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나 Bona Park

박보나 : 한낮의 검은 빛

Artist

사진 : 박홍순

〈휘파람 부는 법〉 2024 《휘슬러스》 갤러리조선 전시 전경 2024

박보나 : 한낮의 검은 빛
유진상 계원예대 교수

일상
박보나의 글 속에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라는 표현을 읽었다. 그것이 그의 작업을 요약하는 키워드라고 볼 수 없다고 해도 이 표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술’도 뭐라 규정하기 어렵지만, 실은 ‘일상’이라는 말도 그 의미를 가늠하기 어렵다. 일상이란 무엇인가? 먼저 일상은 ‘반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반복이 당위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일상은 계급이나 제도의 차이와 무관하게 매번 동일한 형태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동일성이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다. 반복하는 일상은 매일 출근하면서 친숙한 거리를 지나가는 것처럼 안전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느껴지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가 극복해야 할, 부정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쳇바퀴와 같은 일상을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모종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배치에 의해 암묵적으로 강요된 것이거나 세계의 부조리에 의해 내게 주어진 한계이며, 그것의 틀은 단단하고 요지부동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우리의 삶을 규정해버리고, 끝장낼 것이다. 일상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나? 자본과 광고는 소비와 과시와 여가를 통해 일상의 극복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한다. 일상 탈출은 자본주의의 이념이다. 물론 그것을 위한 많은 금액을 지불하기 위해 더 가열찬 경쟁과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한편 예술은 일상 속에서 특이성을 발견하라고 가르친다. 예술 안에서 일상은 신화화되고 평범한 것들이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관객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솔깃한 제안에 귀를 기울인다. 소비자이건 관객이건 일상을 초월하여 스펙터클을 추구하는 순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삶으로부터 소외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박보나의 작업은 일상과 예술 모두를 다룬다. 또한 그는 종종 자본주의와 그것이 내포하는 정치적 부조리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그는 세계에 내재하는 구조적 모순, 즉 은폐된 현실과 그것을 지배하는 자본에 대해 비판한다. 예술, 일상, 자본 –이 모든 항을 가지고 상투성을 만들지 않으면서 작업을 전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예술이나 자본 모두 일상을 예외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부분 수행적인 작업과 그것의 기록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박보나가 2013년에 작성한 선언문은 그의 방법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단초를 제공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퍼포먼스 선언문〉
0. 작가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0. 퍼포머를 착취하지 않는다.
0. 연극을 추구하지 않는다.
0. 무용을 추구하지 않는다.
0. 중심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0. 안전한 서사를 가지지 않는다.
0. 좌절과 실패를 추구한다.
0.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선언을 의심한다.

‘~않는다’로 일관하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선언문은 ‘예술적 수행’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일상적 반복’을 회피하기 위해 작가가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했던 조건들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선언문대로라면 이제껏 예술적 작업, 작품이라고 상상했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기존의 예술적 관행들을 상당히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위에 언급한 사실들이 작가에게는 불편한 일이 되는가? 작가는 어떻게 이 규칙들을 작업으로 바꾸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예술적 권위주의나 타인 착취는 그렇다 치고, 작업의 주제나 서사는 왜 부정해야만 하는가? 어째서 좌절과 실패를 추구하며 기존의 모든 선언을 의심해야 하는가? 일종의 결벽처럼 느껴지는 그의 부정들은 그의 창작과 삶에서 어떤 결과들로 이어지는가?

박보나는 생활과 사유의 괴리를 좁히는 작업을 한다. 그의 작업은 그의 글쓰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에는 일기나 수필과 같은 글의 형태를 띠고 있다가 전시를 해야 할 순간이 되면 그것에 사람들과의 대화나 경험의 공유, 협업을 통해 시각적 형태를 부여한다.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고,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 일들은 ‘전시’에서도 시각적 변형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장을 볼 내용을 물어보고 그것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관객들이 전시장에서 들고 다니게 한다(〈봉지 속 상자(La boîte-en-sac plastique)〉(2010) ). 청소 도우미에게 빨래를 의뢰한 뒤 그것들을 젖은 채로 전시장에 널어놓는다(〈Domestic Scale Choreography 2〉(2015) ). 작가는 구두닦이 노동자가 닦은 구두를 신고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전시장을 돌아다닌다(〈쉽게 끝나지 않는 순간〉(2013) ). 도슨트는 전시장 구석구석의 틈과 균열을 문지르고 쓰다듬으며 우산을 든 관객들에게 전시공간의 구조와 역사를 설명한다(〈버튼과 문턱〉(2022) ) 등등. 어찌 보면 그의 작품들은 예술적 개입을 최소화한 일상의 전위(傳位)처럼 보인다.

