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이 기록한
한국미술의 주요 이슈와 사건
월간미술 편집부
정소영·강재영·김소정·노재민·황수진 기자
Special Feature
월간미술의 지난 기사들 가운데 한국미술사에 유의미한 기록을 선별해 그 축적된 시간의 결을 다시 읽어 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당대의 논점을 제시하며 미술 담론의 방향을 바꾼 ‘논쟁사’, 미술전문지만이 할 수 있는 반복적이고 심도 깊은 ‘집중 보도’, 새로운 시선으로 작가와 비평가를 조명하고 발굴해 온 ‘발굴 기사’, 한국미술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확장시킨 ‘글로벌 시각’, 그리고 매체장르의 변화를 추적하며 시대의 미감을 반영한 ‘다양한 미술 장르 소개’ 기사들을 선별해 담았다.
발굴의 기록, 복원의 저널리즘
정소영 기자
월간미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단절된 한국 근대 미술사의 공백을 메우고자, 기자들이 직접 현장을 탐사하고 작품을 발굴 소개하면서 미술 저널리즘의 대표적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근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와 작품을 재조명하고, 한때 금기시되었던 월북작가들의 작업을 다시 소환하며 한국미술사의 궤도를 재점검한 잡지의 주요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계간미술』 1980년 봄호 「잊혀진 근대미술의 발굴」
잊혀진 근대미술의 발굴
『계간미술』은 1980년 봄호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서양협회를 설립한 1915년을 기준으로 한국현대미술 75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게재했다. 미공개 작품 23점을 재조명하면서 잊혀진 근대미술 작품을 발굴한 특집은 이후에도 3년간 정기적으로 발행됐다. 당시 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은 「잊혀진 근대미술의 발굴」 기사를 통해 서양화가 진환의 기록을 처음 발표했다. 이후 1981년 여름호에 본지 기자였던 윤범모는 「근대 한국미술의 발굴-진환(1913~1951)」을 게재하며 진환의 작품연구의 깊이를 더했다. 당시 윤범모는 진환의 작품에서 이쾌대와 이중섭의 영향을 밝히며 한국 근대 서양미술화가로서 진환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안인기는 「미술잡지 저널리즘의 형성과 기능」에서 월간미술의 전신인 계간미술의 이런 발굴 취재를 “미술 저널리즘의 모범”1이라고 평가했다. 편집부 역시 근대미술 발굴 기사에 대한 소개에서 “발굴된 작품이 지니는 의의는 작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미술사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밝히며 미술전문지로서 견지해야 할 저널리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다른 근대미술 발굴의 대표적인 사례로 1949년 함대정이 29세에 그린 작품〈정릉골짜기〉가 있다. 본지는 1980년 여름호에 함대정의 작품을 발굴하면서 그가 30세가 넘어서 그림을 시작했다는 기존의 통설을 반박할 증거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가 20대 때 이미 그림을 습작하고 있었음을 발굴 기사를 통해 증명했다.
1989년 9월호에는 동경미술학교와 관련한 특집을 게재했다. 한국의 근대미술은 일제 강점기에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미술인들이 일본유학을 통해 신미술을 익혔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라는 이유로 당시 유학생들의 작품에 대한 연구가 중단되면서 한국 근대미술사에 공백이 생기게 된다. 본지는 이런 공백을 메우고 미술사 연속성을 위해 광복 이전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의 작품을 발굴하여 동경미술학교와 일본 근대미술 그리고 한국 근대미술사의 연관성을 찾는 기획을 진행했다. 주한 일본문화원의 후원으로 75년 만에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의 자화상 43점이 본지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이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미술 작품에 일본풍의 색채와 서구적 조형이 영향을 미쳤음을 확일할 수 있었다.

