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전시] 애니미즘들을 다시 움직이기

50여 점의 필름, 비디오 및 각종 사진과 회화자료들을 포괄하는 방대한 그룹전 <애니미즘전>의 테마는 제목이 시사하듯 ‘움직임’이다. 처음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은 민속학과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이 뜻하는 움직임, 즉 자연과 문명의 사물들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애니미즘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기법에 착안해보면 운동의 외연은 확장된다. 사물과 인간의 운동은 그 자체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운동은 재현되고 나아가 생산된다. 시각매체의 역사는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운동을 가시화하고, 정지된 것에 운동을 불어넣은 과정들의 역사다. 이렇게 보면 ‘애니메이션’은 셀(cel)이나 인형 등의 재료에 근거한 특정한 무빙 이미지 예술의 장르적 경계를 넘어선다. 대신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매혹되어 그 찰나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회화와 사진의 기법들, 기계적 자동장치를 이용해 정지 이미지를 운동의 환영으로 변환시키는 영화의 본성, 그리고 전자적 신호와 컴퓨터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자동장치들이 생산하는 포스트-영화시대의 다양한 운동들을 포괄한다. <애니미즘전>은 이러한 미디어들을 아우르는 운동의 역사에 대한 조망이다. 나아가 이 전시는 이러한 운동들이 서구적 근대성의 다양한 국면과 맺어 온 관계의 계보들을 비선형적으로 배치한다. 그 관계들이란 근대성이 형성하고 지탱해 온 다양한 구분을 말한다. 식민주의와 과학적 이성의 양날개를 달고 비행한 서구적 근대성은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야만, 이성과 맹신 사이에 명징한 경계선을 그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디어 이미지들이 구현해 온 애니미즘은 19세기 이후 사회와 주체성의 생산을 지탱해 온 이러한 경계선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문제 삼는다. <애니미즘전>은 애니미즘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전시다. 기획자인 안젤름 프랑케가 말하듯 이는 “애니미즘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이자 이를 파괴하기 위한 전시다.” 비록 프랑케가 “이 전시는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 형태들로 표현된 애니미즘에 대한 것이며 민속학이나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전시 관람자들을 일차적으로 유인하는 작품들은 마술적 믿음, 토착적 신앙,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문화, 영혼이 스며든 사물, 생명으로 충만한 자연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은 근대적 세계관이 전근대적인 것의 이름으로 배제하거나 대상화한 타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애니미즘은 근대성의 이원론적 위계들이 설정한 타자들의 귀환이다. 시 각미디어는 이러한 귀환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각미디어가 세계와 주체 사이에 자리 잡으며 운동을 생산할 때, 그 운동은 주체와 객체, 영혼과 사물, 자연과 문명의 은밀한 소통 그 자체를 체현하는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Medium이라는 단어는 ‘매체’와 ‘영매’를 모두 뜻한다). 이에 화답하듯 <애니미즘전>의 몇몇 작품은 애니미즘적 주체와 인식, 현상들을 전근대적 타자들로 규정하는 근대적 지식과 지각의 체계를 노출하거나, 그러한 체계를 넘어서 애니미즘의 역동성을 담아내고 탐구하기 위한 시각미디어의 대안적 사용법들(즉 시각미디어를 일종의 영매처럼 활용하는 방법들)을 보여준다.
수잔 슈플리의 <태양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Can the Sun Lie?,2013)>는 태양의 위치 변화와 기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에스키 모들의 세계관이 지구온난화에 대한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체계에서 기각되는 과정을 민속지적 영상과 디지털 데이터 영상, 사진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다층적으로 분석한 에세이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양식들은 타자성의 불가해한 매혹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돼왔다. 범신론적 믿음이 지배하는 나바호족의 세계를 포착한 <용감무쌍한 그림자들 (Intrepid Shadows, 알 클라(Al Clah), 1966/69)>에서 자유분방하게 가속화된 탈중심적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무생물(정체불명의 금속 고리)을 활성화시키는 과정 자체를 체현함으로써 민속학적 다큐멘터리의 관찰자적 거리두기를 극복한다. 자크라왈 닐탐롱(Jakrawal Nilthamrong)의 <비현실의 숲(Unreal Forest, 2010)> 은 잠비아 현지 제작진과 함께 한 제작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반영적 양식을 통해 영적 세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연장시킨다. 다큐멘터리 양식들의 반대편에는 애니미즘의 역량을 빌려 이미지와 시각적 지각의 경계를 확장한 실험영화들이 있다. 일본 아방가르드 영화의 중요 인물인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는 16mm영화 <쿠사마의 자 기-삭제(Kusama’s Self-Obliteration, 1967)>에서 불연속적 편집과 자유분방한 카메라워크를 통해 일본 전통신앙의 정령적 존재와 서구 사이키델릭 문화 사이의 현란한 소통을 추구한다. 서구적 정신주의와 토착적 애니미즘 사이의 결연은 초기 수작업 추상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렌 라이(Len Lye)에게서도 드러난다. 그의 첫 작품 <투살리바(Tusaliva, 1929)>는 추상회화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사모아족의 원시적 형상들로 역동적으로 변형시키는 자동기법(automatism) 의 모범 사례다.

