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zanne Valadon

그리는 즐거움을 위한 그림
World Report

〈파란 방〉캔버스에 유채 90×116cm 1923 퐁피두센터 전시 전경 2025
사진: Jacqueline Hyde
제공: Centre Pompidou, MNAM-CCI
배포: GrandPalaisRmn

그리는 즐거움을 위한 그림
변선민 문화예술기획

2030년까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2025년 마지막 전시로 《수잔 발라동》이 개막했다. 1967년 회고전 이후 58년 만에 대대적으로 열리는 발라동의 전시를 위해 퐁피두센터의 방대한 아카이브가 개방되었고,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이 협력하고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스위스 에르미타주 파운데이션과 주요 프라이빗 컬렉션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발라동의 작품 200여 점이 총출동한 퐁피두센터에서 발라동의 작품세계와 발라동과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까지 만나보자. 전시는 5월 26일까지.

수잔 발라동 회고전은 최근 몇 년간 퐁피두센터가 예술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여성 예술가들을 소환하여 그들의 작품세계와 미술사적 기여를 다시금 강조하려는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퐁피두센터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팔레 드 도쿄에 위치해 있던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은 개관 2년 차인 1948년 발라동의 작고 10주년을 기리는 회고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한 이래 처음으로 열린 여성 예술가의 개인전으로, 생전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들었던 수잔 발라동의 명성과 예술사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은 1967년 한 차례 더 발라동의 회고전을 개최하는데, 첫 전시로부터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여성 작가의 개인전을 진행하는 일은 여전히 매우 드물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나탈리 에르노(Nathalie Ernoult), 자비에 레이(Xavier Rey), 키아라 파리시(Chiara Parisi)는 퐁피두센터의 컬렉션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와 비중을 차지하는 수잔 발라동을 다시금 주목하며 발라동의 시대를 앞서갔던 혁신가로서의 면모와 당대 미술계 전반에 큰 변화를 끌어낸 새로운 예술적 흐름의 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점에 주목했다. 큐비즘이나 야수파처럼 당대 주류를 이룬 특정한 미술 사조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50년에 걸쳐 독자적인 방식으로 구축한 발라동만의 작품세계가 마침내 퐁피두센터에 총망라되었다.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분관, 퐁피두 메츠에서 2023년 열린 《Suzanne Valadon. A World of Her Own》 전시를 시작으로 낭트미술관과 2024년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을 거쳐 2025년 퐁피두센터에서 더욱더 확장된 규모의 회고전 《수잔 발라동》이 막을 올렸다. 1967년 회고전 이후 58년 만에 퐁피두센터에서 열리는 발라동의 전시를 위해 퐁피두센터의 방대한 아카이브가 개방되었고,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과 긴밀히 협업했다. 또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스위스의 에르미타주 파운데이션과 주요 프라이빗 컬렉션의 작품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발라동의 좋은 친구이자 컬렉터였던 로베르 르 마슬(Robert Le Masle)이 1974년 퐁피두센터에 기증한 발라동의 개인 아카이브 속 자료들이 더해져 더욱 의미 있고 볼거리가 풍성한 전시가 됐다.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희귀한 드로잉 작품들을 비롯해서 발라동의 독창적이고 선구자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수십 점의 자화상과 누드 작품, 정물화, 풍경화 등 총 200여 점이 발라동과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어 발라동이라는 작가의 총체적인 작품세계와 당대 미술계의 경향을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관찰을 통한 배움: 마리아에서 마리 그리고 수잔으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침대 등받이에 비스듬하게 기대 누워 담배를 문 채로 화면 한쪽을 응시하는 여성이 그려진 〈파란 방(The Blue Room)〉(1923)에서부터 전시는 시작한다. 당당한 표정과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흘러나오는 편안한 자세를 한 화면 속 여성의 침대 발치에는 책 두 권이 올려져 있다. 주위에 걸려있는 발라동의 여러 자화상을 통해, 화면 속 여성의 얼굴이 발라동과 닮지 않았음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발라동의 커리어 정점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전형적인 자화상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여성이 당대의 숱한 편견과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화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해 가던 화가 수잔 발라동이 스스로를 그린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물 던지기를 위한 습작〉트레이싱지 위에 목탄 62×82cm 1914 퐁피두센터

