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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미술관을 위한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본지는 접근성, 다양성, 포용성을 주제로 관람객을 맞이할 세 공공미술관 큐레이터에게 각 전시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세 전시는 유사한 주제를 다루지만 이를 바라보는 관점과 실천의 방법론은 구별되어 보인다. 전시 개막 순으로 전시기획자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진행 강재영 기자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전시 6관 4.17~6.29박예원 학예연구사
김원영·손나예·여혜진·이지양·하은빈 〈안녕히 엉키기〉 워크숍, 현장 퍼포먼스, 설치, 3채널 영상, 7채널 음향 가변 크기 2025
“2025 ACC 접근성 강화 주제전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는 ‘경계 넘기’를 주제로 존재의 ‘다름’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에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고민하는 전시입니다. 우리 안에는 ‘안과 밖’, ‘우리와 타인’,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 ‘나 그리고 나와 다른’ 등의 언어처럼 다양한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타자가 될 수 있다면요? 내가 나인 채로 당신이 당신인 채로, 우리는 어떻게 비대칭적으로 소통하고 함께할 수 있을까요?”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ACC는 2022년부터 ‘접근성 강화 콘텐츠’라는 이름의 사업을 시작했다. 미술관이 어렵고 낯선 공간, 때로는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바꿔보고자 했다. 나는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예술기관에서 접근성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ACC가 위치한 광주라는 지리적 특성과 지하에 지어진 건축 구조까지 고려해 물리적 접근성, 정보 접근성을 모두 고려한 콘텐츠를 고민하게 됐다. 처음에는 시각장애인 대상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기획을 시작했다.
10년 전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육과 전시를 기획했던 개인적 경험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왜 이들을 위한 작품은 없을까?’, ‘국가기관에서 선제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질문이 지금의 ACC 전시로 이어졌다.
ACC는 작가와 함께 주제에 맞춰 작품을 새로 창제작하는 특수한 구조의 기관이다. 이런 구조 덕분에 배리어프리 전시를 장르화하고 정례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연예술계에서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배리어프리를 ACC에서 시각예술 안에서도 고유한 전시 형식으로 제안하고 싶었다.
최근 포용성과 관련된 제도들이 전시에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정책이 기획에 직접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하지만 정책이 존재함으로써 기관 안에서 지지를 얻는 데는 도움이 됐다. 제도는 명분을 만들어주었고, 기획이 단지 개인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닿아 있다는 걸 설득할 수 있게 했다.
전시의 메시지를 요약할 수 있을까? 혹은 담지 못한 행간이 있다면 들려달라.
전시의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경계 넘기’라 할 수 있다. 존재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경계는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생물학적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안과 밖’, ‘우리와 타인’,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 ‘나 그리고 나와 다른’ 등의 언어로 구분 지어 부른다.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때로는 소외를 낳고, 차이를 포용하지 못하며 타인을 배제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전시는 이러한 경계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임을 인식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타자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과정을 탐색하고자 한다.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라는 제목은 이번 전시 참여작가이기도 한 김원영의 책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이처럼 우리 몸은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우리 사회는 의료적 관점에서 장애를 분류하고 비장애인을 정상으로 보고, 장애인을 의존적 존재로 고정시키고 배제와 차별을 강화한다. 반면, 본 전시는 장애를 ‘손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장애인이 경험하는 사회적 배제에 초점을 맞춘다. 즉 장애인이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독특한 개인’, ‘의미 있는 타자’로서 존재하는 사회를 생각한다.
작가 선정의 기준이 궁금하다.
김원영·손나예·여혜진·이지양·하은빈, 송예슬, 아야 모모세, 엄정순, 해미 클레멘세비츠 등 총 5팀이 참여했다. 이들은 무장애, 장애예술, 참여적 예술, 상호작용 예술을 꾸준히 탐구해온 작가들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속 보석함에 있던 작가들을 꺼낸 느낌이다. 전시와 작품을 통해서 예술은 장애를 무거워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들은 전시라는 매체를 넘어서 공연, 참여형 워크숍, 퍼포먼스, 글, 움직임을 통해 나와 타자의 관계를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장애’나 ‘접근성’을 특수하게 바라보기보다 연결의 감각으로 풀어낸다. 장애를 새롭게 바라보는 태도와 예술을 통해 경계를 넘는 연습을 제안하는 이 전시는, 장애인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이뤄지는 시도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접근성 강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과정이기에, 이러한 과정을 함께 겪고 넘어갈 수 있는 이들이었다.