〈쉽게 끝나지 않는 순간 1〉 오프닝 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분 33초 2013

〈Domestic Scale Choreography 2〉 설치 및 퍼포먼스 2015

등장하는 ‘빨래’나 ‘비닐봉지’는 단순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이나 식료품이 잔뜩 담겨 축 처진 얇은 일회용품이 아니다. 작가는 그것들을 ‘노동과 보상, 개인의 생존과 꿈이 투사되어 있는 은유적 기호 혹은 매개체’로 바라본다. 〈봉지 속 상자〉나 〈Domestic Scale Choreography〉는 전시공간을 찾은 관객이나 전시 관련자들을 초대하여 전시 공간 안에서 ‘일상적’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연출한 작업이다. 일상이 전시와 연결되는 순간 일상은 전시를 교란하거나 변형시킨다. 일상은 전시를 위기에 빠트리는 장치이자 전시의, 나아가서는 예술의 외부에 그것들을 노출시키는 도구가 된다. 물론 예술가들이 일상이라는 장치를 예술을 다루는 데 사용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우리는 1990년대 내내 ‘관계성의 미학’이라는 표제로 잘 알려진 ‘일상성’의 예술을 많이 보았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쟈 (Rirkrit Tiravanija)는 전시장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일상’은 동시대미술의 ‘반-예술적’ 전략을 요약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거슬러 올라가면 플럭서스의 ‘반-예술 선언’이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10년대의 마르셀 뒤샹과 ‘레디메이드’를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선언을 의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수행적 행동을 통해 스펙터클로서의 미술이 처한 자본주의적 역설과 노동의 모순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전시’와 ‘전시장’이 가장 먼저 비판되어야 한다. 기 드보르 (Guy Debord)의 요구처럼, 상업성과 스펙터클로서의 예술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미술관’과 ‘갤러리’를 부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박보나의 작업은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수행성은 수필에 머문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수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선언적 텍스트’가 아니라 그가 ‘영점의 글쓰기’라고 부른, 일종의 산책이나 방황과 같은 것이다.

최근의 박보나의 전시는 노동과 자본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이 ‘공감’과 ‘교감’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추상’이다. 박보나는 최근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추상’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추상은 명확히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혹은 않아도 되는 대상의 생산과 관련된다. 그는 이 전시의 워크숍에서 12명의 여성들에게 각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안에 쥐고 있다고 상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맞히도록 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쥐고 있다고 상상하는 여성들의 손 모양을 드로잉하였다. 이 드로잉 연작의 제목은〈산〉(2024)이다. 이 여성들은 탈성매매 여성 지원단체 ‘윙 Wing’과의 협업으로 전시와 워크숍에 참여했다. 이 전시의 제목은 《휘슬러스(Whistlers )》(갤러리조선, 2024)이고, 전시의 계기는 ‘윙’에 대한 기사를 접한 작가가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이 전시에 소개된 다른 영상작업에는 12명의 여성들이 서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옆 사람의 휘파람을 이어 부는 퍼포먼스 영상과 이들에게 영감을 받아 작가가 쓴 글이 작가의 지인들이 제공한 티셔츠 위에 ‘휘파람 부는 법’으로 새겨져 전시되고 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폐부 깊은 곳에서 주먹을 꺼내 오목한 중심에 모은다. 목청에 통로를 좁혀 가라앉은 마음을 천천히 문지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 혀를 말아 막았던 공기를 조금씩 뱉는다.  휘 혹은 파, 파 혹은 휘, 휘와 파 사이에 어느새 휘어진 공간이 생기면 이제는 공간에 둥근 모퉁이마다 친구를 세울 수 있다. 휘 그리고 파, 파 그리고 휘, 입술을 오므려 친구가 뱉은 숨을 들이마신다.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게혀끝으로 입천장을 꾹 누르고 기다리다 문득 단맛이 느껴질 때 입술을 벌려 다시 우정을 내쉰다. 순서대로 한 명씩 같은 동작을 이어나간다. 휘휘파파 파파휘휘, 오랫동안 말이 되지 못했던 마음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어 곡선으로 퍼지고 모두가 아는 그 노래를 울린다.”

