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전말과 미래의 약속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ACC 미래상 2024: 김아영《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2025 월간미술대상 우수 전시 10

12월 특집기사 ②

동시대 미술은 더 이상 미래를 ‘발견되는 시간’으로 보지 않는다. 미래는 폐허와 분기된 현재 속에 잠재된 형태로 이미 그곳에 놓여 있다. 가상 생태계가 현실을 잠식하고, 자율적 판단을 내리는 기계지능이 현실과 가상의 서사 사이를 잇는 지금, 인간은 비인간·비생물 존재들과 세계를 다시 구성하고 현실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을까. 기계-인간의 공진화, 과거와 미래가 맞물리는 시간 감각, 그리고 현실을 다시 읽는 방식의 전환을 통해 미래의 약속이 여기 이곳에서 어떻게 태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두 전시를 소개한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9.3~2026.2.1
전시기획 |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 조희현 아트선재센터 전시팀장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상상의 종말 VI〉혼합 재료 가변 크기 2024
사진:남서원 제공:아트선재센터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동시대 미술관이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미술관은 통제된 환경에서 작품을 보존하고 규범과 질서 속에서 전시를 선보이는 제도적 공간으로 기능해 왔지만, 동시대의 급변하는 환경과 위기 속에서 그 역할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올해는 아트선재센터의 첫 전시 《싹》(1995) 개최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전시는 미술관의 옛터에 있던 한옥을 활용한 전시로, 외형은 한옥이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영향을 받아 내부는 일본식 구조를 띠고 있었고, 살면서 증축한 건물은 서양식이었다. 이처럼 정체성이 모호하고 여러 양식이 혼재된 건물은 당시 한국의 시대적 맥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참여 작가들은 이러한 장소성에 반응한 신작을 제작했고,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주거 공간에 작품을 설치하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5년, 우리는 동시대의 사회·환경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미술관이 어떤 공간이 될 수 있을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한번 그 답을 모색해 보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서 비야르 로하스는 미술관을 더 이상 안정된 보존의 장소가 아닌, 끊임없이 분해되고 변이하며 재생되는 하나의 생태적 존재로 바라본다. 이러한 시선은 전시가 취할 수 있는 급진적 형식은 물론, 예술과 미술관이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며 미술관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게 해주었다.

전시를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신뢰’이다. 큐레이터와 작가 사이의 신뢰가 깊을수록 전시는 가능성의 문을 더 넓게 열어둘 수 있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신뢰는 단순한 협업의 조건을 넘어, 예측 불가능한 과정 속에서도 서로의 방향을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 신뢰의 극단적인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미술관의 구조적 시스템을 완전히 해체하고, 조명과 온습도 제어 장치의 작동을 멈추고, 전시장에 흙과 식물 같은 자연의 요소를 들여오거나 불을 피우는 일은 제도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큰 도전이었다. 그러나 비야르 로하스와 미술관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우정과 깊은 대화,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통상적인 미술관 운영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을 실험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상상의 종말 III〉776×448×522cm
2022 사진:남서원 제공:아트선재센터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한 것은 ‘관객을 전제하지 않는 미술관’을 구현하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시는 관객의 시선과 동선, 편의를 우선하여 설계되지만, 비야르 로하스의 세계에서는 인간 중심의 관람 구조가 완전히 해체된다. 대신 미술관은 비인간적 존재들이 주체가 되는 공간으로 전환된다. 미술관 정문이 흙더미로 막혀 있어 지하로 돌아 들어가야 하고 인간이 읽을 수 있는 안내 정보는 모두 지워져 있으며, 내부는 춥거나 덥고 어둡고 습하며, 때로는 냄새가 나거나 벌레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인간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결코 쾌적하거나 안락한 환경이 아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관객은 더 이상 작품을 감상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생태계의 일부로 편입된다. 즉, 미술관의 기존 시스템이 무너진 이번 전시에서, 공간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관객 스스로 사고의 전환을 시도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구조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준비 과정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통상적으로 미술관에서 허용하지 않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했다는 점이다. 건물의 하중을 계산해 구조 검토를 받고, 멀쩡한 벽을 뜯어내고, 자연에 있던 수십여 톤의 흙과 육중한 바위를 실내로 옮겨와야 했으며, 엄청난 양의 식물과 덩굴, 소나무, 이끼를 구해와 식재한 뒤 관개 시스템까지 설계해야 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3층 전시장에는 전시 내내 실제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해야 했다. ‘미술관에서 대체 이게 왜 필요하냐’, ‘왜 이런 것을 하려 하느냐’, ‘불가능하다’ 등 수많은 우려와 의심 속에서도 끝까지 실현 가능한 방법을 함께 찾아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정한 한 장면보다도, 미술관과 작가의 무모한 항해에 함께 하여 기꺼이 노를 저어준 협업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2025
사진:남서원 제공:아트선재센터