〈그물 던지기〉 캔버스에 유채 201×301 cm 1914 퐁피두센터
사진: Jacqueline Hyde
제공: Centre Pompidou, MNAM-CCI
배포: GrandPalaisRmn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발라동과 예술의 조우는 마리(Marie Clémentine Valadon)라는 본래의 이름이 아닌 마리아(Maria)라는 스스로 만든 이름으로 화가들의 스튜디오에서 모델 일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의 어머니에게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발라동은,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에 힘을 보탰다. 서커스의 곡예단원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그만두면서 친구의 추천으로 14세부터 모델 일을 시작했다. 피에르 퓌비 드 샤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조각가 알버트 바르톨로메와 발라동에게 수잔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알려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까지, 발라동의 다듬어지지 않은 생생한 에너지와 눈빛, 풍만한 신체에 매력을 느낀 화가들은 발라동을 모델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발라동이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으로 알려진 〈자화상〉(1883)은 발라동이 모델로 일을 하던 시절인, 18살에 그린 작품이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부드러운 배경에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선명한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다부진 표정에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응시의 대상이던 발라동이 이제는 응시의 주체가 되어 화면 너머를 바라본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삶과 빛, 형태의 무수하고 변화무쌍한 측면을 표현하려 노력하는 것만이 예술가의 유일한 규칙이다.”

발라동은 모델 일을 하면서 화가들의 어깨너머로 이들이 어떻게 선을 쓰고, 형태를 표현하는지를 관찰한 뒤 쉬는 시간에 혼자 연습해 보곤 했다. 독학으로 미술을 시작한 발라동은 자신의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발라동의 재능을 알아본 로트렉과 바르톨로메는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드가에게 발라동을 추천한다. 발라동의 드로잉을 본 드가는 재능에 감탄하며 칭찬했고, 후에 발라동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불러 동판화 기법과 드로잉 등을 가르치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잔 발라동》 퐁피두센터 전시
전경 2025 사진: Audrey Laurans
제공: Centre Pompidou

가족 초상화
발라동은 자신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의 초상을 끊임없이 그렸다. 발라동이 남긴 400여 점의 작품 중 50여 점에 가족이 등장한다. 발라동은 자신이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가까운 이들을 가감 없이, 하지만 친밀하고도 강렬하게 화폭으로 옮겼다. 비용을 내고 모델을 고용할 형편이 아니었던 발라동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보면 주위 사람들을 모델 삼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18살에 미혼인 채로 낳은 하나뿐인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는 어린 시절부터 발라동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했고 평생을 함께한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 연인과 남편들, 가까운 이들의 초상을 여럿 제작했다. 발라동은 수많은 가족 초상 중 유일하게 한 작품, 〈가족 초상〉(1912)에만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발라동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작품 역시 꾸밈이나 과장이 없다. 어깨를 곧게 펴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발라동의 뒤로 주름이 가득한 얼굴의 어머니 마들렌이, 화면의 앞쪽에는 아들 위트릴로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 발라동의 왼편에는 연인 앙드레 우터가 서 있다. 우터는 위트릴로의 친한 친구이자 발라동과는 20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이 둘은 1909년부터 연인관계로 발전해 5년 뒤 결혼한다. 작품 속 인물 중 유일하게 화면 밖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발라동은 기묘하게 엮인 네 명의 가족 구성원 중 자신이 이 가족의 중심이자, 가장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발라동이 처음으로 그린 인물 초상은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족의 초상이 전시된 섹션을 돌아 나오면 별도로 마련된 벽에 검은 중절모와 안경을 쓴 남성의 초상이 걸려있다. 가까이 보기 위해 그 앞에 서자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20세기 초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로 평가받는 에릭 사티의 초상으로 발라동이 그린 첫 번째 유화 작품이다. 연인 사이이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그렸다. 사티는 발라동을 악보 위에, 발라동은 사티를 캔버스 위에 그렸다. 아직 초상화가 익숙하지 않았던 초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인상 표현과 색감, 전체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발라동의 재능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이 둘은 6개월간의 강렬한 연애 끝에 헤어졌고, 사티는 결별 후에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벡세이션」을 작곡했다. 〈사티의 초상〉 앞에서 흘러나오는 이 곡의 악보에는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미동도 없이 840번을 반복 연주하라’는 노트가 적혀있다. 발라동과 헤어지고 은둔 생활을 했던 사티가 죽고 나서 그의 집에서는 발라동이 그린 사티의 초상과, 벡세이션의 악보 그리고 발라동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뭉치가 발견되었다.