이 텍스트는 박보나의 작업이 지닌 ‘공감’과 ‘교감’의 핵심적 방법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행은 일종의 명상처럼 개개인이 몰입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타인들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 다같이 특정하게 주어진 절차를 통해 다른 차원에 진입하는 것은 매우 필요해 보인다. 동시에 이 텍스트가 지닌 추상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탈성매매 여성들과의 우정과 연대, 그리고 공감을 확산하기 위해 작가는 ‘휘파람 부는 법’을 제안한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저 텍스트가 가리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박보나의 작품에서 움직이는 것은 특정하기 어려운,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어떤 마음의 전달이다. 여기서 추상은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비정형의 기계로서 작동한다. 다른 한편으론, 이 추상적 과정을 작가 스스로 노동과 자본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 지을 때, 마음은 구체적 지향을 드러낸다. 마음은 정치적 지평이 된다.

〈휘슬러스〉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 5분 3초 2023

〈휘휘파파〉 단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 22분 52초 2024

의심
마샬 맥루한은 모든 뉴스가 가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모든 뉴스는 가짜다. 그것은 이용된 매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유사-사건이다. 어떤 매체도 정직하게 보도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것은 모두 가짜이며, 문제가 되는 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의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 번째는 경로 혹은 전달자에 대한 것이다. 사건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두 번째는 대상, 기원 혹은 발신자에 대한 것이다. 나는 메시지가 실재하는지 혹은 애초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그것은 나 자신, 즉 수신자이자 최종적인 현존재인 나의 조건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성경에 등장하는 도마는 의심의 사도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의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절대적 사건이자 선(線)인 ‘죽음’을 넘어서는 초월적 사건에 대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의심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았고, 그 확인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신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의심하지 않고 믿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마태복음 11:25-30)”이 성서적 사건에서 예수는 전달자이다. 그가 자신의 부활한 신체를 통해 전하는 것은 초월적인 섭리에 대한 믿음의 필요성이자 그 절대성이다. 신약을 통해 우리는 이 놀라운 뉴스를 전해 듣는다. 발신자는 누구인가? 전달자는? 그리고 이 뉴스를 접하는 나는 누구인가?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에 있는 호모 사피엔스인가, 종교적 목적론의 세계에 참여하는 피조물인가, 사회적 발전의 막바지 단계를 향해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인가, 아니면 인공지능 기계에 세계를 넘겨주기 직전에 도달한 파국 단계의 개체인가? 각각의 경우 메시지에 대한 의심은 그 근거와 범주를 달리하게 될 것이다.

