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어부들
한국사회의 역사적 사건과 이면을 과도한 연출 장면으로 재현하는 작가 조습. 그의 열번째 개인전이 10월 8일부터 11월 5일까지 갤러리 조선에서 열렸다. <어부들>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제주도 바닷가에서 작업한 신작을 선보였다. 디자인문화비평가 최범은 조습의 최근작은 ‘밤의 대한민국’을 포착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의 새로운 형식을 확립한 조습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개념과 형식으로 무장한 포스트민중미술 대표주자
최범(이하 최) 조습 씨 작품은 이미 많이 알려져서 그동안 간간이 봐왔어요. 처음 본 건 2000년《 디자인 문화비평》(안그라픽스) 2호에 실린 기사에서였고, 실제로 프린트된 작품을 본 건 2005년 대안공간 풀에서 열린 개인전 <묻지마> 전시로 기억하고 있어요.
조습(이하 조) 1999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첫 번째 개인전은 2001년 인사미술공간에서 <난 명랑을 보았네>라는 타이틀로 열었습니다. 최범 선생님은 2005년 <묻지마> 전시 때 처음 뵌 것 같습니다.
최 그러고 보니 벌써 작가 경력 15년이 넘었네요. 나도 평론을 시작한 지 25년이 넘었고요. 그동안 여러 평론가가 조습 씨에 대한 글을 발표했는데, 지난해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조습 씨의 <일식> 개인전에 서문을 쓰면서 저도 뒤늦게 조습 평론가 대열에 합류했어요.
조 사회/과학 문화/과학적인 측면에서 좀 더 폭넓고 다양한 해석을 받고 싶어서 2013년에 최범 선생님께 <일식> 전시 글을 부탁드렸습니다. 아마도 2005년 <묻지마>하고는 조금 다른 작업이라서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했습니다.
최 초기 조습 씨 작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저는 조습의 팬이 됐어요. 완전히 내 스타일이었죠.(웃음) 그래서 처음부터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조습의 작품을 보면 시각적으로 워낙 세고 너무 직접적이라 해학, 풍자, 패러디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저게 뭐야?’ 하며 장난 같다는 인상을 먼저 받죠. 또 사진작가인지, 퍼포먼스 작가인지 작가로서 조습 씨의 정체를 초기에는 헷갈려 하기도 했죠.
조 한국이란 나라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뭐든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별 관심도 없죠. 미술 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굳이 제 직업을 명명하자면 ‘현대미술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최 <일식> 전시 서문 ‘밤의 시간과 벌거벗은 생명들’을 쓰기 위해 조습 씨에 관한 10여 편의 글을 찾아서 찬찬히 다 읽어봤어요. 심광현, 임근준, 노명우 등 웬만한 평론가는 다 썼더라고요. 내가 보기에 조습의 작업은 순수 형식주의보다는 내용주의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조습에 관한 텍스트를 읽는다기보다는 조습이라는 사람을 읽는 프레임, 다시 말해 조습이라는 작가가 한국 사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그 틀을 분석하려했지요. 특히 <일식> 연작은 조습의 이전 작업과 많이 달랐어요. 가장 먼저 눈에 띈 형식적인 변화는 낮이 아닌 밤에 촬영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분장 작업도 두드러졌고요. <일식> 연작을 보면서 작업이 변하는 변곡점의 시기임을 감지했습니다.
조 2013년 1월부터 6월까지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서 1월부터 6월까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일식> 은 그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간 중에 제작한 연작이죠. 저는 군대를 못 가서 그런지 강원도 최전방 지역에서 생활은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수복지구인 양구, 화천, 인제에서 반공주의 혹은 전쟁의 기억은 제가 흔히 도시에서 느끼던 관념적 반공주의하고는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최 <일식> 연작은 기존 작업과 달라서, 어떻게 읽어야 하나, 처음엔 당황했어요. 하지만 조습 씨와 이야기하고 들여다보면서 서서히 파악됐죠. 조습의 표현 양식이 변하는 계기와 의미는 무엇일까? 고민하면서요. 결론적으로 저는 지금까지 조습 씨의 작업을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합니다. 1999년부터 2012년까지를 1기로,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2기로 말입니다. 1기와 2기의 시각적 차이는, 1기는 배경이 주로 낮의 공간인데 반해 <일식> 연작부터 시작되는 2기는 아직 진행형이지만 배경이 밤이에요. 이런 밤의 풍경이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하는 걸 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걸로 보여요. 1기 낮 시기 작업은 낮의 대한민국을 그린 것이죠. 낮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웃기고 자빠진’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조형언어의 형식은 패러디, 조롱, 해학, 풍자, 전복…, 이고요. 이처럼 낮의 대한민국의 모순을 비판하고 공격하던 태도로 대상에 천착하던 조습은 새로운 생각과 깊이를 얻게 됩니다. 2012년부터 밤의 시대로 들어가 밤의 대한민국을 포착하게 됩니다. 낮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 거죠. 낮의 대한민국의 모순을 비판하고 공격하던 중 그 이면을 포착하게 됩니다. 낮의 사건을 일으킨 진짜 진앙지를 만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사건의 배후는 결국 밤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 같아요.
