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몸은 세계다.
열린 공동의 세계다.

김소정 기자

Artist

사진: Stephen Chung / Alamy 제공: White Cube

안토니 곰리/ 1950년 런던 출생. 터너상 수상(1994), 영국 왕립예술아카데미 회원 선출(1998), 대영제국훈장 수훈(2008) 및 기사 작위를 서임(2014) 받았다. 영국 헤이워드 갤러리(2007), 스위스 베른 파울 클레 센터(2014), 중국 상하이 롱 뮤지엄(2017), 이탈리아 플로렌스 우피치 미술관(2019), 독일 뒤스부르크 렘부르크 미술관(2022)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올해 한국의 뮤지엄 SAN, 화이트 큐브 서울,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의 개인전을 거쳐, 미국 댈러스의 내셔조각센터에서 서베이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몸은 세계다.
열린 공동의 세계다.
김소정 기자

1981년, 곰리는 자신의 몸을 소재로 한 첫 라이프캐스팅 작품 〈Mould〉을 발표한다. 그에게 몸은 ‘정신의 거주지’이자 현실 세계의 ‘경험을 담는 용기’이면서 이를 지각하는 관람객에게 새로운 의미를 제안하는 ‘장소’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다층적인 신체 개념을 바탕으로 공공장소에 설치된 그의 조각은 공동체의 일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곰리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Angel of the North〉(1998)와〈Another Place〉(2005)는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터너상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 제4좌대에 조각 대신 ‘좌대인’이라 명명한 자원자의 몸을 전시한 퍼포먼스 〈One & Other〉(2009)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는 조각의 개념을 현실 세계의 인간존재로, 개인의 형상에서 공동체의 실천으로 확장해 온 그의 작업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곰리는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하반기에는 신안에서 대규모 장소특정적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월간미술』은 인터뷰를 통해 다시 ‘인간’을 응시하는 곰리의 조각 철학을 직접 들어보았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축하한다. 인체라는 익숙한 형상에서 출발해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변화를 거쳐온 당신의 작업 세계를 그간 한국에서는 단편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으나, 올해 뮤지엄 SAN, 화이트 큐브, 타데우스 로팍의 전시를 통해 비로소 포괄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개인전을 준비하며 가장 중점적으로 고려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최근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이를 서울이라는 도시의 구조와 결합하고자 했다. 나는 관람자의 신체적 경험과 맞닿은 성찰적인 조각을 만들고, 몸과 공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지난 50년간 부단히 시도해 왔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노력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화이트 큐브 외부에 설치된 〈Swerve IV〉(2024)나〈Retreat: Slump〉(2022)는 도시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보행인들을 맞닥뜨린다. 인간 형상이 공공장소에 놓일 때, 그것은 조각을 넘어서 주변 환경, 도시 구조, 집단적 기억, 시민 의식 등 더 넓고 다양한 사회적 층위에 관여하게 된다.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외양을 띠고 있으면서도 각기 고유한 역사·정치·사회적 맥락을 발산하기에 조각과 도시 사이의 상호작용은 장소마다 다를 것이다. 서울에서는 어떠한 반향을 기대했는가?
조각이 자신이 놓인 환경을 탐구하거나 시험할 수 있다면 각 맥락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낼 것이다. 나는 모든 장소가 지닌 특수성을 이러한 반영적 기능의 일부로 활용하고 싶다. 우리가 안정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때로는 감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생활을 지키는 대가로 더 넓은 현실과 연결될 잠재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작품이 오늘날 인류 대부분이 거주하는 곳의 재료, 방식, 조건에서 비롯되어, 이를 일상의 현장 속에서 그대로 실현하고 체화하도록 만들고 싶다.

조각이 권력에 봉사하거나, 정보를 전달하거나, 욕망을 대변하는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흥미롭고도 불편한 방식으로 자신의 맥락을 마주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은 “이게 뭐지? 이 낯선 물체가 내 세계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조각은 말없이, 그러나 완강하게 반문하겠지. “그러는 당신은 누구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는 인간의 존재 목적이나 시공간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조각은 열린 방식으로 명확하게 이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인식과 생각, 감각의 통로를 열어줄 수 있다.