아트선재센터 큐레토리얼팀이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키워드는 ‘지속가능한 생태’이다. 이는 결국 예술이 새로운 형태의 공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후 변화와 지구 생태에 관한 리서치는 2021년 28개국의 예술기관들과 ‘월드웨더네트워크’를 결성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 일환으로 진행한 《문경원 & 전준호: 서울 웨더 스테이션》(2022)은 기후 위기를 비인간적 시선과 예술적 상상력, 학제 간 협업을 통해 다각적으로 접근했고, 2023년부터 강원도 철원군에서 진행한 장소특정적 연구에서 출발한 《언두 플래닛》(2024)은 예술을 통해 자연 회복의 가능성을 조망하였다. 이 전시의 또 다른 에디션이 현재 방콕예술문화센터에서 진행 중이다.

또한 이러한 생태적 사고는 자연환경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작년에는 트랜스 논바이너리 작가 댄 리의 첫 한국 개인전 《댄 리: 상실의 서른 여섯 달》(2024)을, 올해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태어난 한국 여성, 퀴어, 교차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가들의 서사를 들여다본 《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2025)를 선보였다. 현재는 약 7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퀴어 예술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내년 3월 개막 예정이다.

김선정
아시아문화예술회관 ACC 아카이브 & 리서치 예술감독,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 역임. ‘리얼디엠지프로젝트’ 설립자 및 예술감독으로, 미술관의 경계를 넘어 DMZ(비무장지대)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예술의 비판적 시각으로 탐구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조희현
큐레이터학과 국제문화정책 및 매니지먼트를 전공했다. 아트선재센터에서《오프사이트》, 《작아져서 점이 되었다 사라지는》, 《카미유 앙로: 토요일, 화요일》기획 및 안젤리카 메시티, 프란시스 알리스, 줄리앙 프레비유, 구동희, 제인 진 카이젠 등 전시 진행을 맡았다


ACC 미래상 2024: 김아영《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4.8.30~2.16
전시기획 | 오혜미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ACC 전시 전경 2024
제공: ACC