 〈바이올린 상자〉 캔버스에 유채 81×100cm 1923
사진 제공: Paris Musées,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나는 사람을 알기 위해 그린다
사티와의 결별 이듬해인 1894년 발라동은 드로잉 5점을 《국립미술협회 살롱전》에 출품하고 여성화가 최초로 전시할 기회를 얻었다. 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발라동의 재능을 높게 평가한 드가가 출품된 5점을 모두 구매하면서 발라동의 작가로서의 유명세가 시작되었다. 이후 드가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발라동에게 동판화 기법을 가르친다. 1896년 화상(畵商)이자 편집자였던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발라동의 판화를 출판한다. 다양한 전시로 인지도를 높여가던 발라동에게 1909년 앙드레 우터와의 만남은 발라동의 세계를 결정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터를 통해 직업적으로는 물론 사적인 교우의 영역까지도 폭넓게 확장한 발라동은 1920년대에 들어서 화가로서의 유명세와 높아진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상류사회와 미술계 인사들, 컬렉터, 유명인들의 초상을 다수 제작한다. 평론가 귀스타브 코키오의 부인인 마우리시아 코키오, 화가 조르주 카스의 부인 나라 카스, 여성 사업가 마담 레비 등의 초상을 제작했고, 이중 나라 카스와는 평생을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주로 상류사회 여성들의 초상을 그렸지만 드물게 남성의 초상도 제작했다.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발라동에게 중요했던 사람들로, 앞서 소개한 작곡가 사티와 모리스 라벨, 컬렉터인 찰스 웨이크필드-모리, 딜러이자 친구였던 폴 페트라이드, 발라동의 가족 모두와 가깝게 지내면서 발라동을 헌신적으로 후원했던 컬렉터 닥터 로베르 르 마슬 등이 그 주인공이다. 닥터 르 마슬은 작품 속에서 화려한 색감의 천이 덮인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뒤편으로는 벽에 기대어진 여러 점의 캔버스들이 보이는데, 발라동은 열정적인 컬렉터였던 그의 예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진짜 이론은 자연이 만든다
발라동은 종종 자연을 칭송했다. 하지만 정물과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화가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폴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은 첫 정물 작품으로부터 점차 색감이 살아있고 역동적인 선들이 가득한 구조적인 스타일로 나아간다. 발라동의 정물화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프들이 있다. 수자니(Suzani)라고 불리는 자수가 놓인 하얀 천으로 〈정물화〉(1920), 〈바이올린 상자〉(1923)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정물화의 배경에 스튜디오에 보관 중인 발라동의 작품의 일부가 엿보이기도 한다. 1930년대 발라동은 가족들과 세인트 버나드 성에 머물면서 토끼와 꿩, 오리 등 우터가 사냥해 온 동물들을 소재로 여러 점의 정물화를 남겼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꽃과 화병을 그려 자주 주변인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삶의 기쁨〉 캔버스에 유채 122.9×205.7cm 191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MMA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배포: GrandPalaisRmn