전시 공간 연출에서 접근성과 포용성은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가?
작가들과의 회의를 통해 끊임없이 공간 구성 방식을 고민했다. 또한 이번 전시는 서울 모두미술공간에서 순회 전시로 진행하기 때문에 광주에서 서울로의 이동성도 고려해야 했다.
공간 디자인은 석운동이 맡았다. 작품 설치용 벽면 외에는 별도의 가벽 없이 모듈 방식으로 구성했고, 인도 간디나가르의 시각장애인 어린이를 위한 학교 설립 프로젝트를 참고해 벽면에 양각 텍스처가 새겨진 이동 동선을 마련했다. 손끝 촉각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세로형의 몰딩과 교차하는 순간이 온다. 몰딩을 따라 손을 위로 올리면 눈, 입, 귀, 손, 발 모양의 촉감타일과 점자판을 통해 작품의 지각 방식도 알 수 있다.
홍보물은 디자인 스튜디오 낫심플과 협업했다. 전시 주제 및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촉각 그림책 형태의 리플릿을 동화작가 서유진과 함께 제작했고, 음성해설 포스터, 작가노트가 담긴 출판물을 준비했다. 또한 아인투아인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감각 키트(교구)를 마련했다. 놀이를 통해서 작품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상설 대여형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접근성과 포용성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무엇이었는가?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간혹 있었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기술을 사용하면 장애 유형에 따라 다른 사람이 감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거나, 공간에 맞춰 만들다 보니까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2월에 진행한 사전 워크숍 ‘안녕히 엉키기’에서는 장애 유형별, 이동 수단별로 동선이 다르게 설계돼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 첫날부터 당황했던 기억도 있다. 3일간 비장애인, 장애인 참여자분들과 오랜 시간 워크숍을 하고 함께 식사도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접근성 개념이 알면 알수록 어렵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어려움에 힘이 되었던 사례가 있다면?
같은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은 ‘마음가짐과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피드백을 줬고, 그 말이 이후 전시 준비 전반에 가장 크게 작용했다. 복지가 아니라 모두의 당연한 향유를 위한 일이기에, 관람자와의 섬세한 소통과 사전 안내, 지속적인 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동안 접근성, 포용성을 고민해온 한국접근성콘텐츠연구센터, 실로암복지관, 티슈오피스, 조금다른 등 파트너들과 개인화된 전시 감상 및 참여를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부족함을 오히려 사전에 드러내고 앞으로 계속 함께 나아가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계 프로그램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광주 지역의 장애인, 비장애인 참여자들과 함께 워크숍 ‘안녕히 엉키기’를 진행했다. 움직임, 글쓰기, 대화 등으로 구성된 이 워크숍은 각자의 취약함을 솔직하게 열고, 타자의 존재를 내밀하게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이 외에도 4월 30일과 5월 14일에는 중장년층 대상의 전시 감상 프로그램, 6월 10일에는 현업 종사자들과 함께하는 라운드테이블도 예정돼 있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참고한 책이나 사례가 있다면?
참여 작가들의 신간 세 권을 소개하고 싶다. 김원영의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하은빈의 『우는 나와 우는 우는』, 엄정순의 『코끼리를 만지면』. 이 외에도 전시 전반을 준비하며 관련 도서들을 읽고, 국내외의 장애예술 전시 사례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기관 차원에서 어떤 지속 방향을 계획하고 있는가?
2022년 ‘접근성 강화 콘텐츠’를 발의했을 당시에는 시혜성 전시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그래서 독립적인 사업이 아닌, 각 전시 큐레이터를 설득해 전시 예산 안에서 하나씩 실험해보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도자에는 모형 제작, 사진 전시에는 촉각책, 쉬운 글 해설, 음성해설 리플릿 등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확장했다.
