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승 Kang Seung Lee

이강승의 퀴어 인식론: 이중성의 (불)가능한 이중화

Artist

이강승/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을 오가며 퀴어 역사와 미술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배제된 소수자의 서사를 재조명하는 작품을 전개하는 다학제적 작가. 에이즈 대위기, LA 폭동 등 역사적 사건과 예술가들의 삶을 기리는 설치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 개인전으로 상파울루미술관(2024), 빈센트프라이스미술관(2023), 갤러리현대(2021) 등에서 전시했다.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2024), 도큐멘타15(2022), 국립현대미술관(2023, 2020) 등 단체전에 참여했고 2023년 아타디아상을 수상했다. 스탠포드대, 게티리서치인스티튜트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뉴욕 알렉산더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사진:루벤 디아즈

 〈무제(윌리엄 도시 스완)〉
종이에 흑연 114×73cm 2020

이강승의 퀴어 인식론: 이중성의 (불)가능한 이중화
이여로
미술비평

이강승의 작업을 그 자신의 말을 따라 “퀴어 계보학”1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단일해 보이는 사태가 “실제로는 여러 개의 산발적 출발지점을 가진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2임을 밝히는 방법인 동시에 국가나 세대를 횡단적으로 연결하며 퀴어 커뮤니티의 가계도를 만드는 일이다. 즉 그에게 계보학은 은유화된 방법론인 동시에 은유화될 수 없는 문자 그대로의 만들기인데, 이러한 ‘A이면서 B이다’의 이중성은 이강승의 작업 전반에서 때로는 비판의 형태로, 때로는 전복의 형태로, 때로는 초대의 형태로 이중화된다.

초기작 〈Covers〉(2015)는 미술 제도가 표방하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실재와 얼마나 상반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칼아츠(CalArts) 라이브러리 중 여성과 유색인종 작가 카탈로그 1,400여 권을 복사하여 전시장을 가득 채웠는데, 이는 2만여 권에 이르는 전체 카탈로그 수와 대비된다. 이강승의 말처럼 이는 제도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소수자성을 지닌 커뮤니티가 처한 이중적 상황”, “가시화를 위해 소수자성을 내세운 정체성의 정치학을 이용하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스스로를 주변화하게 되는” 역설을 이야기한다.3

즉 ‘A이면서 B이다’라는 이중성이 ‘A이면서 not A이다’ 라는 형태로 주어질 때, 논리적으로 같은 의미값을 갖더라도 외부가 표상되지 않는 닫힌 형태가 주체를 분열시킨다. 이러한 ‘이중구속’은 후술할 〈Covers(Queerarch)〉(2020)에서 보여준 커버링의 형식이기도 한데, 퀴어 잡지(A)를 갱지로 감싸 퀴어 잡지가 아닌 무엇(-A)으로 보여야 했던 역사, 그리고 겐지 요시노의 말처럼 “소수자[A]가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을 표현하지 않는[-A] 행동 양식”4이 그것이다.

 〈손의 심장(조슈아 세라핀, 네이슨 머큐리 킴과 협업)〉(스틸) 단채널 4K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분 13초 2023

《이강승: 잠시 찬란한》 갤러리현대 전시 전경 2021

따라서 이강승의 이중성은 ‘공예적이면서 개념적’5이라는 긍정의 미적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정은영의 말처럼 이는 “특정한 맥락을 아는지 혹은 모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의 지평”6으로 열리며 퀴어(성)가 지닌 문화정치, 성정치의 맥락을 배제한다면 ‘퀴어 작가의 섬세한 미감’에 감탄하는 표면적 현상에 이르기도 한다. 따라서 이강승이 관객에게 부드럽게 건네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초대”7가 다른 한편으로 “이강승이 작가로서 한국 미술계에 던져놓은 논쟁거리”8라면, 이 글에서 ‘헤테로 작가’인 나 또한 앨라이(ally)라는 준-당사자인 동시에, 하지만 그보다 “내면화될 수 없는 타자”9라는 이중성의 입장에서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