『월간미술』 1991년 10월호 「이 작가를 말한다 이쾌대」
끊어진 한국미술사의 연결, 월북 작가와 북한미술
본지의 활동 중 한국 미술사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월북 화가들에 대한 조사 및 연구였다. 1950년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는 40여 년 동안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월북 작가는 좌익으로 분류되어 한국작가 리스트에서 배제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계간미술』 1985년 가을호에 「산 증언: 6 25 전후의 미술인들」 제하의 특집이 실렸다. 당시 본지 기자였던 김복기는 박영선, 남관, 홍종명 등 원로 작가들을 만나 인터뷰했고,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글을 함께 싣었다. 이는 한국미술사에서 최초로 월북미술가들의 이름을 거론한 사례가 됐다.2 1985년은 월북 예술가 해금 조치가 있기 3년 전이었고 월북 예술인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으나 본지의 특집을 계기로 월북 예술인들에 대한 연구에 물꼬가 터졌다. 당시 경향신문은 “지난 85년 계간미술이 특별기획한 ‘해방40년 한국미술’을 다루면서 이 문제의 접근을 시도한 이후 미술평단을 중심으로 납북화가에 대한 조사연구가 부분적으로 추진되어 왔다”고 평가했다.3 1990년 7월호에서는 6·25때 북으로 간 정현웅의 생애와 작품을 월북 40년 만에 처음 밝히며, 재미교포인 그의 장남이 10일간의 북한 방문을 통해 확인한 부친의 행적을 독점으로 공개했다. 이는 본지의 저널리즘이 돋보이는 취재였으며,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미술전문지다운 기획이었다. 월북작가의 미공개 작품 발굴과 그의 생애를 재조명한 기사 중 1991년 10월호에 실린 이쾌대 특집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본지에는 이쾌대의 유족을 통해 입수한 작품 40여 점을 시기별로 나누어 작품의 변화에 대한 논고와 함께 미공개 작품이 실렸다. 당시 미술사에 누락된 이쾌대의 작품 중 일본 공모전 입선작과 재동경미술가협회와 조선신미술가협회와 같은 화단의 그룹전 출품 작품은 이후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서양화를 논할 때 주요 구심점이 되었다.

『계간미술』 1985년 가을호 「해방 40년 한국미술」
1992년 11월호와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 6월호에도 월북작가와 한국미술사에 대한 테마 기획이 진행됐다. 본지가 이토록 월북작가에 대한 연구와 발굴의 의미를 놓치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시 편집부는 기획 의도를 소개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끊겨버린 한국미술사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월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지워진 월북작가들의 미술사적 의의를 되살려야만 그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본지의 잊혀진 미술사를 발굴하는 노력과 기록은 201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분단의 미술사 잊혀진 미술가들』에도 기록되었다.
1 안인기 「미술잡지 저널리즘의 형성과 기능」『미술이론과 현장』 제2호 2004 p.128
2 국립문화재연구소 「분단의 미술사 잊혀진 미술가들」 『북한미술연구보고서Ⅳ』 2019 p.28
3『경향신문』 「미술계 “잃어버린 미술사 되찾자” 납북화가 해금론 기지개」 1988.3.18
논쟁과 논란
강재영 기자
월간미술은 지난 50년간 한국미술의 주요 변곡점마다 현장과 밀착하여 새로운 담론을 끌어내고 유통함으로써 지금의 역동적이고 다성적인 한국 현대미술의 풍경을 만드는 행위자 몫을 했다. 논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제를 첨예화하는 과정에서 논란은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이번엔 본지를 관통하며 한국미술계에 벌어진 논란과 논쟁을 일부 소개한다. 여러 겹의 역사를 추려 담기엔 지면이 좁지만, 본지가 매체로서 미술계와 어떻게 접촉하고 호흡하며 성장해 왔는지 엿볼 수 있다.

논쟁을 불러온 「한국미술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길」 커버 이미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길
“미술계를 뒤흔든 해방 이후 최대 사건”1 전 이규일 본지 주간의 평가다. 1983년 봄호 특별기획은 김윤수 안휘준 이경성 이구열 최순우 등 총 9명의 평론가에게 ‘일제 식민 잔재’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무기명으로 실었다. 당시 독립기념관 건립 계획이 발표되는 등 사회 각급에서 일제 잔재 청산 움직임이 일어나는 데 따른 계간미술의 반응이었다. 여기에 생존작가를 포함 총 43명의 작가가 청산 대상으로 실명 거론되면서 해당 작가와 평론가 사이에 거센 논쟁이 벌어졌다. 1983년 4월 21일에는 동아·조선일보에 성명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가 작가 단체 명의로 발표되었고, 평론가협회는 이 성명에 반발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해당 기획에 참여했던 이경성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 사태로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한편 당시 일간지 보도에선 기획 취지에 공감하는 여론도 확인할 수 있다.
