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Curators’ Voice & Critique
《드리프팅 스테이션-찬미와 애도에 관한 행성간 다종 오페라》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유현미: Hybrid Reality》
《김한샘: Nowon》
Curators’ Voice & Critique
《드리프팅 스테이션-찬미와 애도에 관한 행성간 다종 오페라》
아르코미술관 6.26~8.3
조주현 드리프팅 커리큘럼 큐레토리얼 디렉터
안데스 〈지질학적 베이커리〉 복합설치 2019~2025
제공: 아르코미술관
전시 기획자에게 전시 제목은 화룡점정과도 같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다소 길고 복잡한 제목을 달고 있다. 이는 필자가 독립큐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한 2021년부터 3년간 이어온 다학제적 큐레토리얼 리서치 프로그램 ‘드리프팅 커리큘럼(Drifting Curriculum)’의 실천 단계이자, 올해부터 3년간 새롭게 전개될 프로젝트의 서막으로 기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드리프팅 스테이션(Drifting Station)’은 출발역이나 종착역이 정해지지 않은 중간 정거장으로, ‘한국의 포스트 인류세 뮤지엄’을 구상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여기서 말하는 ‘뮤지엄’은 전통적 의미의 제도적 장치나 물리적 공간이 아닌, 풀뿌리 기후 행동 네트워크로 존재한다. 드리프팅 커리큘럼의 핵심 어젠다였던 ‘기후행동을 위한 뮤지엄 재구상’은 2020년 국제 박물관의 날, ‘뮤지엄과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토론과 함께 처음 공개되었다. 런던 UCL 고고학 연구소의 로드니 해리슨 (Rodney Harrison) 교수와 암스테르담 대학의 콜린 스털링(Colin Sterling) 교수가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뮤지엄이 ___ 라면?”이라는 단순하지만 대담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드리프팅 커리큘럼의 다학제 네트워크와 함께 한국의 포스트 인류세 뮤지엄 프로젝트로 2025년부터 2027년까지 진행될 ‘드리프팅 스테이션’은 천수만 쌀 플랜테이션 농장을 주요 대상지로 삼는다. 천수만은 1980년대 본격적인 도시 개발과 산업화 과정에서 대규모 간척 사업으로 조성되며 막대한 생태계 파괴를 겪었으나, 우연히도 이후 대규모 철새도래지가 된 곳이다. 기계식 대규모 농업 과정에서 낟알이 꼼꼼히 수확되지 못해 간척 논에 남겨지자, 월동을 위해 찾아온 철새들이 이곳에 모여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철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돌보는 지역 농업 커뮤니티는 인간과 비인간 세계가 서로 호혜적 관계를 맺는 ‘다종 감지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드리프팅 스테이션’은 이처럼 대규모 생태 파괴 이후 오염된 땅을 포스트 인류세 뮤지엄으로 전환하고, 예술가, 학자, 농부, 어부, 마을주민, 관광객, 토지 소유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과 ‘협력적 감지’를 통해 다종 공동체의 지식과 경험 목록을 수집하고 공유하며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격적인 다년 프로젝트 진행에 앞서, 지난 6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드리프팅 스테이션-찬미와 애도에 관한 행성간 다종 오페라》에서는 김정모, 안가영, 안데스, 안정주, 천경우, 장은만, 하이로조익/디자이어스(히말리 싱 소인 & 데이비드 소인 태페서) 등 한국, 대만, 인도 출신의 국내외 작가 총 8명/팀이 참여해 인간과 비인간 공동체의 상실과 회귀의 이야기를 다양한 사운드의 형태로 펼쳐냈다. 1층과 2층 전시장을 가득 채운 새소리, 악기 소리, 종소리, 아이들의 노랫소리, 그리고 주파수의 파동 소리는 작품과 관람객이 함께 만들어낸 예기치 않은 협주로, 행성 간의 다종 오페라를 만들어냈다.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무기체, 물질과 정동이 서로 얽히고 찬미와 애도가 교차하는 이 전시 공간은, 관객들이 다양한 존재들의 소리와 현재 이 순간의 공명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함으로써 감각을 재배치하고,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었다.
한편, 유목적 형태의 풀뿌리 분산형 뮤지엄을 지향하는 ‘드리프팅 스테이션’의 비전을 공유하는 대만의 다학제적 리서치 플랫폼 ‘사이팅 바(Citing Bar)’와의 협업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집단적 학습의 장으로서 만남, 공연, 노래, 스토리텔링, 출판물 등의 형식을 활용해 사변적 대화를 펼쳤다. 8월 1일부터 3일까지 열린 ‘드리프팅 스테이션 LAB’ 프로그램은 기후 행동에 관심 있는 작가, 큐레이터, 매개자 등 신진 예술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담론 프로그램 및 워킹 그룹 활동으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 예술가, 지역 생태 활동가들이 진행한 워크숍, 상영, 발표, 명상 퍼포먼스를 통해 주변 환경 및 타종과 연결되는 다양한 실천 방식을 함께 탐구하고 배워나갔다.