누드: 여성의 시선
발라동은 오랫동안 남성 화가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누드화에 일찍부터 과감히 도전했다. 발라동의 작품 속 인간의 몸은 이상화된 완벽한 신체가 아니다. 발라동은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몸을 따듯하고 감각적인 색감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1909)는 발라동이 그린 첫 누드화이자 여성 화가가 벌거벗은 남성을 그린 첫 작품으로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이 작품은 발라동이 우터와 처음 만난 해인 1909년 그와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창세기의 전통적인 도상학을 대담하게 전복시켜 사과를 따는 자신과 이를 돕는 듯한 모습의 우터를 누드로 표현했다. 기존 작품에는 발라동과 우터의 벌거벗은 몸에 성기가 직접적으로 묘사되었던 반면 1920년《앙데팡당전》에 출품한 버전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우터의 성기가 포도잎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후 발라동은 여성 누드에만 집중하는 시기를 보낸다. 발라동의 여성 누드는 기존의 사회적, 예술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다. 여성의 몸을 향한 남성의 욕망이 담기지 않은, 여성이 바라보는 여성의 몸을 화면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야외에서 목욕하는 여성’이라는 테마는 드가, 르누아르, 세잔 그리고 다수의 화가에 의해 반복적으로 다뤄져 왔다. 〈삶의 기쁨〉(1911)에서 발라동은 앙리 마티스의 동명의 작품에서 제목을 빌려오되, 전복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다. 목욕하는 여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던 남성 화가들은 여성의 벗은 몸을 보는 남성의 관음적인 시각을 담아 여성의 몸을 대상화했지만, 발라동은 작품 안에 남성의 누드, 우터의 나체를 그려 넣어 목욕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과 그 남성을 바라보는 화면 밖 관객의 시선을 이중으로 상정했다. 목욕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한 화면에 존재하며 미장아빔(Mise-en-abyme)이 만들어졌다.

1914년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그물 던지기〉(1914) 역시 고전적인 누드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코르시카 해안에서 그물을 던지는 나체의 남성을 우터를 모델로 해서 세 방향의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병치했다. 마치 그물을 던지는 동작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구성으로 모델의 몸과 동작이 강조되었다. 이 작품 역시 사전에 제작한 드로잉에서는 남성의 성기가 그물로 가려지지 않았었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발라동은 남성의 누드를 제작하지 않는다.

발라동이 66세에 그린 〈가슴을 드러낸 자화상〉(1931)은 나이 든 여성 화가가 그린 최초의 누드 자화상이다. 이 해에 발라동은 법적으로도 ‘수잔 발라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세월을 고스란히 맞은 화가의 얼굴은 윤곽이 흐트러지고 주름살이 깊어졌지만 눈빛만큼은 어린 시절 못지않게 강렬하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파리 예술계의 중요한 작가이자 보기 드문 여성 예술가인 수잔 발라동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담함으로 기존의 규범들에 도전하면서 현실을 그려나갔다. 메리 카삿처럼 동시대 활동했던 대부분의 여성 화가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고 작가 활동을 한 데에 비해, 삶의 최전선에서 어깨너머로 독학한 발라동의 예술세계는 고된 현실과 맞닿아 있는 대신, 그 어떤 제약과 속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항상 질문하고 눈앞의 현실에 진실하기를 바랐던 발라동의 작품들을 통해 선구자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발라동의 50여 년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었던 이번 전시는 예술사에서 소외된 여성 작가를 다시금 조명하는 기회가 되었던 한편, 미술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끌어낸 한 작가의 삶을 통해 역사의 한 순간을 새로운 각도에서 비춰볼 수 있게 해준 기회다.

《수잔 발라동》 퐁피두센터 전시 전경 2025
사진: Audrey Laurans

제공: Centre Pompidou


1 Suzanne Valadon Entretien avec Huguette Garnier Excelsior 10 May 1922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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