기사는 이후 일제강점기 한국미술 연구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열 미술사가는 “친일미술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산시킨 획기적 성과”2라고 언급하는 등 민족사관을 중심으로 한 한국근대미술 연구 증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는 사회 의제를 미술로 확장하고 그 논의의 장을 만드는 미술 저널리즘의 역할을 증명해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장을 확인하는 중요한 창구였던 1987년 봄호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들」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냉전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변혁 앞뒤로 한국 문화계에도 포스트모더니즘 수용론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 논쟁의 무대는 미술 전문지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각 진영에서 각자의 이상을 투사한 형태로 복합적으로 수용되는데,3 본지는 각 진영에서 논의되는 주요 의제를 적극 지면화해 논의의 진폭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두 진영의 갈등을 대립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번갈아 싣거나, 병치하는 가운데 한국적 수용의 방향성을 탐구했음을 당시 기획 기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일 김영복 성완경 등 각 진영의 원로 비평가를 비롯, 홍가이와 같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교육자, 국내 소장파 비평가인 서성록 심광현 등 다양한 필자를 발굴하여 논의의 폭을 넓혔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해외 작가를 방대한 도판과 함께 소개하거나, 뉴욕 화단에서 활동 중이었던 엄혁 박모(박이소)의 기고를 통해 해외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3세계’로 정의하고 주체적인 수용에 관한 논의를 일으키는 등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수용에 비평적으로 접근할 계기를 마련했다.4

본지는 1991년 11월호 ‘편집자로부터’를 특별편성하여
해당 기획의도를 해명하며 논란 진화에 나섰다
미술품 가격에 딴죽걸기
본지 1990년 10월호 기획특집 「미술작품의 예술성과 가격」은 논쟁보다는 논란이 되었던 사례다. 지금처럼 옥션을 통해 가격이 투명하게 공개되거나, 미술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던 1990년, 편집부는 기준 없이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작품 가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독일 경제전문지 ‘캐피탈’을 참고하여 작품 가격 책정의 합리적 기준은 무엇인지 확인해본다는 취지로 특집을 기획했다. 작가 136명을 대상으로 장르별로 예술성을 A/B/C로 나누어 미술평론가 20인에게 평가하도록 하고, 총점과 평균 점수 등을 산출해 지면에 게재했다. 이것이 문제가 됐다. 작가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논란이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파문이 일었다. 그럼에도 미술품 가격 문제를 다각도로 조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은 미술 저널리즘의 사례로 삼아 다시 볼 만하다. 본지는 이후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 높은 미술품 가격에 문제를 제기하는 다방면의 기사를 실어 합리적인 미술시장 형성에 관심을 쏟았다.
온라인 포럼 시대 논쟁의 중심에 선 월간미술
정보화의 파도는 미술계에도 일었다. 특히 인터넷은 주류 언론의 권력과 관행을 겨냥한 대안 매체를 급부상시키는 촉매였다. ‘포럼A’, ‘무대뽀’처럼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무료로, 제한 없이 남길 수 있는 ‘BBS(Bulit-in Board System)’는 당시 미술인들에게 새로운 미술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5 여기에는 미술계의 권력이라 여겨졌던 ‘미술잡지’도 도마에 올랐다. 특히 본지 2003년 1월호 특집 「비평가 44인이 선정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는 작가 선정의 기준, 세대 구분의 문제 등에 관하여 각 잡지사 홈페이지와 온라인 포럼에서 열띤 토론에 불을 당겼고, ‘월간미술 거부 운동’ 등 관행적 미술 저널리즘의 구조적 문제 등을 비판하는 담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는 관행적 제작 구도를 재점검하고 위계 구도를 완화하여 미술 저널리즘으로서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월간미술 거부운동’을 일으킨 2003년 1월호 특집
「비평가 44인이 선정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
SNS발 세대 논쟁
2010년대의 논쟁은 소셜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점화되고 재확산됐다. 특히 2010년대 ‘88만원 세대’로 불거진 세대 논쟁은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본지는 제4회 공장미술제(2014), 청년관을 위한 미술행동(2015), 국선즈(2015) 등 SNS를 중심으로 벌어진 제도비판 국면에 지면을 통한 담론 형성을 시도했다. 이는 지면과 온라인을 오가며 영향을 주고받으며 산적한 정책적, 인식적 문제를 환기시키고 변화의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2014년 1월 웹진 ‘크리틱-칼’에 게재된 홍태림의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는 ‘아티스트피’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올렸고, 오프라인 토론회로 이어지며 담론의 중심이 됐다.6 본지 이준희 편집장과 유진상 평론가는 이를 세대 간 이해 차이에서 비롯한 논쟁으로 규정했다. 이후 홍태림의 재반론이 ‘크리틱-칼’에 게재되며 세대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본지는 이 사건을 청년미술을 폭넓게 다루는 계기로 삼았다. 2015년 2월부터 6차례에 걸쳐 기획 연재한 ‘강수미의 공론장’은 SNS상의 세대 논쟁, 제도 논쟁에 대한 반응을 담아 온오프라인 상에서 호응을 얻었다. 이는 SNS 공간에서 세대론에 관한 발언을 촉진했고, 신생공간과 더불어 세대 문제가 미술계에 널리 회자되는 계기가 되었다.7 이후에도 본지는 칼럼, 테마기획, 특집, 좌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당시 청년 작가들과 신생공간에 지면을 내어주거나 가감 없는 의견을 내밀며 논쟁을 추동하는 한 축을 담당했다.
