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서재 4: 안규철
『수집의 논리(Logik der Sammlung)』
글 안규철 진행 노재민
The Artist’s Bookshelf

사진: 안천호 제공: 국제갤러리
안규철 Kyuchul Ahn /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계간미술』 기자로 일했으며, ‘현실과 발언’ 활동에 합류했다. 유학을 위해 파리로 떠난 뒤, 그 다음 해 독일로 이주하여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학부와 연구과정을 모두 마치고 귀국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열두 개의 질문》(국제갤러리 부산, 2025),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5), 《49개의 방》(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 2004) 등이 있다.

『수집의 논리(Logik der Sammlung)』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지음 Carl Hanser 1997
안규철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보리스 그로이스의 『수집의 논리』를 다시 읽으며 미술의 가치를 규정하는 힘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컬렉션의 내적 규칙, 곧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향해 작동하는 수집의 메커니즘에 있음을 끌어온다. 이어 ‘처음엔 미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미술관 소장품이 되는 역설과 아방가르드 전략을 짚는다. 나아가 1990년대 이후 기획전·설치가 ‘사건’으로 기능하는 ‘흐르는 미술관’의 등장을 통해 미술관이 저장의 장소에서 사물을 ‘재탄생’시키는 역동적 장—‘사물을 위한 교회’—으로 변모했음을 설명하며 오늘의 미술과 미술관의 생태를 가늠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수집의 논리』는 1997년에 초판이 나왔다. 30년 전에 쓴 책이니, 그 이후 미술에서 일어난 변화를 생각하면 이 글들이 현재를 설명하는 데 얼마나 유효할지 의심할 만하다. 그러나 미술관과 모더니즘 미술의 관계로부터 미디어 시대의 미술관 기능 변화에 이르는 그로이스의 선구적인 통찰은 21세기 미술과 사회를 조망하는 지침으로 여전히 부족함이 없다.
나는 이 책을 2000년대 초에 처음 읽었다. 이어서 2003년에 나온 그로이스의 『미술의 지형학(Topologie der Kunst)』을 구해서 읽었는데, 한동안 이 두 권의 책을 교재로 대학원 강독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책들은 그 무렵 미술 환경의 전면적 재편 속에서 신뢰할 만한 오리엔테이션이 절실했던 나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전 세계로 확산된 비엔날레와 인터넷은 기성 미술의 체제와 권위를 급속히 무너뜨렸고, 미술가들은 미술사에 기록될 영원한 작품을 만드는 고독한 은둔자가 아니라, 한시적인 기획전시를 따라 유랑하는 ‘이벤트 기획자’에 가까워지는 듯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미술인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동시대 미술 상황을 파악하고 나름의 방향을 잡는 데는 그로이스의 이 책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레닌그라드대학에서 수리 논리학을 전공하고 뮌스터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보리스 그로이스는 후기 구조주의로부터 발터 벤야민, 키에르케고르, 러시아 근대 철학에 이르는 여러 철학적 전통을 배경으로, 서구 모더니즘 미술과 사회주의 미술을 재평가해 온 철학자이자 미술이론가이다. 평이하고 명료한 문장과 수학 문제를 풀듯 논리정연한 글쓰기로 유명한 그는 독일어와 영어로 20여 권의 책을 냈고, 지금도 이플럭스(e-flux) 저널에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새로움에 대하여』(김남시 옮김, 현실문화), 『반철학 입문』(서광열 옮김, 경희대학교 출판부), 『코뮤니스트 후기』(김수환 옮김, 문학과 지성) 등이 있다. 1994년부터 2009년까지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미술학교와 미디어아트센터(ZKM)에서 교수로 재직한 그는 현재 뉴욕대(NYU)의 러시아 슬라브학 석좌교수로 있다.『수집의 논리』는 미술관과 미술을 중심으로 동시대의 다양한 사회문화 현상을 거시적으로 분석한 메타 비평적 저술이다. 책 제목을 직역하면 “수집의 논리, 미술관 시대의 끝에서(Logik der Sammlung, Am Ende des Musealen Zeitalter)”인데, 풀어쓰자면 ‘미술관 시대의 종말과 수집의 논리’ 정도가 될 것이다. 고전적인 기억의 장소로서의 미술관이 종말에 이르렀다고 진단하면서 미술관 기능의 근본적 변화를 서술한 세 편의 글이 책의 앞부분에 실려 있고, 이어서 대중문화, 근본주의, 동어반복, 정치적 참여 예술, 도시와 관광여행, 사진의 진실, 미학적 관점에서 본 망명자,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동유럽 문화, 신체와 스포츠 같은 광범위한 주제로 13편의 에세이가 이어진다.
