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와 국내 편집자들의 목소리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
마크 래폴트 아트리뷰 편집장 (번역:고진영)
11월 특집기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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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
미술잡지와 미술비평의 변화
전환의 시기, 빠른 속도의 시대에 여전히 잡지를 만들고 있는 해외와 국내 편집자들의 목소리를 모았다. 지금의 시대에 잡지를 만든다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 그들의 말 속에서 잡지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여전히 사유의 장이며 공동체적 실천의 공간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적절한 절망과 적당한 희망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보스토크』 1호부터 50호까지의 표지 제공: 보스토크
판매량과 광고 수익, 정기 구독자 숫자, 열독률. 이미 오래전부터 잡지와 관련된 모든 지표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줄곧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지금까지 잡지사 네 곳을 거쳐 16년째 잡지 편집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동안 잡지를 만들기에 희망적이었던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상황이 희망적이라 품은 희망은 상황이 바뀌면 쉽게 사라지지만,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때로 절망보다 위험한 건 오히려 과한 희망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근거 없는 희망은 마음만 들뜨게 하고, 막연한 희망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민을 무디게 하기 때문이다.
2016년에 창간해 지금까지 51권째 만들어온 『보스토크』는 사진잡지 치고는 좀 특이한 정체성을 지녔다. 그 독특한 DNA를 찬찬히 살펴보면 잡지를 만들면서 마주했던 절망과 괴로움이 오히려 밑거름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보스토크』에는 프리뷰, 리뷰, 신제품 소식 등 일회성 기사 코너가 없다. 이러한 코너들은 독자보다는 광고주를 우선한 기사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광고성 기사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매호 하나의 특집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모든 콘텐츠를 주제와 연결되도록 구성하는 것을 편집 방식의 원칙으로 삼았다. 어떤 주제를 선택하는지, 또 그 주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독자들이 잡지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인식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를 통해 광고주보다는 독자들에게 복무하는 잡지가 되고 싶었다. 실제로 『보스토크』에는 광고 지면이 매우 적다. 간혹 광고 의뢰 문의가 들어오지만, 광고를 진행해도 연관 기사가 나가지 않는다고, 그런 기사를 수록할 수 있는 프리뷰나 뉴스 코너가 아예 없다고 말씀드리면 대개 다시 연락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비록 광고 수익은 매우 저조하지만, 대신 불필요한 광고 없이 특집 기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보스토크』는 매호 주제에 따라 표지와 내지 디자인, 제호 스타일, 본문 서체까지 변화를 준다. 이는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잡지에서 보기 드문 편집 방식이다. 아마도 이러한 부분이 독자들에게 여전히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가는 것 같다. 물론 매번 잡지가 스타일이 바뀌니 종잡을 수 없고 변덕스럽다는 반응도 있지만, 이렇게 매번 다른 주제를 다루고 그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변화를 주는 것은 매호 새로운 독자를 만나려면 내용과 형식을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사진잡지의 독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진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화와 문학 그리고 디자인과 미술 등 사진과 맞닿은 영역까지 확장해야 잡지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독자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잡지이지만 영화와 디자인 분야와 연관된 연재 콘텐츠를 개발하고, 소설가와 시인 등 문학 분야의 필자를 적극 섭외해 글을 수록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사진만의 영역과 독자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독자를 계속 만나야 한다는 판단에는 상당히 냉정하고도 절박한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것 같다. 이와 반대로 예상 독자를 과하게 희망적으로 계산하고, 창간호를 지나치게 많은 부수를 제작해 재고만 잔뜩 쌓였다는 몇몇 사례를 알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처음부터 계산이 대단히 잘못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자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행착오가 잦아지면 잡지의 지속가능성에도 균열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보스토크』 또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발걸음에 대한 계산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큰 문제 없이 궤도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절망적인 순간의 경험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그 괴로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거듭했던 고민들이 나중에 희망의 힌트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스루패스로서의 비평: 소개하지 않고 개입한다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

『마테리알』 1호 제공: 마테리알
1. 2019년 창간한 영상비평지이다.