미디어 아티스트 안가영은 디지털 게임을 기후 위기 속 폐허가 되어가는 땅 위에서 다종 간의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잠재적 상황들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간주하며 참여자들과 함께 픽셀게임을 제작했고, 연출가이자 안무가, 소리꾼, 배우, 퍼포머 등으로 활동하는 조아라는 참여자들과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감정의 진폭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 감응할 수 있는 몸의 감각을 탐구했다. 이 밖에도, 기획자와 참여작가들의 짧은 프레젠테이션, 매니페스테이션, 토크 등이 이어졌고, 성한아 과학기술 사회학자, 권경숙 서산태안환경교육센터장은 시민과학 활동과 과학 인류학적 연구로 포착한 인간과 새, 인간 너머의 존재와 함께 엮이는 연대와 실천의 방법을 다뤘다.
이러한 관계 맺기는 명제적 언어가 아닌 시적 언어, 행성 시학의 발명과 관련됨에 따라,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은 참여자들과 함께 집단 시 창작과 낭독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지질학적 지식을 베이킹 과정과 연결시키며 행성에 대한 미시적 감각과 상상력을 이끄는 안데스의 워크숍, T.J 데모스 문화비평가가 설립한 ‘창의적 생태 센터(CCE)’의 연구, 교육, 큐레토리얼 활동을 소개한 장선희 미술사학자의 강연, “숨을 참아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다소 엉뚱한 실천 공간으로 미술관을 변모시킨 김정모의 워크숍도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땅과 관계 회복을 탐색한 시간이었다. 전치형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와 박사과정에 있는 신희선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저를 꼬옥 안아주세요〉(2024) 상영을 끝으로, AI와 로봇, 기계와 인간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인간 너머 관계 속에서 상호 돌봄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드리프팅 스테이션 LAB’은 벽이 없는 학교처럼 작용하여 다양한 커뮤니티가 근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리고 잊힌 것에 대해 배울 수 있고, 협력적 감지와 다종 간 조우를 통해 비인간 세계와 호혜적 관계에서 필요한 변화를 이끄는 커리큘럼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교육학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 ‘드리프팅 커리큘럼’은, ‘커리큘럼’을 수식하는 ‘드리프팅(표류)’이라는 표현을 통해 근대적 제도에 개입하는 예술 실천을 지칭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이거나 현대적 의미의 커리큘럼 모두를 거부하고 말이 달리던 경주로 자체가 아예 사라진, 새로운 경주로에서 전혀 다른 룰이 적용된 경기장을 의미한다. ‘드리프팅 커리큘럼’이 새로운 경주로를 만드는 과정은 기존의 학교나 박물관 등의 근대적 시스템 밖으로 이동해 다른 행성적 차원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획득하는 학습’에 대한 대안적 차원으로서 ‘언러닝’이 ‘버리는 학습’을 의미한다면, ‘드리프팅 커리큘럼’은 모든 것이 난파되고 파괴된 이후에 새롭게 구축되는 에너지에 중점을 둔다.
3년간의 프로젝트 시작을 알리는 서막으로 기획된 본 전시와 ‘드리프팅 스테이션 LAB’은 대중, 예술가, 환경 NGO, 과학자, 정책 입안자들이 함께 기존의 경주로에서 천천히 벗어나며, 새로운 경로를 스스로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공유하는 장이었다. 한국의 포스트 인류세 뮤지엄으로 만들어질 ‘드리프팅 스테이션’은 예술계와 과학기술 공동체 및 지역 커뮤니티, 문화유산, 환경단체 간의 신뢰할 수 있는 협업을 통해 청년들의 기후 행동을 지원하고, 예술 분야의 새로운 전문성을 개발해 신진 예술 전문가들의 기후역량 강화를 위한 플랫폼으로 기능하고자 한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이 새로운 뮤지엄은 오염된 땅과 그 지역 커뮤니티의 경험과 지식을 수집하고, 그 축적된 정보들이 ‘지질학적-인간적 얽힘’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돌봄의 공동체로 확산되기를 꿈꾼다.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
파주 통일촌 마을, 갤러리그리브스, 임진각 평화누리 8.11~11.5
정소영 기자

사진 왼쪽부터 오상민, 원성원, 양혜규의 작품이 전시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양혜규 〈디엠지 비행〉(사진 오른쪽 위) 천 위에 염료프린트 360×660cm 2020/2025
그래픽 지원:유예나, 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커미션, 현대자동차 후원으로 제작
사진: 이의록 제공: 경기도 및 작가
리미널 스페이스로서의 DMZ: 단절과 미래의 상상
통제와 검문.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안내 문구와 낯선 폰트, 붉은색의 글귀는 잘 구현된 영화 세트장을 보는 듯했다.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한계선 사이의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하면서 느낀 시간의 분리와 단절은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DMZ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존재하지만 실감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일치였다.
팬데믹 기간 인터넷 밈으로 주목을 받았던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는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임계성을 나타내는 리미널리티(Liminality)에서 기원한다. 비어 있는 복도, 폐교, 공항과 같은 실제 공간이지만 분리된 맥락의 공간은 비현실의 세계와 같은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에 머무는 리미널리티의 감각은 DMZ에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했다.
