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린 Selin Moon

사물은 이렇게 바뀐다: 문세린의 조각에 관하여

Artist

문세린/ 1988년생. 일상 세계의 질서와 도시 공간의 감각을 탐구하며, 영상, 드로잉, 조각, 사운드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한다. 한예종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 및 전문사 졸업. 개인전 《탈것을 찾아라》(LDK.DT, 2024), 《Dummy》(합정지구, 2023)를 개최했으며, 단체전 《귀거나 꼬리》(청파로49길, 2020), 《빈곳의 지도》(교역소, 2014), 《새벽질주》(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4),《바닥에는 더 신선한 공기가 있어》(아마도예술공간, 2014) 등에 참여했다. 《그로울링 워크숍》(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3)을 기획했으며, 2021년부터 ‘물물’(문세린, 노은주, 한승우) 대표로 활동 중이다.

〈차 마시는, 담배 피는〉 밀랍, 합판, 등기구, 가변 크기 《dummy》 합정지구 전시 전경 2023

사물은 이렇게 바뀐다1: 문세린의 조각에 관하여
이한범 미술비평

“어느 날, 당신은 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를 보게 됩니다. (One day, you witness a log tumbling down from the mountain.)” 《탈것을 찾아라》(2024, LDK.DT)의 전시장 입구 위에는 이런 문장이 적힌 드로잉 〈어느 날〉(2024)이 걸려 있었다. 언제 지어진 지도, 누가 지었는지도,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오래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누군가가 입을 뗀 것 같았다.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가 될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일이 일어났는데 아직 그것이 특별해진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잠재적이다. 이 드로잉의 맞은편 벽에는 〈어느 날〉과 제목도, 크기도 같은 다른 드로잉 하나가 마주보고 걸려 있었다. 바위와 구름이 있는 경사진 언덕 풍경이 있고, 언덕의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동그라미가 줄지어진 그림이다. 언덕 위편의 동그라미들은 작고 조밀하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크기가 커지며 무언가가 굴러 내려오는 듯한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두 번째 〈어느 날〉(2024)이 문장으로 적힌 첫 번째 〈어느 날〉과 관련한 이미지라면, 동그라미는 아마 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일 테다.

언뜻 하나의 사건(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에 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재현(텍스트, 이미지)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 두 〈어느 날〉은 서로 동등한 위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조금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문장으로 적힌 〈어느 날〉에서 이 어느 날은 ‘One Day’로 표현되고, 이야기로 전해지는 ‘어느 날’은 그것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지금으로부터 가까운 날인지 아득히 먼 날인지 모호하다. 게다가 이날이 정말로 실재하는 날인지, 아니면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날인지도 모호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날’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고, 또 실재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로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어느 날’이 잠재성이 편재하는 허구적 공간을 만들어 낸다면, 그림으로 그려진 다른 ‘어느 날(the day)’은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가 목격(witness)됨으로써 그것이 동그라미라는 형태의 운동으로 전환된 그 특정한 날이다.

《탈것을 찾아라》 LDK.DT 전시 전경 2024

그러니까 두 번째 ‘어느 날’은 편재하는 잠재성이 특정하게 현행화 한 날이고, 우리는 이를 두고 흔히 역사적인 날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두 〈어느 날〉은 서로 동등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전해지는 〈어느 날〉이 그림으로 만들어진 〈어느 날〉을 품는다고 할 수 있다. 두 ‘어느 날’은 같은 날일 수도 있지만, 잠재성의 측면에서라면 그 규모가 다르다. 이야기의 허구적 공간이 그림의 허구적 공간보다 크다.