『마테리알』은 2019년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창간준비호를 무료 배포하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신생공간이 활성화되면서 젊은 비평가들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던 것과 달리, 한국의 영화비평계에는 일단은 젊은이가 별로 없었고 있더라도 그저 선생들이 하던 것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고, 그런 상황을 타개해보고 싶었다. 이는 젊다는 이유로 ‘심사’를 받는 대신에 우리의 지면을 그냥 우리가 만들자, 그리고 거기에 동료들과 동료가 될 사람들을 기꺼이 초대해서 연결해 보자는 마음으로까지 나아갔다.
2.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
‘스루패스’는 축구 용어를 차용한 것으로, 공간을 향해 공을 보내는 패스를 의미한다. 성공적인 스루패스는 아무 의미 없이 정적이기만 한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전환시키고, 역습의 순간, 슛의 순간, 아름다운 패스의 순간, 득점의 순간 같은 것들이 그 속에서 발생한다. 비슷하게 우리가 보내는 비평적 스루패스를 통해 예술계 동료들과 독자들이 열린 공간의 순간들을 경험하길 원한다. 그것이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의 목표이다. 이는 『마테리알』에서 거의 유일하게 지속되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3. 신문 형식의 잡지다.
사람들이 가끔 왜 단행본이나 일반 잡지 형태로 만들지 않는지 묻는다. 하지만 우리는 『마테리알』이 마구 다뤄지고 구겨지고 찢어지기를 원한다. 우산 대신 쓰거나, 비에 젖어 축축한 운동화에 구겨 넣어도 좋은 그런 잡지가 되고 싶었다(모순적이게도 우리는 그것을 이제 1만 5000원이나 받고 팔고 있다). 또한 신문을 읽을 때의 그 불편한 움직임, 팔을 크게 벌려 펼쳐야 하고 접어야 하는 동작들, 시선의 궤적들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거기서 나오는 ‘동세’가 『마테리알』이 지향하는 ‘스루패스로서의 비평’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4. 연 1~2회 비정기 발행된다.
너무 많은 갈래의 글을 너무 많이, 너무 빨리 생산하는 것에 독자들이 심한 피로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을 생각하면 많이 자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수그러진다. 지속가능성의 문제도 있다. 현재 편집부 인원 모두 머니잡이 따로 있다. 마테리알로는 절대 돈을 벌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우리는 긴 텀을 두고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딜레마도 있다. 독자들이 우리를 잊지는 않을지 걱정도 되고, 또 아무래도 영향력이 작아 필자들에게 송구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천천히 오래 재밌게 가보려고 한다.
5. ‘무빙 이미지’라는 문제적 범주에서 시작했다.
2010년대 중반 미술계에서 무빙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미술의 맥락에서 나온 영상작업이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반대로 보다 영화적 맥락에서 제작된 작업들이 미술관에서 호명되기도 했다. 거기에 뭔가 새로운 가능성이 있겠다 생각했다. 그것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희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화에 대한 희망에 가까웠다.
그런데 무빙 이미지를 들여다보다 보니, 그 주변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빙 이미지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이 있고, 퍼포먼스가 있고, 문학이 있고, 그밖의 것들도 많다. 우리는 그것들을 ‘동료예술’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유연하게 이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마테리알』은 영화 잡지도 아니고 미술 잡지도 아니다. 무빙 이미지를 중심에 두되, 그것이 만나는 모든 것에 열려있는 잡지다. 그래서 영화계, 미술계, 문학계 등 다양한 곳에서 독자들이 유입되고 있다.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떤 계에도 속하지 않은 익명의 독자들을 만나는 일이다.
6. 필자와 협업하고, 비평의 형식적 실험을 환영한다.