다시 형식의 문제. 우리는 ‘A이면서 not A이다’의 이중구속을 피해 ‘A이면서 A가 아닌 것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적 규칙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배중률은 어떤 내용(A)이라도 적용되는 사고의 규칙으로 간주되지만 가령 ‘남자가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닐 수는 없다’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이는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현실의 중층을, 또 그렇게 존재하는 경험의 중층을 배제해야 성립된다. 이 중층의 괄호를 다시 내보일 때야 남자(지정성별)는 남자(젠더)이면서 남자(섹스)가 아닐 수 있다(괄호는 매번 달라진다). 이러한 중층의 자기-지시를 금지당하는 사태를 정신분석학에서 “거세”라고 이름한 것은 우연일까. 사회적 상징 체계는 그렇게 거세된 이후에 합류할 수 있는 곳이며, 주체는 그곳에서 끝없는 소외와 분열 상태에 놓인다.

하지만 퀴어 인식론에서 ‘거세’는 은유일 수 없다. 나는 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어야 한다. 이중구속의 상황에서 나를 은유화하며 그것을 주체가 되려면 감당할 소외 정도로 제시하는 인식론이란, 이와 결합된 형식 논리와 함께 그것이 은유일 수 없는 주체들을 커버링하게 만드는 이성애규범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퀴어 인식론은 상대화하고 있다.

퀴어 이론 내부에서도 이중구속의 반동적 해법은 비판되어 왔다.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는 『Cruising Utopia』(2009)에서 퀴어 가시성의 동화주의적 정치를 비판하며 퀴어 미래성을 지지했고, 재스비어 푸아르는 『Terrorist Assemblages』(2007)에서 프랑스 정부가 반이민자 정책을 위해 백인 동성애자를 상대적 내국인으로 간주해 국가 시스템 안으로 전략적으로 포용하는 사태를 호모내셔널리티로 개념화했다.10

그렇다면 문제는 스스로를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동시에 보편성으로 동화되거나 주변부로 고착되지 않을 수가 있냐는 것이다. 가령 리 에델만이 『No Future』(2004)에서 역설했듯 “미래를 가리키는 어떤 희망도 거부하고 죽음 충동을 충실히 따르는 길”11이 급진적 거부나 부정성으로 제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개념이 아닌 삶을 사는 주체를 강박적인 분열과 부정성에 압도시키는 위험 또한 수반한다. 이러한 문제틀 속에서 윤아랑은 “‘변태적 전복 대 정상성으로의 편입’이라는 가짜 문제를 기각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퀴어’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 방식을 구상”12하기를 제시한 바, 생성의 논리로서 이중성은 가능한 것일까.

이중구속이 양자택일로 회귀하는 논리 앞에서 이강승은 분명 그 불가능을 목표로 한다. 이는 퀴어락(한국퀴어아카이브) 에서 주최한 《퀴어락》(합정지구, 2019)에서 본격화되었는데, 이러한 ‘퀴어사 쓰기’가 국가나 자본의 관점에서 사익화된 보편사를 다시 쓰는 “이중 쓰기”13로 작동한다면, 이는 퀴어락이 2002년 한채윤이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와 함께 설립한 자생적 아카이브이자 연구자와 연구 주제가 일치하는 당사자 연구라는 토대적 근거와 더불어 이강승이 “항상 변화하는 미래로서의 퀴어성을 떠올리며 작업”14하며 언제나 이중성을 자신의 조건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2020)를 퀴어링하는 형태로 이식되었는데, 이는 〈Cover〉가 제기했던 질문의 답변이기도 하다. 1980년대 말까지 미국의 퀴어 잡지들이 검열과 폭력을 피해 표지를 노란색 갱지로 감싸 발송했던 역사를 뒤집어 통로 전면에 노출시킨 〈표지들(퀴어락)〉은 커버링이 퀴어 정치학 내부에서 가져왔던 이중성의 맥락을 전복적인 형상으로 보여주며 대림미술관의 관객층이 표상하는 ‘헤테로 커플’, ‘대중’을 실제로 감싸버렸다.

