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2024.3.16~7.7
Exhibition Focus
토마스 허쉬혼 〈친애하는 세계에게,〉혼합 매체 가변설치 2024
《능수능란한 관종》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부산현대미술관
관종하는 탈-눈길-소리-판,
문득 거울
신용철 부산민주공원 학예실장
전시 스스로가 거대한 방송 세트이며 그곳에 23가지의 방송 스튜디오가 들어서 있는 형국이다. 부산현대미술관은 방송사이고 이를 관장하는 제작자는 큐레이터이며, 각 스튜디오(채널)를 만드는 피디는 작가(그룹)이다.
나는 관종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직업인으로서, 개인으로서 일상을 드러내는 관종이다. 빨래를 전시하고, 일하는 스스로를 전시하고, 전시를 전시한다. 관종큐레이터라 할만하다. 관종큐레이터에게《능수능란한 관종》전은 퍽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며, 먹잇감을 먹는 식탁이며, 먹방을 촬영하는 스튜디오이며, 먹방이 실시간 중계되는 채널이다.
이번 전시는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증상으로서 관종(관심+종자 )을 고찰하는 국제 기획전이다. 국내외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연구자 등 23명(듀킴, 성능경, 신민, 신신, 이강혁, 이목하, 원정백화점, 조영남, 권시우, 장진택, 마코, 컨아밈, 컬처 코뮌, 아나 멘디에타, 크리스 버든, 크리스틴 티엔 왕, 다르코 매이버, 에바 & 프랑코 매츠, 조지 네텔, 과리오넥스 로드리게즈 주니어, 줄리아나 헉스터블, 피에로 만초니, 토마스 허쉬혼 )이 참여했다. 전시 작품은 회화, 조각, 사진, 영상, 설치, 비평, 연구, 아카이브 자료 등 100여 점이다.
가히 관종의 고고학이고 관종의 에피스테메라 하겠다. 관종이라는 그물에 걸린 작가와 작품의 이념 지형, 미학 지형은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있어, 결과 켜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물을 이루는 실의 짜임이 불균질-불규칙-불협하다. 관종의 그물에 작가와 작품들이 걸렸다기보다는 관종이라는 그물을 작가와 작품들이 떠받들어 파도로 출렁이게 하거나 치켜들어 깃발로 펄럭이게 하거나, 밀어붙여 언덕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나, 관종큐레이터는 그물을 타고 출렁이며 그물에 실려 펄럭이며 그물에 얹혀 꿈틀거린다.
신민 〈미진美珍 유진流珍〉 스티로폼, 종이, 크레용, 박스, 목공풀 400 × 100 × 150㎝ 2024
《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부산현대미술관
탈판, 탈마당
전시장 들머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파사드 벽면은 꽤나 힙(Hip)한 전시 제목 로고 아래 신신이 만든 참여작가(그룹)별 그래픽디자인 로고 23개와 부산현대미술관 로고로 이루어져 있다. 기획자는 전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 그래픽디자인을 바탕으로 미적 파사드를 연출했다. ‘능수능란한 관종’이라는 탈판을 열며 23가지의 탈마당을 펼쳐보인다. 24번째 자리 잡은 부산현대미술관도 스스로 24번째의 탈마당이다.
들머리에 서서 우리를 굽어보는 신민의 거대한 조각상〈미진美珍 유진流珍〉은 탈판으로 들어가는 통과의례의 문을 지키는 사천왕상이며, 현란한 관종의 스테이지로 이끄는 기도1이며, 물신의 신전을 지키는 신상이다. 기어이 사천왕상, 기도, 신상과 눈을 맞추어야 한다. 째려보든 우러러보든 그리하여 눈을 깔든 눈길을 의식하며 관종의 탈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힙한 파사드에서 미루어 짐작했던 대로 전시장은 23개의 탈마당으로 정교하게 구획되어 있다. 23개의 탈마당은 갖가지 관종의 스테이지이자 스튜디오이며 채널이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공중파에서 방영한 예능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보는 듯하다. 감상자는 탈판의 설계자와 시공자가 공모해서 만든 23가지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탈판을 만나게 된다. 《능수능란한 관종》 전시 스스로가 거대한 방송 세트이며 그곳에 23가지의 방송 스튜디오가 들어서 있는 형국이다. 부산현대미술관은 방송사이고 이를 관장하는 제작자는 큐레이터이며, 각 스튜디오(채널)를 만드는 피디는 작가(그룹)이다.
