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즈》는 ( )가 아니다

윤원화 미술비평

Special Feature

고요손 〈방법 5 다홍과 붉은 숨소리, 꽁꽁, 파편, 드디어 드러난, 껍질 안에, 내면의 비밀〉
파티셰르 르데쎄흐와의 협업 혼합매체 11×13×8cm 2023
제공: 작가

시장의 승리
《굿-즈》를 모르고 별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그 이벤트를 설명해야 한다면, 나는 2024년 프리즈 위크 기간에 진행되었던 ‘을지로 나이트’ 비슷한 거였다고 얼버무리고 얼른 도망칠 것 같다. 하지만 그 자리에 《굿-즈》를 좋아하거나 싫어했던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즉각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굿-즈》는 좀 더…,” 좀 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서울 시내의 소규모 미술 공간에서 활동하는 신진 작가, 기획자들의 연합 쇼케이스였다. 그것은 작품에서 파생된 작고 가벼운 형태의 상품들을 ‘아트 굿즈’ 또는 ‘굿즈 아트’로 소개하는 경쾌한 판촉 행사였다. 그것은 미끼 상품밖에 없고 오픈 행사가 끝나면 사라지는 도깨비시장이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요즘 유행하는 팝업 전시의 기본 문법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라이언 트레카틴이 자기가 틱톡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듯이. 예술이 상업화되고, 미적 경험이 마케팅을 위한 게임의 한 부분으로 재조직되고, 인터넷 문화가 물리적 공간으로 표출되는 경향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걸 한데 뭉쳐서 미술전시를 아날로그 오락실 겸 일회용 쇼핑센터로 재구성한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이런 접근은 21세기 초반의 지난 20여 년을 현재 시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다소 거칠게 요약하는 하나의 큰 줄거리를 상정한다. 2000년대로 되돌아가서 누군가에게 (이를테면 과거의 나 자신에게) 앞으로는 예술이 시장 경제에 통합되고 디지털 매체 환경이 부와 권력을 향한 투쟁의 중심지가 된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깜짝 놀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2000년대 미술시장의 분위기는 어떤 면에서 2020년대와 비슷했다. 자본 유입이 늘고, 시장 규모가 커지고, 신진 작가들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와 예술의 영역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시장 바깥의 삶이 있었고, 아직 상품화되지 않은 문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피난처를 찾거나, 그들을 활용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거나, 때로 그 둘을 구별 불가능하게 뒤섞어 버리기도, 더 쉬웠다. 지금 그 영역은 작고 희미해져서 거의 믿음의 대상으로만 잔존한다. “믿습니까?” 2015년 《굿-즈》 현장에서 아무나 붙잡고 목적어 없이 이렇게 물었다면,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화를 냈을 것이다. 그들이 매대에 진열해 놓은 소박한 상품들은 이미 믿음의 보충물과 대체물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주어도 술어도 없는 물음표를 깜빡이고 있었다.

《굿-즈》를 결말이 예정된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로 본다면, 지금 그것을 불러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한때는 예술 경영과 마케팅의 모범 사례로 《굿-즈》의 성공 비결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탄탄한 자본력으로 더 질 높은 미술 상점을 구현하는 기획자들, 예술 소비의 경험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작가들이 있다. 오아에이전시가 기획한 《PRPT:테이블 서비스》(2023)나 고요손이 파티셰들과 협업한 《섬세하게 쌓고 정성스레 부수는 6가지 방법》(2022~2023)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작품을 음식에 비유하여 문자 그대로 접시 위에 올려서 서빙했는데, 섭식이 소비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임을 상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아름다움을 맛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공을 들였다. 물음표는 느낌표로 치환된다. 미술이 동시대 소비문화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문화 산업의 다른 영역과 호환 가능한 동시에 경쟁 우위를 점해야 함을 뜻한다. 그 모든 소란이 진정한 예술과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은 《굿-즈》를 비난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비난이 무슨 소용일까. 설령 과거로 돌아가서 《굿-즈》를 없앤다고 해도, 결국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생겨났을 것이고, 현재의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아에이전시 《PRPT: 테이블 서비스》 Y173 전시 전경 2023
제공: 오아에이전시

