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LEE IN

이인은 먹과 모필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동양화 재료 안에서 광대무변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가 매만지고 깎고 그리고 구겨낸 것들은 모두 깊고 잔잔한 검정으로 응축된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수묵의 선, 종이에 스며든 먹의 질감과 물의 경로는 상징과 문자로 환생한다. 이 ‘검은 어떤 것’들은 소박하지만 격조 있는 호흡으로 과거의 시간을 향해 유영한다. 작가는 갤러리 초이(4.7~28)와 아트스페이스 KC(4.3~15)에서 개인전 〈검은, 어떤 것(Black, something)〉을 연다.

이 인은 195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동국대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20여회의 개인전 개최와 〈공전〉(2021,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수묵 신작로〉(2021, 광주시립미술관), 〈One Breath-Infinite Vision〉(2019, 뉴욕한국문화원), 〈천일면식〉(2018, 잉크스튜디오 북경) 등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평면과 입체, 동양과 서양, 물질과 비 물질, 전통과 현대. 그것들의 질서와 본성을 파악해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형상으로 드러낸다.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금호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OCI미술관, 서울대미술관 등에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인 - 검은 어떤 것

김주원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1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 자리한 이인의 작업실에서 작가의 근작을 보았다. 근작이라지만 오랜 시간 반복을 거듭해 축적되어 나온 것들이라 내게 조금은 익숙하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그 무수한 반복 안에서 나름의 변형을 장난처럼, 놀이처럼, 혹은 지치지 않고 그 일을 수행해내려는 어떤 열망에서 나온 에너지로 매만져놓은 흔적들을 어지간히 부려놓고 있다. 이 부지런한 작가는 쉼 없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칠하고 쓰고 긋고 파고 만들기를 반복한다. 그것들은 죄다 검정의 색채로 수렴되어 응고되었다. 아니 흰색에서 회색과 짙은 검정에 이르는 스펙트럼에 걸쳐진 색의 계조 안에서 출렁이는 어둡고 무거우면서도 깊고 가라앉은 색들, 하여간 먹색의 색조 영역 안에서 가능한 색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전에는 다양한 색채도 함께 쓰였는데 근작은 다시 검은색으로만 제한되고 있다는 점이 달라졌다.

한편 기본적으로 먹과 모필을 핵심에 두면서 이 도구, 재료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 범주 안에서 그림을 만들어간다는 인상이다. 결국 이인은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체험의 틀 안에서 가능성의 궤적을 그리는 편이다. 물론 그는 먹과 모필, 종이란 재료에 국한하지는 않는다. 그는 핸디코트, 아크릴, 연필, 콘테, 캔버스, 도예(오브제), 설치 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활용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먹색과 모필, 선의 맛을 극대화하거나 이를 보다 감각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선상에서 보조 수단에 머무는 편이다. 오브제와 설치 작업 역시 먹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한다. 먹이 침윤되고 칠해지고 그림과 문자가 작동되는 피부의 영역, 공간의 위상학적 변이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벌어진다. 그러니 이인의 작업은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조형세계의 여러 전거를 참조하면서 작업의 궤도가 그려지기에 이른바 문인화, 서예, 전각 등을 여전히 축으로 삼아 그 운치와 감각을 겨냥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들을 현대미술의 익숙한 여러 어법과 모드와 결합해내면서 감각적이고 세련된 먹 작업의 어느 수준을 고려해 풀어내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그것들이 어느 부분에서는 다소 흩어져 작업의 핵심 고리들이 다소 느슨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로서는 그의 작업의 매력이 여전히 종이에 먹물이 스미고 번지고 얼룩지면서 갖가지 형상, 도상, 부호, 문자와 색채, 붓질을 다양하게 씹어내거나 물고 있는 것에서 나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종이에 먹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유형의 그림에서 자신의 감각적인 솜씨를 보다 예민하게, 장식적으로 순발력 있게 발휘한다.

