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날

《문명의 이웃들: Somewhere over the Yellow Sea》
목포시, 진도군, 해남군 등 전남 일원 8.30~10.31

강재영 기자

Theme Feature

김지아나 〈경계아래, 머무는 것들〉도자, 순환펌프, 혼합 매체 250×460×315cm 2025
《문명의 이웃들》 목포문화예술회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강재영


문명의 이웃으로 확장된 수묵의 지형도
강재영 기자

제4회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10월 31일까지 목포시, 진도군, 해남군에 위치한 총 6개 전시공간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비엔날레는 《문명의 이웃들》이라는 주제 아래 ‘전통의 재발견’, ‘현대적 확장’, ‘세계화’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수묵이 지닌 글로벌한 잠재력을 입증하고자 한다. 총 20개국 83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동아시아 공동의 문화적 유산은 무엇인가에 대해 윤재갑 예술감독이 다시 그리는 ‘수묵의 지형도’가 담겼다.

로랑 그라소〈과거에 대한 고찰〉 캔버스에 유채 200×400cm 2021
전남도립미술관 소장 《문명의 이웃들》 땅끝순례문학관 전시 전경 2025

K아트의 선봉이라는 이름표 아래 고요히 빛나는 수묵
언론 공개회에서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윤 감독이 “수묵이 K아트의 선봉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윤 감독의 답변을 정리하면 이렇다.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는 서양미술사의 자장으로부터 독립된, 아시아 공동의 가치를 품은 전 세계 유일한 비엔날레라는 것이다. 나아가 동아시아가 품은 문명적 가치와 위상을 세계 문명의 주류 보편 문명으로 재편하는 기획 아래 연구와 조사가 수묵아트센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K아트가 내용과 형식을 모두 갖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예, 도자, 서예 매체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엔날레에서 쉬이 듣기 어려웠던, 또한 미술계 내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거대한 문명 확장의 서사는 일견 설득력을 갖춘듯 했다. 글로벌 성공을 거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주는 한국이 서구 문화의 번역 아닌가 하는 의심을 보내는 와중에, 물과 먹, 즉 수묵의 의미를 재창안하여 동양의 정신성을 대변하는 비엔날레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K아트의 선봉’이 될 수 있다는 장밋빛 청사진은 한편으로는 한국의 문화예술 이벤트가 행정과 맺어야만 하는 불가분의 관계를 연상케 했다. K아트의 선봉은 전라남도에게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문명의 이웃들》 목포실내체육관 전시 전경 2025

공재 윤두서 〈세마도〉종이에 먹 46×75.7cm 1704
추사 김정희 〈단연죽로시옥〉종이에 먹 81×180cm 조선 19세기

수묵을 재정의하는 나선형 시공의 프레임
《문명의 이웃들》이 이전 비엔날레와 다른 점은 처음으로 윤선도박물관, 땅끝순례문학관 등 해남 지역을 전시 장소로 편입한 것인데, 여기엔 윤 감독이 정의한 수묵의 프레임이 연관돼 있다. 윤 감독은 윤선도박물관이 자리한 녹우당(綠雨堂)이 K아트의 뿌리라고 말한다. ‘푸른 비가 내린다’는 뜻의 녹우당은 조선 중기 회화-건축-음악-문학이 총체예술처럼 꽃피었던 장소로, 녹우당만 제대로 연구해도 예향 남도의 문화적 가치를 복원·창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문명의 이웃들》은 녹우당을 거점으로 삼아 거시적 관점에서 전남의 문화적 가치를 재정의한다. 해남에서 한국 수묵의 근원을 확인한 관객은 진도에서 근현대의 흐름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목포에서 수묵의 미래와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나선형 시공의 프레임이 각 전시 공간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작품들로 구현되는지 살펴본다.