이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터치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했고, 청각장애인, 중장년, 어린이, 예비 교육인 등으로 감상 대상을 넓혀왔다. 감상의 해설을 넘어 각자의 삶과 연결된 감상을 말하고 나누는 구조로 확장해가고 있다. 최성희 광주교육대 교수, 이다연 학예연구원과 함께 감상자의 내러티브를 발화하고 공유할 수 있는 구조를 개발했고, 이는 이번 전시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기관 내부의 장애 인식 개선 교육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2025년부터는 학예연구사들이 각자의 전시에서 접근성과 포용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실천해나갈 예정이다. 예산 규모와 무관하게, 의지를 가진 개인이 지속적으로 시도하면 결국 조직도 변화하게 된다고 믿는다.
《열 개의 눈》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실 4, 로비 5.3~9.7박한나 학예연구사
홍보미 〈K의 색, 빨간 스튜디오에서〉 종이 위 인쇄 59×42cm 2025
“《열 개의 눈》은 미술관의 접근성을 강화하는 프로젝트의 최종 단계로 선보이는 국제 기획전이다. 우리는 접근성을 단순한 물리적 편의가 아닌 ‘몸들의 고유한 경험’이라 정의하고 신체의 감각 작용을 탐구하는 2년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 전시에는 다분야 국내외 작가 20명이 참여해 70여 점의 공감각적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는 손가락 열 개를 두 눈에 비유하는 전시명과 같이 우리의 감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신체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탐구하며 감각의 위계를 해체하고,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감각적·존재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장으로 꾸려진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열 개의 눈》은 일반 전시와 달리 단계별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열 개의 눈》은 지난해 장애·비장애 예술가들이 함께한 6개의 통합 워크숍과 사전 전시에 이어 올해 국제전 형식으로 확장된 프로젝트의 최종 단계다. 전시 기획에는 미술관으로서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를 실현하려는 기관적 목적과 개인적 경험이 동시에 작용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사람들은 접촉의 단절과 자가격리로 갑작스레 ‘장애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접근성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적 인식도 높아졌지만, 팬데믹 이후 사회는 포용성의 확장과 과거 회귀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 전시가 그런 시대적 과도기에서 미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미술관이 위치한 을숙도라는 장소적 특성도 중요한 계기였다. 을숙도는 철새도래지이자 습지 보호지역으로 상업시설이 아닌 문화·체육 관련 공공기관만 들어설 수 있다. 2019년 근처에 서부장애인스포츠센터가 생기면서 미술관을 찾는 장애인 방문객도 증가했다. 어느 날 흰 지팡이를 든 시각장애인 한 분이 친구와 미술관 로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조심스레 함께 온 분께 미술관 경험에 대해 여쭌 적이 있다. “전시가 아니라 화장실을 쓰러 잠시 들렀을 뿐”이라 말씀하셨는데, 거기서 미술관이 장애인과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현실을 자각하게 됐다. 이것이 전시 주제를 더욱 명확히 하는 데 영향을 줬다.
최근 포용성과 관련된 제도들이 이번 전시에 영향을 미쳤나?
전시가 특정 제도나 정책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건 아니다. 처음부터 본 주제에 관심을 갖고 준비했다. 한편 ‘창작물 우선구매 제도’나 ‘의무 공연·전시 제도’ 같은 정책이 기관 내부에서 이번 전시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바탕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제도로서만 당위성을 얻는 상황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 전시의 동시대성을 방증하는 근거가 되고, 앞으로 비슷한 프로젝트가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라파엘 드 그루트 〈기다림〉 퍼포먼스 2015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의 메시지를 요약할 수 있을까? 혹은 담지 못한 행간이 있다면 들려달라.