〈검은, 어떤 것 - 아해 2〉 캔버스에 혼합재료 162×112cm 2022

2 작가의 근작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종이에 먹으로 그린 먹그림, 일종의 드로잉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온갖 형상과 부호, 기호, 문자와 먹색과 붓 놀림의 갖가지 변주가 유희적으로 펼쳐지는데 이 변화무쌍한 것들의 반복성이 흥미롭다. 주어진 작은 사각형 화면, 그 한정된 조건을 그림의 실존적 조건으로 껴안으면서, 그것에 견인되어가면서 그 안에 머릿속에 저장된 온갖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출력해내는 그리기인데 이는 자유로운 연상작용에 의한 즉흥적 그리기를 실현하는 것이자 가능한 한 자신의 의지를 무력화하고 주어진 재료에 순응하거나 목적론적인 그리기를 약화시키면서 진행하는 편이다. 먹으로만 칠해서 적셔진 화면, 일종의 색면 추상에 해당하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모필의 선 맛이 문자와 숫자의 형태를 지니며 출몰하거나 순수한 도형이 부유하는 경우도 있다. 먹의 농담이 달라지면서 검은 색상 안에서도 다양한 색층을 안겨주는가 하면 형상과 문자, 숫자, 도형, 선과 서체, 구상과 추상 등등이 혼재되어 그림을 보는 재미를 안겨주는 동시에 개별 화면들은 저마다 단독으로 혹은 몇 개씩 짝을 지어 연결되어 나갈 수도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시각정보에 따른 영향 관계를 반영하는 그림인 동시에 그 모든 상징과 부호, 이미지, 미술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회화의 파편들을 무작위로 호명해서 재배열하고 재편집하는 식의 그림에 해당하기도 한다.

3 작은 그림의 연장선상에서 종이나 캔버스의 중심부에 원형이나 타원형과 유사한 덩어리를 위치시키는 것이 작업의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두툼한 질감, 질료성으로 연출된 덩어리가 흡사 인간의 얼굴이나 돌의 형상을 연상시키면서, 모호한 그 무엇인가를 암시하듯 화면 위에 떠있다. 그것을 얼굴이라고 혹은 돌이라고 또는 얼굴/돌이거나 아니면 ‘검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이인은 오랫동안 얼굴이나 돌의 형상을 즐겨 그려왔다. 그는 직관적으로 한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을 얼굴이게 하는 요소가 지워지고 표정이 망실된, 덩어리로만 드러나는 그것은 관념적인 얼굴이다. 특정한 한 개인의 얼굴이 아니며 구체적인 무엇도 아니다. 단지 그 무엇과 같은, 그 무엇이라고밖에는 달리 형언하기 어려운 모호한 이미지, 형상이다. 동시에 돌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옛사람들은 돌에서 장수를, 불변을, 침묵과 배신하지 않음을 보았다. 나아가 지조와 절개, 군신의 예를 헤아렸다. 너무 얇고 가벼운 입술과 부박한 마음을 대신해 저 돌과 같은 강건함과 결연함을 안으로 지니고 싶어 했다. 당연히 돌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상징이 되었다. 그것이 동양의 돌과 관련된 문화, 텍스트를 이룬다. 그래서 돌은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존재가 된다. 군자의 덕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멸과 불변, 침묵과 고요, 깊음과 차가운 성찰을 상징한다. 아득한 시간, 세월이 최후로 남긴 얼굴이기도 하다. 부동과 정적 속에 단호한 물성으로 굳은 돌은 영원성을 보여주며 모든 수식과 허세를 누르고 더없이 졸하고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형상, 몸을 안긴다. 그러니 이인이 돌을 그린 이유가 있고 그 돌과 인간의 얼굴을 동일시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편 이인이 그린 얼굴은 미완성이다. 아니 완성이란 없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생성 중이다. 완결이라는 개념은 동양인의 사고방식과는 무관하다. 사람은 결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묘사하거나 완성하는 것은 참모습일 수 없으며 지극히 한정된 의미밖에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의로 완전한 서술, 완벽한 재현을 피한다. 따라서 동양의 전통적인 그림은 완료의 상태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형성 중의 객체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산수화는 사물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함축이다. 최소의 형식에 최대의 내용을 담으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존재의 형은 최소이고 의미의 형은 최대이다. 그에 따라 화면은 무한한 생장과 진행을 가장 간소한 꼴로 보존하며 일종의 역동적 이미지로서 무한한 풍부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산수화에서 여백은, 운무나 안개 자욱한 풍경은 일부분만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다. 나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그림 속 자연은 온전히 보이기보다는 일부는 가려지고 나머지는 여백, 텅 빈 화면 안에 잠겨있다. 많은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적게 보여주고 다 보여주기보다는 일부분만 보여주는 편이다. 아니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하는 것이 그 대상을 좀 더 잘 보게 하는 일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억을 반추시키고 꿈꾸게 하고 회상과 여운 속에서 사물과 대상을 추려내게 하는 것이다. 망막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시(視)욕망을 짐짓 누그러트리고 망막 이외에 몸이 지닌 다양한 감각기관과 정신적 활력을 통해 상상하고 지각하게 한다. 덩어리로만, 원형으로만, 질료 덩어리로서 촉각적으로 존재하는 이인의 얼굴/돌은 바로 그런 것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검은, 어떤 것 1〉 가변설치 2022