습득영상,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

애니미즘을 다루는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은 시각미디어 자체를 구성하는 유령성(spectrality)의 존재를 암시한다. 사진과 영화가 특히 유령적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듯 사진이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내밀한 지점은 과거에 존재했으나 현재는 부재한 대상과 사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리고 현전과 부재가 공존하는) 과거의 흔적이 가진 유령성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차원을 얻는다. 영화 이미지의 자동운동은 셀룰로이드를 이루는 무수한 프레임 사이의 빈 공간, 그리고 프레임이 본원적으로 가진 사진적 이미지의 정지 상태에서 비롯된 환영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과 영화는 자크 데리다가 《에코그라피》에서 말한 유령의 논리, “볼 수 있 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초과하는” 유령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습득영상(found footage) 제작은 바로 이러한 사진과 영화의 유령성을 탐구한다. 기존에 만들어진 이미지의 전유와 변형, 재배열로 이루어진 작품을 뜻하는 습득영상은 2차대전 후 실험영화를 통해 풍부히 발전했으며 1990년대 이후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cinematic video installation)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앗다. 습득영상 제작에서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은 일종의 비정상적 운동들, 정지와 감속의 운동들이다. 이 운동들은 지속적으로 교체되는 영화 이미지의 흐름들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이미지의 형식적, 수사적 전략들을 드러내고 이미 지에 기입된 과거의 흔적들을 관람자의 현재에 강렬하게 남기기 때 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습득영상 실험영화를 지속적으로 탐구 해 온 켄 제이콥스(Ken Jacobs)의 <자본주의: 노예(Capitalism:Slavery, 2007)>는 19세기 미국 목화농장 노동자들의 입체사진 이미지를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한다. 미세하게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번갈아 보여주는 디지털 자동기법은 원래의 입체사진이 잠재적인 수준으로 나타냈던 3차원적 몰입의 황홀경을 현실화한다. 이 황홀경의 환영적인 면모는 이미지들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플리커 효과(flicker effect)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적인 충동은 식민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그들의 육체에 부과한 피로의 제스처들을 강렬하게 확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노예>에서 정지를 수반한 역설적인 애니미즘은 이탈리아 습득영상 제작의 거장들인 여반트 기니키안과 안젤라 리치 루치(Yervant Gianikian & Angela Ricci Lucchi) 가 사용하는 감속의 기법과 호응한다. <다이아나의 거울(Diana’s Looking Glass, 1996)>은 로마 남부의 신비스러운 한 호수가 무솔리니의 제국주의적 파시즘에 의해 개발되는 과정에 대한 기록영상들을 소재로 삼는다. 호수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된 로마 시기의 거대한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 동원된 노동자들의 지친 눈빛과 몸짓들은 슬로 모션으로 관람자에게 다가온다. 이 두 편의 습득영상 작품은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의 인식과 만나는 깨달음의 불꽃을 지피고 사진적 이미지의 본원적인 유령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의 이미지들에 새로운 운동을 부여한다. 여기서 애니미즘은 다시 움직인다(re-animated).
시각미디어가 근대 이후부터 구현한 다양한 형태의 애니미즘들 은 주체의 경험과 정서, 사유를 재현하고 조직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기술이 근대성의 지식체계 및 제도들이 이루는 네트워크 내에서 작동해왔음을 말해준다. 전시의 참고자료로 제시된 샤르코의 히스테리 환자들에 대한 사진, 메스머의 전기최면 시술에 대한 드로잉, 그리고 에티인 쥘르-마레가 움직이는 물체와 활동하는 육체의 운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개발한 연속사진(chronophotography)은 시각미디어들이 인간의 지각과 생리적, 심리적 과정들을 형성한 사회적 장치(apparatus)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 이 모든 사례에서 운동은 주체의 내적 자아 안에 있는 불가해한 신경생리적 차원과 무의식의 지대들을 가시화하고(샤르코, 메스머), 주체의 외적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석하는 데 복무했기 때문이다 (마레). 사진과 영화에 드러나는 다양한 애니미즘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의 작동양식은 전자적 신호, 컴퓨터 재현체계 및 인터페이스가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r)을 활성화함으로써 사용자의 지각과 정서를 규정하는 오늘날의 미디어 경관에도 적용된다(그래서 이 전시에 비물질노동 개념을 제안한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가 참여한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전시장의 3층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개의 작품은 미디어 애니미즘이 주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논증들을 펼치는 비디오 에세이의 형태를 취한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평행(Parallel, 2012)>은 오늘날 현실을 사진적 이미지와 가깝게 시뮬레이션하는 컴퓨터 게임의 풍경 이미지들(바람, 바다, 나무)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카메라의 기록에 근거한 영화적 풍경의 이미지들과 대비시킨다. 이러한 대비 전략을 통해 파로키는 컴퓨터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컴퓨터 이미지가 현실로부터 추상화된 수학적 기호들의 알고리즘적 연산에 근거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컴퓨터 이미지는 아무리 모방적이라도 물리적 현실로부터 일정 부분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재현과 시각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인 계보학적 탐색은 톰 홀러트(Tom Holert)의 <광택의 노동(The Labours of Shine, 2012)>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대중영화의 매혹적인 스타 이미지와 광택을 내는 구두닦이의 노동 과정에 대한 습득영상, 그리고 브랑쿠시의 광나는 청동 조각상을 병치시킨 이 작품은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예술과 노동, 대중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광택이 가진 의미에서 찾아낸다. 광택은 빛의 물리학을 넘어 일상적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변환시키고, 재화에 교환가치를 부여하며, 이미지에 물신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미학적, 정치적 현상인 것이다. 이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채택하는 2채널 비디오는 시간적인 순차성에 근거한 영화적 몽타주를 공간적인 동시성으로 치환한다. 이러한 공간적 몽타주는 멀리 떨어진 이미지들을 새로운 맥락과 의미망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다시 움직이기(re-animation)의 또 다른 양식이다. ●

