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두 얼굴: 광복 80주년,
한국과 일본의 시선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8.14 11.9

《기록을 열다, 기억을 더듬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10.26

《히로시마 1945》
도쿄도사진미술관 8.17

권영진 미술사·허호정 전시기획

Exhibition Theme

도상봉〈폐허〉캔버스에 유채 73×90cm 1953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역사적으로 모든 전쟁이 그렇겠으나 우리에게 광복은 기쁨과 애환, 상봉과 이별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기억의 사건이다. 한국은 식민지의 처지에서 전쟁을 경험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으며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의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 정부가 8월 15일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며 우리는 불시에 광복을 맞았다. 8월 15일을 기억하는 한일 양국의 시선은 광복을 기념하는 한 축과 종전을 기억하는 다른 축으로 나뉜다. 역사적인 그날 하루를 기점으로 80년 된 기억을 재소환하는 한국과 일본의 국립미술관은 인류사적인 상흔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길어 올리면서도 각각 광복과 종전패전의 얼굴로 후세에 전달할 서사를 전시라는 형식으로 직조하고 있다.


광복 80주년에 조망하는 ‘고향’의 ‘풍경화’
권영진 미술사

1945년 8월 15일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광복절이다. 올해로 80주년을 맞은 이날은 한국에서는 독립운동과 민족의 자주성 회복을 기리는 해방의 날인 반면,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공식화하는 가운데 전쟁을 종결하고 평화를 되찾은 날을 기념하며 주로 자국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한국과 일본에서 상반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날은 한국의 사회는 물론 한국의 현대미술을 논할 때 논의의 기점이 되는 날이다. 식민과 해방, 분단과 전쟁, 전후 복구와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화로 숨 가쁘게 전개된 20세기 한국의 여러 중대한 변화 중에서 해방은 흔히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경계가 되기도 하여 현재의 한국, 현재의 한국미술이 있게 된 출발점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최되고 있는 《향수, 고향을 그리다》는 20세기 한국미술의 전개와 추이를 ‘풍경화’를 중심으로 살피는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다. ‘풍경화’는 유럽의 ‘랜드스케이프 페인팅(landscape painting)’이 동아시아로 파급되면서 19세기 말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다. 근대 유럽에서 ‘풍경화’는 종교화나 신화화의 배경이나 후경으로 존재하던 자연과 지역의 환경이 그 자체로 그림의 주제가 되어 인물이나 서사적 요소 없이 자연경관으로만 이루어진 유화가 등장하면서 독자적인 장르로 성립되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현실 경관에 주목하여 이를 대상화하여 관찰하고 눈과 손의 연습을 통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내는 ‘풍경화’는 종래의 종교화와 역사화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장르화의 등장을 뜻하며 인간의 지각에 의한 세계의 조망이자 회화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서구의 근대적 시각을 대변한다.

이상범〈귀로〉 종이에 먹, 색 135×445cm 1937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17세기 네덜란드의 자연주의 풍경화와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를 거쳐 인상주의에서 절정을 이룬 서구의 풍경화는 ‘근대 예술의 승리’라 불리며 번성했다.

대지 위에 서 있는 인간의 시점에서 일상 주변을 조망하는 풍경화의 시선은 사는 곳의 자연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도시화로 밀려난 시골과 전원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도 하며 분주한 도시의 경관을 빠른 붓질로 포착해 내기도 하는데, 일본에 전해진 인상주의 풍경화로 서구식 근대미술을 접한 식민지 조선에서도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 이래 풍경화가 주류 장르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근대미술의 출발점이며 해방 이후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풍경화에서 화가들이 눈길을 돌린 곳은 잃어버린 국토, 떠나온 조국, 그리운 고향이었다. 땅에 대한 귀속감이 강하여 민족의 범위가 곧 국토의 경계와 일치했던 근현대 한국의 풍경화에서 대지와 자연은 잃어버린 고향이자 나와 가족, 민족이 뿌리내린 정체성의 기원이 되는 원형의 공간이었다.