이번 프로젝트는 장애와 접근성이라는 이슈를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에 끌어들이되, 장애 자체를 전시 주제로 삼기보다는 ‘접근성’이라는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도록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데 집중했다. 팬데믹 기간 누구나 일시적인 장애 상태를 경험한 것처럼 장애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문제일 수 있음을 환기하려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적·제도적 접근성 논의를 개인 고유의 ‘몸’과 ‘감각’에 기반해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 전시의 키워드는 ‘신체’와 ‘감각’이며, 주제는 ‘감각의 유동성’으로 설정했다. 신체의 감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나이, 환경, 신체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이를 통해 시각과 청각 중심으로 고정된 감각 위계를 해체하고, 낯선 감각을 탐색하며 세계의 복잡한 얽힘을 다시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감각은 종종 놀이처럼 가볍게 치부되기도 하지만, 사실 감각에 대한 사유는 근대 서구 형이상학이 구축해 온 이성 중심의 견고한 틀을 무너뜨린 중요한 철학적 테제이기도 하다. 전시는 ‘감각의 유동성’을 조명함으로써 이성/감성, 인간/비인간, 장애/비장애와 같은 이분법적 틀을 허물고, ‘몸’을 근원적 차원으로 되돌려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감각을 가진 존재들의 경험이 사회를 더 유연하고 포용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작가 선정의 기준이 궁금하다.
이번 전시에는 김덕희, 김은설, 엄정순, 조영주, 홍보미, SEOM:(엄예슬, 서하늬), 김채린, 라움콘(송지은, Q레이터), 라일라(이수연), 정연두, 미션잇(김병수), 다이앤 보르사토, 라파엘 드 그루트, 로버트 모리스,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 카르멘 파파리아, 피네건 샤논, 해미 클레멘세비츠 등 총 20명의 장애·비장애 다장르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선정 과정에서 ‘감각의 유동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고, 전시의 세 가지 소주제 ‘만개의 감각’, ‘확장된 몸’, ‘혼종체’와 연관된 작업을 하는 작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연출에서 접근성과 포용성은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가?
전시장 내 가벽을 최소화하고 통로 폭을 3m 이상 확보해 휠체어나 보행 보조기 사용자가 편히 이동할 수 있게 했다. 가벽과 좌대의 모서리는 둥글게 처리했고, 좌대의 높이는 휠체어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맞췄다. 전시 설명 텍스트는 쉬운 글과 오디오 스크립트, 큰 글씨를 제공하여 접근성을 높였다.
참여 작가의 절반이 작품의 촉각 감상을 허용해 감각적 접근성을 대폭 강화했고, 비디오 작품은 오디오 해설이나 촉각 보조 자료로 감상의 폭을 넓혔다. 특히 전시장 안에 ‘감각 스테이션’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수어 해설, 오디오 해설, 체험형 자료, 작품 레플리카 등을 제공하여 관객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네이버 웹툰 작가 라일라와 협업하여 웹툰 형식으로 쉽고 친근하게 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새롭게 시도했다.
접근성과 포용성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작품을 직접 만질 수 있게 허용하면 작품 손상에 따른 보험 적용이 어렵고, 작가의 협조와 동의도 필수였다. 작품 보호와 관객 안전을 위해 철저한 준비와 책임감을 갖고 임하고 있다. 작가들과의 소통에도 공을 들였다. 일반 전시에 비해 협의 내용이 다양하기에 더 복잡하고 세심한 소통에 힘을 쏟았다.
또한 공립미술관 특성상 국문·영문 자막과 한국어 더빙 등 접근성 장치가 필수이지만, 해외 영상 작품의 경우 이런 요구를 모두 충족하는 것이 기술적·예산적으로 어렵기도 했다. 결국, 모든 접근성 요소를 만족시키기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이런 어려움에 힘이 되었던 사례가 있다면?
뉴욕에서 활동하는 시각장애 현대미술가 에밀리 루이스 고시오와의 협업이 좋은 예다. 이메일 소통만으로는 작품의 세부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워 뉴욕 현지 작업실을 방문했다. 현장에서 직접 작가의 의도와 작품을 확인 후 선정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신뢰와 확신을 얻었다. 이 방문은 또한 뉴욕 주요 미술관과 기관의 접근성 실태를 조사하는 리서치 기회로도 이어졌다. 여러 문화권에서 접근성을 구현하는 사례들을 참고할 수 있었고, 이후 전시 기획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인사이트를 제공했다.