미술계 현장의 실태 진단
김소정 기자
월간미술은 창간 이래 줄곧 다양한 이슈와 논의가 불거지고 분분한 미술계 현장을 르포 형식으로 밀착 취재해 왔다. 여기서는 특히 법·제도와 정책의 주요한 변화를 추적하고 현장을 진단하는 동시에 당대 주요 이슈에 대응하며 나아갈 방향을 전망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일간지의 발 빠른 속보나 단독보도 기사와 달리 본지는 여러 이해관계로 얽힌 미술계의 속사정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전달하면서도 매체로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견지해 왔다. 무엇보다 각 분야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의견을 수렴하고 종합적인 분석을 제시하는 기사에 특화되었는데, 이러한 활동은 제도 정책 변화로 현장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혼란 및 적응 양상을 심도 있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다.

『계간미술』 1980년 여름호
법과 제도, 문화정책 분석과 제언
1970년대는 경제 성장이 가속화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로, 『계간미술』은 1980년에 수립된 ‘미술중흥 5개년 계획’을 ‘르포’ 꼭지에서 다루며 미술정책과 제도를 점검했다. 이후 미술 분야의 체계적인 중장기 정책은 2014년에 다시 등장한다. 5년 후 새로운 정권의 수립과 함께 2018년 4월 2일에 발표된 두 번째 중장기계획에서 문체부는 ‘미술로 행복한 삶’을 구현하기 위한 4대 추진전략 키워드(창작, 향유, 시장, 기반)를 제시하고 16개 핵심과제 등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추후 ‘아티스트피’ 논의로 본격 전개될 미술창작 대가체계나 전속작가제 지원 정책 등에 대한 세부 방안이 명시됐다. 본지는 미술정책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정리하여 게재하며 “정부의 시각과 일선 현장에서 뛰는 미술인들의 시각차”를 다뤘다. 최근 미술계 법·제도 분야에서 가장 이슈화된 것은 명실상부 「미술진흥법」 (2023.6.30, 2024.7.25 시행)의 제정이다. 월간미술은 2024년 3월호에 “이 법이 미술계를 어떻게 진흥·변화시킨단 말인가?”를 물으며 현장의 우려를 전달하는 한편, 건강한 미술 생태계 조성에 기여하는 법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전문가를 통해 주요 쟁점을 분석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계간미술』 1982년 1월호
현장 실태보고 및 심층 취재
계간미술은 1980년 겨울, ‘오늘의 한국미술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당시 한국미술계가 봉착한 현안을 수면으로 끌어올리고 전문가 의견을 취합하여 미술계 실태에 올바른 비판을 가하면서도, 매체의 입장에서 비전을 제시하는 저널리즘의 태도를 견지한 기사다. 이러한 성격의 기사는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진행된 ‘진단 특집’의 첫 시작이기도 하다. 본 특집은 “미술 발전을 저해하는 7가지 요인”이란 주제 아래 미술정책, 미술교육, 작가의 양식, 미술비평, 미술 저널리즘, 미술시장, 그림값을 다뤘다. 1992년 1월에는 동일한 제목의 특집에서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미술이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미술계의 규모가 비대해지고 성장의 폭이 넓어진 만큼 […] 중요한 현안을 총체적으로 추출해 보고 새로운 모색점을 찾아보자”고 밝혔다. 편집부는 전문가들에게 질문지를 보내고 그에 대한 솔직하고도 적나라한 답변을 받아 응답자 성명과 함께 공개했다. 미술계의 부정적인 면, 개선해야 할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여파가 당시 현장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반면에 몇몇 답변은 오늘날 미술현장에서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만큼 한국미술계의 인식 변화 및 미술시장의 성장·성숙을 시사하는 것이다.