1 편집자주 ) 기도(きど 木戶)는 일본어로 극장이나 유흥업소 따위의 출입구 등을 지키는 사람을 뜻한다
전시 구성의 설계 전술을 이해해야 전시의 전략을 알아챌 수 있다. 23개의 탈마당은 제각각 돌아간다. ‘관종’이라는 키워드? 아니 해시태그(#)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관종’으로 검색될 가능성만으로 이어진 미적 결과물이다. 이념의 지형, 미적 지형이 매우 다를뿐더러 국내작가, 해외작가가 섞여 있고, 작가의 활동 연대도 매우 넓게 분포한다. 당연히 작품의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음악과 미술과 예능을 가로지르는 일명 딴따라 아트테이너 조영남의 키치가 있는가 하면, 한국 실험미술, 개념미술, 행위예술의 오래된 미래라고 부를만한 성능경의 진지하고 발랄한 작품도 있다.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어마무시한 슬로건을 내걸고 거리를 선전 · 선동하는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컬처 코뮌의 레트로 세계가 있는가 하면, ‘예술은 개뿔’이라고 말하며 밈으로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론을 세상에 뿌리는 컨아밈의 자조적인 스티커 작업도 있다. 예술의 현상학적 존재를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이어붙인 토마스 허쉬혼의 재치있고 방대한 설치작업이 있는가 하면, 웹사이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적 공동체 ‘마코’의 도발적 아카이브와 비평 작업도 있고, 전시 자체를 관종으로 다루는 ‘장진택’의 메타적 작업도 있다. 혼성적 자아를 연출하는 ‘듀킴’의 도발적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욕망과 이미지의 메커니즘을 탐색하는 ‘원정백화점’의 물신비판적 작품도 있다. 그리하여 전시는 해시태그를 바탕으로 관종의 에피스테메를 보여주는 파일럿 프로그램이다. 이 그물에서 미술관도 전시행위 스스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
탈 사이에 낀 눈길
관종은 ‘관심+종자’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종자’는 본디 식물의 ‘씨앗’을 뜻한다. 때로 동물의 ‘새끼’를 부를 때도 쓰인다. 굳이 ‘종자’라고 강조해서 부를 때는 상대를 낮잡아 보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관종을 부정의 의미로 쓸 때는 ‘관심병자’라는 뜻을 품어 병리 현상으로 읽히기도 한다. 관종이 자라난 말밭은 복잡하다. 관종의 바탕에는 갖가지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지형이 도사리고 있다.
관종이 스스로 만들고 깃든 틀은 ‘탈’이다. 탈은 본캐2와 부캐3사이, 생활세계와 예술세계 사이에 걸려 있다. 탈은 보는 이와 보이는 이 사이에 걸려 있다. 탈을 사이에 두고 눈길은 갖가지 눈길들을 만들어낸다. 눈길들은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스치는 눈길로 어긋나기도 하고, 눈길 위에서 굽어보기도 하고, 눈알을 안으로 기울여 눈길의 바닥을 긷기도 하고, 눈길이 스스로 낸 흔적을 훑기도 한다.
눈길은 관심의 손을 뻗어 ‘탈 잡고’, 탈 잡은 거리는 본캐와 부캐 사이에, 생활세계와 예술세계 사이에 탈로 그려낸다. 탈은 관종이 자리 잡은 파도이고 깃발이며 언덕이다. 탈은 눈길을 디딤새로 갖가지 널을 뛴다. 널뛰기를 지탱하는 힘은 욕망이다. 욕망은 지향점이 없다. 욕망은 욕망하는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의 상승은 하강과 맞춤을 춘다. 급기야 우리는 탈과 이어진 눈길의 바탕에 도사린 욕망을 맛볼 뿐이다.
듀킴 〈매혹적인 제물〉 단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4분 37초 2024
《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작가, 부산현대미술관
드러내면서 감추는 탈, 소리
드러냄과 감춤이라는 이항대립은 탈을 지탱하는 두 가지 기둥이다. 드러냄과 감춤을 설계하는 욕망은 설계자 자신의 욕망이 아니다. 설계자의 욕망은 보는 이의 욕망에 기대어 있다. 보는 이의 기대지평이 설계를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기대심에 따라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출지 결정하는 것이다. 이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보는 이며, 설계자는 차라리 시공자에 가깝다. 그리하여 탈은 설계자와 시공자가 공모하여 세운 탈이다. 탈은 눈길들을 타고 떠다닌다.
탈이 눈길을 타고 떠다니는 궤적이 탈소리이다. 탈소리는 눈길 위에 그려진 탈의 악보이다. 악보가 그려내는 화음과 화성의 불균질-불규칙-불협은 갖가지 다른 소리의 공모에서 비롯한다. 욕망의 복화술이라 부를만하다. 제 입으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제 입을 빌려 다른 이의 말을 하는 것이다. 제 입에서 다른 이의 말을 길어내는 이는 입을 바라보고 있는 이다. 입속을 들여다 듣는 이는 제 입을 뻗어 말하는 이의 입을 빨아들여서 제가 듣고 싶은 말을 기어이 뽑아낸다. 입을 사이에 두고 소리의 설계자와 시공자는 따로 또 같이 공모하고 협력한다.