멈춤에서 비롯된 질문들
‘되돌리다’의 의미인 전시명 《언두(Undo) 디엠지》는 ‘언두’의 또 다른 의미인 ‘열다’, ‘풀다’를 더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이후를 조망한다. 강제로 남겨진 DMZ의 생태·경계·존재·기억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예술 태도는 DMZ의 다층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위에 다시금 쓰였다.
올해 처음 함께하게 된 파주 통일촌 마을의 문화예술공간 ‘통’을 운영하고 있는 박준식은 2019년부터 DMZ 파주 권역에서 수집·보존한 식물 표본 〈비옥한 땅에 핀 꽃〉(2019~)을 전시했다. 액침과 건조 기법으로 채집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DMZ 주변 지역별로 구별한 식물 표본은 분쟁과 개발이 멈춘 땅 위에 다시 자라난 자연의 원형 그대로를 보여준다. 이와 상반되는 사운드스케이프 설치인 김준의 〈혼재된 신호들〉(2025)은 DMZ 주변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일상의 소리를 채집한 작업이다. 바람과 식물의 부딪침과 같은 오롯한 태초의 자연이 발생시키는 소리로 이루어진 〈숨 쉬고 바람이 부는 자리〉(2025)와 달리, 남북이 서로 비방하는 대남 대북 방송, 전파 소리 등 인간에 의한 잡음이 혼재된 작품은 전시장 밖 자연으로 둘러싸인 DMZ와 상반되는 이질적 경험을 전달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DMZ는 자연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새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DMZ 일대의 핵심 보호종인 두루미에 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한 홍영인의 〈학의 눈밭〉(2024)은 여덟 쌍의 두루미 발에 각기 다른 신발을 신긴 설치 작품이다. 두루미 발 모양별로 다양한 패션의 신발로 표현된 유희는 두루미를 동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는 생명체임을 상기시키며 동물과 인간의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아드리안 괼너의 〈흔적〉(2023) 역시 DMZ가 적을 향해 서로 포탄을 날리며 살상하던 전쟁 이후 역설적으로 자연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발견한 조류에 대한 기록이다. 전통적 수채화 기법을 이용해 그린 DMZ에 서식하는 조류의 모습으로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괼너의 작품은 기록 그 자체이자 인간의 발전과 변화가 일으키는 자연 파괴의 역설을 상기하게 한다.
DMZ의 멈춰 버린 시간과, 멈춤에서 비롯된 자연의 회복은 현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불안정한 리미널리티를 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경계적 혼돈은 양혜규의 평면작업 〈디엠지 비행〉(2020)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행기, 로봇, 벌, 선풍기 등 관계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디지털 콜라주 속에서 뒤엉킨 작품은 붕괴된 시간과 기술 발전의 현실 속에서 DMZ라는 복잡하고 정의 불가능한 공간의 특수성을 시각화한다.
또 다른 가능성의 자리
DMZ의 생태가 본격적으로 조명받고 예술·문화 주제로 다뤄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군사적 긴장과 자연 생태계 보고(寶庫)라는 이중적 현실 속에서 정부의 관광 중심적 시각과 예술가들의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접근이 대비된다. 때문에 이번 전시는 다시 한 번 DMZ를 야생성과 생명의 다양성이 회복되는 공간으로 조명하며, 예술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자 했다.
DMZ 접경지역인 파주에 문화예술관광지로 조성된 약 99만㎡(30만 평) 규모의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 설치된 원성원의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2010/2025)는 DMZ에서의 상상 속 미래를 현실로 소환한다. 한국 설화 속, 끊이지 않는 고통의 영원한 윤회가 사냥꾼의 화살을 맞는 멧돼지로 인해 끊어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현실의 DMZ 배경에 더해진 멧돼지와의 합성을 통해 DMZ에 깃든 오랜 상처와 오해의 굴레가 끊어지는 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또 다른 상상의 교차점을 일으키는 작품으로, 평화누리공원의 푸른 잔디밭 위에 세워진 오상민의 〈빛: 자연과 선(線)의 틈에서〉가 있다. DMZ의 붉은색 군사 경고 표지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은 붉은색을 바탕으로 철조망을 상징하는 금속사를 엮어 만든 조형물이다. DMZ에 서식하는 덩굴식물의 형상을 모티프로 제작된 문양은 금속 성분에 의한 빛의 반짝임으로 야외에서 더욱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자연의 근원이 되는 빛으로 자연과 바람, 인간의 기술이 공존하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현재 DMZ는 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을 넘어, 세계 냉전사의 마지막 잔존지로서 국제적 의미를 지닌다. 베를린 장벽, 키프로스 그린라인과 같은 분단의 상흔과 비교할 때 DMZ는 분리와 단절의 경험을 보편적으로 공유하면서도, 그 속에서 회복된 생태가 드러내는 역설적 풍경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곳이다. 때문에 DMZ에서의 예술은 이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처를 기록하는 동시에 치유의 언어로 변환하며 분단의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정치적·문화적 담론으로 제안한다. 