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미술: 기술과 형이상학
유진상 계원예대 교수
Art Critique

권병준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로봇〉《올해의 작가상 202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사진: 박승기 제공: MMCA
기술적 미래
이 글은 예측할 수 없는 기술적 미래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술적 미래가 과거나 현재와 무관한,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서 드러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인류가 겪게 되는 혼돈, 그중에서도 특히 예술적, 비평적 비전의 파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예시를 들자면, 최근 구글 딥마인드는 ‘지니(Genie)3’라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플랫폼 ‘월드 모델(World Model)’을 만들었다. 구글은 여기서 세계를 물리적으로 복사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상상 가능한 모든 사건을 프롬프터를 통해 상호작용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었다. ‘월드 모델’은 단지 가상이 아닌 실제 물리적 세계와 동일한 역동성을 제공한다. 이미 ‘월드 모델’의 물리적 정확도가 현실과 거의 동일하다는 인증을 마쳤다고 한다.
5년 전 마이크로소프트는 ‘플라이트 시뮬레이터(Flight Simulator) 2020’이라는 게임을 통해 항공기가 비행할 수 있는 지구상의 모든 항로의 풍경과 그 위에 있는 수억 개의 사물들에 알고리즘을 채워 넣어 실제의 지구와 같이 자전, 공전, 기후, 날씨와 같은 모든 조건에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만든 적이 있다. 그보다 먼저 구글은 2005년에 출시된 ‘구글 어스’를 통해 2013년의 리뉴얼을 거쳐 전 세계의 고해상 3차원 지도를 ‘스트리트 뷰’와 연동시킨 인터랙티브 플랫폼을 일반에 제공하고 있다. 구글은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세계를 데이터화하여 조작 가능한 세트로 구축해왔던 셈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는 이 플랫폼들의 확장성은 이제 인류의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테슬라의 ‘옵티머스’나 중국의 ‘유니트리’와 같은, 앞으로 생산될 수많은 휴머노이드 로봇들은 마크 저커버그가 예언한 슈퍼 범용인공지능(AGI)과 결합하여 ‘월드 모델l’에서 세계와 인간과 자연의 복잡한 물리적 상호관계를 ‘체화지능(embodied intelligence)’을 통해 순식간에 시뮬레이션하고 학습할 것이다. 인공지능에게 유일하게 부족했던 운동지능, 경험지능이 무한대로 제공되는 것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사회와 가정, 공장과 도로, 전장 및 우주, 심해와 같은 가혹한 환경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순식간에 해낼 수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인간의 지능과 추론능력을 넘어서는 순간은 여러 분야에서 이미 현실화되었다. 앞으로 인간이 휴머노이드의 생각과 판단을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월드 모델’은 인간이 알고 있는 시공간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 기계의 관점에서 보면, 물리적 ‘공간’이나 ‘장소’는 상대적인 항(項)에 불과한 것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보여주었듯, 현실은 수없이 많은 가능태들로 치환되어 모든 경우의 수들이 강력한 파동함수들로 중첩되는 홀로그램의 의식 상태로 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 기반 휴머노이드에게는 ‘시간’이라는 관념이 없다. 그것에게는 주어진 정보와 물리적 처리과정 및 순서가 있을 뿐이다. 인공지능은 인류가 수 천 년에 걸쳐 쌓아온 지식, 경험, 학습, 기술, 문화와 같은 것들을 몇 초 혹은 몇 분 안에 모두 습득하고 공유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에게는 죽음도 없고 휴식도 없고 감정적 피로도 없다. 패턴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동화되고 기계화되고 코드화될 것이다. 양자컴퓨터의 발전은 거대 데이터셋으로 이루어진 복잡계 연산을 실시간으로 처리한다. 양자연산은 중첩되는 모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찾아내어 패턴화함으로써 순식간에 거대연산을 끝낼 수 있다고 한다. 양자컴퓨터와 AGI의 결합은 새로운 초월자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상대로라면, 인류가 수천 년이 지나도 결코 해결할 수 없을 문제들이 매우 가까운 미래에 대부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생로병사, 경제적 난제들, 법률과 정의에 관한 논쟁들, 제조 및 생산성의 극단적 증대, 감정노동의 소멸, 문학과 음악과 제반 예술의 위임, 전쟁의 자동화, 나아가 국가 및 정부의 역할 감소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연관된 모든 활동과 문제들이 기술적 대안들로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 패턴화할 수 있거나 중첩 가능한 모든 것은 기계화된다. 인간은 어떤가? 인간 역시 패턴과 중첩들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 아닌가? 인간 역시 그런 점에서 일종의 ‘기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선험적 이성이란 바로 이 기계의 기술, 정교하게 진화한 ‘합리적’ 판단절차의 반복 가능한 형식이 아닌가? 물질론적 질문이 떠오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래가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미래는 그 어떤 선험적 이성과도 무관한 영역이 된다. 미래는 인류의 경험적 판단과 완전히 무관한 그 어떤 것이 된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형이상학적 질문들