성능경 〈사색당파-특정인과 관련 없음〉 종이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잉크 각
26.4 × 21.2㎝ 2015 《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작가, 부산현대미술관
메타예술의 틈, 곳, 판
《능수능란한 관종》전은 관종을 탐구하는 메타-관종이다. 관종의 다양한 꼴로 관종의 본질을 묻는 메타이다. 메타시는 시의 꼴로 시의 본질을 묻는 시이다. 시의 주어가 시다. 메타영화는 영화의 꼴로 영화의 본질을 묻는 영화이다. 영화의 주어가 영화다. 메타이야기는 이야기의 꼴로 이야기의 본질을 묻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야기다. 전시장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관종의 탈, 눈길, 탈소리에 출렁이고 펄럭이고 꿈틀대며 스스로 관종이 된다. 전시라는 것 스스로가 관종이다. 《능수능란한 관종》은 메타전시다. 전시의 꼴로 전시의 본질을 묻는 전시다. 나아가 메타예술이다. 전시라는 예술의 꼴로 예술의 본질을 묻는 메타예술이다.
생활세계와 예술세계, 창작자와 감상자, 설계자와 시공자 사이,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사이에서, 있지만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여전히 늘 그 낌새와 조짐으로 머물다가, 때때로 어느덧 재빨리 골탕 먹이고 놀려주는 자리에 작품들은 능수능란하게 끼어들어 있다. 전시는 문득 문과 문 사이에 난 틈이고, 곳과 곳 사이에 놓인 다리고, 판과 판 사이를 잇는 마당이다. 큐레이터의 욕망은 능수능란하게 배채(背彩 ) 또는 산점투시(散點透視 ) 되어 있다.
그리하여 거울이다. 갖가지 탈들이 걸린 전시장을 압도하는 매체는 거울이다. 작품의 명제가 새겨진 명제표는 거울판이다. 작품이라는 탈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거울 앞에 선 저 스스로를 관종할 수밖에 없다. 거울판은 카메라며 채널이며 눈이다. 작가의 눈이며 큐레이터의 눈이며 우리의 눈이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를 관종한다. 우리 관종은 이어져 있다.
2 편집자주 ) 본래 캐릭터의 줄임말. 롤플레잉게임(RPG )에서 처음 만든 캐릭터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의미가 확장하여 현대 사회 자아가 다중화되는 현상 속 자신의 원래 모습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3 편집자주 ) 부 캐릭터의 줄임말. 롤플레잉게임에서 여러 역할을 경험하기 위해 새로 만든 캐릭터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의미가 확장하여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여러 사회적 역할 중 하나를 지칭할 때 쓰인다
에바 & 프랑코 매츠 〈보았던 내용〉 박제 고양이, 전자레인지, 지워진 하드 드라이브
50 × 40 × 120㎝ 2022
《능수능란한 관종》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2024
제공 : 작가, 부산현대미술관
인터뷰
토마스 허쉬혼
(Thomas Hirschhorn)
진행 강재영
통역 구민지
스위스 출신 작가 토마스 허쉬혼은〈그람시 모뉴먼트〉, 〈인플루언서 시리즈〉등 철학 개념과 사회 문제를 관람객에게 던지고 반응과 행동을 유도하는 작업으로 니콜라 부리오, 할 포스터 등이 그를 언급하면서 구미 미술계의 시선을 끌어왔다. 월간미술은 이번 전시 참여를 위해 처음 한국 땅을 밟고, 부산에서 일주일간 체류하며 작품을 완성한 토마스 허쉬혼을 인터뷰했다.
사진 : 강재영
이번 전시 《능수능란한 관종》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떤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나?
이번 전시 주제에 끌렸다. 이 전시는 중요한 질문, 숨겨 왔던 욕망, 특이한 행동, 모호한 긍정, 고치지 못한 습관과 같은 주제를 두루 다루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겸허하게 저 자신을 돌아본다면, 스스로 일종의 ‘관종’이란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과연 능수능란한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을 바라고 인플루언서가 되려 하는 건 사실이니까.
이번 작업 〈친애하는 세계에게,〉에서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작품 제목이자 전시장에 게재된 소개 글인 ‘친애하는 세계에게,’는 저항정신을 유지하고, 인간으로서의 입지를 견지하며, 불복종하는 자세를 잃지 말자는 내용이다. 관심이란 것은 시몬 베유가 강조했듯 철학적 논제다. 관심을 끌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관심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관심이란 가장 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라는 인용구를 통해 강조하고 싶다. 소셜 미디어를 활용할 때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입장을 견지해야지,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 큐브의 중립성에 예술가로서 ‘저항(resist)’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서의 전략은 무엇인가?