미래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우리 주변에 스며들어 있는 어떤 감각적 잔향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며, 현재의 표면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균열들을 읽어내는 세심한 행위에 가깝다. 동시대 사회에는 미래를 앞당기려는 기술적 속도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동시에 작동한다. ACC 미래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미래는 그저 다가올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압력과 결핍, 그리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리듬들의 집합이다. 이 질문은 시간의 구조를 다시 바라보게 했다. 미래는 단순히 다가올 시간의 예측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미세하게 감지하는 일에 가깝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김아영 작가의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작업은 현실의 틈에서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미래를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나는 전시를 ‘설명하는 공간’보다는 ‘사유가 발생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관객이 작품을 통해 스스로 생각을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노바리아’의 세계관을 과도하게 정리하거나 해설하지 않으려 했다. 이야기의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서사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레이어를 쌓아 올리며 선형적 서사나 단일한 해석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대신 장면의 속도, 이미지 사이의 간격, 사운드의 변화 같은 요소들을 통해 관객이 직접 세계의 방향성을 체감하길 바랐다. ACC 미래상을 준비하면서, 미래를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라 감각적 징후로 바라보았다.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표면에서 이미 진동하는 미세한 변화로 존재한다. 그래서 김아영의 세계와 만났을 때, 나는 그 세계가 열어 보이는 시간의 균열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작가는 이러한 감각적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며 우리의 세계를 다른 속도로 읽는 방법을 제안했고, 나는 그 속도를 전시장이라는 현실에 이식하는 일을 맡았다. 특히, 작가가 제시한 ‘inverse’라는 개념이 공간적 체험으로 번역되면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생성하는 리듬에 관객이 직접 접속하도록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접근은 전시 기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해 온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예술이 미래를 예측한다고 믿지 않는다. 대신 예술이 미래의 감각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낯섦을 통해 관객이 자기 삶의 리듬을 다시 듣게 되는 순간—그 미세한 진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번 전시가 지향한 지점이었다.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ACC 전시 전경 2024
제공: ACC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결정의 순간’과 닿아 있다. ACC 미래상이라는 첫 시도는 규모 면에서도, 시간과 공간의 조건 면에서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거대한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 새로운 제도를 전시라는 현실적 구조로 구현한다는 일은 물리적 구조, 시간과 공간의 압박에 맞서는 과정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김아영의 새로운 커미션 작업이 지닌 기술적 시도, 서사적 조밀함, 고고학적 감각이 한층 더 응축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은, 전시의 본질이 결국 ‘세계의 층위를 다루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이번 기획에서 가장 큰 배움이었고, 오래도록 잊기 어려운 경험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미래를 하나의 단일한 서사나 예측 가능한 경로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의 감각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관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ACC 미래상에서 작가는 미래를 ‘예측’의 언어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적 시간 체계가 놓친 감각과 세계관을 다시 탐색하고, 그 틈에서 발생하는 가능성을 예술의 언어로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둔다.

김아영〈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스틸) 3채널 비디오, 컬러, 2채널 사운드,
조명 설치, 무작위 영상 재생 및 조명 동기화 제어 프로그램, 해시계 조형물,
그래픽 시트, 원형 스크린, 대형 슬로프 27분 가변 크기 2024 제공: ACC

김아영은 이번 작업에서 인공지능 기반의 기술적 실험과 고고학적 시선, 동아시아적 도상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이를 단순한 형식적 장치로 소비하지 않는다. 가상 도시 ‘노바리아’의 서사를 중심으로 전통 역법, 천문학, 인공지능 연산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근대적 표준 시간 밖에서 작동하는 다층적 시간 체계를 제시한다. 이러한 구조는 ACC 미래상이 제안하는 ‘미래의 감각적 재구성’과 정확히 맞물린다. 결국 이번 전시는 미래를 말하는 전시가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어떻게 흔들고 다시 구성하는지를 몸으로 감각하는 전시였다. 관객이 익숙한 시간의 구조를 잠시 벗어나 다른 가능성의 세계에 접속하는 일—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가장 본질적인 소통이었다.

큐레이터로서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주제는 아시아성, 미래주의, 그리고 인간·사회·기술의 관계성이다. 아시아성에 대한 관심은 지역성을 강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과거의 잔흔이 미래를 구성하는 또 다른 층위로 재배열하는 데서 출발했다. 나에게 아시아성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사고 틀이다. 미래주의는 이러한 탐구를 확장하는 시선이다. 미래주의는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발생하는 작은 감각적 균열들을 읽어내는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적 속도와 사회적 압력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 변위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시해 온 세계의 구조를 다시 묻게 만든다. 그리고 이 두 축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과 사회, 기술이 서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감각의 조건을 바꾸는 힘이며, 인간의 경험과 사회적 구조 사이에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전시는 그 리듬을 드러내고, 관객이 그것을 몸으로 감지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오혜미
1960년대 이후 아시아 현대미술의 주요 의제, 미래주의와 미디어·기술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전시와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동시대의 감각을 재구성하는 예술의 실험이 어떤 방식으로 미래의 상상력과 연결되는지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2026 ACC 미래상: 김영은》을 준비 중이다

2025년 11월호 (VOL.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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