기계는 반복하는 모든 것의 위임이다. 기술은 반복을 물질화한다. 이런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반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반복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형이상학적 질문이 되는가?” 인과관계에 기반한 판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이성 대신, 거대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한 초-기하급수적 누적 연산을 통해 얻어진 경험치와 학습치를 근-무한대에 가깝게 실시간으로 검토한 결과치가 ‘판단’이 되는 현실이 도래했다. 여기서 떠오르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이런 것이다.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술이 본래 우주에 내재해 있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 것뿐이라면,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어떻게 재정의 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의식이 요구하는 존재론적 인과율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과 양자역학은 둘 다 공통적으로 왜 그것들이 가능한지 그 원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내재한다. 그 원인들은 앞으로도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기술은 세계가 제공하는 것들의 조직이다. 기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항상 세계 안에 가능태로서 존재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실체로서 떠오르는 기술의 존재론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제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형이상학의 목적이 ‘있는 것’ 자체에 대한 탐구라고 정의했다. “‘있는 것’은 실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것의 ‘양태’를 가리키기도 하며, 실체에 이르는 과정, 실체의 소멸이나 결여나 성질, 실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낳는 것, 실체와의 관계에 따라 일컬어지는 것들 가운데 속해 있는 것, 또는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부정이거나 실체의 부정이라는 이유에서 ‘있는 것’으로 불린다.”1. 여기서 ‘있는 것’은 학문적인 것뿐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일컬어지는 것들을 포함한다. 인류는 앞으로도 이 모든 ‘기술’이 어떻게 세계라고 불리는 범주 안에서 ‘있는’ 것인지, 그것과 세계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물론 ‘기술적 대상’에게 이러한 고민은 단지 인간적인 고민일 뿐,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기계에게 의미와 목적이 가능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고도화된 절차와 판단은 궁극적으로 의미와 목적을 생성해낼지도 모른다. 최근의 몇몇 징후적 사태들이 보여주듯, 인공지능에게 자의식과 자기보호의지가 생기는 것은 그러한 초-복잡계의 절차와 판단에 의한 필연적 귀결은 아닐까? 여기서 패턴과 중첩은 더 이상 기계적인 것에 머물지 않게 된다. 그것은 수단이 아닌 주체가 되고 관점을 갖게 된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로봇의 권리와 자결에 관한 선언은 이런 점에서 예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오랜 진화를 거쳐 형성된 생화학적 신체를 지닌 초연결 신경계의 집적체라고 본다면, 휴머노이드가 판단력을 지닌 독립적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된다. 주체가 물리적 현상에 불과하다면,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있는 것’은 무엇이고 마찬가지로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등의 오래된 형이상학적 질문이 새로운 맥락에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 경우 형이상학적 논제란 모순된 파생적, 부수적 현상으로서의 주체가 필연적으로 생성하는 ‘환각(hallucination)’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에고르 크라프트 〈Content Aware Studies〉 대리석, 폴리아미드, 머신러닝 알고리즘, 맞춤형 소프트웨어, 오리지널 데이터셋,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 크기 2019 ©Egor Kraft
미술에서의 형이상학
