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 Suejin Chung

정수진의 회화,
다차원적 평면성과 기괴한 사물들의 장소

김주원 큐레이터·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Artist

정수진/ 1969년생.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시카고예술대에서 회화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대구 시공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더페이지갤러리, 이유진갤러리,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아라리오갤러리, 두산갤러리, 몽인아트센터, 갤러리스케이프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아트선재센터, 일민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안공간 루프, 국제갤러리, 원앤제이갤러리, 파리 에스파스루이비통, 상하이 비즈아트센터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주요 작품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두산연강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롱 뮤지엄(상하이), 선화예술문화재단이 있다. 두산레지던시 뉴욕(2009)과 쌈지 스페이스(2003)에 참여했다. 사진: 박홍순 이미지 제공: 작가 《정수진: 부도위도》 S2A갤러리 전시 전경 2025


정수진의 회화, 다차원적 평면성과 기괴한 사물들의 장소
김주원 큐레이터·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정수진은 ‘회화’를 인간의 정신 혹은 의식을 탐구하는 가장 적합한 매체로 보고, 줄곧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 체계를 실험, 구축해 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각’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낯선 차원을 깨닫고 이를 회화 매체로 탐색해 왔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동안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 후 1995년 귀국했다. 이영철이 기획한 《’98 도시와 영상-의식주》(1998)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된 정수진은 만화 형식의 회화 네 점을 출품 하였다. 당시 한국은 대중문화와 소비문화가 정착된 시기로, 상품 자본주의와 문화 다원주의 시대로의 전환 현상이 두드러 졌다. 미술계에서는 문화제국주의, 민족, 역사, 정체성 등의 거대서사와 모더니즘(단색화)과 민중미술의 집단적 진영논리 에서 벗어나 작은 이야기와 일상을 주목하는 다양한 방법론이 모색되었다. 《’98 도시와 영상-의식주》전에 소개된 정수진의 회화는 급변한 시대적 문화적 상황과 동시대적 감수성을 대변하는 한 예로 주목되었다.

〈무제〉종이에 펜, 잉크, 수채 36.5×26cm 1998~2001

“정수진의 4컷짜리 만화 연작들은 ‘프랙탈적’ 난장판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놀이 장면을 보여준다. 만화 속의 인물과 사물들은 웅얼거림과 동작, 제스처를 통해 서로 느낌과 의사를 교환한다. 역사적 시간, 공간의 규칙을 파괴하는 이 작은 만화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전, 후, 순간 사이의 틈이 만화 커트의 경계, 빈 공간의 상상에 의한 소통방식을 도상들 간의 소통으로 대체하면서 기호적 소통방식의 두터움과 감각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1

1990년대 ‘다원화’된 한국미술의 양상을 살펴보려 기획된 이 전시는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대 변환을 알린 기념비적 전시로 평가된다. 그를 포함해 김소라 이수경 김상길 이동기 함경아 등 오늘날 한국 동시대 미술 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한편, 정수진은 《주차장 프로젝트 1: 만화》(아트선재 센터, 1999), 《한국 신세대 흐름전: 믹서앤쥬서》(한국문화 예술진흥원 미술회관, 1999), 《젊은모색2000–새로운 세기를 향하여》(국립현대미술관, 2000) 등 주목할 만한 국내 주요 국공립, 사립미술관의 기획 전시에 잇따라 초대 되었다. 이들 전시에는 마치 백과사전의 분류된 항목처럼 무표정한 낱낱의 a) 만화책, 오징어, 양파, 호두(?), 슈퍼마켓 진열대, 병 등의 사물 b) 소인(小人), 여자, 남자 c) 엉킨 실뭉치 같은 나선형, 직선, 구불구불한 선, 원 등의 기호가2 비(非)원근적 회화의 화면 안에 ‘함께’ 등장하였다.

〈뇌해〉린넨에 유채 180×220cm 2020~2024

사물들의 공통 장소
정수진의 회화 속 이상한 사물들은, 미셸 푸코가 자신의 책 『말과 사물』 (1966) 서문에서 인용한 보르헤스의 어느 텍스트에 나온다는 중국의 한 백과사전을 상기시킨다. 푸코가 인용한 보르헤스의 구절은 이렇다.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는 “동물이 a) 황제에 속하는 것 b) 향기가 있는 것 c) 훈련된 것 d) 돼지 e) 인어 f) 터무니없는 것 g) 방목견(犬) h) 이 분류에 포함되는 것 i)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것 j) 헤아릴 수 없는 것 k) 낙타털의 섬세하디 섬세한 화필로 그려진 것 l) 기타 m) 장식 항아리를 금방 깬 것 n) 멀리서는 파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3