이 관계성을 성찰하는 것은 문세린의 조각 실천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문세린에게 조각은 사물을 탐구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물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을 측정할 것이다. 그것의 크기나 무게를 잴 수도 있고,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이 불러일으키는 정동을 관찰하기도 하고, 그것이 움직인 궤적을 기록하거나 한 사회와 관련하여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텍스트로서 읽기도 한다. 여기서 조각이라는 것을 또 다른 하나의 측정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급한 측정의 행위와는 다른 지식 생산에 관여한다. 문세린이 조각을 통해 수행하는 사물에 대한 탐구는 사물의 현행화 된 현재 모습에 대한 조사와 그 사물에 얽힌 잠재성의 공간을 방랑하는 일의 상호 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사물의 잠재성의 공간이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그 공간으로 진입하는 저마다의 방법이 있을 텐데(혹은 오늘날의 조각은 이 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거의 잊은 것처럼 보인다) 문세린에게 그것은 다름 아닌 사물에 대한 문학적 사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문학은 시나 소설, 희곡과 같은 장르나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 지시되지만 물질적이지 않고 형태적이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이야기의 공간을 뜻하며, 그것은 사물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사물의 여러 얼굴의 가능성을 타진하기에 유용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문세린은 사물을 물질적 세계의 조건 속에서 살피면서, 동시에 이야기 세계의 조건 속에서도 살핀다. 이 여정이 조각이라는 실천 속에서 천천히 합성되면, 어느 순간 사물은 우리 앞에 낯설게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날(One Day)〉 종이에 마커 31×43.5cm 2024 〈어느날(The Day)〉 종이에 마커와 펜 31×43.5cm 2024

“어느 날, 당신은 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를 보게 됩니다.”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이제 이 문장이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사물에 관해 탐색하는 조각의 시작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탈것을 찾아라》는 거칠게 말하면 바퀴라는 사물에 대한 탐구다. 전시장을 구성하는 여러 방 중 가장 안쪽의 작은 방에는 통나무가 잔상처럼 중첩된 벽화 〈있었다〉(2024)가 그려져 있고, 맞은편의 작은 스크린에는 3분 길이의 영상 〈바퀴의 기원〉(2024)이 반복 상영되고 있었다. 제목만 본다면 마치 바퀴에 관한 역사를 우리에게 설명해줄 것 같지만, 이 짧은 영상은 그저 높은 곳에서 카메라를 천천히 패닝하며 바라본 산의 풍경만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람소리만이 들리고, 움직이는 동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탓에 바퀴의 탄생은커녕 인간이 탄생하기도 전 원시 행성의 모습 같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현생 인류가 사라지고 난 아주 먼 미래의 행성일 수도 있다. 바퀴의 기원은 통나무도, 동그라미도, 구르는 것도 아닌, 그것들이 우연히 사건이 될 수 있는 텅 빈 잠재적 공간이다. 바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물이 같은 기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퀴의 기원〉이 만드는 영화적 공간은 이야기로 전해지는 〈어느 날〉, ‘One Day’의 허구적 공간과 닮아 있다.

그런데 〈바퀴의 기원〉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닮았지만 서로 다른 산의 풍경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문학에서 ‘산’이라는 일반 명사를 쓰면 그것은 언제든 그때그때 서로 다른 산의 이미지를 산출할 수 있지만, 피사체를 보여줌으로써 허구를 구성하는 영화에서 무언가가 보인다는 것은 특정한 그것을 보여주는 일일 수밖에 없다. 〈바퀴의 기원〉이 보여주는 산은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한 산이지만, 특정 장소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서로 닮은 다른 산을 나열함으로써 그 이미지의 시퀀스가 일반 명사로서의 산으로 수렴되도록 한다. 특히 이 영상을 구성하는 풍경 푸티지는 모두 공영방송국에서 ‘산’이라는 키워드로 제공하는 연출이 규범화된 오픈 소스 이미지로, 이 질적 특성은 서로 다른 닮은 대상의 연속이 일반 명사화되는 방식을 강화한다. 또한 AI 생성기로 만든, 닮았지만 서로 다른 타이포그래피의 오프닝 타이틀 또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려 하기 전에 ‘기원’이라는 지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하는 지표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허구적 공간이 하나의 드라마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세계의 집합이라는 것 또한 표현한다. 그럼으로써 진술되는 것은, ‘바퀴의 기원’은 어느 특정한 시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거의 모든 장소에서 비롯할 수 있는 보편적 개연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부터라면 ‘바퀴’라는 것이 반드시 ‘바퀴’로 나아가거나 통나무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바퀴라는 사물을 기원적 공간에서 성찰하기 시작하면, 견고하고 분명했던 사물은 모호해지고 사물과 결속된 네트워크는 불안정해질 수 있다. 그러면 비로소 조각이 할 수 있는 말이 생겨난다.