조 강원도 양구에서의 생활을 돌이켜 기억하면 딱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 그건 밤과 추위입니다. 고도가 높은 지역이고 거주한 시기가 겨울이라서 해가 떠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요. 그리고 해가 떨어지면 제가 처음 경험하는 아주 새까만 밤이 찾아오죠. 그래서 어딜 가든 손전등이 필요한데 그 손전등 불빛 아래 나무, 눈, 돌 뭐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하나가 추위인데 건물 밖에 있는 물건 중에 얼어붙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최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배우 섭외나 장소 물색 등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조 등장 인물은 전문 배우가 아니고 주로 제가 평소에 알고 지내는 작가 혹은 동료 선후배들입니다. <일식> 연작은 촬영장소가 주로 강원도라서 4일이나 5일씩 촬영을 하고 돌아왔는데 이번 <어부들> 연작은 촬영지가 제주도라서 2달 정도 제주도에서 합숙 촬영을 했습니다. 다행히 제주시에서 작업실을 빌려줘서 체류 비용을 줄일 수 있었고, 예술인복지재단에서 기금을 지원받아서 마지막 후반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뭐 남자들끼리 지내는 군대 내무반 생활과 비슷합니다.(웃음) 촬영이 전부 바닷가에서 이루어지다보니 간조·만조 물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어요. 여름이라 낮이 길어진 탓에 촬영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었고요. 확실히 자연의 위대함을 배우고 왔습니다.(웃음)
최 물리적 비용이나 육체적으로도 힘들겠지만 사람 다루는 일도 만만치 않을텐데?
조 지금까지 촬영하다가 못 버티고 중간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짧은 시간에 촬영을 해야 해서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문 배우들보다 훨씬 헌신적이고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야 가능한 일이죠. 간혹 제가 잠든 와중에도 이번 작품 촬영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보면 참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좀 더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촬영하다보면 제 자신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최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조 사진가도 있고 화가, 조각가도 있고 정당에서 일하는 정치인도 있어요. 그분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자신이 화면에 과장되게 나오는 모습 그 자체에 만족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평상시와는 다른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보고 즐기는 거죠. 일탈의 경험인데,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 시대에 반미치광이가 되어 보는거죠. 대놓고 미친 척하고 살 수는 없지만 사진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니까요.(웃음) 그래서 촬영을 하다보면 어떤 축제 같기도 해요. 요즘 자주 회자되는 일종의 사진 ‘굿’판을 벌리는 자(者)들인거죠. 그들에게는 일종의 운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웃음)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
최 이번 전시 제목인 <어부들(Fishermen)>에 등장하는 인물-군상(群像) 역시 2기의 첫 작업인 <일식> 연작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밤의 공간이 배경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버림받은 자, 누구나 죽여도 되는, 인간이 아닌 존재, 버러지 같은 생명들로 보입니다.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주목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즉 ‘벌거벗은 생명’처럼 보입니다.
조 저는 요즘, 세월호 참사 이후 창작에 대한 공허함을 느끼는데 아무리 힘들었어도 세월호 사건 이전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죠.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참사 이후 창작에 대한 욕망이 사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정신적 공황상태 같은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배신감이 이번 <어부들> 연작에 중요한 중심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올 봄, 제주 4·3항쟁 기념 전시 때문에 제주도를 여러 번 오가면서 바다와 관련된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 작업도 사실 물속에 수장된 사람보다는 그 사람들을 건져내는 육지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죠.
최 저 역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어요. <어부들> 전시에 나오는 사람들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입니다. 원초적 욕망, 살아야겠다는 욕망만 있는 광인의 이미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좀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정상적이지 않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상징이라고나 할까요. 조습 씨는 <어부들> 연작을 통해 바로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습 씨가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한국 현대사의 밑바닥 모습은 <일식> 연작에서처럼 휴전선 일대를 헤매는 일종의 공비들이거나, 인간이라고 보기 곤란한 ‘어부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미친 것 같은 어부들의 모습에서 ‘원초적 생명력’ 같은 진부한 해석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대사처럼 “우리, 인간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요. 또 다른 질문을 해보죠. 현대미술 어법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관람객은 조습 씨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어떤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작품이 드러나는 방식, 즉 형식 때문에 내용적인 측면에서 놓치는 게 많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하게 됩니다.
