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기계–생명체 :
욕망이 독립해서
스스로 생명체가 되는 이야기
안진국 미술비평
Special Feature
추상적인 감정은 물질화되곤 한다. 사랑은 반짝이는 반지가 되고, 감사는 리본 묶인 선물 상자가 되며, 미움은 찢긴 편지로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 사회에서 다양한 감정은 단순히 무형의 상태로 머물지 않고, 물질적인 형태로 환원되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감정이 한 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 감사, 미움과 같은 감정의 아래에는 항상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반지와 선물 상자에는 좋은 화답을 바라는 욕망이, 미움에는 상대방이 불행하길 바라는 욕망이 숨어 있다. 인간 사회는 어쩌면 욕망이 끊임없이 들끓는 장(場)일지도 모른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 기계 생명체를 창작하는 최우람은 자신의 작업이 “인간 사회 틈에서 살고 있는 욕망이 독립해서 스스로 생명체가 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기계는 인간이 가진 욕망의 현시
미국의 기술철학자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권력과 자본의 목적에 따라 사회 전체가 하나의 기계처럼 작동하는 현상을 ‘거대 기계(megamachine)’라고 정의했다. 이는 물질적 · 기술적 시스템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구조를 포함한다. 도시는 거대 기계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도시의 기반 시설과 기술은 거대한 기계적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인간들의 역할과 관계, 조직을 통해 형성된 비가시적 구조 역시 도시를 하나의 거대 기계처럼 작동하게 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최우람은 기술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에서 유기체적 면모를 발견했다. “서울 대치동에 살았는데 집 창밖으로 건물이 신축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건물이 쑥쑥 자라나는 생명체처럼 느껴졌어요. 아, 우리가 ‘기계의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했죠.”2 “성장한 후에, 어느 날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며 야생의 물소 떼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또 개발이 한창인 강남구에 살았을 때, 신축 빌딩이 하루하루 자고 나면 더 높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서 성장하는 유기체 같은 느낌을 받았죠. 이런 것들이 제가 작품에서 기계와 생명체를 결합하게끔 한 영감을 주었습니다.”3 인간의 사회적 특성이 집약된 도시는 욕망의 분화구로, 편재해 있는 욕망이 아파트가 되고, 자동차가 되고, 전광판이 되어, 하늘에 닿을 듯 올라가고, 도로를 가득 메우고, 쉬지 않고 발광하며 광고한다. 최우람은 이러한 모습 속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체를 느꼈던 것 같다. 이 때문일까, 그는 도시라는 거대 기계 안에 새로운 기계 생태계를 꾸리고, 기계가 생명체처럼 살아간다는 가상의 세계를 펼쳐놓는다. 예를 들어, 〈울티마 머드폭스〉(2002)는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견된 가상의 생명체이고, 〈에코 나비고〉(2004)는 도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핸드폰 목소리의 전파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어바누스〉 시리즈(2006)는 도시의 높은 빌딩 위에서 에너지를 섭취하며 살아가는 가상 생명체이다. 도시는 작가에게 유기체적 기계를 떠올리게 하는 근간이 된다.
최우람은 작업 초기부터 “기계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연계에 존재한다. 기계들은 인간의 욕망을 근본 에너지로 삼으며, 오늘날까지 진화를 거듭해 왔다.”4 라고 말했다. 기계를 단순한 무기체가 아닌 생명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고, 여기에 원초적이며 추상적인 욕망이라는 감정을 결합해 기계와 생명의 관계를 서사화했다. 그는 이를 ‘기계 생명체(Anima Machines )’라고 명명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키네틱 아트로 불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단순히 기계의 움직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관계, 그리고 기계의 존재론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기계는 원래 인간의 생물학적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다. 그런데 이러한 기계가 인간에게 진보와 향상을 향한 욕망을 추동하며, 인간의 조건과 삶을 변화시킨다. 기계는 인간이 만든 도구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제어하고 더 큰 진보와 향상을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기계는 인간이 가진 욕망의 현시인 것이다. 최우람의 기계 생명체는 기계에 투여된 인간의 욕망이 물질화되어 나타난 살아 있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욕망–기계–생명체의 연대기
최우람이 기계와 생명체를 결합한 기계 생명체를 본격적으로 선보인 1998년부터 그의 작업은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작업은 독보적이었으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형식으로 평가되었다. 이후 2006년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도시에너지》와 2008년 영국 리버풀비엔날레 등을 통해 그의 작업은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2022년부터 2023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 최우람 –작은 방주》는 그가 국내 미술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최우람은 ‘욕망-기계-생명체’라는 세 겹의 중첩된 요소를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데, 이 요소가 시기마다 비중의 편차를 보이며 다양한 형식의 작업으로 변주되고 있다. 그의 작업 시기는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초기 실험 시기’( 1998~2001 )와 ‘기계 생명체 도약기’(2002~2011 ), ‘재료와 형태의 확장 시기’(2012~2021), 그리고 ‘기계 생명들의 회집체 시기’(2022~)로 나눌 수 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는 ‘초기 실험 시기’로, 첫 개인전 《문명 숙주》( 1998 )와 2번째 개인전 《170개의 박스로봇》(2001 )을 개최한 시기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테크노디스토피아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인간의 욕망을 의식적으로 기계적 형태로 발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는 ‘기계 생명체 도약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작가 자신과 기계 생명체들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알려진 시기로, 테크노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 기계가 인류의 동반자로 나타난다. 이 시기는 ‘기계-생명’에 초점을 맞춘 시기로, 본격적으로 현시대에 실존하는 생명체처럼 보이게끔 다양한 생물학적 정보 등을 함께 제시하면서 작업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계 생명체가 동식물을 연상시키는 단일체 형태로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울티마 머드폭스〉(2002 )는 물고기,〈녹스 펜나투스〉(2005 )는 새, 〈제트 히아투〉(2004 )는 상어, 〈우나 루미노〉(2008 )는 꽃, 〈익센타 램프〉(2013 )는 파리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기계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전파나 에너지를 먹는 것뿐만 아니라, 〈어바누스〉 시리즈처럼 다음 세대를 탄생시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무기물로서의 기계가 지녔던 특성과는 구분되는 생명체의 특성이다. 최우람은 기계 생명체에 생물학적 설정을 부여하고, 모터와 기어, 구동부로 이루어진 정교한 기계역학 설계를 통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현함으로써 가상 생명체에 실재감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설정과 움직임은 기계의 생명력에 대해 사유하도록 이끈다. 특히 그의 기계 생명체 중 상당수가 ‘숨 쉬는’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숨 쉬는 것과 생명력은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다. 기계 생명체의 영문명인 ‘anima machines’에서 ‘anima’가 라틴어로 숨결, 호흡을 뜻한다는 점에서도 작가가 생명과 호흡의 연관성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작가는 라틴어를 자주 사용한다. 최우람은 각각의 기계 생명체에 가상의 학명을 부여했는데, 이를 라틴어로 적고 있다 ). 예를 들어,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2008 )는 갈비뼈 혹은 갑각류의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들썩이며 커다란 숨을 뿜어내는 것으로 움직임을 시작하고, 바다사자를 닮은 기계 생명체 〈쿠스토스 카붐〉(2011 )은 들숨에서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가 날숨에서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내려가며, 실제 호흡과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호흡의 표현은 기계가 살아있는 존재라고 믿게 하는 핵심 기제라고 할 수 있다.