1999년 새해에는 새천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좀 더 확장된 필드 위에 미술계 현장을 위치시키고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기획이 발견된다. 1999년 1월호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 기사를 통해 비평, 큐레이터십, 미술관, 대학교육, 미술출판, 대안매체, 미술정책, 기업메세나, 패트론, 아트컨설팅, 화랑, 고미술, 컬렉터 등 14개 분야를 총망라하는 분석을 진행했다. 불과 7년 전 1992년의 특집과 비교해 볼 때, 미술 현장의 영역이 어느 범위까지 넓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1992년이 미술시장의 활성화가 기대되는 시점이었다면, IMF사태 이후 경제 침체기에서 힘겹게 미술문화를 이끌어오던 1999년의 미술계에서 어떠한 성장 가능성을 읽어냈는지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겠다. 본지의 ‘진단’ 시리즈는 2000년대에도 이어진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을 검토하고(2002년 6월호) 광주비엔날레를 점검하며 콘텐츠와 권력의 관계를 고발하고(2004년 1월호) 미술시장의 성장세를 분석하는 등(2007년 3월호) 현장의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담아내는 전문지 본연의 임무를 수행했다. 2010년 3월, 편집부는 “양질의 생산적 담론을 위한 토론의 테이블” 위에서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문화예술위원회의 이념코드 인사, 공공미술 관련 법개정, 서울시 디자인 정책, 문예진흥기금, 블록버스터 전시, 미대 입시판도를 논의했다. 2013년 12월호는 미술 현장에서 꽤 오랜 시간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개선이나 발전 방향이 제시되어 왔던 8개 분야에 대해 다뤘다. 미술비평, 미술품 감정, 비엔날레 시스템, 전시기획, 시상 및 공모전, 미술언론, 미술 및 문화정책, 그리고 대안공간 현장에서 활동한 9명의 필자가 그들의 생각을 펼쳐놓는 자리가 마련됐다. 특히 미술품 감정과 대안공간 분야가 추가되어 현장의 새로운 니즈가 반영된 모습이다.

『월간미술』 2023년 7월호
미술계를 뒤흔든 화제, 월간미술의 진단
1990년대는 광주비엔날레의 창설로 미술계가 새로운 분기점을 맞은 시대이기도 하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당시 18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국내 초유의 초대형 행사였다. 본지는 이 기사에 70페이지 가량의 지면을 할애했는데, 사진기자만 다섯 명이 투입되었을 정도로 현장의 생생함을 전하기 위한 화보 구성에 힘썼다. 그러나 세계적 규모의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운영 미숙 문제가 심각하게 지적되었으며 광주라는 뼈아픈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서 열린 비엔날레에 광주시민이 어떤 부분을 얼마큼 차지하고 있는지에 답을 구하지 못한채 남아있었다. 1997년 12월호에서는 제2회 광주비엔날레의 문제를 조목조목 파고들며 날카로운 비평을 전개했다. 1998년 10월호에 재단을 겨냥한 칼럼이 게재되자 그다음 달에는 재단 측의 반론이 이어졌다. 당시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비엔날레의 추진 주체는 어디까지나 광주시이므로 […] 광주인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져야 한다.” 광주비엔날레를 둘러싼 논쟁이 한동안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그다음 달에 또 한번 재반론 칼럼이 실렸다). 광주비엔날레 관련 기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그 어조와 내용은 변화를 거쳤다. 2년마다 재생산되던 제도비판 현상보다 ‘동시대 전시’로서의 의미에 주목하는 비평이 주목받는 모습을 추적하는 것도 변화를 읽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8월에는 미술계가 별안간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故전두환 씨의 장남 전재국 씨의 압수물에 고가 미술품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며 ‘미술품=비자금’ 인식이 강화됐다. 이에 본지는 미술계가 “애꿎은 돌팔매를 맞고 있다”면서도 “100% 잘못이 없다고 부인할 수도 없는 현실”을 지적한다. 이어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2013년 9월에 한국미술계의 좌표를 진단하는 긴급 특집을 마련해 전문가 4인의 심층토론과 미술계 안팎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6인의 칼럼을 실었다.
2020년대에는 이건희컬렉션이 미술계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올랐다. 2021년 9월호에서는 이를 통해 한국미술계의 기증문화, 컬렉션, 기관의 소장품 관리 현황과 문제점을 살피고 이건희 기증관 설립 등 관련 논의들을 짚었다. 아울러 2023년 7월에 후속 특집을 진행하여 컬렉션의 숨 가쁜 전국 순회전 양상과 신드롬을 진단하며 미술관 본연의 역할을 강조하고, 이건희 기증관 건립 사업의 허점을 공론화했다.
이러한 특집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미술계 내의 오래된 이슈를 짚은 일종의 심층 보고서로, 월간미술이 어떻게 지난 50년간 한국미술계 현장 중심에서 기여도를 높여왔는지 보여준다.