파도 만드는 기계
앞의 이야기를 열린 결말로 고쳐 쓸 수 있을까? 지금은 작가들이 전시를 하고 작품을 판매할 창구가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공간을 새로 열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작은 공간들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그 역동성은 주도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예술 활동에 대한 흐릿한 열망을 일깨운다. 또는 단순히, 무언가 좀 더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일어난다. 아마도 이것이 2025년 시점에서 《굿-즈》가 호출되는 이유일 것이다. 《굿-즈》의 관객이자 소비자였고 현재 ‘YPC 스페이스’의 공동 디렉터인 유지원은 10년 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대안적이라고 보기에는 목적이 불분명하고,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기에는 힘이 한군데로 모이지 못했으며, 진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오히려 장난처럼 보였던, 마치 콩알탄처럼 무작위로 모여 부딪히고, 사건을 만들고, 아무렇지 않게 흩어지기를 반복했던 구간.”1 여기에는 정해진 목적이나 계획 없이, 제도적 규제나 시장의 요구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현재의 조건에 반응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어떤 동시대적 예술운동에 대한 상실감과 기대가 뒤섞여 있다.

이주요가 2017년 영국 더쇼룸에서 정지현과 함께 진행한 《Dawn Breaks》 프로젝트는
전시장 인근 주민을 
초청하여 개인적인 사물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워크숍을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간의 사물과 조형을 재구성한 프로젝트다.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그러나 개별 공간들과 작가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만든 이벤트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굿-즈》의 목적이 불분명해 보이고 그 힘이 한 방향으로 집중되지 못했던 건 각자의 목적과 지향과 욕망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굿-즈》에 관한 과거의 대화들이 결론을 맺지 못하고 불만 섞인 침묵으로 종결되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되묻게 되는 것은, 그렇게 제각각인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함께 움직일 수 있었냐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우리가 각자의 예술을 탐색하면서 따로 또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운동장은 어떤 형태일까. 이것은 그들의 질문이기도 했고, 지금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 《굿-즈》는 시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미술시장과 예술가 지원 정책, 서브컬처 동호인 행사, SNS와 비디오 게임을 참조한 일시적 극장이기도 했다. 참여자들은 그곳에서 (그들이 받은 기금 명을 활용하자면) ‘작가’와 ‘미술’과 ‘장터’를 합산하는 각자의 아이디어를 상연했다. 예술과 상업을 심각하게 믿거나, 그런 믿음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거나,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작가와 관객이 보기보다 가벼운 작품들을 진짜 돈과 교환할 때마다, 계기판의 바늘은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어지럽게 출렁거렸다.《굿-즈》가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유명세를 탄 이유는 그것이 예술의 가치 체계를 교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가치 평가를 회피하거나 유보하는 게 아니라 파도타기처럼 경솔한 평가의 연쇄 반응을 촉발함으로써, 미술 제도에 의해 규제되던 예술의 위계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작가와 관객의 유입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굿-즈》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안정화하기에 적합한 형식은 아니었다. 그 이벤트의 일차적 의의는 너무 무거운 믿음과 너무 팽배한 불신 사이에서 짓눌리지 않고 움직이기 위한 활동 공간을 개방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현장에서 자기 작품을 부술 수도 있었고, 그 파편들을 소중히 포장해서 판매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상반된 몸짓들이 대수롭지 않게 이어지는 순간들은 예술을 믿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굿즈는 열성적인 팬들이 직접 만날 수 없는 화면 속 존재에 대한 사랑을 구체화하는 매개체다. 작가의 작품은 굿즈로 변형됨으로써 예술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고 응답받는 다양한 연극적 행위에 휘말렸다. 그러나 그런 ‘플레이’가 특정한 사물이나 사람을 유일무이한 사랑의 대상으로 확립하여 교환 불가능한 가치를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굿-즈》는 예술을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을 함께 찾아보는 자리였지만, 사랑받는 예술이 되는 방법은 각자가 고민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유지원 『미술 사는 이야기 신생공간이라는 사건과』마티 2024