엄정순 〈당신의 눈동자를 위하여〉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97×72cm 2025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연계 프로그램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관객 참여형 이벤트 ‘포스터를 들려줘’다. 일반 관람객이 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전시 포스터 이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어주는 실험적 프로그램이다. 비장애 관람객도 이 과정에서 정보 접근성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고, 장애와 비장애 간 소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참여 작가 라파엘 드 그루트의 퍼포먼스는 눈을 가린 채 부산 거리에서 수집한 사물과 참여 작가들로부터 기증받은 재료, 자신이 제작한 오브제를 이용해 신체를 변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관객과 직접 교감하며, 감각의 한계와 우연성, 위험을 유희적으로 탐구하는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참고한 책이나 사례가 있다면?
참고한 저서로는 서구 철학 전통에서 시각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다른 감각들에 주목하는 철학적 흐름을 다루는 제이 마틴의 『눈의 폄하: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시각과 반시각』, 시각장애인의 인식 방식을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설명하는 이토 아사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접근성을 포함한 창의적 큐레이팅 방식과 사례를 소개하는 아만다 카이사의 『Curating Access』 및 진중권의 『감각의 역사』,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손병걸 시인의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등이 있다. 전시와 교육으로는 아르코미술관이 주관한 재단 교류, 장애/비장애 전시 《여기 닿은 노래》와 리움미술관이 주최한 ‘감각 너머’ 연계 포럼 및 캐나다 토론토에 소재한 Tangled Art + Disability 갤러리의 접근성 프로그램 등이 있다.
기관 차원에서 어떤 지속 방향을 계획하고 있는가?
부산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접근성과 포용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앞으로도 관련 전문가, 예술가, 단체들과 지속적으로 협력하며 교육, 커뮤니티, 디지털 콘텐츠로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3, 4전시실, 서울박스 5.16~7.20이지회, 이주연 학예연구사
김원영 〈보철(물)로서 움직이기-머신/어포던스/케어〉 퍼포먼스 전경 2024
제공: 서울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서로 다른 몸이 가진 다양한 조건을 이해하고, 이들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능성을 살펴보는 기획 전시다. 본 전시에서 미술관은 건강한 몸뿐만 아니라 장애가 있는 몸, 나이 든 몸, 아픈 몸 등 다양한 몸을 맞이하는 공적 공간으로, 그 만남의 방식을 실험할 수 있는 장소다. 전시는 ‘취약한 몸’에 대한 통념을 재고하게 하는 미적 실천들을 제시하는 한편, 다른 몸을 환대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신체 다양성에 관한 인식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몸을 살피는 일이 공공의 이익으로 환류(環流)됨을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이지회 건축을 전공했고, 미술관의 장소성에 관심을 가져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1932년 병원으로 지어진, 흔치 않은 유럽 ‘모던 무브먼트’ 양식이다. 돌봄의 공간이었다가 한때 기무사였고 지금은 공공 문화 공간이 됐다. 이 복합적 장소성 안에서 ‘몸을 어떻게 다루는가’라는 질문이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부터 가족을 돌보게 됐던 경험도 있다. 큐레이터의 어원이 ‘돌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최근 돌봄이 강조되는 흐름에 용기를 냈다. 미술관에서 크리스틴 선 킴의 작업을 소장하는 등 내외부 요인도 자연스레 전시 준비로 이어졌다.
이주연 ‘돌봄’이라는 키워드에 오랫동안 관심 있었다. 유사한 주제의 전시를 준비하다가 이지회 학예사와 협업하며 전시 방향이 더욱 명확해졌다. 오히려 나는 젊은 세대로서 불안정한 신체성이나 언젠가는 돌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실존적인 고민에서 출발했고, 돌봄을 재개념화해야 한다는 감각을 가지고 접근했다. 우리도 ‘기울인 몸들’처럼 서로 의지하며 진행하고 있다.