해남-수묵의 뿌리와 근간
해남 전시는 대한민국 수묵화의 근원을 탐색하고, 조선시대 문인화가 도달한 미학적 성취를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곳은 비엔날레 전체의 서사를 여는 출발점이자, 한국 수묵의 역사적 깊이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고산윤선도박물관에서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1710)과 겸재 정선의〈인왕제색도〉(1751)를 맞배치하여 조선 중·후기 회화사를 양분했던 두 거장의 미학적 대화를 상상하며 한국 문인화의 정수를 맛보게 했다. 또한 공재 윤두서의 〈세마도(洗馬圖)〉(1704) 진본이 321년 만에 최초로 일반에 공개됐다. 수장고에 보관되어 온 이 작품은 현존하는 한국 말 그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업으로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가치가 높다.

바로 옆 땅끝순례문학관에서는 공재, 녹우당, 겸재를 오마주하는 현대 작가들의 재해석이 펼쳐졌다. 특히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가 공재와 겸재의 작품을 양쪽에 배치한 〈과거에 대한 고찰〉(2021)을 통해 두 거장의 미학을 현대적 시각 언어로 소환한다. 이와 함께 공재의 손녀사위였던 다산 정약용의 일기 등 관련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 과거와 현재를 잇는 풍성한 지적 탐구의 장이 마련됐다.

위《문명의 이웃들》 남도전통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아래 이진경 〈훨훨-살아있구나!〉 혼합 매체 가변 설치 2025
《문명의 이웃들》 목포문화예술회관 전시 전경 2025

진도-수묵의 줄기와 확장
진도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묵의 역사적 흐름과 그 변천 과정을 추적하는 두 개의 전시가 마련됐다.

소전미술관은 추사 김정희 작품 중 최고로 평가받는 〈단연죽로시옥〉 (조선19세기)이 전시됨으로써 조선 후기 서예의 미학적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석파 이하응의 〈석란도 병풍〉(1877)을 비롯한 근현대 서화 대가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시대를 관통하며 이어져 온 한국 수묵의 역사적 맥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남도전통미술관에서는 근현대 한국 수묵화 운동을 이끈 이응노, 박생광, 서세옥, 송수남, 황창배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문인화가 귀족 계급의 정체성을 상징했다면, 민주화 전후 수묵화 운동은 낡은 관념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내려는 치열한 예술적 실천이었다. 이 공간에서 수묵의 확장이 단순히 홍보를 위한 언어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과 전통적 기법을 체화한 거장들의 치열한 작품 전개에 기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추상적 실험, 강렬한 채색의 도입, 파격적인 구성을 통해 수묵이 당대의 감성과 시대정신을 담는 역동적인 매체임을 드러낸다.

목포-수묵의 세계화
목포는 동시대 예술 언어로서 수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거대한 ‘실험실’이자 ‘용광로’가 됐다. 윤 감독은 수묵의 정의를 ‘물에 녹는 재료’로 확장하여 채색화, 수채화까지 포괄하려는 시도를 통해,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창의적 실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카키누마 코지는 마스킹 테이프를 활용해 전통 서체를 해체하고 추상회화로 재구성하는 독특한 기법을 선보인다. 한영섭은 붓으로 그리는 대신 한지 밑에 나뭇가지를 놓고 문지르는 프로타주 기법으로 완전히 새로운 질감의 수묵을 창조한다. 이 밖에도 중국의 시에티엔, 폴란드의 프세미스와프 와시엘스키, 인도네시아의 마리안토 등 국제 작가들의 참여는 수묵이 동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예술 언어로 확장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목포문화예술회관에서는 전통 수묵의 철학이 최첨단 미디어 기술, 사회적 의제와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예승의〈몽유화유〉는 수묵 감상법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개입을 시도한다. 이란 출신의 독일 작가 파라스투 포로우하르는 이란의 전통 문자예술 ‘파시(Farsi)’를 통해 젠더와 권력의 문제를 다룬다.

나가며: 문명의 이웃들이 함께 열어갈 K아트의 미래
관객을 과거에서 미래로 이끄는 《문명의 이웃들》의 나선형 시공 프레임은 거대 담론을 넘어 구체적인 작품과 공간의 체험을 통해 높은 설득력을 확보했다. 즉 수묵이 과거의 유산이 아닌, K아트의 미래를 사유하는 가장 동시대적인 ‘방법론’이 될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거대한 비전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제도와 비평적 담론으로 어떻게 살아있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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