시차 속에서 보기
그때와 지금 사이에는 시차가 있다. 당시 《굿-즈》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은 미술시장을 그들과 무관한 비현실처럼 여겼고, 그들이 익숙하게 즐겼던 인터넷 문화 역시 조금은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남아 있어서, 둘을 교차하여 무대화하는 것만으로 현실을 이탈하는 듯한 운동감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은 시장과 디지털 매체가 현실을 규제하는 좀 더 실제적인 힘으로 존재하고, 그것을 이용하거나 회피하는 행동은 각자의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비현실적 극장을 원하든 현실적 대안을 원하든 간에 2025년에 《굿-즈》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오면 또 하나의 아트 페어가 될 것이다. 무엇이 예술이고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겨루는 화려한 무대는 이미 충분히 많다. 그러나 전시가 열리고 거래가 성사되는 흥분된 순간들의 앞뒤로 계속 이어지는 작가들과 작품들의 긴 시간을 어떻게 엮어갈 것인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가치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재미와 의미와 효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어떻게 계속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예술을 하면서 어떻게 건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소소하지만 절박한 물음에서, 21세기 초반의 동시대 미술사를 대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하는 거대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다.

《Open Corridor》 인터럼 전시 전경 2024 사진: 박홍순

이런 관점에서 《굿-즈》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중앙 집중적 가치 체계나 추상적인 자본의 순환과 구별되는 좀 더 분산적이고 창조적인 예술 애호 시스템의 전망이 눈에 띈다. 모든 참여자가 작가이자 관객이자 소비자이자 협업자로서 상호 참조와 해석을 통해 집단 창작을 전개하는 포스트 프로덕션의 놀이터에 대한 기대가 있다. 이는 《굿-즈》 이후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던 유사한 성격의 판매전들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대안적 예술 생태계를 그리던 다른 프로젝트들, 이를테면 이주요가 정지현과 함께 진행한 《Dawn Breaks》(2015~2017)나 이후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선보인 〈Love Your Depot〉(2019~)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유토피아적 요소다. 위험과 보상이 모두 개별적으로 계산되는 현재의 미술시장을 보완하는 예술 공유지는 어떤 형태로 그려질 수 있을까. 전 ‘교역소’ 운영자로 《굿-즈》의 기획에 참여했던 독립 큐레이터 정시우는 좀 더 시스템적인 해법을 찾았다. 그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홍진훤과 함께 개발한 〈게임-샌드박스 레지던시〉(2022)는 레지던시 작가들이 작업 데이터를 서로 공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협업 시스템으로, 장기적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 공유지에서의 집합적 창조와 세계 짓기를 지향했다.

이주요 〈Love Your Depot〉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19
사진: 박홍순

그렇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렇게 크고 거창한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소수의 작가들이 서로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함께 엮었던 작은 전시들을 좀 더 애착을 갖고 기억한다. 작가들이 정말로 서로의 관객이 되면, 그들은 일시적이나마 시장의 반응에 개의치 않는 자족적인 피드백 회로를 형성한다. 《굿-즈》의 기획자 중 하나였던 손주영이 박정우와 함께 만든 《Open Corridor》(2024)는 그가 캔버스 짜는 일을 하면서 생긴 가늘고 긴 자투리 천을 다른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신작을 의뢰한 결과였다. 그는 각각의 참여 작가들에게 평소 그들의 작업을 어떻게 보았고 왜 하필 이런 모양의 천을 골랐는지,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일일이 편지를 썼다. 관객은 그의 편지와 그에 대한 작가들의 시각적 답변을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허둥지둥하는 순환 속에서 느리게 고이는 것들을 지켜보고 보살피는 일은 시스템에 탑재될 수 있는 기능이 아니다. 작품을 앞에 두고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지는 적절한 거리감과 친밀함을 요구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걸맞은, 또는 미래의 우리에게 합당한 예술 형식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GSR(Game-Sandbox Residency)〉 실시간 웹 생성, 사운드,
컬러, 가변 지속시간 니콜라스 펠처, 안성석, 이다 다이스케, 이은솔, 정진화,
한수지 작업 데이터를 이용해 창작 웹 개발 홍진훤 2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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