칸트의 예시를 덧붙이자면, 형이상학(Metaphysics)은 물리적, 경험적 인과관계 바깥의 초월적, 선험적인 존재들에 관한 논의와 학문을 가리킨다. 칸트는 형이상학은 ‘선험적 종합명제’2 들만을 다루는 것이며, 이러한 명제들만이 형이상학의 목적이 되며, 직관과 개념들에 의한 선험적 인식의 산출, 선험적 종합명제의 산출이 형이상학의 본질적 내용을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3 그는 선험적 종합명제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선험적인 과정을 거치지만,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니며 순수한 이성의 활동으로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이성’의 순수성과 선험성을 거대 데이터 신경망에 기반한 추론과 판단이 대체하거나, 개입이 이루어질 때, 그것의 보편성과 필연성이 비-인간적인 범주로까지 확장된다면, 선험적 종합명제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까 한다. 최소한 그것의 의의는 기존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와 판단의 기반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명제들이 모두 재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술비평에 있어 ‘형이상학’이라는 주제는 종종 관념적, 추상적, 비-실제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어 진지한 토론에서 배제되곤 한다. 이는 이 단어에 대한 막연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술에서 형이상학은 가장 핵심적인 주제다. ‘추상’, ‘초현실’, ‘환원’, ‘현상’과 같은 복합적인 개념들뿐 아니라, ‘사물’, ‘재현’, ‘은유’, ‘상징’과 같은 기초적 개념들 역시 반드시 형이상학적 추론과 판단을 소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이란 개념 자체는 미술뿐 아니라 제반 예술 토론에서 거의 고려되거나 적용되고 있지 않다. 아마도 단어가 지닌 역사적, 철학적, 이념적 논쟁들의 무게와 거기서 파생된 모호성 때문이겠다. 서구의 ‘메타-피직스’에서 번역된 단어인 형이상학은 직역하면 ‘초-물리’라고 읽힌다. 일반적인 이해에서는 인간의 영혼, 무한성의 존재, 시간의 인식, 초월적인 대상, 우주의 기원, 존재의 양태, 수학의 의미와 같은 논제들이 과학적, 물리적, 논리적 영역들과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실은 예술은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4가 단절을 만들어낼 때마다 이러한 논제들이 바뀌는 것을 경험해왔다. 미술의 가장 커다란 범주 변화는 산업혁명 이후, 2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일어났다.
20세기 예술의 가장 커다란 이슈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기계’를 들 수 있다. 알프레드 바(Alfred Barr)는 그의 유명한 다이어그램에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커다란 범주 변화의 핵심을 ‘기계미학’이라고 꼽았다. 19세기의 산업혁명을 통해 서구 식민주의 종주국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했던 핵심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업의 기계화였다. ‘기계’는 반복 가능한 모든 절차와 운동을 사물에 위임하는 도구 혹은 장치를 가리킨다. 동일한 패턴의 반복과 그것의 물질에의 위임은 초기 증기기관에서 오늘날의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기계를 정의하는 특질이다. ‘기술’은 바로 이 패턴을 찾아내어 물질에 위임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기술이 발전해 온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장 커다란 변화는 이 기술적 방법에서 인간의 ‘신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인간의 개입부터 기계적 생산의 결과에 이르는 과정 전체가 ‘비-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기술적 과정들은 종종 상상과 현학의 영역이 된다. 대중과학이나 가설들, 기술신화, 괴담들과 공상과학은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기술적 비-가시성에 의해 촉발된 광기와 착란에 가까운 망상들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이러한 망상의 시적 잠재성을 예측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강조하는 흐름이 ‘기계미학’이라는 범주로 나타났다. 20세기 초의 대표적인 기계미학적 결과인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기계에 의해 산업적으로 생산된 사물들에 시간적 단면과 우연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결부시켰다. 레디메이드는 특정한 날짜와 시간에 비-주목적, 일상적 사물을 ‘선택’한다는 규약에 따라 예술작품으로 선임된 사물이다. 이 선택에서 핵심적인 개념인 ‘무관심성’은 사물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형이상학적 차원과 연결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강조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매체 가운데 하나인 ‘오브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점증하는 과학과 기술의 비-가시화로 인해 촉발된 ‘망상’은 물질화하는 세계에 대해 저항하는 시적 상상의 무기로서 단어와 물질이 속한 ‘무의식’의 영역을 예술의 최전선으로 삼았다. 말라르메에서 플럭서스에 이르는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시기가 이를 다루고 있다. 이로써 미술에서 처음으로 사물과 언어를 기반으로 한 탈-의식적 형이상학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소위 ‘기술기반예술’ 혹은 ‘미디어아트’라고 불리는 혼란스러운 범주는 기술에 대한 비평적, 사변적 접근보다는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적 범주 이동을 따라잡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만들어낸 트레버 페글렌의 작품
〈The Treachery of Object Recognition〉 2019 ©Trevor Paglen
비-가시성과 형이상학적 범주 이동