2012년부터는 ‘재료와 형태의 확장 시기’로 최우람이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던 시기다. 이 시기 작가는 큰 전환점을 맞이했는데, 물질적인 면과 장인 정신이 중심이 되었던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서 사유와 개념 중심으로 확장하게 된다. 이에 따라 더는 탄생 설화나 생물학적 정보 등 가상 설정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에 영속성을 위해 주로 금속과 플라스틱 소재를 사용했는데, 이 시기에는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이전과는 다른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전선으로 천사를 만들기도 하고( 〈허수아비〉 ), 건축물의 형상 사이에 비닐봉지가 떠 있는( 〈파빌리온〉 ) 등 이전과는 재료가 달라졌으며, 형태 또한 동식물을 닮은 기계 생명체에서 천사, 건축물, 회전목마, 로봇, 램프 등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눈여겨볼 지점은 이전보다 상징적 측면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천사 형상을 한 〈허수아비〉(2012 ), 금색의 휘황찬란함과 검은 비닐봉지의 일상성을 대비한 〈파빌리온〉(2012 ),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 〈오로보로스〉(2012 ), 회오리치듯 나선형으로 피어 있는 〈우나 누미노〉(2012 ) 등은 그 형상에서 사회 권력과 인간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후로도 동식물형 기계 생명체를 선보이고 있지만, 이 시기 이후 작업은 상징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 최우람-작은 방주》를 선보인 2022년 이후부터는 ‘기계 생명들의 회집체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내용적인 흐름에서 이전 시기를 잇고 있다. 하지만 상징성은 훨씬 강화되어 나타난다. 큰 차이는 기존 기계 생명체들이 단일체로서 전시장에 놓였다면, 이 전시에서는 모든 기계가 독자적인 하나의 단일체이면서 동시에 회집체로서 거대 기계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머리가 없는 18개의 밀짚맨( strawman )이 지름 4.5m의 둥근 상판을 떠받치고 있는 〈원탁〉(2022 )은 소유를 향한 욕망을 보여준다. 상판 위의 머리를 향한 밀짚맨들이 경쟁 속에서, 그 위를 유유히 움직이는 세 마리의 〈검은 새〉(2022 )는 마치 경쟁의 낙오자를 기다리는 듯 〈원탁〉을 응시한다. 이 두 작업은 단일체이지만 회집체를 이룸으로써 의미를 증폭시킨다.〈작은 방주〉(2022 )도 마찬가지다. 검은 철제 프레임에 흰색이 칠해진 폐종이상자가 덧대어진 35쌍의 노가 도열한 12m의 거대한〈작은 방주〉 안에는 파놉티콘 역할을 하는 〈등대〉와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는 〈두 선장〉, 우주 망원경 〈제임스 웹〉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방주 옆으로 연결되었는지 끊어진 것인지 모를 〈닻〉이 벽에 박혀있고, 뱃머리 장식인, 축 처진 〈천사〉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방주의 한쪽 뱃머리에는 무한히 증폭되는 공간을 보여주는 〈무한 공간〉이 놓여 있고, 반대쪽 뱃머리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이 열리는 영상 작업 〈출구〉가 상영된다 ( 〈작은 방주〉는 양쪽 어디가 뱃머리인지 알 수 없다 ). 방주와 그 안에 실린 작업들, 그리고 주변의 작업들은 각각 단일체로 의미를 지니지만, 회집체가 됨으로써 하나의 거대 기계를 완성한다. 이러한 회집체 방식은 “방주는 결국 아무것도 싣지 못하는 공허한 욕망의 덩어리”임을 더욱 강력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욕망은 최우람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뚫고 나와 기계 생명체로 우리 앞에 놓인다.
그가 보여주는 우리의 욕망은 금빛 건축물이며,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이며,
머리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밀짚맨이다.
낙오자를 호시탐탐 노리는 검은 새이며.
앞뒤 없는 방주이며,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는 두 선장과 제임스 웹이 된다.
욕망은 무한히 증폭된 공간과 빠져나갈 수 없는 출구를 만든다.
욕망은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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