최근 포용성과 관련된 제도들이 이번 전시에 영향을 미쳤나?
이지회 창작물 우선구매 제도는 이전부터 실행해왔기에, 전시에 직접 영향을 준 건 아니다. 다만 예술계 전반에 깔린 흐름이 작가 제안이나 소장품 구매에 전략적으로 작용한 건 사실이다.
이주연 제도를 염두에 두고 전시를 기획한 건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제도와 맞물리며 실현의 기회를 만난 것에 가깝다. 다만 요즘 장애예술가나 돌봄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가 많아졌고, 제도를 통해 그들이 가시화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영향이라 생각한다.
전시의 메시지를 요약할 수 있을까? 혹은 담지 못한 행간이 있다면 들려달라.
이지회 ‘신체 다양성의 문제를 장애, 노년, 돌봄의 시선으로 탐구한다’고 요약했지만, 다 담기엔 부족하다. 전시는 장애와 노화를 각자가 마주한 자신의 이야기로 느끼게 할 것이다.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공동체와 연대가 구축되지 않을까. 우리 전시가 프로파간다가 아닌 당사자의 언어로 말하는 예술의 한 사례가 되었으면 한다. 약한 신체를 대상화하지 않고 힘을 불어넣는 미학을 지향하고 있다.
이주연 전시는 세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약한 몸’이라 여기는 신체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또 그들이 어떻게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살핀다. 둘째로, 공공미술관이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되려면 어떤 환경이어야 하는지 건축, 디자인, 언어로 만들어 본다.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몸들이 미술관에서 어떻게 마주치고 ‘볼 수 있는지’를 퍼포먼스, 언어, 건축, 몸짓 등 여러 층위에서 탐색하려 한다.
작가 선정의 기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이지회 구나, 김원영, 크리스틴 선 킴, 판테아 아바레시, 사라 헨드렌케이트린 린치, 조영주, 천경우, 데이비드 기슨브랫 스나이더아이린 챙, 김은설, 리처드 도허티, 알리시아 네오, 최태윤연 나탈리 미크, 윤충근, 김영옥조미경이진희, 윤상은 등 총 15팀이 참여한다. 그중 3분의 2는 장애, 아픈 몸, 노년, 이주민, 보호자 등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다. 그 당사자성과 공간 안에서의 협업 방식이 중요한 기준이었다. 국내 처음 소개되는 판테아 아바레시는 장애 당사자의 섹슈얼리티를 두텁게 다룬다. 세계 최초 농인 캠퍼스인 갈로뎃대학의 총괄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는 이번 전시에서 ‘데프스페이스(DeafSpace)’ 개념을 담은 공간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주연 여러 몸이 섞여 어울리는 전시를 지향한다. 관내 부서별 담당자들과의 대담에서, 장애인 교육을 오랫동안 맡아온 담당자는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이들이 당사자성으로만 조명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인으로서의 성취가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도 듣게 됐다. 이런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공간 연출에서 접근성과 포용성 구현 전략은?
이지회 건축 스튜디오 인테그와 협력하여 공간을 설계했다. 시각장애, 청각장애, 휠체어 사용자, 신경다양성 관람자 등 4가지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이들이 충분히 전시를 경험하도록 구상하고 있다. 접근성 매니저 조언도 구하고 있다.
이주연 전시장에 온 시각장애인 관람객이 혼자 자율적으로 관람하는 걸 목표로, 전시장 전체에 점자 블록을 깔기로 했다. 또한 글 전체를 쉬운 문장으로 쓸 예정이다. 음성해설엔 시각장애 당사자가 직접 참여한다. 시각장애인이 지인과 대화하듯 작품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설치하려는데, 이는 비장애 관객에게도 새로운 감상의 층위가 될 수 있다. 즉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를 경험케 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리처드 도허티 〈공터〉 (축제 중심부에 극장 형태 디자인)
철강과 골밀도 폴리에틸렌 약 100㎡ 테아터포르멘 페스티벌센터(독일 브라운슈바크) 설치 전경 2022
사진: 모리츠 쿠스트너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접근성과 포용성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이지회 현실적인 제약이 많다. 이를테면 브라유 점자를 전반에 적용하려고 하니 예산이 너무 커졌다. 브라유 점자 문맹률이 생각보다 높다는 접근성 매니저의 의견도 고려했다. 결국 음성해설에 더욱 집중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주연 접근성, 포용성을 더 세심하게 고민하려면 더 많은 시간, 에너지, 마음을 써야 할 텐데 시간 여유가 없고, 모두가 이미 120% 이상 역할을 하다 보니, 잘 챙기고 있는지 두렵고 아쉬움이 생긴다. ‘수요 없는 공급’이란 말도 자조적으로 하는데, 전시가 실제로 관객을 초대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지 회의감을 넘어 두려움도 있다.