이 동물 분류를 보면서 그 생경함과 황당함에 웃음이 났다면, 그것은 이 놀랍고 이상한 분류가 우리의 오래된 관행적 사유 기반을 깡그리 뒤흔들기 때문이다.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물들이 어떤 기반 위에서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치되어야 하는데, 위의 분류에서는 “각 항목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가 무너져 있다”4는 점에 기인한다. 푸코가 인용한 보르헤스는 ‘중국’이라는 단어에서 ‘무질서’를 떠올린 듯하다. 질서이자 기준으로서의 ‘백과사전’과 이국으로서의 ‘중국’을 연결할 공통의 바탕/장소의 존재 가능성을 의심했던 것일까.5 서구의 특정한 질서를 단일한 보편과 규범으로 믿어온 서구인의 일반적인 시각에선 중국의 특정한 질서, 자신들과 다른 차원의 세계와 동물을 보는 기준, 분류 근거(14차원 분류 근거)가 놓일 수 있는 공통의 바탕/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수진의 회화는 서구중심주의와 망막중심주의의 공모가 체계화한 사물의 ‘단일한’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대립하기도 했던”6 ‘특정한’ 사물과 ‘특정한’ 시간이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의 바탕/장소’로 자신의 화면을 내어주고 있다. 이는 냉전 체제의 와해와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전지구화의 격변, 이에 따른 동서(東西) 사물 질서, 체계의 충돌과 갈등을 한국, 시카고 등에서 목격한 청년 예술가의 일상과 경험, 끝끝내 본질을 탐구하려는 변증법적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정수진의 회화는, “한눈에파악할 수 있는 주(主), 종(從) 관계의 전통적인 구도와 원근법의 공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개성적인 객체의 독립된 자유의지는 자칫 혼란과 불안을 유발하지만, 각 개체의자율이 보장되고 전체의 구조가 깨어지지 않는 조화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작가는 조정자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구성한다.”7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의 다양한 물리적 환경 변화는 그녀의 회화 속 다차원의 ‘특정한’ 사물들의 배열 방식과 공명하고 있다. 보르헤스가 상상한 중국의 어느 한 백과사전 처럼, 정수진의 백과사전 사물 항목을 상상해 보자. 그의 회화 속 사물들은 그 어떤 위계도 순서도 없이 때론 줄쳐진 그리드 위나 겹쳐진 다차원의 평면 위에 서로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배열될 뿐이다.

약병, 빵-빨조각, 양파, 서양배-한입 먹은 배, 밤톨 뒷덜미가 보이는 짧은 머리칼의 두상, 호두-뇌, 미니 건물 미니 건물 단면, 아이스크림 꼬깔, 눈 결정, 흘러내리는 물감, 구멍, 눈-눈동자, 초콜릿바, 유리잔을 감싸는 코르쉐 부분, 나무 막대, 각목, 토끼-하마, 리본-보타이, 나비, 브라운 컬러머리칼의 남자얼굴 등이 정수진의 회화가 보여주는 사물 항목들이다. 이 항목들 가운데, 나선형 선, 얇고 곧은 선, 원 등의 조형 기호와 반짝임, 길게 늘인 핑크색 다이아몬드 마름모, 팩맥처럼 보이는 원형, 윙크하는 유쾌 소년 등의 약호화된 만화적 형태들이 코드로 더해질 수 있다.

‘Pink Sea’ 연작 중〈Writing with No Trace〉 오일에 젯소 패널 30×40cm 2022

시각과 인식 사이: 다차원적 평면성
사실 공통의 바탕/장소 속 ‘이상한’ 사물들은 정수진이 오랜 시간 연구하여 구축한 이론과 관계있는 세계의 이미지다. 그녀는 지난 2014년, 자신의 회화세계를 독해할 독자적인 이론 체계서 『부도(不圖)이론: 다차원 의식세계를 읽어내는 신개념 시각이론』(부도지, 2014)을 출판했다. 이 이론은 성이심(成以心)의 『성명설도(性命說圖)』에서 설명하는 “부도위도(不圖為圖)”라고 한다. ‘부도위도’는 ‘그림이 아님을그림으로 삼는다’ 혹은 ‘그림 아닌 것을 그림으로 한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으로 보이지만, 곧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8 이 논리에 따르면 ‘부도위도’는 그림 아닌 것과 그림 사이의 역설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정수진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물’을 본다는 ‘시각’(아직은 그림 아닌 것)의 문제가 ‘인식’(정수진의 그림)이라는 차원으로 ‘전환된 사물’ 사이의 관계일 수 있다. 시각과 인식의 관계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서양, 동양 등의 공간, 한국어, 영어, 불어 등의 언어에 따라 전혀 다른 형상,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 같은 추론이 가능한 것은, 작가가 이 이론을 통해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는 현실계와 평면 속에 등장하는 형상계 에 대한 범주를 구분하고, “형상계는 인간의 관념이 이미지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이 존재하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설명 하기 때문이다.9 그는 단순하게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시각과 차원의 전체상, 그 ‘구조’를 주목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서 다차원의 구조, 다차원의 전체상임을 드러내고 있다.