애덤 아비카이넨 (오른쪽) 2013과 임흥순 〈비념〉(왼쪽) 2012

애덤 아비카이넨 <천연자원 관리국의 범죄현장 조사서>(오른쪽) 2013과 임흥순 〈비념〉(왼쪽) 2012

 

[section_title]베를린 세계 문화의 집 시각예술분과 수석 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section_title]

애니미즘 파괴의 연속을 보여주는 전시다

e01_4당신이 기획한 전시는 최근 비엔날레, 대규모 미술 행사를 중심으로 스펙터클한 작품 선정과 디스플레이를 추구하는 전시공학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상당히 많은 양의 아카이브와 텍스트로 구성되어 관람객이 그것을 자세히 살펴봐야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의도한 전시 디스플레이의 방향에 대해 설명해달라.
이번 전시는 예술을 통해 개념, 상상력 및 미디어 테크놀로지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모더니티의 논리와 증상에 대한 연구에 관해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연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이 전시는 매우 넓은 의미에서 미디어의 역사에 관한 전시이다. 또한 전시라는 매체, 형태 그리고 전시의 역사가 삶 또는 살아있음과 관련된다는 것에 대한 연구이자 반영을 의미한다. 난 항상 ‘애니미즘’이라는 용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든 회화나 도자기처럼 전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제의적인 춤과 박물관 전시 사이의 간극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펙터클한 전시와 자본주의 문화는 이 간극을 위장한다. 그러한 전시는 모든 애니메이션(animation,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이 전시될 수 있고 소비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애니미즘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신중하게 획득되고 유지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도 매우 큰 개념이다.
이 전시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와 다르게 애니미즘이 아니라 뮤지엄과 죽은 물질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박물관과 모더니티의 관계는 애니미즘 파괴의 역사이다. 뮤지엄에 대한 소외 효과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뮤지엄은 무엇을 보고 물건을 신중하게 연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지미 더럼(Jimmie Durham)의 작품인 유리 진열장 속의 돌들은 관객들이 보기에 유머러스할 것이다. 우리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나비를 고정시켜 놓듯이 애니미즘을 고정시킬 수 없다. 애니미즘은 항상 영적인 것의 과정과 관련 있으며, 믿음 또는 절대적인 지식 또는 진리와 같은 독단적인 유형과는 관련이 없다. 애니미즘은 마음의 상태에 관한 것, 살아있게 혹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전시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구조적인 상상력을 주장함으로써 변증법의 형태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번 전시에서 박물관 진열용 유리 케이스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영화와 영화의 역사를 소개한 것이다.
<애니미즘전>은 순회하면서 작업이 추가되거나 빠지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는 한국 작가들의 작업이 몇 점 추가됐다. 이들 작업에서 보이는 애니미즘적 요소에 관해 어떻게 느꼈는지, 그리고 나라별로 당신이 전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 중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애니미즘은 모더니티의 역사와 같은 ‘보편적인 역사’의 부정적인 면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국가마다 다른 문맥이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글로벌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유럽에서는 무엇보다 애니미즘을 과학과 이성에 반대되는 허구, 미신 등의 개념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식민주의적 사고의 단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애니미즘을 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어떤 지역에서는 역사적 과정이 이 전시의 맥락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의 선전(深圳)같은 도시에서는 제국주의, 국수주의적 전통, 급속한 근대화와 같은 20세기 충격으로 기억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혼동 과정 없이 ‘모더니티’와 ‘애니미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토속신앙’ 문화는 수백 년에 걸쳐 제국과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잠재적인 저항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전시는 애니미즘의 ‘귀환’ 그 자체에 관심을 둔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전시는 애니미즘의 파괴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비판적이지만 애니미즘의 ‘귀환’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 이 귀환은 본질과 전통의 귀환으로 오인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데 근대 국가의 논리 자체가 이러한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안티-애니미즘도 결국은 애니미즘의 한 형태로 애니미즘 외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애니미즘의 다양한 형태와 이와 관련된 힘, 집합체, 그리고 이야기들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음을 제안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상상력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인 전시를 뮤지엄 속에 서 구현하는 일을 예술가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웃음에 관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이슬비 기자

