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서재 5: 서혜영

『주기율표』,『보이지 않는 도시들』,『사물의 편』

 글 서혜영 진행 노재민

The Artist’s Bookshelf


서혜영 Haiyoung Suh / 이화여대 조소과 및 브레라 국립미술학교 를 졸업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다시 불러낸 시간》(A BUNKER, 2024), 《Node, One and Its Entirety》(성곡 미술관, 2023) 등이 있다. 2001년 제21회 석남미술상을 수상했고, 2019년 파리 시테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국립현대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코리아나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주기율표』,『보이지 않는 도시들』,『사물의 편』

서혜영은 이탈로 칼비노, 프랑시스 퐁주, 프리모 레비의 텍스트를 따라 언어와 세계,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탐문한다. 레비의 『주기율표』가 보여주는 물질의 순환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가 돌과 금속, 물, 나무와 같은 재료를 통해 세계의 근원적 리듬을 감각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이어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언어가 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방식’임을 읽어내며, 작품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는 의미의 장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퐁주의 『사물의 편』을 통해 일상의 물질이 스스로 발언하는 세계를 상상 하고, 자신의 연작 〈물질도감〉 속에서 사물이 지닌 시간성과 기억을 시각적으로 기록한다. 언어와 물질, 시와 과학이 교차하는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서혜영은 세계를 다시 쓰고 다시 그리는 예술적 사유의 궤적을 펼쳐 보인다.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 이현경 옮김 · 돌베개

그는 이미 길고 긴 우주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우리는 그 역사를 알 수 없다. 그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날마다 그리고 계절마다 게으르게 변하는 온도 아래에서만 존재했다. P.327

『주기율표』는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가 쓴 자전적 에세이로, 각 장이 주기율표에 나오는 원소의 이름을 따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화학, 문학, 역사, 철학이 결합된 독특한 형식을 띠며, 레비의 삶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개인적 회고가 보편적 사유로 확장된 작품 으로 화학자로서의 직업적 여정을 통해 인간성과 과학의 관계를 성찰한다.

각 원소는 상징적 의미로 쓰이며, 레비의 개인적 경험이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죽음과 애도의 무게를 가진 납, 인간의 탐욕과 위선, 가치에 질문을 던지며 윤리적 타협을 실험하는 금, 아우슈비츠라는 절망 속에서 창의성과 생존의지를 불태우게 한 세라늄, 불안과 두려움의 예측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나트륨과 인, 인간의 물질성과 우주의 연속성을 증언하는 탄소까지 각각의 원소는 레비의 기억과 경험이 저장된 실험실 이자 인간 내부의 우주이다.

그의 주기율표는 역사와 윤리, 생존 본능이 교차하는 하나의 구조물 이다. 원소들이 서로 다른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이루듯, 우리의 존재 또한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며 다른 조합으로 이어진다. 내가 마주하는 돌, 금속, 나무, 물, 그리고 내 몸까지도 결국 이 거대한 연속성의 증거이며 그들은 서로 다른 궤적을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하나의 전체로 호흡 하며 순환한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지음 · 이현경 옮김 · 민음사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자라나면서 손의 움직임은 안정되기 시작했고 손을 바꾸거나 움직임을 되풀이할 때 그 각각은 영혼의 움직임과 모두 일치했다. P.53

이탈로 칼비노의 작품은 현실과 언어의 관계를 탐구하는 철학적 우화로 읽힌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들려주는 도시는 실재의 복제물이 아니라 말해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언어적 구축물로, 의미는 텍스트에 있지 않고 독자와 언어의 상호작용 속에서 세워진다.

처음엔 말없이 손짓과 물건으로 도시를 설명하고, 나중엔 언어를 통해 도시를 재구성한다. 도시는 말해지는 순간부터 변형되고 오해되며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여기서의 도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되는 방식이며 서술 행위를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조를 보이게 한다. 칼비노는 도시를 상세히 묘사하면서도 결정적인 이미지나 서사는 생략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읽는 이가 완성해야 할 시적 건축물이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강렬한 공간적 상상력을 갖게 한다.

결국 칼비노의 세계는 언어가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언어 속에서 생성되는 것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미술 감상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작품은 결코 그 자체로 완결된 실체가 아니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의 언어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난다. 예술은 더 이상 ‘보여지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이 존재하게 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남는다.


『사물의 편』
프랑시스 퐁주 지음 · 최성웅 옮김 · 읻다

그토록 느리고 그토록 확실하고 그토록 신중하게 나아가는 방식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약간의 노력을 대가로 얻는 이 완벽한 미끄러짐. P.69

퐁주의 『테이블』을 접한 후 읽은 『사물의 편』은 일상 속 평범한 사물들을 시적 언어로 새롭게 바라보고 기술한 산문시집이다. 퐁주는 사물을 시적 주체로 끌어올려 그것 자체의 목소리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내가 2021년부터 시작한 〈물질도감〉 연작과 흥미로운 접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퐁주는 조개껍데기, 비누, 빵 등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도구적 상징적 의미에서 벗어나 사물 그 자체가 지닌 질감, 소리, 형태, 시간성을 언어로 재현했다. 그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언어 사이의 새로운 접속을 탐구하며. 사물과 물질의 세계를 주인공으로 삼아 사물이 스스로 발언하게 하였다.

〈물질도감〉은 시각적 표면 연구를 통해 사물이 단순히 물질에 그치지 않고 기억과 시간의 매개체로 사물이 품고 있는 시간의 축적, 공간의 흔적을 기록하며, 인간의 경험과 연결한 사물의 초상화이다. 나는 퐁주의 언어적 시학과 물질도감의 시각적 탐구가 만나는 지점을 따라, 사물과 세계, 언어와 시각이 얽히는 새로운 풍경을 경험하였다.

2025년 11월호 (VOL.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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