정수진의 회화세계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던 작품은 균질한 밀도로 시선을 끌었던 ‘뇌해(腦海)’ 연작일 것이다. 숨막힐 듯한 밀도로 밀어붙이던 작품들은 2021년 전후하여 제작된 ‘Pink Sea’, ‘Observer’ 연작 등에선 보다 대담한 화면 구획과 반복적인 패턴, 기호처럼 처리된 눈, 눈동자와 물질성을 강조한 물감/색채 덩어리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인간 두뇌를 닮은 호두-호두인 듯한 뇌, 게임 캐릭터 팩맨(Pac Man) 같은 토끼-토끼 닮은 팩맨, 토끼얼굴의 오리-오리 같은 토끼 등의 이중형상의 출현도 흥미롭다. 이질적인 사물들을 연결하고 배치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극적 활용 역시 정수진 회화의 예술적 현재성을 고양시킨다. 세밀하게 그린 구상적 형상들의 파편과 배열, 2차원적 입체와 납작한 기호의 접합, 모호한 정체의 이중형상 등은 초현실적 환영 세계를 개시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문제, 즉 ‘보는’(시각)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낯선 차원은 보다 선명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는 분명 오랫동안 탐구하며 구축해 온 작가의 시각이론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진정성있는 변증법적 논리싸움이 매력적인 예술작품에의 황홀한 미적경험을 방해 한다고 할지라도, ‘특정한’ 여러 사물과 여러 시간이 겹쳐진 다차원적 회화는 결코 같을 수 없는 시각과 인식의 관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공통된 바탕/장소’로서의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


1 이영철 「복잡성의 공간, 불연속성의 시간: 《’98도시와 영상-의식주》 展의 기획과 연출에 관하여」《도시와 영상-의식주》 카탈로그, 《당신은 나의 태양》 카탈로그 2005 토탈미술관 p.143 재인용 인용문의 볼드 처리는 원문과 상관없이 이 글의 주요 키워드로 강조하고자 처리하였다
2 “자신의 꿈과 함께 끊임없이 연상되는 공상과 자신의 생활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 활동하는 공간들, 즐겨 읽던 만화책들을 주인공 삼아 그녀만의 바다(뇌해)에 자유롭게 펼쳐 놓는다. 그들은 […] 서로에게 영향받지 않는 독립적인 사물[…] 작품에 등장하는 술 마시는 여자(작가)를 째려보는 오징어 한 마리, 끊임없이 연상되는 상념(想念)을 암시하는 양파, 슈퍼마켓 진열대의 소인(小人)들 인간의 뇌를 닮은 호두 알 한 개까지 모두 그녀의 그림 속에서 완전한 자율적 존재[…] 그러기에 그녀의 작업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주(主), 종(從) 관계의 전통적인 구도와 원근법의 공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개성적인 객체의 독립된 자유의지는 자칫 혼란과 불안을 유발하지만, 각 개체의 자율이 보장되고 전체의 구조가 깨어지지 않는 조화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작가는 조정자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구성한다” 강승완 《젊은 모색2000–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 전시 리플렛 글 (국립현대미술관, 2000)
3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p.7
4 위의 책 p.9
5 전근대 중국의 백과사전류라 할 수 있는 『삼재도회(三才圖會)』 (전 108권, 1609)나 『설부(說郛)』(전 100권, 1407경)는 각각 그 책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사전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게도, 그 책 속 각각의 항목은 합당한 근거로 인해 그 자리에 존재했다
6 미셸 푸코 앞의 책 p.9
7 조상일 『대각선논법과 조선역』 파주: 지식산업사 2013 p.24, 정연심「정수진의 그림 겹쳐진 차원, 의식의 파동」 《정수진 개인전-부도위도》S2A갤러리 2025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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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으로 진행하는 특별 기고이다.

2025년 12월호 (VOL.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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