지미 더햄 〈롯의 아내도 이해했으니, 과거를 회상하기만 하면 화석화와 퇴적작용이 일어날거야〉 돌 종이 칼 스푼 접시 1998

지미 더햄 〈롯의 아내도 이해했으니, 과거를 회상하기만 하면 화석화와 퇴적작용이 일어날거야〉 돌 종이 칼 스푼 접시 1998

[Review] 미래가 끝났을 때

김실비  단채널 HD영상 9분16초/컬러영상과 사운드 13분55초 2013

김실비 <M을 위한 노래> 단채널 HD영상 9분16초/컬러영상과 사운드 13분55초 2013

미래가 끝났을 때
하이트컬렉션 2.7~5.10

영문학자 시엔 느가이(Sienne Ngai)는 현대문학과 다른 예술분야에서 관객들이 하찮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지니는 계기를 이론화했다. 느가이에 따르면 귀엽고 수동적이며 하찮은 것들은 일차적으로는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극도의 쓸모없음과 마주치게 될 때 관객들은 보다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된다. 즉 수동적이고 단순하며 귀여운 것들이 반대로 비평적, 저항적, 공격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 신진작가전, <미래가 끝났을 때>는 이른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에 속하는 젊은 작가들의 자기 풍자와 자기 연민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느가이가 주장하는 수동적이고 일상적이며 하찮은 것들이 현대미술에서 보여주는 가능성과 문제점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기성 작가들이자 선생님들이 직접 젊은 작가들을 뽑고 추천해서 전시를 꾸린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전시회를 연상시킨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의 사회적 관심사나 미술계 상황과 대비되는 젊은 세대의 고민이 더욱 부각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작업이 흔히 말하는 88만원 세대, 혹은 삼포세대라고 불리는, 고도의 산업화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약자로서 젊은이들의 상황을 주제로 하고 있다. 강정석의 <야간행>에서 작가는 시네마 베리테 스타일로 친구들과의 추억여행을 다룬다. 언뜻 로맨틱하게 들리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학업, 아르바이트, 군대, 연애의 경험 중에서 딱히 성공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에 달린 카메라가 어둠 속의 눈길을 매우 산만하게 편파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들이 헤쳐 나가는 인생의 길 또한 예측불허다. 아울러 얼마 전 편의점에 취직한 작가의 친구를 모델로 한 작업에서 친구의 얼굴이 변하는 모습이 타자의 시선과 사회의 규율을 내재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는 가설은 웃프기 그지없다. 코믹하기도 하지만 친구의 보수화 과정을 물리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무엇인가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도가 궁극적으로 부질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작업들은 대부분 정리된 방식이 아니라 여기 저기 섬처럼 흩어져 있다. 바닥의 먼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인을 남긴 작업, 다이소에서 파는 스티커를 관객들이 직접 전시장 곳곳에 붙이도록 유도한 작업, 전시가 끝난 후에 통상적으로 남게 되는 벽면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한 작업들은 과연 하찮은 상태와 하찮은 것들이 어떻게 관객을 자극하고 젊은 작가들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전시장 입구 바닥에 먼지로 만들어진 로와정의 사인과 외국 생활 중에 모아놓은 두루마리 심지로 만들어진 설치작업은 먼지처럼 가볍고 가변적인 작가의 존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사용한 화장실 두루마리의 심지를 모아서 만든 작업은 가변적인 작가 자신의 존재감을 매일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고 사수하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또한 서보경은 <여름휴가>에서 사강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프랑스의 여름휴가 장면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자연 광경 속에 놓여 있는 작가는 어색하게 쏟아지는 물과 바람에 맞선다. 갑자기 닥치는 폭우와 광풍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고 견뎌내는 작가의 모습에서 로와정의 경우에서와 같이 자기 풍자와 자기 연민을 함께 엿볼 수 있다. 정승일의 덜 스펙터클해 보이는 유리로 만들어진 입방체, 삼각형의 뿔, 최윤의 다이소 스티커를 이용한 작업과 아마추어식 풍경화 <국민 매니페스토>, 이양정아의 월세 300에 보증금 20으로 구할 수 있는 집 리서치 프로젝트 등은 자신들이 처한 물리적, 미학적, 경제적 환경들을 솔직하게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양정아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의 집을 서울에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아예 300만 원으로 살수 있는 바닥의 면적을 사진작업으로 전시한다. 즉 자기 풍자적인 미학 이 저항이나 자기보존 본능과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이 지닌 비평적인 쟁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될지를 걱정해 보아야 한다. 결국 자기 풍자를 통해서 비평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는 극도의 지적인 사고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비평의 대상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각종 비평적 오류로부터 벗어나려는) 동시에 그 때문에 더 자기 과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신들을 풍자함으로써 자기보존 본능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세련된 저항 방법일 수도 있지만 가장 비효율적인 현실변화의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드러낸 솔직한 현실의 문제들은 너무 그럴싸한 화랑에서 열린 전시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절절하게 다가왔다. 삼포세대 중에서도 삼포세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후세대 작가들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과연 무엇이며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고동연・미술사

[Review] 서혜영-사물의 공간

 미송 무늬목 MDF 자석 2014

미송 무늬목 MDF 자석 2014

서혜영-사물의 공간
갤러리 조선 2.12~3.5

뒤샹 이후의 현대예술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미술제도의 문맥 속으로 옮겨 놓고 예술의 지위를 부여했다. 평범한 사물(事物)이 예술제도를 거쳐 평범하지 않은 작품의 지위로 격상된다. 한편에서는, 미술관 내에서 박제되는 미술에 대한 반발로 예술을 미술관, 갤러리가 아닌 일상의 공간 속에서 제작, 전시, 감상하려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다. 대자연 속에서, 거리에서, 지하철, 공원, 식당 등 여러 ‘일상의 공간’ 속에 예술작품을 적극적으로 침투시키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일상 사물을 예술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예술을 평범한 공간 속으로 데려오려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과 일상의 공간이 서로 먼 곳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갤러리와 미술관에서의 설치 및 드로잉 작업과 함께 대형 건물의 로비나 사무실, 상업 공간 등에 작품을 설치해온 서혜영의 활동은 일상과 미술제도 사이를 오가는 현대미술의 상황을 잘 드러내준다.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이번 개인전 <사물(私物)의 공간(空間)>에서 작가는 ‘예술 작업의 결과물인 작품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는 상상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측에는 천장까지 이어진 높은 기둥이 서 있고, 꺾어진 벽면에는 나무와 철제 조립물들이 섞여 있다. 좌측에는 두 개의 작은 조명이 내려와 있고 그 아래 중간에 나무 조형물들이 놓여 있다. 삼각형을 조립해서 만든 오브제는 작가가 이전에 즐겨 사용하던 모티프인 ‘벽돌’ 모양으로 구멍이 나있다. 그 구멍을 통해 빛이 새어나와 전구를 넣으면 조명 기능을 할 수 있는 형태이지만, 조명이 들어가지 않은 경우에는 감상용 오브제로 존재한다. 나무상자들은 여성사미술관에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의 의자와 등받이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기대대로 누군가의 사적 공간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몇 개는 의자가 되고, 몇 개는 조명이 되고, 또 몇 개는 특별한 기능 없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블록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몇 개의 블록만으로 세계와 온갖 사물들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아끼고 행복해하듯이, 서혜영의 오브제들은 어른을 위한 블록이 될 수 있다. 조명의 유무에 따라 기능을 넣을 수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번 개인전에서 서혜영의 ‘사물’ 혹은 ‘작품’은 화이트 큐브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듯 잘 배치된 오브제들은 손댈 수 없을 듯 보였다. 즉 사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가진 오브제를 보여주는 완벽한 전시 공간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블록을 만난 아이들과 같은 기분을 느끼기는 다소 어려웠다 하겠다.
하지만 작가의 취지와 기대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거의 똑같이 찍어낸 듯한 디자인의 가구와 조명기구, 미학적 고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먹고, 일하고, 잠을 잔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사무가구들을 사용하고, 아파트 평수에 맞게 제시되는 좁은 선택지 속에서 물품들을 선택’당’한다. 주어진 규칙과 ‘정상’의 범위 속에서 살아가도록 권고받듯이 말이다. 서혜영은 자신의 미적, 기능적 선택에 따라 환경을 구축해보자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을 둘러싼 사물들은 그저 그런 사물이 아니라, 더 특별한 사물이 되고, 나아가 우리의 삶도 더 특별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줄 거라고 말한다.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Review]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한 Q-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
아트스페이스 휴휴2.7~3.7