우리는 날 선 목소리와 날것의 생각들을 환영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글이 잘 쓰였는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글에 담긴, 혹은 글을 촉발시키는 생각과 통찰력이 흥미로운지를 제일 먼저 살핀다. 너무 잘 쓰이고 정제된 글들만 있으면 재미가 없다. 잡지에 실린 글을 다소간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 순간들도 있어야 한다. 마테리알에 실리는 글의 형식도 다양하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비평문뿐 아니라 서신교환, 대화, 번역, 가상의 강연록 등 다양한 형식의 글들을 싣고 있다.
7. 소개하지 않고 개입한다.
초창기에는 꽤 과격했다. 창간기념 행사 홍보문에 “오늘날 한국 비평의 고지혈증”이라는 표현을 썼고, 선배 평론가에게 “아버지가 죽일만한 아버지인지는 자식들이 판단할 문제”라고 건방지게 대답하기도 했다(그때는 20대였다). 2020년에는 외부단체와의 협업 속에서 영화문화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만들어 영화학교와 유관기관에 보냈다. 최신호인 9호에서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계급의 문제가 어떻게 복잡하게 배제되고 탈락되는지에 대해 다루는 서신교환을 실었다. 우리는 거울처럼 현장을 반사하기만 하는 비평이 아니라, 상황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비평을 하고 싶다. 정보를 전달하거나 작품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 질문을 던지고 긴장을 만드는 것.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비평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예술 잡지의 존재 이유
마크 래폴트 아트리뷰 편집장

『아트리뷰아시아』 2025년 10월호
아라야 라스드잠레언수크(Araya Rasdjarmrearnsook)을 모델로 한 표지
사진: 루시 레이븐
1949년 런던에서 『아트리뷰(ArtReview)』가 창간될 당시,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예술은 사치처럼 보였고, 『아트리뷰』 같은 잡지는 예술이 당시 재건 과정과 더 넓게는 시민사회의 기반을 세우는 데 왜 중요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사람들에게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 설득의 핵심은 예술의 가치가 드러나는 다층적 경로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일이었다. 예술은 경제적 투자이자 역사적 유물이며, 철학적 명제이자 사회적 제안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예술이 더 이상 사회 지도층이나 경제적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계급을 벗어나 보다 평등한 영역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즉, 예술이란 서로 다른 관점과 대립되는 생각이 한자리에 제시되고 마주하며 토론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행위였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예술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서로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 잡지는 겉으로는 예술을 다루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것들을 이야기한다. 예술처럼 잡지 또한 아이디어의 성장과 발전을 다루는 매체이며, 이는 단순한 미학적 문제의 범주 너머로 펼쳐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각을 기술하는 것은 역사, 사회학, 언어학, 논리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적 사고를 동원하며 시각적 담론을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다. 심지어 작품의 형식이나 재료를 묘사하는 일조차 일종의 번역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예술 잡지는 예술 그 자체뿐 아니라 예술을 둘러싼 모든 기제가 시민사회의 조직적 구조 속에서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를 설명해야 할 책임의 무게가 점차 커지고 있다.
흔히 미술비평가는 ‘취향을 형성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즉,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분하고, 때로는 그 이유까지 설명해주는 이로 인식된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21세기를 살아남고자 하는 예술 잡지의 핵심은 예술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사실을 생산하고 지식과 경험이 ‘틴더화(Tinderfied)’된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 영국의 앤드류 모런(Andrew Moran) 교수의 표현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답을 찾을 때까지, 또는 더 은밀하게 다른 사람이 좋아할만한 답을 찾아낼 때까지 손가락으로 계속 화면을 넘긴다. 일본 저자 리에 쿠단(Rie Qudan)이 지적하듯, 인공지능의 부상과 지식의 구글화(Google-isation of knowledge)로 인해, 이제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세상의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이 존재한다고 믿게 될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회색지대나 불확실성의 여지는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비판적 사고가 멸종 위기에 놓인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사람이 비평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이지만, 정작 누구도 진정한 비판적 사고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오늘날 예술 잡지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임은 바로 이 비판의 사유를 지켜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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