‘화이트 큐브’ 자체라기보다는 ‘화이트 큐브 효과’에 대항하는 수단에 여러 가지가 있다. 재료로 덮어 버리기, 장애물 활용하기, 전시장 바닥을 장악하기, 거리 좁히기, 관람자를 불편하게 하기, 유혹이나 부가가치적 전략 지양하기, 작품 자체에 여러 제약 가하기, 무엇보다 최대한 많이 만든다는 원칙 등이 있다. 그 모든 경우, 중요한 것은 ‘화이트 큐브’ 자체에 대항하기보다 작품 자체를 ‘위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연결된 초고밀도 사회 풍경을 묘사한 것이 전작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어떤 움직임의 촉구, 이행이라고 볼 수 있나?
이번엔 3점의 개별적 작품, 즉 12종의 인-플루언서 포스터 (I-nfluencer-Poster), 36종의 밈(MEME )과 포스트(POST ), 2종의 자동차-부자(Car-Rich )를 한데 엮어냈다. 포괄적 주제에 대한 내 입장을 ‘디어 월드’라는 텍스트로 연결하고, 판지를 활용해 미학적 연결점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따라서, 판지로 바닥까지 뒤덮었다. 이들은 예술 작품이기에,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닌다. 따라서, 다른 그 어떤 작품보다도〈디어 월드〉는 관객과의 연결을 요청하고 촉구하는 이야기이다.
관람자가 어떤 것을 느끼고 가기를 원하나?
한국인을 포함한 모든 관람자가 작품을 스스로와 연결되었다고 느끼게 하고 싶다. 그런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작품을 모두 한국어로 번역해 제시할 수 있어서 기뻤다. ‘연결’이란, 다른 사람의 손길을 느끼고, 작품에 대해 생각하며, 흥미를 품고, 호기심을 느끼고, 더 알고 싶어 하고, 동요하고, 작품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세세히 살펴보고 싶어하고, 집착하고, 다시 와서 확인하고,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고, 물론 궁극적으로는 변화하는 걸 말한다.
재료의 선택에서도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잘 드러난다고 생각된다.
작품 속 두 대의 ‘자동차-부자’는 보편성, 이동성, 지위의 상징, 필요성뿐 아니라 에너지의 문제를 체현한다. 두 대의 기아(Kia )차는 골판지를 변화, 특히 세상의 변화를 위해 사용하는 제 의지를 뜻한다. 박스는 일상적 재료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재활용이 가능하다. 이것을 전시장에 들여와서 전시장을 덮는 행위 자체가 미학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미술과 SNS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다고 보나?
소셜 미디어는 진정한 진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에게 큰 문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술에서 다뤄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예술적으로 다룰 주제를 제공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소셜 미디어를 비판하고, 또 다루는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할 때 소셜 미디어를 ‘미학적’ 요소로 활용한다. 다른 요소로는 ‘사랑,’ ‘철학,’ ‘정치’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소셜 미디어가 예술 작품의 수용과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예술 작품을 확장하고 또 그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이 있다. 예술 작품의 수용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본다.
관심을 수치화하고 계량하는 SNS, 당신에게 이러한 관심은 어떻게인식되는가?
이것이야말로 까다로운 요소이자 중요한 질문이다. 즉, 다른 이들에 관한 관심이나 그들과의 상호작용을 정량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지는, 소수의 몇몇과의 상호작용의 강도가 우리로 하여금 배우고, 진보하고, 진화하고,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다수의 팔로워나 ‘좋아요’ 인증이 이러한 강도를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숫자의 문제는 늘 확대 지향이란 점이다.
전시라는 매체가 세상을 바꾸는 데, 혹은 더 나아지게 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나?
다른 행위들과 더불어, 전시를 기획하고 방문하는 경험이 우리가 평소 소홀히 해 왔던 그 무엇과의 연결점을 찾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할 것이라 믿는다. 전시 덕분에 만나고, 발견한다. 딱히 예술 작품 전시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환경적, 기술적, 역사적 전시 등 모두를 포괄한 생각이다. 많은 이가 전시에서 글을 읽거나 소리를 들으며 이리저리 주의를 기울이는 걸 보고 항상 놀라곤 한다. 전시의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전시’라는 형식에 대한 저항, 또는 이를 위한 저항도 매력 요소로 작용한다. 전시를 본다는 것은 늘 인간의 육체적, 지적 능력 간의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국은 처음인데, 혹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에 온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첫인상은 아무래도 지극히 피상적이다. 즉흥적으로는 ‘집중’이란 표현을 떠올릴 수 있다. 지금까지 만나고 함께 일할 수 있었던 분들은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고, 헌신적이었으며, 목표 의식이 확실했다. 여정 중에 만난 주변 사람으로부터도 마찬가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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