《향수, 고향을 그리다》 전시는 정지용의 시 〈향수(鄕愁)〉(1923)와 청전 이상범의 10폭 병풍 〈귀로(歸路)〉(1937)가 마주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시인은 눈 앞에 펼쳐진 고향의 정경을 그림 그리듯 읊고, 화가는 시로 떠올린 장면을 그림으로 옮기듯 스산한 산야와 시냇물, 전답이 있는 초가, 좁은 시골길을 따라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촌부를 그렸다. 이 시절 절절하게 고향을 노래하는 시와 그림, 노래가 많은 것은 식민과 이향(離鄕)으로 고향을 잃었거나, 돌아간다 하더라도 더 이상 꿈에 그리던 옛 고향이 아님을 깨닫는 비애의 심정이 크기 때문이다.

최영림 〈낙원〉캔버스에 유채, 흙 72×90cm 19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이 앓는 우울증, 불안, 불면 등 신체적 질병을 뜻하는 노스탤지어(nostalgia)가 고향을 그리는 시름, 향수(鄕愁)로 번역되었는데, 근대기 한국의 풍경화에서는 고향보다 향수, 즉 고향을 상실하여 그리는 애틋한 마음이 주된 정조가 되었다. 전시는 ‘향토’, ‘애향’, ‘실향’, ‘망향’,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1부 ‘향토’는 개인의 출생지나 성장지를 뜻하는 ‘고향’에 그곳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나 심미적 감성을 더한 개념이다. 1920~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의 지역적 특질,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찾을 것을 촉구하는 ‘향토색’이 담론화되면서, 향토색은 한국의 근대 풍경화를 설명하는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향토색’ 담론은 서구식 근대화를 추종하여 버리고 떠났던 고향을 다시 돌이켜본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의를 갖지만, 제국 일본의 낙후된 지방인 조선의 황폐하고 쇠락한 풍경을 그려 일제의 이국 취향에 부응한다고 비판받기도 하고, 혹은 서구 근대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동양적 이상향, 순정의 땅으로 고향을 이상화하여 동양주의를 내재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28년 결성된 녹향회(綠鄕會)에서 활동한 김주경과 오지호는 무엇이 ‘진정한 향토색’인지를 논하는 공방 속에서 한국의 맑은 대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밝고 산뜻한 색조로 표현하고자 했다. 대구의 김용조, 부산의 우신출, 제주의 김인지 등이 조선 내 지역의 밝고 건강한 향토색을 포착한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빼앗긴 들”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고향은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으로 감격스럽게 “되찾은 땅”이 되었다. 2부 ‘애향’에서는 웅혼한 국토 이미지에 민족의식을 결부시킨 산수 및 풍경화를 볼 수 있다. 해방 후 한라에서 백두까지 국토를 사생한 정종여는〈지리산조운도(智異山朝雲圖)〉(1948)에서 새벽 운무에 휩싸인 지리산 연봉을 부감구도로 포착하여 발묵 기법의 광대한 공간감으로 드러냈다. 경주에서 손일봉이 신라의 왕릉과 고적을 그렸고, 문신이 마산의 앞바다와 산을 그렸으며, 이응노가 홍성에서 덕숭산과 수덕사의 실경을 그렸다. 고향의 자연은 김환기와 유영국이 추상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안의 섬은 김환기가 파리와 뉴욕에서 모더니즘의 조형을 모색할 때 추상으로 귀결되는 본원적 자연으로 자리했다. 울진의 산을 그리며 순수 추상에 도달한 유영국의 기하학적 색면은 자연의 대척점인 예술이기보다 자연에서 발원한 예술이자 자연친화적 모더니즘의 심상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6·25전쟁으로 고향의 풍경은 또 한 번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전쟁으로 인한 ‘실향’이 3부의 주제다. 3년간의 전쟁으로 국토 전역이 엄청난 피해와 상흔을 입었고, 피난과 월북, 월남이 교차하여 대규모 이산이 발생했다. 전쟁의 참상 앞에서 예술가들의 현실 인식은 더욱 극명해졌던 듯 화가들은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를 그리고, 처참한 피난 행렬을 화폭에 담았다. 이종무의 〈전쟁이 지나간 도시〉(1950), 도상봉의〈폐허〉(1953)는 폭격으로 허물어진 건물의 도시 풍경화이며, 평양 출신 신영헌은 보도사진을 바탕으로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위태롭게 건너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반(半)추상의 화풍으로 그렸다. 해군 종군화가로 6·25전쟁에 참여한 남관은 도불 후 대상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화면을 실험하며 전쟁의 참화를 담아냈다.