위 왼쪽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자르디니) 전시 전경 2024 사진: Mark Blower
오른쪽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아르세날레) 전시 전경 2024 사진: Mark Blower
아래 〈피부〉 단채널 4K 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45초 2024

이는 이강승의 작업이 프리즈, 베니스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등 상징자본을 가진 공간들에서 선보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제(별자리)〉(2024),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3~2024)의 작업 전반에 수놓아진, 마틴 웡의 회화에서 차용한 미국 수어 알파벳 자수나 로스앤젤레스, 싱가포르 등지의 크루징 장소에서 수집한 말린 씨앗과 식물들은 제니 우의 말처럼 제도 내부로의 편입(재코드화)을 위해 스스로를 해체하는(탈코드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암호화”15에 가깝게 밀어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암호의 이중성을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무언가를 지키는 일인 동시에 “관객에게 다가가 초대”하는 이중성이기 때문이다. 재훈이 ‘기혼중년여성’으로 패싱16되는 단체 관람객이 〈흙 속의 아카이브〉(2023) 앞에서 “퀴어 유산에 관한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풍경이” 그러나 “선인장의 일부를 전해 받는 몸짓으로 느껴졌”17다면 왜인가? 내가 방문했던 전시장의 ‘당신들’ 또한 오준수가 썼던 시구처럼 “서늘한 눈으로/그저 내려다보고”18 있지 않았다. 그러나 따뜻한 결론을 강조하며 끝낼 수 없는 까닭은 이강승의 “초대”가 “운명을 건 도약”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상품의 가치와 교환을 설명한 이 말은 이강승이 소속된 커먼웰스앤카운슬이 대안적 갤러리로 전환한 이후 그의 작품이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과 우선적으로 들어맞지만, 교환이란 상품과 화폐, 보기와 보이는 것, 텍스트와 해석, 작품과 관객이라는 중층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물론 이강승은 직접적으로 이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드로잉이 번역의 매개체로 갖는 의미에 관해 “번역은 결코 1:1로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어떤 것이 사라지거나, 반대로 어떤 것이 새롭게 더해진다”19고 말한 것은 분명 ‘도약적 교환’을 말하고 있다.

그중 관객 사이의 도약은 그의 작업이 “순수하게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시각적 형식을 띤, “또 다른 형태의 마주침”20이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 마주침의 형태는 정은영의 우려처럼 “퀴어 창작자 입장에서는 조금 더 나가줬으면 좋겠는 그런 바람”으로, 왜냐하면 “너무 말끔한 미감으로 가꾸어 내놓는 톤앤매너를 통해 ‘누가, 어떻게, 이 작업을 퀴어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것인가?’”라는 ‘A이면서 not A’의 이중성으로 돌아갈 위험에 놓여있다. 반대로 그 도약이 시작되지 않거나 실패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사물에 불과해진다. 이강승이 만들어 낸 풍경은 이러한 이중의 위험을 발판 삼아 도약을 감내한 결과로, 지금까지 도약 이전을 맥락으로, 이후를 기호로 설명했다면, 이강승의 작품론은 관객이 머물고 있는 이 도약의 시간 속에서 설명될 것이다. 가령 8인치 이하의 작은 드로잉은 미니어처처럼 포착된 그 크기로 인해 이미지와 나 사이에 다소 직접적인 친밀성을 만들어내고, 거대한 드로잉의 크기는 그것을 제작하던 이강승의 몸짓 자체와 관계 맺게 만든다.21 이는 〈피부〉(2024)에서 80세의 퀴어 무용수 멕 하퍼의 몸을 느리고 가깝게 따라가며 보여준 몸의 기억, 그리고 조슈아 세라핀을 초청하여 안무가 고추산의 1981년 작〈Configurations〉를 일종의 생성적 아카이브로 재구성한〈손의 심장〉(2023)를 드로잉으로 일찍이 해보인 셈이다.〈무제(쳉퀑치)〉(2019~2020) 연작 등에서 인물을 지우거나 흐리게 처리하는 기법은 암호화가 타자의 배제가 아닌 교환의 조건임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빠진 것과 거기 없는 것에 더 크게 의존함으로써 무엇인가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능력”22으로서, 안 보이던 것을 하나 더 보이게 만드는 재현의 양적 싸움23을 넘어 “우리가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을 함께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24를 문제화하며 도약이 놓인 어둠 즉 “알려지지 않은 것과 지워진 존재들”의 형식이 된다. 이렇듯 암호가 해독의 대상이 아니라 내부를 지켜 나가는 형식이자 그 형식 자체로 외부와 교환될 때, 이강승의 작업은 타자의 내면화나 공감이 아닌 타자의 타자성과 함께하는 일, 〈서울〉(2018)이 보여주었듯 “땅에 묻힌 파편을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기억이 없는 땅에 파편을 묻는”25일이 된다.


