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타이틀 매치 홍이현숙 VS 염지혜《돌과 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4.12.5 ~ 3.30
Exhibition

2024 타이틀 매치 홍이현숙 vs. 염지혜 《돌과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입구 로비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작품 제작지원: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돌과 밤의 변증법
권태현 독립큐레이터

홍이현숙〈당신이 지금 만지는 것-인수봉〉
광목천에 크레용 프로타주 1100×155cm(6) 2024

홍이현숙과 염지혜의 ‘돌과 밤’은 수많은 시적, 이미지적 미끄러짐을 경유하여 파국과 희망 사이를 연결해 내기도 한다. ‘돌과 밤’이라는 개념이자 이미지는 홍이현숙과 염지혜라는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표상하면서 동시에 작업과 전시를 통해 얽혀있는 다층적인 변증법적 상태 그 자체를 나타낸다.

홍이현숙과 염지혜, 두 작가가 맞붙었다. ‘타이틀 매치’라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연례 기획 맥락에서 보면 맞붙는다는 말에서 치열한 대결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다. 인간, 남성, 근대 등등의 계열체와 연결되는 체제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대결로서의 맞붙음. 하지만 이 전시가 만들어낸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맞붙음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접촉을 통해 감응하고 변화하며, 나아가 주고받은 영향 속에서 각자를 규정하는 경계까지 녹아내리는. 돌이 밤이 되고, 밤이 돌이 되었다가, 또다시 돌과 밤으로 돌아가는, 그러나 그 이전과는 다른 돌과 밤이 되어 있는, 그래서 돌과 돌이, 밤과 밤이 또 다르게 만나는, 그런 맞붙음.

전시 서문은 홍이현숙의 작업을 돌로, 염지혜의 작업을 밤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홍이현숙은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인수봉〉을 통해 거대한 바위의 표면을 대규모 프로타주 작업으로 미술관에 옮겨 왔고, 염지혜는 〈마지막 밤〉과 〈한낮의 징후〉라는 두 작업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문제는 홍이현숙의 돌에는 밤이 깃들어 있고, 염지혜의 밤에는 돌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홍이현숙의 돌과 밤, 염지혜의 밤과 돌은 제각각 다른 개념이자 시어, 이미지, 또 물질이기도 하다.

홍이현숙의 돌-이미지들은 눈으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다. 만지고, 닦고, 문지르며 다른 개체의 면과 면이 닿은 흔적이 이미지이자 물질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낮의 밝은 세계를 광학적이고 시각적이라고 한다면, 홍이현숙의 이미지는 온몸으로 더듬더듬 빚어낸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여전히 빛을 통해 눈으로 봐야 하는 이미지이지만, 시각중심성을 성찰하는 밤의 세계가 그곳에 겹쳐있다. 물론 홍이현숙의 이번 신작들은 프로타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카메라로 찍은 광학적인 이미지들인데, 그것들은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이라는 제목이 붙은 일련의 연작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홍이현숙은 2019년의 승가사 마애불, 2023년의 월출산 시루봉, 그리고 이번 전시의 인수봉까지 이어지는 연작을 통해 시각적인 이미지로 번역되는 촉각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 야들야들, 오톨도톨, 까실까실 등 의성어와 의태어가 가득한 작업 노트에서 홍이현숙은 일련의 이미지들을 “촉각 지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홍이현숙〈아미동 비석마을〉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3분 42초 2024

