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땅 이야기:
Kazakhstan all the time》

전북도립미술관  2023.12.8~3.10
Exhibition Focus

아스캇 아크메디아로프 〈가만히〉 무쇠솥 가변 크기 2022 제공 : 전북도립미술관

태도가 저항이 될 때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교수

이 글은 하랄트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 1969 ) 그리고 예술성의 기준을 ‘정치적 진보’(저항 )와 겹쳐 놓으려는 벤야민의 시도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제만은 작업실 -미술관 -갤러리라는 폐쇄적 회로에서 예술을 죄고 있던 고삐를 확 풀어버렸다. 예술은 고정불변의 오브제라는 한계를 벗고, ‘작업’이자 ‘개념’, ‘상황’인 동시에 ‘정보’로서 존재하게 된다. 제만의 반대편에 벤야민이 있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적 전환의 장소”일 따름이다. “정치적 전위가 예술적 전위의 위치를 결정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예술적 전위를 대체하기도 한다.” 할 포스터는 예술의 정치성을 당연시한 벤야민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흥미롭게도 제만과 벤야민, 그리고 포스터를 겹쳐 놓을 때, 그 어울림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태도/저항은 형식/사회의 간극을 건널 유용한 돌다리를 갖게 된다. 그 돌다리는 자못 유용하다. 예술은 그 도저한 예술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에 맞설 수 있다. 예술가는 태도로써 당대 사회를 변화시킬 어떤 발언을 던진다. 그렇게 태도는 저항이 된다. 이 전시는 광활한 가운데땅으로 휘몰아치는 폭풍에 예술, 혹은 예술에 관한 태도로써 맞선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그 폭풍의 땅은 카자흐스탄이다.

가운데땅 이야기
처음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전시의 지평을 가늠하지 못했다. ‘Kazakhstan all the time’이란 부제가 눈에 들어왔을 때, 어떤 생각이 본능처럼 떠올랐다. “아, 여기 뭔가 있겠구나.” 카자흐스탄은 역설의 땅이다. 거침없는 정복의 역사가 광활한 초원의 경이와 역설의 양면을 이루는 신비의 땅이다. 또 인간의 영웅적 위대함에 관한 모더니티의 과장된 신화를 스탈린과 ‘세미팔라틴스크’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미팔라틴스크는 1949년부터 1991년까지 116회의 지상 핵실험과 340회의 지하 핵실험이 벌어진 죽음의 땅이다. 이 비극은 동시대 카자흐스탄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대비된다. 천연가스와 막대한 지하자원은 카자흐스탄을 이미 1인당 3만 달러가 넘는 경제강국으로 만들었다. 이 역설과 반전의 역동성은 동시대 카자흐스탄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가운데땅’은 그 역동성을 잘 표현한다. 가운데땅은 톨킨(J. R. R. Tolkien )의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장소다. 불사의 땅 ‘마이아’, 엘프의 ‘아르만’, 완전한 인간의 거처 ‘누메노르’ 사이의 중간지대이자 인간, 사우론, 난장이, 호빗, 엘프들이 혈투를 벌이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음모와 배신, 사랑과 신뢰를 나누며 존재의 의미를 구한다. 《가운데땅 이야기》는 카자흐스탄을 예술가의 공적 개입이 수행되는 무대로 삼고 있다.

예술은 그 도저한 예술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에 맞설 수 있다.
예술가는 태도로써
당대 사회를 변화시킬 어떤 발언을 던진다.
그렇게 태도는 저항이 된다.