또한 DMZ의 자연은 분단이라는 비극적 조건으로 보존되었지만, 기후 위기의 시대에 이는 전 지구적 보존 모델로 전환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러한 담론적 가능성이 DMZ에서의 단발성 행사로 소모되지 않으려면, 촉박한 행정 일정과 예산 축소라는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는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DMZ 전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장기적 문화자산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DMZ의 리미널리티는 지리적 현상에 대한 감각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 전체의 불안정한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고 본다. DMZ에서 느끼는 불일치와 모순의 감정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이후 세대가 각기 다르게 상상하는 한반도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그 경계적 경험을 감각화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여전히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서 있는 분단국가로서의 자리를 성찰하게 한다.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국립중앙박물관 6.10~8.31
편지혜 미술사학

〈백자청화매죽문호〉높이 41cm 조선15세기 국보 개인소장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 전기, 새로운 시대미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같은 몇몇 걸작들은 친숙하지만, 조선 전기 미술의 다양한 면모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특히 조선왕조가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이 시기 예술 역시 소박하고 검소하며, 화려함을 절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는 조선 전기 미술의 일면일 뿐, 당시 예술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온전히 대변하지는 못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 개관 20주년을 맞아 선보인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은 이 같은 제한적 시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조선 건국부터 16세기에 이르는 200년간의 예술 성과를 691점의 유물로 집대성한 이 전시는 당대 미술의 제작과 생산 시스템, 사상적 배경, 사회적 맥락, 종교 등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전시는 태조 이성계가 발원하여 금강산에 봉안했던〈사리장엄(舍利莊嚴)〉(1391)으로 시작된다. 금동 사리함과 백자 발 등으로 이루어진 이 유물을 통해 조선 건국에 대한 이성계의 열망과 다짐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백(白), 묵(墨), 금(金) 세 가지 색으로 구성이 전개되는데, 각각 도자, 서화, 불교미술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훈민정음〉을 통해 조선 전기와 현재를 연결하며 마무리된다.
도자로 빚어낸 시대미감
전시의 첫 번째 섹션인 ‘백(白), 조선의 꿈을 빚다’는 조선 전기 도자의 전환을 보여준다. 조선의 시작과 함께 푸른 청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의 시대로 도약하는 200년간의 여정이 펼쳐진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국가가 주도한 혁신적 제작 시스템이 존재했다.
조선은 유교적 질서 확립과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전국의 도자 생산과 유통에 체계적으로 개입했다. 공납용(貢納用) 분청사기에는 사기장(沙器匠)의 이름, 납품 관사, 제작 지역, 사용처 등을 새겨 철저히 관리했다. 이 시기 분청사기는 무늬 도장으로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백토를 채우는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주로 장식되었는데, 이는 규격화와 동시에 경제성과 심미성까지 성취한 합리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왕실의 관요(官窯) 운영으로 공납 의무에서 벗어난 지역의 장인들은 기존의 통일되고 정제된 양식을 탈피하여 개성 넘치는 분청사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분청사기조화·박지연어문편 병(粉靑沙器彫花剝地蓮魚文扁甁)〉(조선15세기)은 활짝 핀 연꽃과 그 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의 모습을 풍만한 편병 위에 생동감 있게 장식하여 자유분방한 미감을 드러낸다.
조선왕실은 경기도 광주에 관요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도자 생산에 나섰다. 이로써 백자가 조선 도자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 시기 백자는 유교적 예(禮) 실천의 핵심 도구로 활용되었다. 국가의 오례(五禮)에 사용된 그릇과 태(胎)를 보관하는 항아리는 백자로 제작되어 왕실의 이상과 영원함을 상징했다.〈백자청화매죽문호(白磁靑畵梅竹文壺)〉(조선15세기)와 같이 순백의 표면에 청화 안료로 그림을 그린 백자는 왕실 도화서 화원들의 뛰어난 솜씨로 조선왕조의 품격을 드러냈다.
수묵으로 그려낸 인문정신
두 번째 섹션인 ‘묵(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이상을 담은 서화 세계를 보여준다. 불교 중심의 고려에서 유교 중심의 조선으로 이행하면서 본격적인 인문시대가 열렸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은 시서화로 대표되는 인문을 바탕으로 문치(文治)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들에게 서화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유교적 수양의 도구이자 이상향을 구현하는 매체였다.
사대부들은 수묵의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이상과 내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수묵산수화는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이상향의 풍경을 담은 관념산수화였다. 즉, 산수화는 우주의 운행법칙을 담은 이상적 자연을 재현했고, 사대부들은 이를 통해 와유(臥遊), 즉 ‘누워서 명승지를 유람하는’ 상상적 체험을 즐겼다.