이런 어려움에 힘이 되었던 사례가 있다면?
이지회 리처드 도허티와 함께 입구 계단을 누구나 앉아 쉴 수 있는 벤치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시설에 관한 부분이라 내부 부서들과의 조율이 필수였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긍정적이어서 용기를 얻었다.
이주연 전시를 준비하며 홍보고객과에 관객이 요청할 때 필담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했는데 이미 필담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답을 받았다. 현장에서는 이미 많은 요구가 있었고, 알게 모르게 각 부서에서 노력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됐다.
전시에서 연계프로그램도 중요할 것 같다.
이지회 여성학자 김영옥과 장애여성공감이 함께하는 퍼포먼스를 준비 중이다. 노화와 장애화 과정을 교차적으로 탐색하고, 죽음을 전제로 한 시간성 속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다. 와상환자가 전시를 본다면 공간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와 같은 관객 기획의 관점에서도 고민하고 있다.
이주연 윤상은 작가와 발레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다. ‘완벽한 몸’을 전제하지 않고, 서로에게 몸을 기대며 균형을 잡아가는 듀엣 안무를 배운다. 최근 사전 워크숍을 마쳤다. 김원영은 ‘보철물로서 움직이기’라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의 보철물이 되는 과정에서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가, 서로 기대면서 변하는 두 몸의 관계를 조망하고자 한다.
참고한 전시나 책, 사례가 있다면?
이주연 연극 〈몬스터 콜스〉에서 김원영이 배우로 출연했는데, 모든 배우에게 수어 통역자가 붙어 안무처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접근성’이 단지 기능이 아니라 미학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됐다. 점자 블록도 아름다운 장치가 될 수 있는지, 쉬운 글도 말맛이 있을 수 있는지, 음성해설도 감상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됐다.
이지회 데이비드 깁슨의 『Architecture of Disability』가 가장 인상 깊었다. ‘접근 가능성’을 넘어서 ‘손상의 미학’을 보편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책이다. 사라 헨드렌의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이나 김원영의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을 참고했고, 조지나 클리그의 『More than Meets the Eye』도 시각장애인의 예술 감각을 깊이 있게 다룬다.
기관에서 접근성· 포용성을 어떻게 지속할 계획인가?
이지회 발의하는 과정에서 ‘범부서적 노력’을 강조했는데, 준비 과정에서 이미 각 부서에서 다양한 노력이 존재했음을 알게 됐고, 이것이 연결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소외된 커뮤니티를 찾아가는 ‘움직이는 미술관’부터, 2008년 이후 장애, 시니어, 사회적 약자 대상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팬데믹 이후 무장애미술관 예산도 늘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미술관 접근성 서비스 통합 안내 웹 메뉴도 개설할 예정이다.
이주연 지금은 위로부터의 정책과 아래로부터의 실천이 맞닿는 시기다. 미술관 내부 부서들과도 긴밀하게 논의 중이고, 장애인 관람객도 꾸준히 오고 있다. 이동 지원 등은 여전히 과제지만 전시 자체가 실천의 교차점이 되고 있다는 걸 체감한다.
이지회 모든 전시가 같은 방식으로 접근성과 포용성을 구현할 필요는 없다. 전시마다 다양한 실험이 가능해야 한다. 이 전시도 그중 하나의 시도이고, 앞으로 더 많은 목소리가 공존하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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