지난 1월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cricurartist)의 작품과 이광기 작가의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 려봐라>의 합작에 대한 사전 협의 문제가 불거진 것. 이광기 작가는 오래 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통신3사 새끼들아 요금 좀 내려봐라’라는 문구가 적힌 테이프를 윤진섭 크리큐라티스트에게 보냈는데 그는 이를 하나의 개념적 오브제로 간주하여 자신의 작품에 차용했다. 그런데 개념적 오브제로 사용하더라도 이광기 작가와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작가들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다행히 전시 오픈식에 이광기 작가가 참석하고 전시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해는 풀렸고 테이프 작업을 현장에 설치하면서 전시는 더욱 풍성해졌다. 사실 이번 일은 자그마한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이를 통해 개념적 오브제의 존재를 새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이번 전시가 교환가치를 거부하는 개념적 오브제들의 향연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작가 본인이 그동안 집에 모아 두었던 물건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이 오브제들은 애초에 교환가치가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윤진섭 개인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하는 순간 자본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빛을 발하게 된다. 이는 예술 행위에 의해 작품에 의미가 부여되는 현대미술의 메커니즘과도 맥이 닿아 있지만 우리 삶에서도 그러한 지평은 열리곤 한다. 특히 개인의 추억을 되새기는 사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존적 가치를 지닌다.
사실 삶의 주름을 촘촘히 들여다보면 자본의 가치를 뛰어넘는 보존적 가치가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이라는 이름 뒤에 도사린 자본의 막강한 힘에 모종의 복종을 맹세함으로써 이러한 보존적 가치들을 망각하거나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특히 예술작품의 경우 예술시장에서 가격이 책정되고 일정한 금액으로 거래되는 순간 그 예술작품의 가치는 오로지 교환가치에 근거해서 판단된다. 기존의 보존가치가 강조되는 개념적 작품이라 할지라도 돈으로 환원되는 순간 가치의 기준이 순식간에 전치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 자본에 잠식되지 않거나 저항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교환가치를 훼손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전시가 흥미로운 건 자본에 대한 예술적 저항을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가 온몸을 바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 진행되면서 전시장의 오브제가 지속적으로 변하도록 설정한 행위 역시 자본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예술 수행의 전략이다. 또한 한 큐(韓 Q), 왕치(王治,Wangzie), 윤진섭을 비롯해 20여 개의 예명을 사용하는 것도 예술가의 명성이 작품의 교환가치를 높이는 예술계의 섭리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자본에 저항하는 예술 행위를 수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온전한 삶의 가치를 보존하고픈 희망 때문이 아닐까. 50년 이상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는 이종누이의 삶(사진)과 자신의 피(혈당 체크 후 남은 피 묻은 솜들)를 병치한 작품은 이종누이의 혹독한 삶을 자신의 아픔으로 애도하기 위한 것이지 관례적인 예술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는 무관하다. 이번 전시는 자본으로 환원되길 거부하고 삶의 역사를 빌려 예술의 가치를 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의미성을 가진다. 그러나 관례를 떨쳐버리는 전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일쑤다. 과연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고를 수 있을까.

김재환・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Review]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허구영-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