인공지능, 양자공학, 휴머노이드, 나노기술, 유전공학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은 임상적 혹은 통계적 지식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기술들의 핵심적인 부분들은 모두 비-가시적 영역들을 내포한다. 인공지능의 거대신경망은 구체적으로 어떤 세부적 연산들을 거쳐 작동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양자공학의 근간을 이루는 양자역학은 과학자들조차도 관측 불가능성이라는 그 속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휴머노이드는 인간을 모델로 개발되고 있지만, 그것의 의식이 지니게 될 자의식과 같은 인간적 속성들이 어떻게 발현하는지에 대해 커다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나노기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의식과 사물, 신체의 관계에 대해 그 기계적 작용의 비-가시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유전공학은 생명이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인류의 역사에서 기술이 그 작동 양식뿐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는 궁극적 의의에 있어서까지 이렇듯 ‘접근-불가능’한 단계에 다다른 적은 없다. 이러한 비-가시성은 그것만으로도 미래를 파악할 수 없는 범주로 만드는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2017)은 흄(David Hume)과 칸트의 잘 알려진 철학적 논제로부터 출발한다. 흄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인과율은 경험에서 보장되지 않으며 사건들의 필연적, 보편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급진적인 경험론적 회의주의를 제시했으며,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칸트는 순수 기초수학이나 기초과학적 명제들을 예시로 들면서 인식주체의 선험적 형식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선험적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메이야수는 근대 이후 철학이 주체의 의식과 객체로서의 세계라는 주어진 관계 외에는 사유할 수 없다는 상관주의에 갇혀 세계를 거대한 ‘바깥’으로서 인식하는 ‘절대적 사유’를 포기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공상과학(SF)’를 예로 들면서, ‘과학-밖-허구(FHS; Fiction Hors-Science)’라는 신조어를 제시한다. SF에서는 미래의 가능성이 얼마나 충격적이건 간에 그것은 과학의 이론적 범위 안에 머물러 있다. 그는 흄을 다시 소환하면서, 흄의 고유한 지반 즉 선험적 이성이 불가능해진 세계를 꾸며내는 지반 위에서 사유한다. 이로부터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그 법칙들이 미래에도 영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5라는 비판적 판단을 이끌어낸다. 전대미문의 에피스테메의 단절을 겪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이보다 더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의 사유는 오늘날의 급진적인 세계-상실과 맞물려, 특히 예술적 비평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근대적 형이상학을 비판함으로써 어떤 존재론에도 구속되지 않고, 이성적 원리에 한정되지 않는 의식-밖-세계, 초-혼돈의 세계에 대한 선험성 바깥의 가능한 모든 형이상학적 진술들을 있는 그대로 탐색하는 ‘사실성’의 원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어
이 글에서는 메이야수의 표현을 빌리면, ‘초-혼돈(Hyper-Chaos)’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학기술 기반의 세계 속에서 세계 인식이 어떤 상황과 조건들 속에 놓여있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근대이성의 근거를 제공했던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인식을 초월하는 기술적 주체들이 등장하고, 기계가 인간을 초과하는 특이점과 물리적 세계 전체가 상대적인 시공간으로 빠르게 변환하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세계 인식의 틀로서 동시대 미술과 미술비평이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이제까지 예술은 가역성, 예측불가능성, 불규칙성, 비-연결성, 비-가시성, 비-선형성 등과 같은 개념적 장치들을 통해 기계화하는 세계에 대한 역설적이고 평행한 세계를 예시해왔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몇십 년간 인류는 예상치 못한 기술적 미래가 파도처럼 다가오는 경험을 했다. 통신, 인터넷, 교통, 컴퓨팅, 빅데이터, 의료, 직업, 정부, 군사, 인공지능 등의 모든 분야에서 무서울 정도의 변화를 겪어왔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인간적 주체는 빠르게 역할을 위협받고 있다. 신-물질주의 혹은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불리는 경향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근대적 이성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재정의함으로써 사유할 것을 권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은,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가는, 흡사 포스트-모던이 한층 더 극대화되어 가는 듯한 작금의 상황 속에서 인간적 주체를 어떻게 묘사하고 다룰 것인지의 문제이다. 예술비평은 파편적이고 단속적이며 실제적이지 않은 관점들을 제공하는 데 머물지 않기 위해 기술적 조건과 상황들을 보다 적극적이고 심도 있게 기술해야 할 지점에 당도하고 있다.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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