화이트 큐브에서는 금속 블록을 쌓아 만든 인체 형상이, 타데우스 로팍에서는 금속 띠로 연결된 인체가 전시되고 있다. 이는 질량, 부피, 무게라는 물리적 구성 요소뿐 아니라 관객의 현상학적 체험 면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유도한다. 인체를 ‘살아있는 경험의 총체’로 볼 때, 각각의 조형 언어는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언제나 ‘사유하는 것(정신)’과 ‘연장된 것(물질)’을 구별하는 데 방점을 둔다. 나는 몸과 마음의 분리를 치유하려고 노력하지만, 우리 세계에는 안과 밖, 덩어리감과 공간감, 현실 경험의 불안정성, 중력과 저항력처럼 이원성과 양극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산업화의 재료와 방법, 그리고 도시 건축의 직각 구조를 활용해서 연결 체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우리가 집(공간)에 대한 필요를 어떻게 물질화했는지 드러내고자 했다.

〈Another Place〉 주철 189×53×29cm 100개 2005~2006 영국 머지사이드 크로스비 비치
사진: Stephen White 제공: 작가

〈One & Other〉퍼포먼스 2009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 ‘제4좌대’ 커미션.
100일간 하루 24시간 동안 각 참가자(‘좌대인(Plinther)’)가
각 1시간씩 서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총 2,400명이 참여했다

사진: Clare Richardson 제공: 작가

전통적으로 인체 조각을 감상한다는 것은 조각가의 내러티브를 관람자가 습득하는 방식이었다. 당신은 관람자의 지각적·신체적 경험을 우선시하며 이 관계를 반전시켜 왔다. 익명의 인체 조각은 관람자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인간’의 의미가 새롭게 읽히는 장소가 된다. 작품이자 장소가 되는 이러한 조각의 개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신에게 ‘인간 형상’은 어떤 존재인가?
인체는 말 그대로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다. 나는 미술에서 몸이 재현의 대상이 되어 권력의 위계를 뒷받침하거나 민족적 서사(신화든 역사적 사실이든, 혹은 둘 다 혼합된 형태든)를 대표하는 도구로 인식되는 개념에 저항해 왔다. 조각의 역사에서 이는 주로 정치적·상징적 권위를 지닌 인물을 기념하는 이상화된 상(像)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외모는 대부분 우연의 산물이며 진정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이다. 나는 몸을 내부로부터의 관점, 즉 주체의 관점에서 다시 소개하고자 했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 자코메티는 외부에서 거리를 두고 면밀히 관찰한 인체를 제시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물질세계, 즉 내가 거주하는 몸에 집중한다. 비록 ‘내 몸’이라 부르긴 하지만 이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자율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외형의 우연성과 조각이 권력이나 기존 체제 유지에 봉사하는 기능을 걷어낸다면, 조각은 열린 공간이자 맥락을 탐구하는 도구가 된다. 이 저항적이고도 시적인 대상, 즉 미동도 말도 없는 조각이 공공의 장소에 놓이게 되면 이에 호기심을 갖는 관객의 반응에 따라 다른 의미를 품게 된다. 조각은 감정을 느끼거나 사고할 수 없지만, 관람객으로 하여금 이 열린 체계에 그들의 즉각적인 사고와 감정을 투사하도록 할 수 있다.

나의 작품은 이러한 생생한 반응과 함께 만들어진다. 조각은 사람들이 보고, 탐색하고, 그 주위를 걸어 다닐 때 비로소 존재한다.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체험하면서 공동으로 창작하는 살아있는 예술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Orbit Field Ⅱ〉 단면 2.3cm 정사각형의 알루미늄 튜브로 제작된 47개의 링 2024
제공:뮤지엄 SAN

우리는 인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본능적으로 인간의 형태를 찾으려 한다. 당신은 이를 잘 꿰뚫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Orbit FieldⅡ〉(2024)는 금속관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작품으로, 구체적인 형상이 없음에도 관람자가 인체를 의식하는 것에서 작품의 감상이 시작된다. 관람자는 자신의 움직임과 주변 타인의 움직임이 만드는 유기적인 장면이 작품 일부가 되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처럼 관람자가 자신의 몸을 매개로 하여 타인·환경과 “불가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 당신의 작업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곰리의 ‘인간’들은 지역 사회에 여러 울림을 주고 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작업을 소개해달라.
작품이 내 손을 떠나 공공의 삶 속에 들어가면 이를 평가하기 어렵지만, 가장 직접적인 예로는 〈Another Place〉(2005)와〈Horizon Field〉(2010)를 들 수 있다. 해변과 산에 놓인 철 조각이 끊임없는 변화에 저항하면서 인간과 인간을 넘어서는 생명 모두와 관계를 맺는다. 〈Domain Field〉(2003)는 모든 ‘Field’ 프로젝트가 그렇듯이 공동체와 함께, 또 공동체를 위해 만든 작업이다. 나는 예술가를 특별한 천재로 보는 관점에 회의적이다. 근대 이전 시대에도 집단적 상상력이 동원된 탁월한 작품이 무수히 존재한다. 스톤헨지, 보로부두르 사원, 샤르트르 대성당 같은 건축물은 조형물인 동시에 당대인들을 현실의 경험으로 이끄는 이상적인 지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이 상품화되면서 공동체의 목표를 설정하고 표현하는 능력에 제한이 생겼다.