이러한 철학이 구현된 대표작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조선16세기)다. 중국 호남성 동정호 일대의 여덟 군데 절경을 그린 이 그림은 조선 전기에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소상팔경도는 봄의 산시청람(山市晴嵐)으로 시작하여 겨울의 강천모설(江天暮雪)로 마무리되는 사계절의 변화를 담아낸다. 진주박물관 소장 작품은 전경·중경·원경의 삼단 구성과 끊기는 듯한 짧은 선으로 산과 바위를 표현하여 16세기 전반 수묵산수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한편 궁중에서는 길상이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화조영모화 같은 장식적 그림이 그려졌다. 특히 영모화에 뛰어난 이암(李巖)의 〈모견도(母犬圖)〉(조선16세기)는 어미 개와 새끼들 사이의 깊은 애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먹의 농담만으로 털의 질감은 물론 온화한 표정과 모정까지 화폭에 담아냈다. 금방울과 붉은 술이 달린 목줄을 한 어미 개는 궁중 애완동물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그의 화풍은 일본 에도시대 영모화의 먹 번짐 효과를 활용하는 ‘다라시코미(溜込)’ 기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빛으로 담아낸 변치 않는 신앙
전시의 세 번째 섹션인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는 조선 전기 불교미술의 지속과 변화를 조명한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사적 신앙으로서 왕실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삶에서 위안을 주는 종교로 기능했다. 유교가 종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했다면, 불교는 신분을 가로지르는 횡적 유대를 형성하며 조선인들의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불교에 대한 입장은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공적으로는 불교를 제한했지만, 사적으로는 신앙에 여전히 의지했다. 태조의 무학대사(無學大師) 왕사 임명, 세종의 불서 한글 번역, 세조의 원각사 창건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적 질서가 점차 확고해졌다. 이로 인해 왕들이 불교 신앙 활동을 공개적으로 펼치기 어려워지자, 왕실 여성들이 불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문정왕후(1501~1565)는 선교양종(禪敎兩宗)과 도승제(度僧制)의 부활, 그리고 회암사 중수를 통해 불교 부흥을 이끌었다. 왕실 발원 불사의 목적은 죽은 가족에 대한 애도와 극락왕생 기원, 병의 치유, 득남 등 인간 본성에 맞닿아 있는 간절한 바람들이었다.
조선 전기 불교회화는 고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16세기 ‘금화(金畵)’ 기법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어두운 비단 바탕에 금선묘로만 그린 불화는 문정왕후 발원작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문정왕후가 회암사 중창을 위해 조성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인〈약사여래삼존도(藥師如來三尊圖)〉(1565)는 조선 전기 금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갈색 비단 바탕에 금선묘로 중앙의 약사불과 좌우의 일광·월광보살을 그려냈으며, 보관, 좌대 등의 세부 장식과, 옷 주름, 복식의 문양까지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했다.
조선 전기 미술의 재발견과 그 현재적 의미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은 조선 전기 예술에 대한 통념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동안 소박하고 절제된 이미지로만 인식되어 온 조선 전기 미술이 실제로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역동적으로 발전하며 시대정신을 구현한 창조적 예술이었음을 재조명했다. 주목할 점은 국내외 70여 개 기관에서 대여한 방대하고 귀한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조선 전기 세계관에 대한 미적 탐색이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시대미감’은 조선이 고려의 미의식을 계승하면서도 유교적 질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미적 감각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백자로 구현된 유교적 이상, 수묵으로 표현된 인문정신, 변치 않는 신앙 안에서 피어난 불교미술로 나타나며, 이 세 축은 백색, 먹색, 금색이라는 세 가지 빛깔의 미감으로 응축된다.
이번 전시는 개별 작품의 양식사적 분석을 넘어 미술의 제작 시스템, 유통 구조, 사회적 기능까지 종합적으로 접근했다. 이를 통해 미술을 시대 창조의 동력으로 파악하는 통합적 시각을 제시했다. 나아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미술의 힘을 되새기며, ‘새 나라, 새 미술’이라는 화두가 오늘날 한국 미술에도 유효한 질문임을 확인시켜준다. 전통의 단절이 아닌 창조적 계승과 변환을 통한 문화적 혁신이라는 조선 전기의 성취는 동시대 한국 미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유현미: Hybrid Reality》
금호미술관 8.1~9.28
박영택 경기대 교수

《유현미: 하이브리드 리얼리티》금호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금호미술관
착란과 몽상의 풍경
유현미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 사진이 하나로 공전하며 착란과 허구의 상을 안겨준다. 한편 우리가 보는 세상을 중력으로부터 이탈시켜 휘어놓고 낯선 것들끼리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관계를 부단히 접속시키면서 이 현실계를 매질한다. 유현미의 작업은 분명 혼성적이다. 장르를 파괴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동시에 각각의 장르를 다시 감각적으로 재구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장르란 무엇이며 그것이 초래하는 새로운 감각, 위상은 어떤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일상의 사물을 선택해서 그 표면 위에 회화적 행위가 얹히고 공간에 재진입해 배열되는 과정은 오브제 작업에 더해지는 회화, 그리고 설치가 하나로 묶이는 일이다.