한국미술 세계화의 궤적
노재민 기자
한국미술계는 오랜 기간 세계와의 접속을 하나의 과제로 삼아왔다. 국제전 참가부터 시작해서 해외의 동향을 주시하고 비평을 수용하며, 그들의 미술 제도와 담론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국제화’와 ‘세계화’는 한국미술의 발전을 가늠하는 지표이자 욕망의 언어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 열망은 언제나 단선적인 수출 논리나 제도적 참여의 문제를 넘어, 한국미술이 ‘어떻게 세계와 관계 맺을 것인가’라는 자의식의 진화를 반영했다. 국제화에서 세계화로 나아가는 흐름에서 한국미술의 세계화는 단순히 해외 진출의 양적 지표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자기 점검의 역사였다. ‘세계화’는 더 이상 외부를 향한 열망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려는 내적 실천의 다른 이름이었다.

『계간미술』 1977년 봄호 특집 「세계 속의 한국미술」
1970년대, 국제전에 투영된 열망
『계간미술』 1977년 봄호 특집 「세계 속의 한국미술」은 한국미술의 국제적 위치를 진단한 이른 시도였다. 이일은 「국제전 속의 한국 현대미술」 제하의 원고를 통해 한국미술의 국제전 참가가 형식적 의례에 머물고 있음을 비판했다. 그는 한국이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까뉴국제회화제,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는 참여했지만, 정작 베니스비엔날레나 카셀 도큐멘타 같은 핵심 무대에는 초청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단순한 참가가 아닌 세계 속에서 한국미술의 위치를 자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국제전은 체계적 전략 없이 추진되어 ‘주먹구구식 행사’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출품 작가 선정 기준과 전시 방향에 대한 정보 또한 부족했다. 이 비평가는 우리 현대미술의 현실적이며 진정한 소재가 해외전에 얼마나 정확히 반영되어 왔는지 물음을 던지면서도 1973년과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한국 판화가 세계 미술계로부터 “신성하고 뿌리 깊은 잠재력을 지닌 영역”으로 평가받았음을 상기시키며, 변화의 조짐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이어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국제적 인식은 적어도 4~5년 이래 상당한 변화가 있었는데, 이에 기여한 것은 “각종 국제전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간에 있었던 해외 체류 작가의 꾸준한 개별적인 활동과 국내 작가들의 그룹·개인 해외활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국제전 참가와 이와 아우른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적 도약은 이제 국제적 차원에서 강력히 뒷받침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월간미술』 1995년 1월호 특집 속 백남준과 김홍희의 대담
「예술은 올림픽 경기가 아닙니다」
1990년대, 제도화된 국제화의 현장
1990년대는 국제화 담론이 제도적 차원으로 구체화된 시기였다. 1995년은 ‘미술의 해’로 지정되며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되고,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설립된 해이기도 하다. 본지는 1월호 특집「국제화 시대의 한국미술」을 통해 백남준과 김홍희의 대담 「예술은 올림픽 경기가 아닙니다」로 기획의 문을 열었다. 백남준은 “정보력의 확장이야말로 세계화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길”이라 말했고,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와 킴 레빈은 국제 교류를 위한 담론 체계와 전략의 부재를 지적했다. 프랑스 전문가들은 “국가 단위의 예술로서 한국미술이 중요하다기보다 오히려 누가 한국의 우수한 작가인가, 한국의 작가들은 어떠한가 하는 식의 작가 개개인의 아이덴티티가 세계 미술계에서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한편, 이용우는 1997년 6월호 특집 기획 「오늘의 창작, 핫이슈7」 속 글 「진정한 국제화는 실현되는가」에서 1960년대 이후 확산된 탈중심·탈모던 미학 담론이 ‘국제주의와 정체성’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형성했다고 진단하며, 한국미술이 그 속에서 어떤 모순을 겪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국제주의는 서구 중심의 문화 헤게모니로, 정체성은 지역주의나 민족주의 미학으로 각각 비판받으며, 두 방향 모두 완결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한국 미술계에서는 ‘국제화 열망’과 ‘자생력’ 사이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음을 짚었다. 저자는 1980년대 이후 국내 미술계가 국제주의를 명분으로 한 단기적 전시와 상업적 이벤트에 몰두했다고 지적하며, 이를 “일회성 국제 이벤트”나 “센세이셔널리즘의 홍보용 문화행동”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진정한 미학적 자생력은 민족주의적 소재주의나 구호가 아니라, 국제적 시야 속에서 한국의 미의식을 자율적으로 확립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즉, 외연적 확산보다 내적 성숙을 우선해야 하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율적 미학과 지속적 문화 이념을 구축할 때 비로소 ‘진정한 국제화’가 실현된다고 결론짓는다.

