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걸음으로 걷기

글 : 여경환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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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 예술가, 미디어아트의 창시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 지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 기인. 이제는 이런 수식어들로 백남준을 설명하는 것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과연 백남준과 그의 예술이 갖는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가만히 떠올려보자. “2032년 만일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만일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 만일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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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년이 14년밖에 남지 않은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남준의 예술이 던지는 의미의 좌표를 제대로 찾아가기 위해서 과연 백남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출발점이다. 백남준이 직접 쓴 각종 메모, 팩스, 기고문, 인터뷰 등을 모은 선집이 바로 1993년 에디트 데커와 이르멜린 리비어가 편집해서 불어로 출간한 《Paik: Du Cheval à Christo et Autres Écrits》이다. 2010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을 출간했고, 8년 만에 번역 개정판을 출간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1987년 일문과 영문으로 된 원고 ‘아사테라이트-모레의 빛을 위해’를 2010년 번역본에서는 영문 → 불어 → 한국어로 중역을 했다면, 이번 개정판에서는 일문 →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중략된 부분까지 살려서 완역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시나리오 팩스 자료 등을 보완하거나 번역 오류를 수정하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논쟁의 지점은 남아있다. 예를 들어 백남준 연구자인 김금미의 지적대로 ‘비결정적인(indetermined)’에 대한 번역을 이 개정판에서는 ‘불확정적’ ‘불확정성’으로 통일한 문제에 대해서는 백남준 미학의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엉켜있는 결절점으로, 향후 좀 더 풍부한 논의의 장이 열릴 것을 기대한다(건국대학교 뉴미디어아트연구소 주최 2018 콜로키움 “백남준으로부터의 메시지” 발표문 ‘Jam으로서의 백남준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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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 럼 . 에 . 도 . 불 . 구 . 하 . 고 . 368개의 각주가 달린 이 책을 백남준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이 술술 읽어내려 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0여 년의 시간과 서구문화의 중심과 동양철학을 넘나들며, 음악 ・ 미술 ・ 철학 ・ 과학 ・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등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분야부터관련 인물들, 사건들, 저서들, 개념들이 이르멜린 리비어의 말대로 ‘비빔밥같이 섞여있는 글들’을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재핑(zapping)’이다. 끝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가로지르고 넘나들면서 읽는 것만이 이 책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고, 또 백남준이 정말 원했을 독법일 것만 같다. 이때 한 사람의 독자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니라 이 책의 순서를 매번 새롭게 편집하는 편집자의 위치에 서기도 하고, 시공간과 분야를 넘나들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물과 개념들 사이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기도 하며, 1960년대 쓰여진 글이 2018년의 현재와 미래를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SF소설의 한 장면을 읽거나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바로 독자들에게 각자의 자리와 자유를 부여하는 것처럼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상상과 사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20세기를 살아간 21세기 작가인 백남준이 꿈꾼 바로 그것일 것이다.

큐레이터로서 나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피드백, 사이버네틱 예술, 우리는 열린회로 안에 있다, “불확정성”과 변동성, 랜덤 액세스 인포메이션, 텔레-비전 = 멀리 보다 등과 같은 백남준의 언어들이 그동안 백남준아트센터의 전시와 프로그램들에서 꾸준히 논의돼왔고,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구현돼왔고, 지금도 여전히 호흡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이리저리 재핑하면서 과연 무엇이 백남준을 이끌었는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소박한 고백 – 그것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고, 가변적일지라도 – 으로 대신한다. “어쩌면 내가 한국인 혹은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소수민족의 콤플렉스’ 덕분에 아주 복잡한 사이버네틱스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 아닐까?”(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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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 까지》

백남준 지음 / 에디트 데커, 이르멜린 리비어 엮음 / 임왕준, 정미애, 김문영, 이유진, 마정연 옮김  (재)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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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미술 > vol.407 | 2018.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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