기존의 사물이 그대로 밀고 들어와 맥락을 비틀고 낯선 얼굴을 내밀게 하는 작업보다도 이 오브제 작업은 익숙한 것을 다른 서사의 구조에 편입시킨다. 동시에 사물의 피부에 개입한 환영적인 흔적들로 인해 그 사물은 평면의 위상으로 호출해 나열하는 관계에 견인된다. 그렇게 역설적이게도 입체는 부단히 평면으로, 화면으로 들어가는 착시를 안기며 서 있다. 그러고는 이를 다시 매끄러운 사진의 피부로 마감한다. 그러나 그 사진은 결코 단일한 표면이 아니라 매우 촉각적인 환영을 입체적으로 드리우며 펼쳐진다. 이 애매한 사진의 피부 위에서 받는 낯선 감각은 기존 사진과는 무척이나 상이한 것이다. 오브제(조각)와 회화, 사진을 다시 자신의 감각으로 재편성하면서 그 장르에 균열을 일으키고 확장시킨다. 오브제에서 회화를, 회화에서 입체를, 사진에서 회화와 입체를 부단히 인식하게 하는 변환과 착란이 질주한다. 이 전환의 감각으로 인해 전통적인 장르에 갇힌 개념은 유출된다.
유현미의 작업은 장르의 혼성적인 방법론에만 귀속되지 않는다. 각 연작을 관통하는 서사, 주제가 두드러진다. 이 주제 역시 과거와 현재, 현실과 무의식이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십장생〉(2024) 연작은 조선 후기 민화를 차용한 작업이다. 십장생이나 책가도는 당대 사람들의 인간적인 욕망을 극대화한 주술적인 이미지다. 무병장수하고 불멸과 불사의 길을 추구하거나 현세적인 소망이 절박하게 내재 된 그림이다. 유한한 인간의 조건과 한계를 이미지의 힘을 빌려 돌파하려는 환상과 의지가 간절하게 수놓아진 그림이다.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이의 시선이 교차하고 현세의 인간과 귀신이 소통하는 자리다. 죽은 이(조상신의 음덕)는 산 자들에게 축복을 보내고 산 자들은 죽은 이를 축원한다. 그 자리가 민화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거기에는 그림자가 부재하고 원근법적 시선도 사라진다. 작가는 일상의 오브제를 이용해 민화를 재구성해 보인다. 여기에는 동시대인들의 생의 욕망을 상징하는 사물들이 빈약하게 재연된다. 생의 소망과 꿈들이 파리하게 시든 자리와도 같다.
작가는 민화가 환시적으로 보여주는 주술성을, 불안한 현실과 덧없는 삶을 이겨나가려는 의지를 다시 돌이켜보게 한다. 그러한 꿈들은 여전히 모든 인간에게 공유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너무 인간적인 것들이라 도리어 슬프다. 그 슬픔의 자리, 역설적인 부재감을 보여주는 것은 위태롭게 자리한 집을 보여주는 작업 내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와 의자가 놓인 작업 등에서도 엿보인다. 우리가 견디고 서 있는 생의 자리는 얼마나 불안하며 이 삶은 또 얼마나 남루한가 하는 생각, 그리고 그곳에서 싹을 틔우는 희망의 자리는 또 무엇인가.
유현미의 작업은 하이브리드적이다. 조각과 회화, 사진이라는 세 장르가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은폐하다가 슬쩍 공모관계를 교묘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인위적인 경계, 당연한 상식과 규범의 체계를 허무는 일이자 극복하는 일이다. 그와 한 쌍으로 현실과 비현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식과 무의식, 생과 꿈 등이 작업의 주된 테마가 되고 있다.
꿈을 꾼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비현실을 사는 시간이자 공간이며 시각과 비시각의 영역을 넘나드는 일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세계로 낙착됨을 의미한다. 꿈이 많고 몽상이 깊은 이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사는 이들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눈, 자신만의 내밀한 경험과 시각적. 심리적 체험을 가시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능력 등이 그렇다. 그것은 또한 샤먼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알고 있는 것과 모호한 것을 다루는 미술은 분명 꿈과 관련이 깊다. 현실에 비해 꿈은 비연속성을 띤다. 그러니까 꿈은 시간의 연속성을 자르고 횡단하며 아울러 공간적 불연속성을 지닌다. 꿈속에서는 현실에 저당 잡힌 모든 인과율이 분해되고 해체된다. 이처럼 꿈에서 가능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비연결성은 비현실적, 초현실적 상황을 초래한다.
그런가 하면 꿈은 철저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그 꿈은 결국 혼자만이 겪는, 누구와 공유하기 힘든 독특하고 개별적인 경험이다. 그것이 아무리 시각적이고 또는 생생한 경험이었다고 해도 과학적으로는 결코 증명할 수 없다. 시각적 또는 물리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에 그것은 분명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전적으로 무(無)로 돌릴 수 없다. 너무나 생생히 체험하고 느끼고 만난 것들이다.