쿤스트독갤러리 2.7~2.20

‘사별삼일(士別三日)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필자가 2012년 서울 사이아트갤러리에서 열린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란 동일한 제목의 전시를 봤기 때문일까? 이번 전시를 보기 전부터 작가 허구영의 전시는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게 했다. 더욱이 1990년 초반에 그가 보여준 일련의 그룹전 기획과 그를 통한 여러 가지 담론들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신선함과 미술을 대하는 반문(反問)들을 가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바, 그의 태도를 존경해왔으며 언제나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분명 필자는 더 좋은 전시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작가 작업의 문맥(context)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왜 아직도 그러한 담론에 매달려야 하는지? 한 부분에 대한 미련이 그의 전체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많은 상념이 그의 작업을 정체(停滯)하게 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말한 ‘갸우뚱한 균형’은 주체 안에 내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닌가? 쿨하게 ‘작업은 개인적인 차원이다’라고만 말하고 전시를 통해 수정된 항해의 과정들이 전혀 없다면, 관계하지 않는 타자를 상정해 놓았다면 왜 전시를 하여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사견을 피력하려는 것인지? 이러한 의문점에서 그를 움직이지 않는 그로 볼 수밖에 없다.
왜 필자는 이렇게 비관적이어야 했을까? 그것은 전시장에서 2014년의 허구영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캡션이 없는 작품들이 때 묻고 허름한 전시장 벽체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서로 어울리기보다는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불친절이 의도된 것이라면 그 배후를 알아차릴 때 쾌감이 있을 진대, 이번 전시에서는 놓인 것이 없는 잔칫상을 보고 주인의 배려를 책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그가 파놓은 함정에 누구도 빠지지않고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푸념만 늘어놓는 뻘줌한 광경만 노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나는 것은 그가 작업실에서 만들어낸 그의 의도(언어로서)들을 네오룩과 갤러리 홈피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니다. 그런 것 없이 전시현장에서 그의 생각들이 요해(了解)되지 못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의 생각이 뒤틀어지고 비껴가는, 그렇게 사고에서 도주하는 작업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함정에 안 빠지고서 그의 작업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조차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라고 하는 말조차 삼가는 그의 작업, 이번 전시만큼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전시는 그 현장에서 보여주어야만 한다. 작업실의 수많은 고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죽지도 않고 다시 환생하지도 않는다. 전시장이라는 현장에서 무엇을 기획하고 무엇을 제공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사고와 거리두기, 자신과 작품의 거리두기, 작품과 관객의 거리두기에서 그의 입장은 오해되고 그의 욕망은 희석되고 관객은 그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ps. 닷새를 고민한 이 치기어린 후배의 보챔은 그가 만든 함정인가?

윤제・포천아트밸리 예술감독

[Review] 배종헌-별 헤는 밤

배종헌-별 헤는 밤
갤러리 분도 2.12~3.8

이거 참. 별이라니. 도대체 언제였던가. 우두커니 별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때가 말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여전히 종종 그렇게 한다. 다만 나는 내가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는 사실을 숨길뿐이다. 나는 소년이 아니니까. 별을 꿈꾸기보다 안정된 삶을 감당해야하는 어른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대구에서 배종헌이 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갑자기 소년이라도 되어버린 걸까? 시선을 떨구고 어눌한 어조로 천천히 무언가 말을 할 때 배종헌은 영락없는 소년이다. 소년의 감성으로 바라본 별은 어떠할까. 여기서 갑자기 그는 훌쩍 커버린다. 그는 증거를 수집하는 감식가의 냉정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과연 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되묻고, 그것을 시각화한다. 그는 미학적 인류학자가 되어 별의 사회적 활용을 이야기한다. 그가 담담하게 털어 놓은 천공(天空)의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별이 되고자 욕망하고 있던 것이다. 그 욕망은 끊임없이 부추겨지고, 그럴수록 그 욕망의 실현은 멀어진다. 정작 충격적인 것은 별 헤는 소년의 감성으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인류학자로서 배종헌이 들이대는 증거물들이다.
별의 욕망과 그 욕망의 불가능한 실현 사이의 간극을 도처에서 출현한 수많은 별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별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주 익숙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사물들로 육화되어 있다(<운석> ). 세개의 별(삼성)이 울리는 알람이 아침을 깨운다. 일곱 개의 별(칠성사이다)이 목마름을 채운다. 별 관(冠)을 쓴 초록의 여신(스타벅스)이 감성을 달래주고, 삿포로에 취해 잠이 든다. 이미 거대한 별들이 하늘을 날고(보잉), 별이 빛나는 은행(국민은행)에서 재산을 불린다. 또 별이 되고픈 아이들을 응원하며 별이 되지 못한 좌절을 보상받는다(K팝스타). 오리온의 성좌는 이미 혀 위에서 달콤하게 녹아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배종헌이 끌어모은 별의 증거들이 하찮은 쓰레기 더미의 몰골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별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다. 별이 될 수 없으므로 더 별을 소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쓰레기 더미들은 착취당한 욕망의 흔적일 뿐이다. 배종헌은 지극히 실증주의적인 태도로서 우리 사회에서 별이 활용되는 방식들에 접근한다. 그렇다고 배종헌이 별이 오늘날 소비자본주의 시대 이윤추구의 수단일 뿐이라는 뻔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만은 아니다. 배종헌의 작업에서 읽어야 할 것은 자신의 예술을 성찰하는 방식이다. 예술은 별이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궁극적 형태였다. 반 고흐는 평생의 가난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별이 되었다. 배종헌이 에어캡(뽁뽁이) 속에 별사탕을 끼워넣는 하찮은 방식을 취하는 이유는 별이 되려는 자신의 욕망과 투쟁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별 헤는 밤>이란 별에 대한 욕망과 이윤을 맞바꾸는 동시대 자본주의 체제를 미학적으로 탐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재규정하는 시간이다. 그의 성찰이 그리는 궤적이 어떠할까를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 또한 이미 예술계에서 별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만들어가는 길 위에서 한 발 한 발 자신의 걸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동일・대구가톨릭대 교수