〈1967_2015〉 단채널 비디오, FHD, 컬러, 사운드 12분 36초 2015

〈블랙홀 2〉 2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 12분 1초 2019

폴리 아티스트(음향 예술가)들과의 협업은 박보나의 대표적인 연작 중 하나다.〈코타키나 블루 1(Kotakina Blue 1)〉(2015)은 ‘영화 노동자’인 음향 예술가 이창호의 작업 10가지를 10개의 모니터로 전시한 작품이다. 이창호는 남국의 휴양지에서 들리는 10가지 소리들, 즉 숲속을 혼자 걷는 소리, 이른 아침 바다의 파도 소리, 해변을 혼자 걷는 소리, 배를 저어 강을 건너는 소리, 버드나무 사이를 휘젓는 바람, 둥근 바람, 평화롭게 자전거를 타는 소리, 천천히 산에 올라가는 소리, 편평한 바람, 여름 빗소리 등을 여러 가지 평범한 도구들을 이용해 제작했다. 이 작업은 복사기 제작 업체인 신도리코의 지원으로 그 사옥 내 복도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다. 소리와 이미지의 ‘복사’라는 공통적 맥락으로 이미 흥미로운 이 작업은 미디어에 의해 보이는 풍경 (열대의 휴양지)과 실제 제작현장 (열악한 음향 노동자의 작업실)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실제와 이미지의 간극을 보여주었다. 이 작업에 대한 글에서 작가는 ‘동물의 왕국’과 같은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흥미를 위해 연출된 것이며 실제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보기 좋은 이미지를 의심하면, 화면 밖 너머의 훨씬 먼 곳까지 갈 수 있다. 야생이나, 열대의 섬, 기적의 금광이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인간 중심적 태도나 영화 산업 노동자들의 존재, 그리고 독재의 음흉한 모의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3 박보나에게 의심은 음모와 술수로 점철된 한국의 근대사와 그로 인해 파괴된 인간적 조건들을 인지하는 기본적인 저항의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후의 〈코타키나 블루 2〉(2015 ), 택배로 배달된 물, 불, 공기, 흙은 언박싱하는 소리를 담은〈4 원소〉(2021), 광산에서 매몰된 광부의 구출 과정을 다룬〈1967_2015〉(2015), 이중간첩 혐의로 몰려 1969년 처형된 이준규의 이야기를 다룬〈태즈메이니아 호랑이〉 (2018) 등은 모두 현대사의 정치적 사건들 혹은 상상 속의 대상들을 소리로 재현한 작업들이다. 배은아는 박보나의 작업에 대해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를 인용하면서 ‘노동’과 ‘작업’ 그리고 ‘정치적 행위’가 박보나의 예술적 조건을 구성한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박보나의 작업에 대해 가장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검은색
그럼에도 박보나의 작업에서 가장 독특한 작업은 연작 〈블랙홀〉(2019 )이다. 〈블랙홀 1〉은 1960~1970년대에 한국에 유성들이 떨어지던 순간들과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을 병치시킨 작업이다. 작품에는 각각 크기가 다른 검은색 원들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일상적인 표현으로 ‘블랙홀처럼’ 사라지거나 빨려 들어간 사실들에 대한 암시를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검은색 원들이 만들어내는 ‘소격 (疏隔) 효과’는 박보나의 작업을 좀 더 폭넓은 해석의 차원으로 열어놓고 있다.〈블랙홀 2〉는 배우들이 돌아가며 네 가지 동작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동작, 기도하며 눈치를 보는 동작, 우는 동작, 진압과 지시를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고, 다른 한 채널에서는 배우들이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자신들의 퍼포먼스와 역할, 세계와 창작, 질서와 무질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는 2채널 영상작업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연기할 8가지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블랙홀 3〉에 등장하는 꿈의 대상이다.〈블랙홀 3〉는 영국 입스위치(Ipswich) 지역의 중고 물품 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한『1000개의 고전적 꿈 해석(The Classic 1000 Dreams)』이란 책에 등장하는 8개의 꿈 이야기–도토리, 철학자, 과부, 예수님, 유인원, 은행원, 고리대금업자, 중국 남자의 이야기–가 적힌 페이지가 불에 탄 종이 사이로 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 ‘블랙홀’은 실현되지 않는 꿈속의 사건, 허공을 떠도는 말들, 반복되는 일상적 행위, 간극과 소외 등을 함축적으로 가리킨다.〈블랙홀 4〉 는 전시장 여기저기에 놓인 8개의 세면대와 거기에 담긴 물, 그리고 수면에 비친 검은 공의 그림자와 거기에 적힌 8개의 숫자들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의 존재는 오직 제목에 의해 지시되어 있지만, 그로 인해 이 세계는 편재하는 블랙홀의 일부가 된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들 사이사이의 그림자와 반영들, 언어와 시선의 틈과 경계들 위에 어른거린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 읽게 된다.〈휘휘파파〉(2024)에서 친구가 들려주는 귓속말과 화자가 내뱉는 말 사이의 어두운 공간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이 검은색과 연관될 것만 같다. 마치 한낮의 검은 빛과도 같은 중첩과 배치로 이루어진 ‘읽기’의 공간이 펼쳐져 있다.

*본 원고는(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4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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