전시는 북쪽에 고향을 두고 월남한 화가들이 남한에서 그리는 4부 ‘망향’의 풍경화로 마무리된다. 피난에서 돌아와 고향의 봄을 맞은 작가들이 생기를 되찾은 전원과 전후 복구가 한창인 도시의 풍경을 그렸지만, 고향을 잃은 월남 화가들은 북녘땅과 가족을 그리며 기억 속의 고향을 그리기 시작했다. 밝고 화려한 색채의 대형 화폭에 물동이를 인 여인상을 그린 박성환의 〈망향〉(1971), 달빛 아래 나무에 기대 피리를 부는 소년이 있는 박돈의 〈성지〉(1957) 등이 ‘망향’의 풍경화로 소개되었다. 두고 온 고향의 기억은 화려한 색채의 배경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듯 흐려지고, 유년시절의 기억을 목가적인 전원 풍경으로 그린 월남 화가들의 그림에 빈번히 소환되었다. 최영림의 〈낙원〉(1970)은 평양 출신의 화가가 전쟁 중 홀로 월남하여 1960년대부터 그려내는 화풍이다. 캔버스에 흙과 모래를 바른 후 유화 물감으로 이미지를 그리는 최영림의 전원 풍경은 흙벽 같은 질감의 황토색이 두드러진다. 전경에 서로 기대고 얽힌 여러 신화적 인물의 피부가 된 황토색은 그 자체로 고향의 땅과 흙으로 연결된다. 북쪽에 두고 온 고향은 월남 화가들의 그림에서 향토색 짙은 이상적 낙원으로 그려지고,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의 상실감은 전후의 현대가 본격적인 추상으로 조형을 차별화할 때 남과 북 그 사이 어디쯤인가를 떠도는 ‘망향’의 풍경화로 남았다.

《향수, 고향을 그리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 전경 2025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향수, 고향을 그리다》는 되찾은 우리 땅의 의미를 한국 근현대 풍경화 210여 점과 시, 노래,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가사 등으로 조망한다. 한국에서 ‘풍경화’는 일상적 주변의 자연을 잃어버린 국토이자 모국, 돌아갈 고향으로 재발견하여 화가가 이를 민족적 정체성의 근저로 삼거나,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키는 모태로 삼고 깊은 상실감을 드러내는 장이 되었다. 이 전시는 ‘풍경화’ 장르에 주목하여 한국 근현대미술의 전개를 살핌으로써, 그간 주로 주제나 사조, 양식의 측면에서 조망되던 방식에서 벗어나 근현대를 잇는 분화된 이해를 제공한다. ‘고향’의 ‘풍경화’는 근대에서 시작하여 해방 이후까지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의 여러 경로, 즉 복수의 현대화 과정을 일깨운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2025년의 여름, 한국인 대부분이 도시화된 환경에 살고 있고, 전지구적 이동이 일상화되어 땅에 대한 귀속감으로 확인하는 고향의 의미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부유하는 현대인들이 최종적으로 돌아가 안식할 곳으로 고향에 귀속되기를 원한다면, ‘고향’의 ‘풍경화’는 헛헛한 공허함을 달래는 원풍경의 이미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진실’을 좇는 좁은 길
허호정 전시기획

역사적 ‘진실’의 문제가 나날이 불투명해진다. 이미 1989년에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하지만 진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경멸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강변하듯 썼다. 보편성, 총체적인 것, 결정적인 진실 따위가 ‘착각’에 불과하며, 그런 것들에 매달리지 말라는 ‘명령’이 지배하게 된 시대의 초입이었다. 산재한 아카이브,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막론하고 찍은 사진들, 남기려는 욕망과 선택하려는 욕망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함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따라가 보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 ‘좁은 길’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까?1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는 종전 80주년을 기념해 《기록을 열다, 기억을 더듬다》가 열렸다. 방대한 양의 시각문화 자료와 일본 내 유수의 기관에서 가져온 전쟁기 회화, 드로잉, 사진들이 전시의 긴 호흡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을 영웅적으로 기념하는 국가 주도의 역사화가 다수 걸려있는 점이 두드러져 보였다. 철저하게 침략자의 관점에서 그려진 그림들의 아이러니도 드러났다. 아마도 전시를 만드는 사람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했을 것이다. 만연한 고통이 숨겨진 이미지, 그림과 그려진 것 사이의 불균등한 관계를 모두 지운 이미지. 이로부터 어떻게 ‘역사’를 말할 수 있을지 묻는 일이 곧 전시의 시작이었을 테다.