[Review] 박문희-미지의 생명체들

박문희-미지의 생명체들
송은아트큐브 1.16~2.22

전시장에는 구체적인 어떤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천으로 덮여있거나 걸레, 인조 머리카락, 인조 잔디 등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들추어서 그 실체를 확인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강아지나 낙타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 연결고리를 찾는 일뿐이다. 작가는 이렇게 전시된 것들을 ‘미지의 생명체들’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러한 미지의 생명체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존재인 미지의 것과 접촉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에 큰 자극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호기심이나 두려움이 이내 폭력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서로에게 긴장이 감도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내 익숙하게 되면 서로를 관찰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과 상식으로 미지의 것들을 분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과정에서 수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오해와 갈등은 항해술의 발달로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이 기술한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탐험기와 선교사들의 책이나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비단 과거만의 산물이 아닌 현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들의 원인이기도 하다.
박문희의 작품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에서는 검은 얼룩이 진 천으로 덮인 무엇인가가 있다. 이것은 정말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제목과 그 얼룩으로 자연스럽게 젖소 같은 동물이 생각난다. 심지어는 처럼 숨은 저녁이라는 제목이 붙어있고 테이블 다리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낙타라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는 강아지를 연상하게 하고, , 는 인조 모발로 덮여 있지만 여성과 아이의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이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들 안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단순한 위장과 포장으로 인하여 우리는 순식간에 새로운 생명체들과 조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이것이 정말 생명체인지도 알 수 없다. 그만큼 미지의 것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간단한 장치만으로도 쉽게 우리의 인식에 혼란을 주는 언캐니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하나의 공식을 걸어 놓았다. 그 공식은 symbol(상징)+meaning(의미)+definition(정의)을 correlation(상관관계)분에 validity(타당성)로 계산하고 beauty(아름다움)를 제곱하는 것이다. 이렇게 박문희는 자신만의 공식을 찾고 우리들에게 ‘제가 찾은 답은 이것인 것 같은데 당신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라고 자신의 공식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만약 우리가 작가의 공식을 인정한다면 미지의 생명체는 더 이상 미지의 생명체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지의 생명체를 파악하는 우리만의 공식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미지의 생명체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작가가 만들어놓은 패러독스에 빠져버리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박문희가 만들어내는 작업들의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신승오・페리지갤러리 전시팀장

[Review] 윤병주-Exploration of Hwaseong

윤병주-Exploration of Hwaseong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7~28

윤병주는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인 PT & Critic에 선정된 올해의 작가이다. 작가와 전문가, 컬렉터(collector), 그리고 관객의 진지한 토론을 통해 향후 작업방향에 대해 다같이 고민해볼 수 있게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윤병주는 이러한 과정에 기꺼이 진입하고자 하는 작가이며 서울예술대학교 사진과 졸업을 앞둔 무한 가능성을 가진 예비작가인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윤병주는 현재 땅을 파헤치고 도시개발이 한창인 경기도 화성(Hwaseong)지역에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미지의 세계인 우주의 화성(Mars)을 탐험하고 기록한 것으로 설정한다. 실제 존재하는 지명인 화성과 비실제적인 우주 화성 간 동음이의어적 측면에다 동시에 두 장소 모두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지역으로서의 유사점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렇게 화성이라는 특정 장소와 미지의 장소 화성 간의 간극은 우리 삶의 소통 중 생겨나는 끊임없는 미끄러짐과 닮아있다. 그리고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상 현실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내듯 이번 전시는 우주 화성에 대한 우리의 판타지(Fantasy)와 함께 미지의 것을 정복하고 경쟁적으로 자본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무한 욕망을 보여준다.
전시장은 실제로 존재하는 화성지역 곳곳의 사진과 영상, 사운드 채집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작가는 사진가의 시선이 아닌 기계(무선 조종 자동차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촬영)에 위임하여 자료를 객관화하고 마치 달 탐사선이 달을 탐사한다는 듯 조작된 사진과 영상을 배치한 후 이미지 자체는 화성(Mars)의 느낌으로 붉게 조작한다. 이때 조작이라는 기제를 통해 실제와 비실제 사이에 흥미로움과 재미가 더해진다. 작가는 붉게 또는 외계인 존재의 흔적인 양 조작된 이미지들, 마치 우주탐사기록과 결과를 홍보 전시하는 양 조작하는 행위들에서 상당한 쾌를 찾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즐거운 조작행위는 화성탐사과정과 수집된 조작물들을 아카이빙(archiving)한 것처럼 가정되고 멋진 탐험가로 위장한 작가 자신의 사진과 함께 영웅으로서의 기념비적 상황이 전개된다.
사진을 전공한 윤병주 작가의 이번 전시는 그에게는 매체에 대한 실험이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사진작업 <우사단>에서는 카메라적 시선의 문제나 그 시선이 가진 정치 · 사회적 문제를 이미지 자체의 조작을 통해 다루고 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화성>, , 에서는 사진과 영상매체를 통해 가상 상황을 만들고 실재를 드러내는 기록으로서의 사진매체에, 즉 도시화의 욕망과 미지의 세계를 식민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교하여 다루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 전공자로서 사진이미지의 미학적 조작보다 실재를 드러내는 가상의 설정 속에서 사진과 영상매체를 기록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에 방점을 둔 것이다. 결국 그는 사진매체에 대한 다양한 탐험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예비작가 윤병주는 다음 전시에서 어떠한 작업을 보여줄 것인가? 향후 작업방향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오세원・문화역서울 284 운영팀장