〈인간적인 1〉 캔버스에 혼합재료 122×122cm 2012

4 근작에서 다소 낯설고 흥미롭게 본 것은 도예를 이용한 작업이다. 종이나 캔버스에 그리던 도상들, 형상들이 흙으로 빚은 일정한 기형의 표면에 올라가는 형국이다. 기본적인 그릇, 화병 형태 혹은 원통형의 구조로 빚어낸 바탕을 지지대 삼아,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에 구워낸 기물 위에 아크릴과 핸디코트 등을 바르고 사포질을 반복해서 고른 피부를 만든 후 연필과 콘테, 먹물 등을 입혀서 그림을 그리거나 두껍게 칠한 검은 바탕 표면을 칼로 파내 전각을 하듯 문자를 새기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새기고 파내는 다양한 손의 감각, 그 손의 놀림을 반영하는 도구의 활용 흔적이 고스란히 촉각적으로 전달되는 경로를 작가는 생생히 즐긴다. 화병 형태를 지닌 오브제의 피부 위에 자유롭게 그리고 칠하고 새기는 등의 여러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화병/오브제는 구연부와 목, 어깨와 몸통으로 이루어졌는데 작가는 이를 몇 개의 화면으로 나누어 색면과 그림, 문자를 넣어 개입한다. 평면과 달리 입체의 피부 위에 구사된다는 점에서 평면과 다른 매력이 존재하고 또한 오브제를 활용하기에 그것 자체가 조각적으로 존재하고 바닥에 설치된다는 점에서도 매우 가변적인 존재로 활용되는 편이다. 이 작업의 경우는 애초에 회화적인 제작을 고려해서 화병의 크기와 구연부와 목, 몸통 등의 비례 조율이 요구되고 동시에 이 모든 부분이 상호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지게 표현되는 방편이 요구된다. 이 작업 역시 종이 작업에서 구사한 것과 동일하게 먹으로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까만 먹의 색감만을 잔뜩 칠한 모노 톤의 추상 작업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나로서는 진하고 두터운 바탕 면을 만든 후에 추사체의 글자를 전각하듯 새긴 작품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식물 이미지와 새, 원형의 점, 한자, 기하학적인 문양과 선들이 장식적으로 얹히고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상당히 감각적으로, 장식적으로 화면을 꾸려나갔다. 단순하고 절제된 화면 구성과 동시에 표현적인 형상의 절충, 재료의 물성(질감)에 대한 탐닉, 추사체의 원용, 이미지와 문자의 결합 등이 복합적으로 조율된 작업인데 이는 오밀조밀한 재미와 절묘한 장식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그 모든 것은 문인화적인 모종의 맛, 멋을 힘껏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본인이 선택한 동양화작업에 대한 정체성 모색과 함께 자신의 감수성과 미의식이라는 취향의 문제, 한국 전통의 편린들에 대한 흠모와 사라진 시간에 대한 채집과 선인들이 지닌 미적 취향에 대한 감식, 기호의 결정 등등이 두루 탑재돼 있기에 배어나온 것이다.