유현미의 작업은 꿈과 미술/이미지의 친연성을 지속적인 화두로 삼아왔다. 오랫동안 꿈과 현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영역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흔들고 지워보려는, 아니 그 경계에서 위태롭게 서보려는 시도를 자신의 작업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꿈이 지닌 시각적 비재현성이 홀연 미술과 만나 출현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먼저 작가는 리얼리티가 있는 구체적인 사물과 현실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사물의 세계를 꿈과 시적으로 연출한다. 그러자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언캐니한 풍경이 출몰한다. 작가는 일상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사물을 석고붕대로 고정해 조각된 사물을 만들고 그것들을 인위적 공간(작가의 스튜디오)에 포함시켜 한 장의 그림이자 사진으로 꾸며낸다. 사물(오브제)에서 조각으로, 회화로 다시 사진으로, 결과적으로 그 모두가 통합된 형국인 셈이다. 이때 사물의 표면을 새롭게 연출하는 한편 붓 자국으로 인한 마티에르를 적극 부여한다. 일종의 회화적 제스처다. 그러니까 작가는 전통적인 조각과 회화의 과정 자체를 실현하고 모방하면서 그렇게 연출된 이미지를 사진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로 인해 조각과 회화, 사진이라는 장르의 차이, 경계가 어지럽게 섞이고 결합해서 다소 기이한 장르가 되었다. 이처럼 작가는 모든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굳어진 영역을 유연하게 주무르며 밀고 나아간다.
작품 속의 사물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허공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며 연결되어 있다. 개별적인 세계, 사물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자 개체로 자존하지 않고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인식이다. 혼돈과 미분화, 순환적 사유는 다분히 여성적이자 동양적 사유의 한 편린인 동시에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을 겨냥하고 모든 장르를 월경하고자 하는 작가의 전략 아래 나온다.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장르와 상황들이 만나서 창조적인 이미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유현미의 작업이다. 작품을 보는 이들은 ‘사물 자체-조각-회화-사진의 영역 사이’를 횡단하고 거닐고 헤매면서 상상력과 깨달음, 환영의 장면을 즐기게 된다. 현실계에서 벗어난 낯선 세계와 조우한다. 여기서 관람자는 단순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기꺼이 작품 표면으로 호명되어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거나 숨은 그림을 찾는 식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성을 부여받는다.
《김한샘: Nowon》
디스위켄드룸 7.30~9.6
강재영 기자

사진 중앙의 작품은〈Demo Play〉(2025)
《Nowon》 디스위켄드룸 전시 전경 2025 제공: 디스위켄드룸
모순된 삶을 긍정하는 ‘No one’
디스위켄드룸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칩튠(Chiptune)1 사운드가 공간을 채운다. 6인치 컬러 TV에는 드라마 〈신돈〉 밈을 떠오르게 하는 픽셀 애니메이션 〈시지프스〉(2025)가 쇼윈도를 등지고 반복 재생되고 있고 양쪽 벽에는 플라스틱 프레임 안에 채워진 볼록하고 반짝이는 레진 작업이 나란히 자리한다. 브라운관 TV를 왼쪽으로 90도 꺾어놓은 듯한 이 액자 안에는 성전의 전사들을 위한 비장하고 음울한 글귀나 〈Ars Goetia〉(2025)처럼 중세 유럽에서 흑마법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문양이 그려져 있다. 검정 바탕의 녹색 글자로 비균질적으로 처리된 레진의 표면은 이 그로테스크함을 한층 배가시킨다.
김한샘 개인전 《Nowon》은 작가가 제작한 2D 횡스크롤 게임의 이름이자 작가의 새로운 작업실이 자리한 ‘노원’의 이름이기도 하다. 게임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한 왕국은 오랫동안 평화로웠고 지하의 성수가 이 평화를 유지시켜 주었다. 왕족은 이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악마는 샐러맨더를 통해 왕족의 정신을 오염시켰으며 결국 세상에 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정화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미궁을 탐험하여 숨겨진 고대 유물을 찾아야 한다. 전시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담은 〈Demo Play〉(2025)를 중심으로 자신의 게임에 등장하는 픽셀 형태의 프랍(Props)을 무엇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모양으로 현현(顯現)한 기념물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Nowon〉은 횡스크롤 게임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플레이어는 닉네임으로 히어로(Hero)를 선택한다. 히어로는 가로로 펼쳐진 땅 위를 좌우로 달리거나 점프하면서 장애물을 넘거나 공격하며 경험치를 쌓고, 전리품을 얻는다. 시야가 제한되어 다음에 어떤 기회와 위협이 나올지 모르기에, 새로운 위협과 기회에 대응하는 것이 게임의 주된 플레이 방식이다. 플레이어는 장애물과 적에게 게임 오버 당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게임의 지형지물, 순서 등을 익히며 점점 성장해 나간다. 그런데 플레이가 이어질수록 주어지는 상황은 미묘하게 틀어져 있고, 등장하는 상황의 전후 관계가 논리적으로 짜여있기보다는 더 직관적으로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와 같은 맥락이 삭제된 ‘응원 문구’는 공허하지만 이러한 게임의 특성과 묘하게 조응한다.