[Review] 하정우-TRACE

하정우-TRACE
표갤러리 2.6~3.5

‘그는 우리의 얼굴에 잠시 정박했다 사라지는 잡을 수 없고 정의되지 않는 감정의 미묘한 곡선을, 화면 위에 새기고 자아를 화면에 투영하여 지우므로 우리에게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허락한다.’
우리 몸 가운데 얼굴은, 내면 깊숙이 흐르는 미스터리한 감정의 곡선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사유의 영역이며, 상징적 의사를 담고 지우는 의식과 무의식의 영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성역이다. 종종 이 감정의 의사 표시는 음성언어보다 더 즉각적이고 놀라운 효과를 이끌어 오는데, 이것은 우리 내부 감정 변화의 불확실성을 명쾌함에 이르도록 안내하고 있다. 여기 자아와 실존 그리고 타자에 대한 성찰을 통한, 내적치유의 과정을 조형요소(점, 선, 면 그리고 색채)로 제안하는 작가 하정우가 있다.
그에게 예술의 행위는 “우리 정신에 깊숙이 숨고 자리한 ‘존재의 실체’를 대결과 화해를 통해, 거칠지만 감성어린 이미지를 2차원의 화면 위로 유도하여, ‘그리기’로 현상계의 수면에 풀어놓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호흡이 있고 없는 사물과 대상의 관찰과 교감하여, 그 내부의 심리적 상태를 극도로 함축한 조형언어로 사유의 장에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적 행위는 그 자신의 자아와 실체를 인식하고, 가상과 실상(은막 위의 역할과 현실)의 경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의 방에 있는 스스로를 직시하고 경계하고자 하는 최소이자 최선의 몸부림이다.
이제 그의 화면을 바라보자! 우리 눈앞에 등장한 이미지는 저 미지의 영역에서 경험한 격정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말문을 열기가 그리 쉽지 않는 듯한 인상이다. 다만 그곳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 의사표시가 역력하고, 화면에는 아직 그곳에서 본 것으로 인해, 흔들리는 불안한 눈동자만이 가녀린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정우의 또 다른 화면에는, 그와 인연이 된 인물들의 감정곡선뿐만 아니라 우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식물과 기물들에게도, 내면에 흐르는 감성과 감정이 허락되고 있다. 나아가서 그에 의해 호흡을 부여받은 사물들은 마치 인간의 그것과 같은 몸짓과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하정우의 이미지가 재현된 장소는 그의 정신과 육체가 합일되는 경계에 있다. 그곳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확장성을 가진 다른 자아의 영토’이다. 그가 표현하길 원하는 ‘사실의 실체’는 그 자신의 ‘자아의 방’에 있는 낯선 폭력성과 두려움 그리고 정의되지 않는 슬픔들(은막 위의 등장한 모든 가상과 실상의 환영)이다. 그가 우리에게 소개한 이미지들은, 점과 선 그리고 면이 교차하여 그 우연성과 필연성의 획득을 통한 ‘내적 치유’의 흔적들로 제안되고 있다. 그는 이 조형적 접근법을,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상처 입은 영혼의 내적인 치유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구기수・미술비평학

[Review] 고봉수-상상력의 기원

고봉수-상상력의 기원

금호미술관 2.13~23

냉철한 이성주의 예술가 고봉수가 현대미술에 딴죽을 거는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차가운 이성주의 문맥을 벗어나 발칙한 상상하기를 통해 이성의 객관성과 보편성의 틀을 깨고 예술적 상상의 자유로움과 확장성을 작품에 담아내는 전회를 시작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작품세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하면서도 심도 있고,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날카로운 풍자와 상상력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르네상스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작품에 담긴 신화소와 아우라를 패러디함으로써 현대미술의 한 전략을 다시금 비틀고 그 메마른 의미를 되살려낸다. 기법적 측면에서 조각장르의 한계였던 중력과 형상이 제한하는 시공간, 미디엄이 차지하는 고정관념 등을 재구축하고 타 장르 혹은 금기시되었던 미디엄의 이질적인 특성들을 과감하게 결합시키는 초현실주의적인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등장시켰다. 더불어 내용적 측면에서는 전작들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거기에 탐미적 인체 형상과 초라한 실존적 형상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충돌시킨다. 해서 그의 작품은 익숙하고 친숙했던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이 어색한 지점에서 조우하며 낯설 고 엉뚱하지만 현재의 유행적-양식화된 스타일을 조롱하며 실소를 유발하게 하는 코드를 생성한다. 미추(美醜)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자신이 추구했던 세계마저 파기시켜버리는 통렬한 블랙코미디 작품들은 과도하게 치장되고 포장된 현대미술의 골격이자 그 징후로서의 살들을 벗겨내버린다. 작가는 오랫동안 예술과 상상력의 역학관계를 깊숙이 사유했고,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궁극적 단순명료함과 묵언적 형태 속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이제 비밀스럽고 내밀한 내러티브를 부활시킴으로써 현대인의 상상력을 추동하고 고정화하는 세계-추상 혹은 상상소의 근원을 다시 직시한다. 이것은 현대미술의 난점인 제한된 상상력에 대한 반발이자 현혹되기 쉬운 유행 현상에 대한 공격이다. 그리고 컨템포러리 아트의 주요 덕목이 창발적 변용과 신선한 충격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사고와 사유는 항상 턱없이 부족해 상상력과 사유의 부재를 초래하며 결과적으로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과잉생산되는 현 시점에 대한 부정의 메시지 역시 읽어낼 수 있다.
작가 고봉수의 차별성은 전시테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오늘의 상상력의 기원은 무엇인가를 되묻는 지점이며, 현대의 무차별적 패러디 현상과 상상력 부재의 근원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점이다. 예술세계의 페르소나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내밀하고도 절대적 자유로서의 상상력은 그의 작품을 관류하는 힘이자 예술정신의 기원이며 사유함의 향(香)이다.

황찬연・예술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