크로스비 해변의 인간 군상, 게이츠헤드의 거대한 천사, 북아일랜드 지역 분쟁의 표상, 지역민이 빚은 인체 토기, 제4좌대 위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다양한 규모와 맥락을 가진 인체 형상을 만들었다. 실제 세계의 경험을 매개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조각이, 가상현실(VR)과 인공지능(AI)이 일상화된 21세기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추상과 구상의 낡은 이분법을 벗어나 보자. 아이디어가 작품이 되는 예술의 모든 구체화 과정은 형상화(figuring)이자 탐구(figuring out)의 과정이다. 우리는 정보에 집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정보를 수집, 재구성, 공유하는 장치들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그러나 정보와 경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경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몸, 그리고 우리와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다른 모든 몸을 존중하는 것이다.

가상에 끝없이 매료된 오늘날, 나는 조각의 물질성이 우리를 다시금 직접적인 신체 경험으로 이끌길 바란다. 그래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상상할 수 있는 대상과의 관계를 회복하길 바란다. 인간의 상상력은 오감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현재 이를 잃을 수 있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조각은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해 준다.

〈Big Form Ⅲ〉 연철봉 114×91.4×102cm 2024
사진: Stephen White & Co. 제공: 화이트 큐브 서울

올해 하반기에 전라남도 신안에서 진행되는 ‘예술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작업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주요 개념은 무엇인지 소개해달라.
가용할 수 있는 최첨단의 재료와 기술력을 동원해 몸이자 장소가 되는 작업을 구상했다. 모임의 공간도 되고 자연 세계의 리듬과 소통할 수 있는 ‘바닷가의 열린 성당’을 만들 예정인데, 과거 고딕 성당을 지었던 집단적 상상력의 정신을 되찾는 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리 건설 기술자, 해양 엔지니어, 금속·용접 전문가들의 역량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업이라 아마도 한국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비금도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고, 오랫동안 이 특별한 섬에서 갯벌과 더불어 활기찬 삶을 일궈온 주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해조류, 조개류, 소금을 다뤄온 오랜 전통에는 강인함과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특히 소금이 결정화되는 기하학적 구조는 이번 작품〈Elemental〉의 공간 프레임에도 반영되어 있다. 나는 우리가 자연과 교감할 때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이 프로젝트를 현실로 만들어 준 여정에 함께한 지역 주민들과 뛰어난 전문가들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깊이 감사한다.

예술가로서 50여 년을 보냈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어떤 점이 같고, 또 다른가? 작업의 중심점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으며,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도 계속 탐구하는 주제나 아이디어는 무엇인가?
폭넓은 관점에서 질문을 해주어 고맙다. 내가 예술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술가로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색하는 과정에서 일평생 받아온 지지에 겸허할 따름이다. 우리 지구의 정치 체계가 퇴행하는 이 시대에 예술이야말로 필수적이고 열린 소통과 집단적 교류가 이뤄지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방식을 유지한 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쟁 등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돌아간다면, 여태 우리가 쌓아 올린 풍요로움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곧 멸종할 것이다. 현생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시간(최근 연구에 따르면 약 30만 년)을 진화의 시간(약 37억 년)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극히 짧은 시간 존재한 셈이다. 행성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지구는 앞서 다섯 번의 대멸종을 거치면서 그랬듯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를 사랑하며, 인간이 스스로 실수를 인식하고 의식과 감각 능력을 활용해 우리가 의존하는 자연과 더욱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재생 능력을 갖췄다고 믿는다. 지금이야말로 식민자, 제국 건설자, 자본가들이 그동안 식민화되고 착취당하며 억눌려 온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끝없이 주기만 하는 생물권과 더불어 창조적이고 지속 가능하며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결국 동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점점 도시화 되어가더라도 말이다. 내 작업은 인간 조건의 두 상반된 측면을 모두 담아낸다. 한 축은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의존성이며, 다른 축은 점점 더 지능화되는 인공 환경에 대한 의존성이다. 이 두 가지 의존성이 지닌 잠재력과 책임을 함께 가져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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