이 책에서 당연히 주목되는 것은 미술관의 수집에 관한 글들이다. 그로이스는 소비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지는 다른 생산물과 달리, 미술은 수집되는 것을 목표로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작품이 수집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나 선함이나 진실 같은 기준들이 아니라, 바로 수집의 논리, 미술관 컬렉션의 내적인 논리라고 단언한다. 수집에는 그 자체의 고유한 메커니즘이 있는데 끊임없이 기존에 수집되지 않은 것, 이미 수집된 것과는 다른 것, 새로운 것을 찾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표 수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우표를 두 장씩 모을 이유가 없다. 그것보다는 우연한 실수로 인쇄가 잘못되었거나 특별한 내력이 있는 희귀한 우표를 수집하는 것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 된다.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차이가 있는 것만이 수집할 가치가 있다. 수집 가치를 만드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이다.
이러한 수집의 논리는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수집할 때 그대로 적용된다. 미술관은 기존의 미술과 같거나 비슷한 미술작품을 수집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미술처럼 보이는 작품’은 수집을 거절당하고 ‘키치’로 평가절하된다. 미술관은 기존의 미술과 다른 미술만을 수집한다. 역설적이지만 ‘처음에 미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어야 미술관 소장품이 될 자격을 갖는다는 말이다. 미술이 아니었던 변기를 미술로 만든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수집의 논리가 가장 완벽하게 실현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로이스는 “성자가 되려면 독실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먼저 죄 많은 삶을 살고 난 다음에 참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유로 이 역설을 설명한다. 미술이 아니었던 것만이 미술이 될 수 있다. 미술관은 미술 아닌 것으로 미술을 만드는 기관이다.
그로이스는 같은 논리로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해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미술관을 ‘미술의 무덤’이라고 비판하면서 미술관에 저항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의 미술이야말로 미술관이 요구하는 새로움에 대한 강요, 수집의 논리에 철저히 순응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미술을 미술 제도와 관습에 대한 급진적 저항이자 예술가의 절대적 자유와 혁신의 표현으로 보는 형식주의 모더니즘 미술의 관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그로이스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금지의 원칙에 지배된다. 그들은 “새로운 풍요로운 땅을 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황무지를 뒤에 남길 뿐이다. 여기서 예술가는 신대륙을 발견하는 자가 아니라, 사막으로 보내지고 거기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자와 같다.”
그로이스는 1990년대에 미술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본질적인 변화의 징후를 포착하며 미술관의 기능을 재정의한다. “기획전시와 설치는 한시적인 작은 미술관들이고, 미술 작품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관계 맺기의 사건’이다. 동시대 미술은 ‘사건적 성격’을 가지며, 미술관은 이러한 기획전시와 설치를 위한 무대가 되었다.” 영구적인 컬렉션의 장소였던 미술관이 일시적인 대규모 전시를 위한 무대로 변화한다. 그로이스는 이를 ‘흐르는 미술관’이라고 지칭한다.
전통적인 미술관이 ‘기억의 장소’이자 ‘사물의 묘지’로서, ‘삶의 기능이 박탈된, 죽은 것’을 보존했다면 동시대 미술관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술관은 수동적인 저장고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기관, 문화-생태적 재활용 시설, 재처리 시설이자 사회·정치적 공간이 된다. “미술작품의 삶은 미술관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것은 애초부터 죽음 이후의 삶이다. 미술관은 수집된 물건의 과거 기억을 지우고, 실용적 기능이 없는 사물들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여 미술작품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든다. 미술관은 묘지가 아니라 사물을 위한 교회이며, 여기서 사물들은 ‘자신들의 귀환, 재탄생, 재림을 경험’한다.” 이로써 미술관은 세속화 시대에 교회를 대체하는, 사물을 신성화하는 공간이 된다.
그로이스는 미디어 시대의 도래,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붕괴, 그리고 끊임없는 기술적 문화 생산이 미술관을 ‘기억의 장소’에서 ‘사물을 위한 교회’로, ‘보존’에서 ‘재활용’으로, ‘고정된 진리’에서 ‘유동하는 사건’으로 변화시켰다고 본다. 동시대 미술관이 보여주는 변화하고 유동하는 특성은 동시대 주체의 유동적인 정체성을 반영한다. 미술가와 큐레이터는 이제 “정해진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사건’을 만들고, ‘관계’를 구축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타자의 미학적 위치를 재규정하는 ‘여행하는 기념비’가 된다. 이러한 복잡하고 역설적인 문화 역학 속에서, 미술은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1990년대에 보리스 그로이스가 내놓은 진단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미술과 미술관의 모습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 “ ” 표시된 문장은 모두 [수집의 논리]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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