〈Podium〉 아크릴 페인트,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21×16×18.5cm 2025
예를 들면, 게임 초반부에 등장하는 허수아비는 아무 의미 없이 공격당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공격하지 않고 지나가면 아이템을 주겠다고 히어로를 설득한다. 히어로는 아이템을 받은 후 잠시 망설이다 허수아비를 공격한다. 허수아비와의 신뢰를 저버린 히어로는 벌을 받을 것만 같지만 지는 쪽은 약자 허수아비고 금화 보상이 쏟아지는 것으로 장면(Scene)이 마무리된다. 작가는 히어로가 약속을 지키길 기대했을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까? 한 장면 더 보자. 게임 중간엔 공격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대상을 도와주는 퀘스트도 등장한다. 장애물 때문에 깨끗한 물로 향하지 못하고 말라가는 오리너구리를 연못으로 인도한다거나, 딱따구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 고목을 위해 딱따구리를 제거해준다. 재미있는 지점은 게임이 이러한 행위에 어떠한 보상도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을 뿐이다. 닉네임을 설정하는 화면에서 특정 문구를 입력하면 이스터 에그(Easter Egg)2 ‘Secret Room’이 등장한다. ‘DOOMGUY’라는 이름 뒤에 나온 비밀의 방은 게임 ‘디아블로’에서 그동안 화자 자신이 죽인 악마의 수가 수만 마리는 되지 않을까 자문하는 내용이다. 게임 속 죽기 위해 등장하는 객체로서의 캐릭터에 눈을 달아보는 시점 전환은 이 장면에서 명확하게 일어난다. 〈Nowon〉에선 히어로를 위협하는 장애물로 다람쥐가 등장한다. 게임 서두에 말한 악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귀여운 존재지만 다람쥐에게 공격당하면 목숨을 잃기에 죽여야만 한다. 영상 말미 등장하는 숲의 주인 다람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우리 동족을 너무 많이 죽였어. 단지 여흥3을 위해 수많은 다람쥐를 죽이다니.” 이 장면을 지나간 후에 전시장에 디스플레이된 다람쥐의 모습을 한 〈Podium〉(2025)은 히어로라는 이름의 포식자에 의해 박제된 전리품처럼 보이고,〈화수분〉(2025)에서 멈추지 않고 솟아나는 금화는 자본을 향한 플레이어의 꿈이자 욕망을 직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한샘은 신화와 게임을 응축해 현실에 도사린 함정들, 이를테면 헛된 희망과 믿음과 같은 모순을 구조적으로 극대화해 조명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삶 사이에 놓인 소소한 희망의 흔적들, 여전히 작동하는희망을 ‘단지 부정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메시지는 이제는 박물관에서 볼 법한 올드 미디어의 시각적 형식에 녹여 추억을 품은, 이제는 성인이 된 관객을 효과적으로 유인한다. 어쩌면 이번 전시는 그동안 김한샘이 해왔던 올드미디어와 중세 신화에 대한 집요한 탐닉과 자신만의 수공예적 재현이 종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전시와 동명의 게임 제목이 지닌 여러 레이어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단초와 효과적으로 겹쳐지게 하면서 게임에 등장하는 단순화된 순간순간의 기쁨과 슬픔을 관람자 자신의 패배와 극복의 순간으로 유비하도록 돕고 있다. 1층 전시장에 설치된, 레진과 플라스틱으로 된 일련의 시리즈나 〈O Holy Knight〉(2025), 〈Testers for Alpha〉(2025)와 같은 작업의 경우는 게임 속에 등장하는 비물질 캐릭터를 물리적으로 구현해내면서 게임 속 스토리에 모종의 현실 감각을 부여한다. 특히〈Testers for Alpha〉와 같은 작업은 〈Demo Play〉 속 죽어간 악마들의 모습과 대구를 이루며 긴장을 만든다. 이는 현실과 가상을 착란케 한다기보다는 게임 속에서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리는 존재들을 기념케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혹은 정신성을 물질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디오 게임이 개인, 그리고 현실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게임과 관계한 다양한 문헌과 개인적인 경험을 교차하며 서술한 임가영의 『연속종이: 비디오 게임의 죽음』(2025)에서 저자는 게임으로 도피하는 기제를 “‘( 언젠가는) 게임을 꺼야 한다’와 ‘게임을 끄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일종의 이중 구속적인 강박”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게임에 몰입하는 경험은 매우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결합이다. 이중 구속을 종이라는 물질적이고 외재적인 매체를 통해 해체하고 재감각하려고 했던 임가영의 시도는 김한샘의 작법과 겹쳐 보이며 독해의 단초가 된다. 게임에 몰입한 경험을 설명하는 말로 현실 도피, 혹은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이상의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고 환상을 가장 능동적인 형태로 사용”4한 것이라 말하는 저자의 말이, 김한샘이 작업에 투영해 내는 어떠한 에너지와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1 칩튠은 패밀리컴퓨터로 대표되는 1980년대 게임기의 내장음원 칩으로 만들거나 그와 흡사한 음색(에뮬레이션과 샘플링 포함)으로 만든 곡, 혹은 음악 장르를 일컫는다. 한국어 위키백과 ‘칩튠’ 인용 https://ko.wikipedia.org/wiki/칩튠/
2 부활절 토끼가 부활절 계란을 숨기듯 프로그래머가 소프트웨어에 특정 기능을 숨기는 것을 일컫는 게임 용어
3 게임 속에선 다람쥐의 주식인 도토리를 빼앗아 싸이월드의 배경음악을 바꾸었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4 임가영 『연속종이: 비디오게임의 죽음』 화이트 리버 2025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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