〈음악대〉 장난감에 점토 30×30×25cm 2024 《탈것을 찾아라》 LDK.DT 전시 전경 2024

바퀴는 모르는 사이 ‘탈것’이 된다. 이 사이에는 아득한 인과적 거리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현실이다. 문세린은 바퀴를 생각하다가 ‘탈것’에 대해 생각했을 수도 있고, ‘탈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바퀴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사물에 대해 탐구한다는 것은 한 방향의 연결로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퀴와 탈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현실이 구성되어 있고 사실은 그것이 신비하다는 점이다. 〈음악대〉(2024)는 장난감 비행기, 버스, 트럭, 오토바이에 점토를 붙여 조각을 만들고, 큰 순서대로 아래에서부터 쌓아 올린 작업이다. 이 형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서 도둑들을 내쫓기 위해 당나귀 위에 개가, 개 위에 고양이가, 고양이 위에 닭이 올라탄 형상과 닮았다. 컵과 도넛이 위상학적으로 같은 형태로 여겨지는 것처럼, 브레멘의 음악대와 〈음악대〉는 사뭇 다르지만 사실은 그렇게까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운송과 이동을 위한 사물인 비행기, 버스, 트럭, 오토바이에 대해 원래 우리가 가진 ‘탈것’으로서의 의미는 여기서 전혀 다른 ‘탈것’으로 바뀐다. 생각보다 사물의 범주는 자명하지 않고 쉽게 교환될 수 있다. 한편 〈노래하는 고속도로〉(2024)는 ‘탈것’ 중 하나인 자동차의 내부 공간에서 느껴지는 진동, 들리는 노래, 보이는 풍경, 스쳐가는 다른 탈것 위의 사물들을 명상적으로 들여다보는 영상이다. 이것을 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퀴가 매개하는 탈것, 탈것의 공간이 매개하는 외부의 수많은 현실들을 연결하고 그 연결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퀴의 기원〉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11초 2024

〈노래하는 고속도로〉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20초 2024 《탈것을 찾아라》 LDK.DT 전시 전경 2024

잠재성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사물을 탐구하는 방법이자 그 과정에서 사물의 다른 모습을 이끌어내는 일이 문세린의 조각 작업이라면, 그의 이전 개인전《Dummy》(합정지구, 2023) 또한 같은 맥락에서 폭넓게 이해해볼 수 있다. 전시 제목인 ‘dummy’의 사전적 의미는 ‘모조’, ‘가짜’이지만, 여기서는 사물이 자기 자리를 이탈해 다른 자리에 다른 자세로 자리 잡은 변형들을 뜻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더미는 무언가를 닮았지만 그것은 아닌 것이다. 〈인포〉(2023)는 제목 그대로 전시장에 가면 운영자나 관리자가 앉아서 관객을 맞이하거나 일을 하기 위해 쓰이는 책상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어색한 부피감과 방향, 실용적일 리 만무하게 놓인 모습에서 어딘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 한쪽 바닥에 놓인 〈엔젤〉(2023)은 언뜻 통속적인 천사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통속적인 유령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둘 다인 그런 존재? 천사임을 확정해주는 기표인 엔젤 링은 천사 혹은 유령들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고, 천사 혹은 유령은 뭉툭하여 선명하지 않다. 이 사물들은 가까스로 천사 혹은 유령의 이름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전시의 유일한 영상 작업 〈무제〉(2023)에는 중간중간, 작가가 어린이들과 함께 했던 조각 워크숍에서 촬영한 푸티지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은 미래에는 사라질 물건과 남아있을 물건을 손꼽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동물 조각상은 만들기 힘들어서 없어질 것이고, 종이 비행기는 드론에 의해 대체될 것이지만 돌은 지구가 파괴되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어떤 물건은 사라지거나 변형되고 어떤 물건은 언제나 자기 자리를 가진다. 이 영상은 문세린의 기존 영상 작업의 일부나, 촬영했지만 미사용한 푸티지 20개로 구성되어 있고, 이 푸티지 사이에는 2분여의 흰 공백 화면이 지속된다. 나는 이 영상이 사물에 관한, 혹은 세계의 물건들에 관한 자신의 지난 경험들을 되돌아보고, 조각이란 무엇을 하는 일인지 생각하는 작업이라고 이해했다.

