SNS를 통해 떠돌았다. 초기술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미술 형식의 변화도 도드라졌다. 미술비평가가 들여다봐야 할 지점이 많다. 그러나 이런 전시와 이슈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비평은 많지 않다. 미술전문잡지에서 의미 있는 주제 비평이 이어지지만, 그때뿐이다. 광주비엔날레의 주제와 정체성 문제를 짚거나 ‘청년작가전’ 검열 문제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글, 시대의 변화를 짚는 글 등이 드문드문 눈에 띌 뿐이다. 지금의 비평 지형은 작가 아카이브를 위한 글로 쏠려 있는 건 아닐까. ‘숲속의 빈터’는 여전히 ‘공백’인지도 모른다. ‘온전한’ 비평이 없는 ‘공백’. 지금도 비비평(非批評 )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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