《기록을 열다, 기억을 더듬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도쿄국립근대미술

마쓰모토 슌스케의 〈가로수길〉(1943)을 전시 초반에 배치하고, 이를 전시의 대표 이미지로 내세운 것은 기획의 고심을 가늠케 한다. 전시 1부는 청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격화되고 있는 1940년대 초, 일본 내 프로파간다 미디어와 대조적인 미술의 언어를 조명했다. 그리고 회화가 자신의 언어로 무언가를 발화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슌스케의 그림이 그 예로, 그림에는 갈림길이 있는 가로수길의 한 귀퉁이, 높은 담벼락 아래, 엉거주춤한 자세의 중절모 쓴 사람이 푸른 배경에 묻히듯 그려져 있다. 암울한 시대적 정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침잠하는 개인의 내면을 엿보게 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미술의 언어’는, 모퉁이를 도는 순간 바로 그 힘을 잃었다. 전시의 거개를 채우는 것은 전쟁기념화, ‘대동아공영론’의 판타지를 재현한 프로파간다 포스터와 회화, 여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부녀화가들’의 공동제작도, 성전(聖戰) 형상화 등이다. 행군하는 제국 군인들, 그 뒤로 솟는 화염, 점점이 하늘을 수놓은 낙하산 부대, 창공을 나는 전투기의 폭격 장면 등은 전쟁 영화에서 흔히 볼 법한 스펙터클로 재연되고 있었다. 기술적으로도 빼어난 이 그림들에는 그리는 이, 보는 이는 물론이고 그림의 저변에 위치한 포화 속 사람들이 모두 지워져 있다(이러한 이미지를 목록에서 삭제하기보다 외려 전시하기를 택했다는 점, 그러한 선택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없었다는 점은 또 다른 고려 사항이다).

한편, 전시 전반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역사의 ‘진실’을 배치하기에 앞서 무언가 주저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는 전시 말미에 배치된 오가와라 슈의 인터뷰 영상에서 단적으로 확인됐다. 이 작가는 전시된 〈청두 폭격〉(1945)을 비롯해 기록 사진 등을 참조해《기록을 열다, 기억을 더듬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제공: 도쿄국립근대미술관 그린 전쟁화를 많이 남겼다. 전시 설명에 의하면, 오가와라 슈는 1990년대에 이르러 전쟁화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을 언급했으며, 그러한 죄책감으로 전후 상당 기간 중앙 화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인터뷰어가 묻는다. “이 공습 장면을 그릴 때, 폭격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셨나요?”. 그러면 오가와라는 “지금 와서 그렇게 말한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렇게 돌이켜보는 건 감상주의일 뿐이죠. 당시 전쟁의 상황은 훨씬 더 가혹했습니다. 그때는 눈앞의 일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요”라고 답한다. 이외에도 그는 당시 ‘반전(反戰)’ 여론이 있었다는 말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하거나, 그때의 자신도 역시 ‘자신’이라며 일종의 향수를 이야기한다.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그 자장에 묶여 있던 엘리트의 이 같은 고백은 많은 질문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전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이미지와 진실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피해의 재현 대신 활발한 가해의 재현을 가져다 놓고는 답을 미뤄두었다.