‘과거’ 섹션이 전시된 4전시실 《가운데땅 이야기》 전시 전경 2024 제공 : 전북도립미술관

포스트 소비에트 예술의 과제
전시의 외양은 크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 4전시실은 카자흐스탄의 ‘과거’를 다룬다. 여기서 화두는 사라져가는 민족적 정체성과 유목 생활의 전통을 미학적 형태로 복원하는 것이다. 5전시실은 카자흐스탄의 현재 정치적 상황에 대한 작가들의 직 · 간접적인 발언을 전하고 있다. 특히 소비에트 체제의 비극에 대한 기억과 독립 후 권위주의 독재, 급속하게 전개된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은 여기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3전시실은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다룬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불안과 혼돈이 흥미롭게 해석된다. 이들 작가는 새로운 카자흐스탄을 위한 미학적 근거로서의 공통체험을 집적해 나가고 있다.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과거의 위대한 역사와 전통에 접신함으로써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카자흐스탄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이다. 바자르갈리예프(Kuanysh Bazargaliyev )의〈모든 사람이 카자흐인이었을 때〉(2013 )는 위대한 서양의 역사를 카자흐의 관점에서 다시 쓰고 있다. 키질 트랙터(Kyzyl Tractor) 콜렉티브는 직접 유목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미학적 민족지를 수행한다. 그들은 수천 년간 이어진 공동체의 전통과 접신하고 이를 퍼포먼스와 사진, 미디어아트를 통해 제시한다. 이러한 작업은 정주(定住 )화 정책을 통해 카자흐스탄 민족을 땅에 묶어 두려 했던 소비에트 지배 이전의 원초적 삶을 상기시킨다. 바키트 부비카노바(Bakhyt Bubikanova )는 민족적 정체성 복원을 예술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자신의 문제로 변용한다. 작가는 텅 빈 건물 이곳저곳을 자신의 스승 몰다쿨(Moldakul )의 이름을 외치며 배회한다. 그만큼 카자흐스탄 예술가에게 미학적 과제는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사회적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둘째, 카자흐스탄이 겪은 탄압과 비극적 희생에 대한 기억이다. 누르볼 누라크멧(Nurbol Nurakhmet)은 지극히 회화적인 방식으로 훼손된 신체들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신체들에 새겨진 운동복과 신발의 문양은 일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만큼 국가폭력은 일상에서 언제 어느 곳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울레 술레이메노바(Saule Suleimenova )는 LPG 가격 폭등으로 촉발된 ‘피의 1월’ 사건 현장을 전시장에 옮겨 놓는다( 〈알마티의 하늘〉 ). 유사하게 아스캇 아크메디아로프(Askhat Akhmedyarov )는 전통 솥뚜껑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가만히〉 ). 그것들은 관객들이 솥뚜껑 사이를 걸을 때마다 서로 부딪쳐 굉음을 낸다. 이 소란은 정부와 러시아군의 유혈진압으로 일순간 소비에트 지배체제로 되돌아간 그날의 충격을 상기시킨다. 셋째, 일상의 사물과 환경에 관한 체험이다. 이 체험은 리아잣 카님(Lyazzat Khanim )의 SNS 화면과 디지털기기의 미끈한 물질성( 〈Landscape〉 )부터 마랏 딜만(Marat Dilman )의 로봇 이미지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이미 보편화된 사물의 경험으로부터 향후 카자흐스탄 공동체의 토대가 될 공통체험의 저수지를 만들어 간다.

‘미래’ 섹션이 전시된 3전시실
《가운데땅 이야기》 전북도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전북도립미술관

공동체의 근거, 여성성과 모성
이 전시는 여성과 모성에 관한 특별한 관심을 표명한다. 코콘자(Kokonja )의 작업은 카자흐스탄 여성의 전통 가정사와 관련이 있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직조와 바느질은 정교한 공예가 아니라 평범한 게르에나 있을 법한 천과 여성의 머리카락을 이어 붙인 것이다( 〈운명의 비행〉 ). 이러한 작업을 통해 코콘자는 위기와 혼란 속에서 카자흐스탄 공동체를 굳게 지켜낸 것은 바로 일상의 여성성임을 형상화한다. 아딜벡(Aida Adilbek ) 역시 카자흐스탄 한 가정의 일상을 담담하게 추적한다( 〈손바닥(Alaqan )〉 ). 작가의 할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정원에 물을 주고, 카자흐의 전통 치즈를 만들며, 또 다른 여성(어머니 )과 차를 마신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성의 반복되는 하루가 정작 사회적 위기와 유목의 불안정한 삶을 지탱하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성과 모성에 관한 자의식과 관심은 동시대 카자흐스탄 예술의 차별성을 담보하는 한 주춧돌로 기능한다.

〈광장〉과〈검열〉사이
고려인의 후손, 로만 자카로프(Roman Zakharov )는 웹툰 같은 드로잉 〈광장〉(2022 )을 걸었다. 카자흐스탄 당국(대사관 )이 전시 후원을 명분으로 이 작품의 철거를 요구했을 때 그는 그저 일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의 생각과 메시지는 정방형의 공간과 오브제 – 일품의 한계를 넘는다. 〈광장〉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이 카자흐스탄을 벗어나 2023년 대한민국의 미술관에까지 이르는 사실에 관한 증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자카로프의 대응이다.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광장〉의 자리에 〈광장〉을 건다. 〈광장〉은 일체의 이미지를 배제한 채 한글과 영어로 이렇게 적었다. “검열 : 죄송합니다. 이 작품은 검열상의 이유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 한 문장은〈검열〉의 자리가 〈광장〉이 있던 곳이며 동시에 권력에 의해 〈광장〉이 철거되었음을 유쾌하게 폭로했다. 〈검열〉은 〈광장〉의 부재로써 오히려 〈광장〉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권력의 탄압을 드러냈다. 사실 〈광장〉은 정방형 건물을 에워싼 군인을 “무서움”이라는 단어로 묘사했다. 그러니까 자카로프에 작용하는 검열의 주체는 민중을 탄압하는 바로 그 국가권력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려는 자카로프의 태도는 예술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독재를 극복하려는 정치적 저항과 분리되지 않는다. 《가운데땅 이야기》는 태도가 저항이 되는 순간 표현의 자유가 사회공간의 민주주의와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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