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 하툼》
화이트 큐브 서울 3.6~4.12

모나 하툼, 이토록 친밀한 폭력

Critique

모나 하툼
화이트 큐브 서울 3.6~4.12
이진실 미술비평

〈미스바〉 황동 랜턴, 금속 체인, 전구, 회전 전동 모터 랜턴: 58×32×28.5cm 2006~2007
© 모나 하툼

모나 하툼, 이토록 친밀한 폭력

베이루트 출신 작가 모나 하툼(Mona Hatoum)의 국내 첫 개인전이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모나 하툼은 사회적 조건으로서 여성의 신체성을 보여주는 강렬한 퍼포먼스와 비디오 작업으로 주목받았으며, 1990년대 이후로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설치미술 및 조각으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시적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나에게 모나 하툼이라는 이름은 〈거리 측정〉(1988)이라는 강렬한 비디오 작업으로 각인되어 있다. 목욕하는 어머니의 사진과 보이스오버로 구성된 영상은 무척 강렬하면서도 여러 레이어가 중첩된 모호한 인상을 남겼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작가와 어머니의 대화, 그 위로 겹쳐지는 내레이션, 그리고 역광으로 윤곽만 간신히 드러나는 어머니의 몸과 그림자, 그리드와 아랍어 글자가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여러 겹의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특히 그리드 위에 철조망처럼 드리워진 아랍어 글자들은 아득한 대화 소리와 함께 한편으로는 사적인 내밀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망명, 실향, 전쟁으로 인한 상실과 고통과 같은 정치적 주제를 강력하게 드러냈다.

물론 이번 화이트 큐브 서울 개인전에서 이러한 초기의 강렬한 서사성과 정동은 기대하기 어렵다. 1990년대 이래로 하툼은 다매체 설치 및 조각으로 작업 방식을 전격 옮겼으며, 이주민 가족 출신 여성으로서 겪는 트라우마, 신체성에 관한 발언은 일상적이면서도 언캐니한 사물성과 공간성의 체험으로 전이되었다. 이러한 전이로 인해 초기 퍼포먼스와 비디오 영상이 발산하던 미세하면서도 강렬한 전율은 다소 세련되고 역설적인 미감으로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하툼은 한 인터뷰에서 ‘레바논 출생,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 여성 작가’라는 그녀의 정체성을 통해 사람들이 보고 듣기를 원하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배반하고자 한다고 표명한 바 있다.1 이제 일상적이면서도 환상적으로 보이는 하툼의 조각 및 설치 작업들이 말 그대로 ‘화이트 큐브’에 자리한다. 외양적으로는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보이는 단순함과 반복, 집안의 기물들이 주는 일상성의 감각은 이제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이를 통해 하툼의 초기 작업들이 담고 있던 메시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의 생애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하는 일종의 제도적 폭력, 구분 짓기, 공간적 단절에 대한 질문의 지평으로 변환된다.

〈정물(의약품 캐비닛) VI〉
블로운 유리, 강철, 유리 캐비닛 73.5×61×34.5cm 2025
© 모나 하툼, 화이트 큐브

무거운 위트, 현실적인 언캐니
휠체어, 가림막, 의약품 캐비닛, 전등과 같은 하툼의 조각과 설치는 ‘홈바운드’의 성격을 지녔지만 결코 안락하지 않다. 이 조각들은 언제나 의외의 물성, 형태로 역설적인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형태에서 기대되는 특질과 쓸모를 배신할 뿐 아니라, 위협적이고 기괴한 물건으로 변한다. 가령, 〈무제(휠체어 II)〉(1999)는 신체를 지탱하고 보조하는 휠체어의 모양이지만 똑바로 앉을 수 없게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은 보조기기라기보다 말끔히 소독된 병원 카트나 해부대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톱날 모양의 휠체어 손잡이는 치명적인데(다른 연작, 〈무제(휠체어)〉의 손잡이는 식칼 모양이다), 이는 돌보는 이 또는 간호하는 이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 같다. 돌봄의 대상도 주체도 부재하는 가운데, 위트라고 부르기에 섬뜩한 사물적 왜곡은 언캐니한 환영 속에 신체를 둘러싼 사회적 구조와 모순이라는 모종의 현실성을 불러온다.