한 가지, 전시에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은 전쟁의 기억을 재구성하려 시도한 1970년대의 기록들이 포함된 섹션이었다. 1974년, NHK 히로시마 방송국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피폭 체험을 그림 그리도록 독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고바야시 이와키치의 드로잉에는 핏빛의 강물에 떠내려 가는 잘린 신체들, 부러진 다리 너머의 전경 등이 담겨 있었다. 또, 특정 지역 혹은 사람(시신)에 표시를 해서 ‘조선인’이라고 가리키는 경우를 찾아볼 수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전시는, 프로젝트가 착수된 시기부터 매체에서 재일조선인, 동남아 출신 유학생들의 피폭 사실이 다뤄졌고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생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이 균열의 다음은 무엇일까? 전쟁 폭력의 비극성, 책임에 관한 근본 감각은 ‘인류’의 지평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전시에서 이에 관한 응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이소 야마다 〈Mushroom Cloud (A few minutes after the bombing)〉
흑백사진 1945 주고쿠 신문(中国新聞) 아카이브
제공: 도쿄도신미술

이어서 방문한 도쿄도사진미술관에서는 《히로시마 1945》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목적으로 여러 기관이 합심해 모은 원폭 직후 사진 및 영상 기록물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한 특별전이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해당 기록의 세계유산 등재를 2023년에 신청했고, 신청 건은 2025년 심의 보류되었다.2 이는 복잡한 역학관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추정컨대) 피해 사실을 축소하려는 가해국(미국) 쪽의 이의 제기가 있고, 피폭 서사를 중심으로 ‘국민’ 의식을 결집하고, 피해자 자의식을 강화해 전쟁 동안의 책임 문제는 묻어두려는 일본 내 민족주의 문제 또한 얽혀 있다. 《히로시마 1945》에서 이러한 정치 역학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원폭 당시 현장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와 시점에 촬영된 사진들을 최대한 모아, 짓이겨 형체를 알기 어려운 신체와 절규하고 망연한 얼굴을 보여주려 의도했다. 그런 한편, 이들 사진이 대중에 공개가 늦어진 이유는 미국의 통치 이후 지속적인 검열이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평일 이른 오후에도 전시장은 관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진 하나에서 다음으로 옮겨 가는 발걸음들은 매우 느리게 움직였고, 그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거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전시장이 돌연 엄숙한 장례식처럼 느껴졌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로써 해당 전시는 ‘원폭 피해의 증언’이라는 한 가지 논리를 절대적으로 따르며, 그 자체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시는 ‘진실’보다 강력한 사실에의 집중을 강조하며, 찍힌 사진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허용치 않았다. 사진 한 장에 정확히 대응하는 캡션, 카메라의 뷰파인더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피사체—응급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 가족을 잃은 아이의 시선, 눈과 팔을 잃은 사람, 살갗이 다 벗겨진 시신들, 원폭돔과 대로를 따라 폐허를 드러낸 도시의 전경 등. 메시지는 분명했다. 피폭의 비극성, 참상의 전달.

과연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디디-위베르만의 말을 빌리자면, “한 가지 증언”으로 향하는 사진을 본다는 것은 “결국 그 사진들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디디-위베르만은 아우슈비츠에서 시신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던 존더코만도가 찍은 네 장의 사진을 주목하며, 그것이 그간 조작되어 유통되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그것들을 비대하게”, “거기서 보고 싶은 모든 것을 구성하는” 목적으로, “클리셰들을 완전히 변형하는 것은 주저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지적했다.3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증언, 그 굴레에 갇혀 버린 이미지는 어떤 상상의 가능성도 이미 차단해 버렸던 것이다.

이미지의 상상력은, 가까스로 노출된 사람들의 참상에 나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오늘로 옮겨 보는 일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일말의 상상적 여지가 없는 폐쇄된 전시장에서, ‘원폭 피해’는 1945년에 관한 (국민이 아닌 시민) 공동체의 근본 기억을 형성하지도, 지금도 진행 중인 폭력들에 대한 인류 전체의 현재적 책임을 환기시키지도 못했다.


1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아카이브 취향』 문학과지성사 2020 pp.118~119 원저 Le goût de l’Archive는 1989년에 발행되었다
2 박상원 ‘日도쿄 사찰 고려대장경 등 목판인쇄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전망- 히로시마 원폭 사진은 심의 보류 가능성… 일부 국가가 이의 신청한 듯’ 『연합뉴스』 (2025.3.19) https://www.yna.co.kr/view/AKR20250319116500073
3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오윤성 옮김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레베카 2017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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