〈엔젤〉(부분) 석분점토, 비닐, 합판 132×85×10cm 2023

〈머리 혹은 주먹〉(사진 왼쪽) 나무 위에 페인트, 볼트 와셔 85×15×38cm, 85×10×30cm 2023, 〈무제〉(사진 위) 싱글채널 영상, 70분 38초
(미사용 촬영본, 기존 영상 작업의 일부를 포함한 20개의 클립과 각 사이의 2분의 흰 화면 공백) 2023 《dummy》 합정지구 전시 전경 2023

《탈것을 찾아라》가 바퀴에서 시작했다면, 《Dummy》는 톱날에서 시작한다. 〈톱날 A〉(2023)와 〈톱날 B〉(2023)는 언뜻 우둘투둘한 다양한 톱날 모양을 그려보는 연습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어느덧 그것은 진동의 모양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톱날은 톱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동으로 옮겨지고 변형되고 퍼져 나간다. 그러고 보면 문세린이 탐구하는 사물이란 바퀴나 톱날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먼 미래에도 존재할 것 같은 그런 원형적이고 또 원시적인 속성을 가졌다. 그가 이러한 사물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마도 그 사물 자체에 대한 애호보다는 그것이 사물의 다른 존재 가능성에 대해 숙고하는 데 더 유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봤던 문세린의 작업은 〈도끼〉(2014)라는 3분 길이의 짧은 영상이다. 작가가 공사장 공터 한복판에 서 있고, 도끼 손잡이에 줄을 길게 묶어 손에 쥐고 있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도끼를 매단 줄을 점점 느슨하게 풀다가 어느 순간 풀썩 쓰러지며 영상은 끝난다. 이 작업에 대해 그가 남긴 노트의 일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외부세계를 향한 최초의 사물의 결과.” 불현듯 도끼 또한 인간이 관계 맺어 온 가장 오래된 사물 중 하나라는 것을 생각한다. 당시 나는 이 작업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의 작업에 대한 원형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문세린에게 조각은 단지 사물을 새로이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긴 시간과 다양한 존재 가능성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굴절되고 무엇과 연결되어 나가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로부터 오늘날 협소해진 조각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한다.

1 이 글의 제목은 단요의 장편 소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사계절, 2023)의 제목을 변형한 것이다
2 문세린의 영상 작업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글 「왼발을 뒤로, 다시 오른발을 뒤로, 그리고 어둠을 껴안듯이」『오큘로 006: 어둠』(미디어버스, 2018)에서, 나는 그가 영상에 자주 ‘어둠’을 도입하는 이유와 어둠이 그의 작업에서 수행하는 기능에 대해서 이와 비슷하게 설명한 적이 있다. 자명한 사물이 모호해지고 사물의 잠재성이 부풀어 오르는 공간을 구성하는 일은 그에게 언제나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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