『월간미술』 2007년 4월호 테마기획 「해외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한국의 영 아티스트」
2000년대 이후, 세계 속에서 다시 한국미술
2000년대 이후 ‘세계화’가 미술계의 보편적 전제처럼 자리 잡았지만, 그 안에서 한국미술은 시대의 변화를 맞이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2007년 4월 테마기획 「해외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한국의 영 아티스트」 속 원고 「어떻게 국제 미술시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집필한 유진상은 국제미술시장에서 제대로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는 1차 시장의 국제적 사업역량에 좌우된다고 밝히며, “갤러리들이 해외 주요 미술관 전시나 기획전시, 주요 컬렉션 등에 작가들을 소개하고 알리는 일이 예상을 벗어난 경매 낙찰가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국제적인 동시대미술의 평가 기준에 대한 이해가 국내 미술계에 점점 더 중요한 조건으로 강요될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큰 젊은 작가들에게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주시하고 동시대미술이 요구하는 작품의 수준과 창작 태도를 충족시킬 것을 당부한다.
동일 기획 지면에서 배혜경 크리스티 한국사무소장은 인터뷰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은 다른 아시아 작품들에 비해 작품성이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가격 면에서 아직 접근이 용이한 점이 장점”이라는 의견을 밝히면서도, 뉴욕이나 런던 메이저 경매에 한국 작품이 진출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홍콩 크리스티 아시아 현대미술 경매처럼 한꺼번에 많은 작품이 진출하기에는 아직 국제적 인지도 면에서 역부족”이지만 “아시아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입지를 서서히 넓혀간다면 장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세계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조언으로 “자국 내에서 먼저 자국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해외시장에서도 붐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본지 편집팀은 2012년 1월 특집 「미술에서도 한류는 가능한가?」에서 국내외 전문가 15인의 응답을 통해 ‘한류’ 담론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이들은 “한국 미술계의 현재 위치와 위상을 살핀 후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프로모션하고 국제적 네트워킹 속에서 소통의 장을 여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한류라는 현상에 집중해 국내에서 국외로 나아가는 단순한 수출지향적 방향성, 한국이 국외에서 인정받는 결과에 그쳐서는 안 됨”을 강조했다.
장르별 집중 탐구 및 점검
황수진 기자
월간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장르를 시대의 흐름과 함께 기록해 왔다. 판화에서 한국화, 공공미술, 조각, 회화, 게임아트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의 특집들은 동향 보고를 넘어 예술 개념의 변화와 제도·매체 환경의 진화를 비평적으로 양상과 시도를 논의의 장으로 건져 올리고, 기존 장르의 현주소를 점검하며 위기를 진단하고 확장의 방향을 함께 모색해 왔다. 이번 ‘장르별 집중 탐구 및 점검’은 각 장르가 시대마다 어떤 문제의식과 미학적 조건 속에서 자신을 갱신하고 확장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월간미술』 1966년 1월호 특집
판화—복제에서 디지털까지
현대판화는 기법의 보급과 작가층의 확대로 불과 30여 년 만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89년 12월호는 판화가 독자적 예술 언어로 설 수 있는가를 물었다. 1990년대 들어 판화의 제도화와 확장이 본격화되었다. 대학 판화과의 신설, 전문지 발간, 《한국현대판화 40년전》(국립현대미술관, 1993), 서울판화미술제의 성공 등 활황 속에 월간미술은 1996년 4월호에서 판화의 대중화와 상업화, 복수성의 윤리 문제를 함께 짚으며 현장의 진단서 역할을 했다. 이어 1998년 3월호는 2030세대 판화가 20인을 조명하며 재료와 기법의 실험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조형 감각을 분석했다. 2000년대 들어 IMF 외환위기 이후의 침체와 디지털 기술의 도입은 판화의 존재 기반을 흔들었다. 2006년 8월호는 그 논의의 결산으로 매체미술 시대 전통적 수공성과 디지털 기술이 공존하는 동시대 조건 속에서 판화의 새로운 개념과 위상을 모색했다.