조 요즘 미술 하는 사람들도 미술을 잘 모르는데요.(웃음) 제 작업은 저를 이해해주는 ‘고정 팬’과 가는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최 기존 ‘고객’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인가요?(웃음) 고정 팬을 위해서 가겠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미술제도의 혜택을 보는 ‘제도권 작가’로 미술 시스템에 안착하겠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예컨대 미술 시스템에 문외한인 일반인에게 이우환의 어려움과 조습의 어려움, 그 자체는 같습니다. 하지만 두 작가의 어려움은 완전히 다른 겁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에게는 조습이 이우환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죠. 그건 작가마다 특화된 조형언어 측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대상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조습 씨의 이번 작품이 너무 예쁘고 완성도가 굉장히 높아서 어떻게 이해할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조 글쎄요. 그리 잘 만든 사진 같지는 않은데요.(웃음) 요즘 최근 사람들에게 제 작업이 ‘물화(物化)’됐다는 얘기를 듣기는 해요. 제 생각에도 예전에는 행위와 과정 자체를 즐기는데서 끝이었다면, 지금은 그 결과에서 완성된 시각적 효과를 찾으려고 노력하합니다. 오래 하다보니 장비를 다루는 기술이나 연출 등에서 양식적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결국은 카메라나 후보정, 프린트 기술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웃음)
최 누군가는 이런 테크닉이나 스킬이 좋아진 것이 작품의 의미와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너 작품 팔아먹으려고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지?”라고 물어 볼 수도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지 않아요.
조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얘기하시는 분은 없어요. 예전에 제 작품이 팔릴 확률이 3% 미만이었다면 지금은 9% 정도까지 높아진 것 같아요. 이런 확률 수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소위 미술판에서 ‘잘나가는 작가’가 되는 건데, 저는 앞으로도 기껏해야 지금 이 정도를 유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에서 미술작품을 파는 것은 100% 작가의 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걸작 중에 걸작은 이한열 걸개그림을 패러디한 <습이를 살려내라>(2002년)일 텐데, 이런 작업을 하던 친구가 ‘미술관 작가’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습이 미술관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라지 않거든요.
조 2012년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열린 <달타령>과 2013년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일식>을 비교하면서 몇몇 분이 그런 점을 아쉬워하라고요. 더 다듬지 말고 날것 같은 모습, 시대의 야만성, 우리들의 탐욕 등을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하기를 원하시는데. 그분들 눈에는 계속 다듬어지고 제도화된다는 느낌이 나나 봐요.
최 사실 이런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이런 것이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모순이고, 작가들은 이 모순과 함께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만약에 <어부들> 작업이 리움에 소장된다면 그것을 일종의 ‘타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의 부르주아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만약에 이런 작업을 리움이 수용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속물적 수용이지 조습 작품의 메시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메시지 수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의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모순을 일정정도 수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영향 받은 외국 작가는 있나요?
조 미술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사회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외국 작가보다는 생각을 같이하는 한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예를 들어 가까이는 ‘현실과 발언’ 선생님들부터 조금 더 가까이는 2000년대 중반까지 대안공간 풀이나《 포럼 A》가 그분들이죠.
최 생각보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납니다. 나는 1980년대를 관통한 70년대 학번이고, 조습 씨는 90년대 학번입니다. 20대 초반에 선배 세대들이 겪은 1980년대에 대한 동경, 혹은 자신이 겪지 못한 시대경험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있지 않나요.
조 원래부터 제가 발 디디고 사는 시대의 모습에 호기심이 많았어요. 1980년대를 안 살아본 자의 한(恨)이랄까?(웃음) 지금은 1970년대를 경험하고 있지만요.(웃음) 그렇게 지금 사회 변화의 원류를 찾고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에 관심이 많아진거죠.
최 조습은 역사의식 빼면 시체! 역사의식을 작업의 기반으로 삼아, 콘텐츠는 하드코어 같지만 시각적 형식은 매우 자유로워요. 바로 이 지점이 기존의 리얼리즘 미술과 구별되는 차이점이고 여기에 쾌락과 재미가 덧붙은 작업이지요. 내가 앞서 첫눈에 조습 씨의 작업을 이해한다고 한 것도 그 지점입니다. 민중미술과 포스트민중미술의 차이라고나 할까. 저는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디자인 쪽에선 1980~90년대 미학운동이 없기 때문에 민중미술 판에 참여했지요. 하지만 민중미술에 정치적 측면에서만 동의한 것이지 미학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개념적 의미에서만 동의한 것이죠. 이런 면에서 조습 씨의 작품은 나에게 시각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쾌락을 줍니다. 이런 개념과 형식의 조합을 ‘포스트민중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조습 씨 팬이 됐다고 한 겁니다. 조습 씨의 작품은 기존의 현실 비판적 리얼리즘 계열에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으니까요.
진행 정리・이준희 편집장
조습(본명 조병철)은 1976년 온양에서 태어났다.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 10회와 〈제2회 타이틀 매치전 이강소 vs 조습〉(쌈지스페이스, 2003), 〈코리안 랩소디〉(삼성미술관 리움, 2014)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13회 오늘의 젊은예술가상〉(문화관광체육부, 2005)을 수상했고, 쌈지스페이스, 비즈아트(상하이), 도쿄윈터싸이트(도쿄), 창동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인천아트플랫폼,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최범은 1957년 태어나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디자인》 편집장,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기획실장, 출판사 시지락 대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계약 교수, 〈200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 희망제작소 간판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