이처럼 언캐니한 상상력의 외양을 띠고 은밀히 드러나는 현실성, 즉 장애, 돌봄과 관련한 신체적 곤경, 의존적 관계, 제도적 격리라는 문제의식은 신작 〈분리〉(2025)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이칸막이는 시각적으로 전혀 가려지지 않는 철조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철조망은 그녀의 초기작 〈거리 측정〉에서 그리드에 걸쳐진 아랍어 문자를 환기시키는 한편, 시각적 분리가 금지와 위협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불러들인다. 이번에 전시된 〈분리〉는 약 20년 전부터 그녀가 선보인 〈강판 분리〉(2002)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주방에서 쓰는 강판의 날이 3단 가림막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베이고 갈리는 신체적 고통을 상상케 만드는 동시에, 시각적 ‘보호’라는 기능을 완전히 배신하고 보는 이를 격리, 감금의 공포로 빠뜨린다.

《모나 하툼》 화이트 큐브 서울 전시 전경 2025
사진: 전병철 
제공: 화이트 큐브

공간, 사물, 신체의 인사이드 아웃
하툼의 작업에서 그리드와 펜스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티프로서 다양한 시각적 은유와 병치를 통해 역설적인 의미망을 만들어내곤 한다. 특히, 가림막, 새장, 창살과 같은 분리의 프레임은 (초기 비디오 작업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친밀감과 거리감의 역설을 자아낸다. 철조망으로 된 〈분리〉나 콘크리트 타설용 강철바로 제작된 〈거울〉(2025)은 사적인 친밀함에 기반하는 보호, 애정(자기애를 포함해), 연약함이라는 관념을 의심케 하고 그 관계성을 다시 측정하게 만든다. 그것은 격리가 아닌가? 그것은 학대가 아닌가? 나는 저 창살 안에 갇힌 자인가, 아니면 바깥에서 갇힌 자를 들여다보는(혹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자인가. 이처럼 하툼의 ‘초현실적’인 조각들은 위트와 언캐니를 오가며 친밀함과 사적인 것을 제도적 폭력과 비상사태로서의 현실로 뒤집어놓는다.

무엇보다 이러한 위트와 역설의 핵심에는 신체의 형상이 놓여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몸을 지탱해 주는 지팡이(〈무제(지팡이)〉(2011))가 물렁한 고무로 제작되어 벽에 기대있는가 하면, 몸을 장식하는 목걸이는 작가의 흰 머리카락으로 빚어졌고(〈헤어 네크리스〉(2025)), 거의 완벽한 구(求球)를 이루는 콘크리트 조각은 뇌처럼, 아니 내장처럼 보인다(〈인사이드 아웃〉(2019)). 신체의 일부는 보석이 되고, 그 연약함은 사물들의 ‘살’로, ‘골수’로 변형된다. 반대로 사물들의 견고함이 우리 자신의 심리적인 강박과 사로잡힘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정물(의약품 캐비넷)〉 VI 작업은 약 캐비닛 안에 찬란한 빛깔을 발하는 작은 유리 조각품들을 진열한 작업이다. 그러나 ‘정물’로 명명된 이 작은 유리 조각들은 실상 수제 수류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름다운 소유물과 폭탄 사이의 거리는 얼마만큼일까. 하툼의 작업에서 폭탄은 단순히 분쟁 지역의 참상을 환기시키는 사물이 아니라, 종파적 분쟁과 전쟁의 폭력을 야기하는 문젯거리로서 (여성) 신체라는 함축을 지녀왔다. 갤러리 입구에 걸린 오래된 작업 〈나의 죽은 몸 위에〉(1988~2002)라는 포토몽타주처럼 전쟁의 폭력과 공포는 보호의 담론을 미끼로 여성의 신체 위에서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아랍어로 ‘불을 밝히는 등’을 의미하는 〈미스바〉(2006~2007)는 황동으로 된 등이 회전하는 작품이다. 별빛처럼 빛나는 불빛 사이로 무기를 든 남자들의 형상이 보는 이를 에워싸며 공포의 감각을 주입한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집안, 그리고 폭탄이 투하되는 공포의 장소 사이의 거리는 빛과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이처럼 하툼의 가구, 조명이 안겨주는 역설은 우리가 사물과 맺는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신체적, 심리적 폭력과 공포의 구조를 환기시킨다.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