5 이인은 이번 근작에 대해 ‘검은 어떤 것’이란 제목을 붙였다. 그는 먹을 주된 재료로 삼고 연필과 콘테 등을 함께 다룬다. 모두 검은색인데 이 검정의 여러 층차(層差) 안에서 모종의 깊음과 침잠된 분위기를 일궈낸다. 모필과 칼이 그것들을 실어나른다. 붓은 물을 머금고 먹을 타고 종이라는 지지대 속을 유영한다. 비결정적 구조를 지닌 한지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 그 조직에 순응한다. 먹색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고 모필을 유희하는 감촉의 영역 또한 상당히 아득하다. 좋은 작가들은 기존의 다소 상투화되거나 습관적인 먹의 쓰임이나 모필의 활용에서 벗어나 수묵이란 재료를 자기가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펼쳐내는 쪽으로 몰고 가고자 한다. 여기서 수묵이란 재료는 당대의 삶의 감수성이나 작가가 보고 읽어낸 것으로부터 번져나가는 또 다른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쪽으로 환생한다. 그리고 동양화는 선의 예술이다. 그 선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선이다. 단지 사물의 외형을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데 옹색하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 선은 묘사를 뛰어넘어 어떤 기품의 경지로 내달린다. 보여줄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근원을 향해 마구 질주하는 것이다. 이인은 구체적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상징과 부호, 문자에 의지한다.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라 상상과 관념의 매개들이자 또 다른 세계의 영역으로 몰고 가는 징검다리 같은 것들이다. 그가 사용하는 종이에서 먹과 모필/선은 물을 매개로 가능하다. 한지는 물을 빨아들이며 물에 탄 먹을 흡수한다. 물의 속성, 흐름이 종이의 조직 사이로 스며든다. 물의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그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붓의 놀림은 바로 그런 물의 흐름, 속성을 보여준다. 붓에 의지해, 먹에 의탁해 이리저리 흐르고 휩쓸리고 지나가는 물의 이동과 경로가 들어온다. 한편 이인이 써나간, 파낸 문자들은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그림 그 자체다. 죽죽 그어나간 필획의 맛과 칼맛이 함께 하고 먹의 농담과 필선의 세와 이어지고 끊어지는 선의 맛, 생동하는 획들이 자아내는 여러 조형적인 묘미가 바글거린다. 그것은 전적으로 선이 이룬 추상적인 드로잉이자 회화이다. 특히 그의 전각의 맛이 가득한 글의 맛이 좋다, 조지겸이나 제백석의 칼맛이 그 어딘가에 맴돈다. 글꼴은 추상체를 연상시킨다. 추사의 경우는 분명 서예이지만 동시에 회화 자체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놀라운 공간 운영, 탁월한 조형성, 유희와 해학미, 농익은 미적 감각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 글자 하나하나는 이미 문자/그림의 경계를 부수고 있다. 기괴하고 고졸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으로 빛나는 필획들이 순수한 조형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추사의 글씨는 당대부터 괴이하고 난해한 글씨로 평가되고 불계공졸(不計工拙), 즉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가릴 수 없는 경지의 글씨였다고 한다. 서예가뿐만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조형예술가가 그의 서예에 깊이 매료돼왔다. 실상 추사체의 본질은 필획과 글씨 구성의 힘에 있다고 한다. 서예는 서예가의 독특한 붓의 기운과 동시에 쓰여진 한자의 형체를 빌어 비가시적인 모종의 세(勢)를 실체화 하는 일이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형상(붓질과 문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자극의 방편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필법의 기술은 각 예술가의 개성을 담아내며, 그 각각의 필획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인 데에 호소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전통 동양화에서 표현 역시 필선에 의존한다. 선이 중심인 동양화에서 필력은 곧 그림의 전체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붓의 운동성과 경향성은 공간상에 움직임, 즉 변화를 가져오고, 그 변화의 성질로 인해 시각적인 에너지가 발생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이는 회화가 매력적인 이유와 동일하다. 회화의 매력 역시 그 작가만의 몸짓, 호흡, 그리고 그의 총체적인 감각을 반영하는 붓질의 전이에 있다. 점과 획의 결합만으로 이루어진 서예는 운필의 방향, 속도, 운필 중의 압력에 따라서 표현되는데 단순하게 말하자면 먹의 윤갈, 선의 굵기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무한한 변화를 추구한다. 획에는 운이 있어야 하고 운은 격을 말한다면서 획을 통해서 작품의 격조가 드러나야 한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아취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질박하고 소박하기도 해야 한다. 이는 물들이거나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동양의 서화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던 것이었고 동시에 우리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들이 한결같이 추구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인의 근작인 ‘검은 어떤 것’의 여러 유형의 작업들, 다양한 재료와 방법론으로 시도되고 연출되는 것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것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사진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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