한국화—계승과 변혁의 기로
‘한국화’라는 명칭은 1980년대 초, 일제 잔재를 벗고 조선 회화의 주체적 계승을 표방하며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변용 사이의 긴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월간미술은 1988년 여름호에서 한국화의 회화 정신과 표현양식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비판적으로 점검했다. 1990년대에 들어 집단적 개혁운동은 사라지고 개별 작가 중심의 실험이 확산되었지만 ‘한국성’의 회복은 여전히 핵심 과제로 남았다. 1997년 3월호는 한국화가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며 전통의 계승과 자기 변혁을 조화시킨 작가들의 시도를 조명했다. 2000년 2월호는 김학량과의 공동기획을 통해 교육제도의 경직성과 전통 형식의 답습이 한국화의 현대적 전환을 가로막고 있음을 지적하며, 전통의 정신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할 방향을 제시했다.
공공미술—제도 변천과 참여의 확대
1983년 ‘1%법’ 도입과 함께 잡지는 같은 해 여름호에서 전 세계 벽화운동을 소개하며, 미술이 미술관을 넘어 거리로 확장되는 현상을 공동체적 예술로 조명했다. 1989년 5월호는 1%법 시행 이후 확산된 대형 벽화와 조형물의 실태를 점검하며, 법적 규정보다 자발적 참여와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0년대 초반 잡지는 제도의 그늘에 주목해 2002년 11월호 논단에서 작품 선정과 심의 과정, 사후 관리 등 운영상의 문제를 지적했다. 2004년 문화관광부가 제도 전환을 예고하면서 개혁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같은 해 7월호에서 찬반양론을 병치한 오형태와 성완경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이어 11월호에서는 해외 사례와 업계의 목소리를 함께 다루며 공공미술의 의미를 재고했다.

『월간미술』 2002년 4월호 특집
조각 —정체성과 개념의 확장
1980년대 국제 행사를 계기로 조각은 이례적인 양적 팽창을 겪었다. 1986년 봄호는 그 확산 속에서 조각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물었다. 1990년대에 들어 잡지는 탈장르화와 다원화의 흐름 속에서 조각의 변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1992년 3월호는 ‘주제의 재발견과 확장’, ‘매체의 다양화’, ‘양식의 해체’를 1990년대 조각의 핵심 징후로 포착했다. 2000년대 월간미술은 조각의 정체성 논의를 보다 세분화해 다루었다. 2000년 3월호에서 최태만은 한국 조각의 방향을 ‘서술성·물질·구조·개념’의 네 축으로 도표화하며 정체성의 좌표를 제시했다. 이어 2003년 5월호에서는 김복진으로부터 시작된 구상조각의 계보와 위상을 점검했고, 2005년 4월호는 김종영을 중심으로 한국 추상조각의 역사와 지형도를 되짚었다.
회화—끝없는 위기론과 재정의
1980년대 중반은 회화가 평면의 한계를 넘어서려던 시기였다. 1990년 11월호는 이러한 변화의 현장을 추적하며 작가와 평론가의 발언을 통해 입체화된 회화의 의미와 한계를 진단했다. 1996년 1월호는 설치와 테크놀로지 아트가 확산되는 상황 속에서 회화의 위상을 다시 물었다. 이후 2010년 6월호는 87명의 작가에게 ‘그리기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회화의 근원적 행위와 미학적 의미를 되짚었다. 2019년 8월호는 20명의 기획자와 비평가가 각자의 시선으로 회화 작가를 추천하며, 위기론의 허구성을 제도와 시장의 견고함 속에서 분석했다. 2025년에는 인공지능의 창작력과 저작권 논의가 뒤섞인 오늘의 현실 속에서,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회화 반격》 전시를 계기로 반복되어 온 회화 위기론을 다시 호출하며 여전히 유효한 회화의 힘을 상기시켰다.
게임아트·인공지능—기술 이후의 예술
1999년 8월호는 디지털 기술을 예술개념의 전환점으로 주목했다. 2001년 5월호는 인터랙티브 아트, 웹·모바일 아트 등 새로운 예술형식의 가능성을 조명했다. 같은 시기 게임과 미술의 결합은 ‘뉴 미디어 컬처’의 한 흐름으로 주목받았다. 2002년 4월호와 2005년 1월호는 게임을 매개로 한 미술의 사회문화적 확장을 다루었고, 2020년 8월호는 게임이 예술의 문법과 창작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분석했다. 2023년 8월호는 논의를 뮤지엄으로 옮겨 전시 맥락에서 게임의 활용 가능성과 시사점을 제시했다.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 이후 2017년 2월호는 인공지능 시대의 창의성과 예술의 본질을 질문했다. 2022년 11월호는 생성형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작가들의 실험을 통해 예술과 기술의 공생 구조를 조명했고, 2024년 5월호는 논의를 예술 현장의 현실로 확장해 인공지능이 예술 생산 시스템 전반—노동, 창작, 저작권—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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