1 이강승 HG Masters와의 인터뷰 『아트 아시아 퍼시픽 (Art Asia Pacific)』(Vol.138) 2024 p.48
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p.76 재인용: 백종륜「한국 근대 퀴어 서사의 계보학」서울대 석사논문 2019 p.10
3 박세희 「이강승의 퀴어락」『에스콰이어』 (2020.6) pp.50~51
4 켄지 요시노 지음 김현경, 한빛나, 류민희 옮김 『커버링』 민음사 2017 위 글에서 재인용
5 HG Masters 위의 글
6 정은영 「전시 보러 갈래? -정은영과 함께 2」 하루에 하나 웹사이트 2024 https://oneactiononeday.com/subpage/hangoutwsiren2.html
7 이강승 엘리엘 존스와의 인터뷰 2024 https://akeroydcollection.com/programme/the-heart-of a-hand
8 정은영 위의 글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재희 옮김 『은유로서의 건축』한나래출판사 1998 p.187
10 김현철 「성적 반체제자와 공공 공간-2014 신촌/대구 퀴어퍼레이드를 중심으로-」서울대 석사논문 2015
11 최원형 「미래와 퀴어」한겨레 2023.02.17 https://www.hani.co.kr/ arti/culture/ book/1080139.html
12 윤아랑 「애매한 어둠 속에서 살며」 『자음과모음』 45호 2020 pp.323~332
13 데리다가 「서명, 사건, 맥락」(1988)에서 개념화했는데, 쓴다는 것은 쓴 자가 존재했던 과거를 전제하는 동시에 지금의 부재를 통해 매번 재구성함을 요지로 한다. 재인용: 문지윤 「동시대 안무 실험의 ‘이중적 쓰기’」 문화연구 제9권 1호 2021 pp.55~72
14 엘리엘 존스 앞의 글
15 Jenny Wu “Collective Memory and Coded Histories at the 60th Venice Biennale” Carla(38) 2024 pp.28~31
21 HG Masters 앞의 글 p.51
16 편집자주) 패싱(Passing)은 타인이 자신을 특정한 성별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성별 이분법에 따라 ‘남성’이나 ‘여성’으로 보이는 경우뿐 아니라, 개인이 지닌 젠더 정체성과 사회적 인식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젠더 용어이다
17 「전시 보러 갈래? —정은영과 함께 1」 하루에 하나 웹사이트 2024
18 터울 「[칼럼] 시간 사이의 터울 #1: 어느 감염인의 이야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2015 재인용
19 HG Masters 앞의 글 p.50
20 엘리엘 존스 앞의 글
22 권진 「저 산까지도 정원으로 들여왔어라」 『Kang Seung Lee: Garden』 원앤제이갤러리 2018 p.6
23 남웅, 이연숙 『퀴어 미술 대담』 글항아리 2024 p.50
24 엘리엘 존스 앞의 글
25 권진 위의 글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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