거대한 프로타주 작업은 인수봉에서 이른바 대슬랩(大 slab)이라고 불리는 바위의 표면을 옮겨온 것이다. 슬랩은 클라이밍에서 확실히 손에 쥘 수 있는 홀드가 거의 없는 평평한 바위를 말한다. 이런 암벽을 타는 사람들은 잡고 오를 틈새를 눈으로 보고 찾는 것뿐만 아니라, 오돌토돌한 바위의 표면을 손끝 발끝으로 세심히 더듬으며 촉각을 곤두세워 몸과 바위의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프로타주 옆에 상영되는 기록 영상에는 커다란 인수봉 바위에 천을 내려 그 위를 문지르며 흔적을 남긴 여러 협업자들의 분투가 담겨 있다. 어떤 물질의 표면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의 움직임과 신체가 닿았던 흔적이라는 차원에서 프로타주 이미지의 지표성은 사진이나 영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미지이자 그 자체로 물질인 이 작업은 하나의 흔적, 하나의 증거로서 여기에 제출된다. 그리고 이런 촉각적이고 신체적인 문제에서 홍이현숙이 특별하게 감각한 것은 바로 바위의 온도이다. 온몸으로 바위와 관계를 맺는 산악인들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지는 바위의 온도를 남달리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프로타주에서 붉은색으로 달아오른 바위의 이미지는 기후 위기라는 거시적인 개념을 한 명 한 명의 몸이 느끼는 감각의 차원으로 번역한 것처럼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화이트큐브로 자리를 옮긴 바위의 흔적은 벽에 수직으로 서 있지 않고, 보는 사람을 덮치듯 압도하는 각도로 설치되어 방관하는 관객들의 몸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같은 전시장의 다른 편에 설치된 〈아미동 비석마을〉에는 또 다른 돌들이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 형성된 일본인 공동묘지에 6·25전쟁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삶의 자국들이 묘지의 흔적을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마을 곳곳에서 묘비가 튀어나온다. 계단이나 집을 지탱하는 주춧돌, 특히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밟고 올라서는 댓돌이 묘비인 경우도 많다. 삶을 표상하는 집과 죽음을 표상하는 묘비가 이상하게 뒤섞인 것이다. 작가는 비석마을 곳곳의 비석을 매만지고, 닦고, 심지어 그것을 빨래판 삼아 빨래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몸짓은 작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의 연결 속에서 다른 시간, 다른 민족까지 넘나든다. 중간에 등장하는 일본인 퍼포머는 일본 제국의 군복을 입고 비석마을 사이사이를 다니고, 부토를 연상시키는 춤을 춘다. 역사적인 차원의 지난 시간과 일상적인 지금, 구체적인 삶과 익명의 죽음 같이 아주 성격이 다른 것들이 주술처럼 뒤엉키기 시작한다. 골목 곳곳에 회색 가스통이 즐비한 한국식 서민 주택 양식과 일본식 묘비, 그것을 덮어버린 시멘트, 원색의 페인트 같은 것들이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일본인 퍼포머와 홍이현숙은 그 층 사이사이를 누비는 것처럼 보인다. 영상의 후반부에는 두 퍼포머가 상이한 시공간의 층을 가로질러 함께 만나 춤을 추기도 한다. 서로 다른 것이 어우러지는 그 춤은 이질적인 층위에 구멍을 뚫어 관통하면서도 둘 사이를 꿰어낸다. 그렇게 완전히 다른 것들이 이미지의 차원에서 연결되는 감각적 도약이 만들어진다.

염지혜〈마지막 밤〉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25분 2024

이런 도약은 〈아미동 비석마을〉이라는 하나의 작업에 머물지 않고, 홍이현숙의 다른 작업들 사이에서 혹은 염지혜의 작업까지 뻗어나간다. 인수봉의 암벽과 아미동의 비석, 두 돌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전시라는 시공간의 몽타주를 통해 시적으로 연결된다. 염지혜의 작업에 등장하는 절벽과 바위들도 마찬가지이다. ‘돌과 밤’이라는 물질로 쓴 시. 이미지로 쓴 시가 여기에 있다. 이런 방식의 연결과 확장은 같은 층 건너편에 있는 홍이현숙의 과거 작업을 전시한 공간에서도 흥미롭게 작동한다. 그중에서도 ‘위안부’로 끌려갔던 문옥주 할머니의 묘를 수요집회 참여자들이 쓴 편지로 덮는 작업 〈조촐한 애도〉와 이웃의 자살을 애도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삭발하는 퍼포먼스 영상 〈물주기〉는 애도라고 하는 문제에선 연결되지만, 각각 2016년과 2005년 작업으로 연속성을 가지진 않은 작업이다. 심지어 영상의 화질과 화면 비율까지 완전히 이질적인데, 이번 전시는 두 작업을 마치 2채널 영상처럼 나란히 설치했다. 흥미롭게도 〈조촐한 애도〉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무덤 이미지와 〈물주기〉의 삭발한 머리의 클로즈업 쇼트는 겹쳐지면서 두 작업 속에 두 죽음과 두 애도는 하나로 연결되었다가 다시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기존과 다른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낸다. 또한 작가는 본인이 영상에 퍼포머로 등장할 때면 항상 똑같은 파란색 꽃무늬 원피스를 착용하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2009년의 〈북가좌동 엘레지〉부터 이번 전시의 신작인 〈아미동 비석마을〉까지 관객들은 전시 곳곳에서 마치 귀신을 만나듯 영상 속에서 같은 형상을 마주하게 된다. 시공간을 가로질러 출몰하는 작가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를 또 이상한 방식으로 꿰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 사이의 기이한 연결은 염지혜의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마지막 밤〉과 〈한낮의 징후〉는 애초에 낮과 밤이라는 쌍으로 이루어진 작업이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염지혜의 이전 작업과 연결되는 캐릭터나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2021년 작〈사이보그핸드스탠더러스의 코〉나 〈물구나무종 선언〉 등 작업으로 제시한 물구나무종 같은 구체적인 설정도 그대로 공유되면서 염지혜가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게 포착된다. 그는 인간중심성과 근대성, 가속주의 등으로 표상되는 오늘날 우리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모양새를 기존과 다른 감각적 체계 속에서 성찰할 수 있도록 한다. 이번 전시의 신작인 〈한낮의 징후〉와 〈마지막 밤〉 두 작업도 기본적으로 가속주의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면서, 진보와 발전이라는 근대적 시간 관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수 있는 틈을 벌린다.

〈마지막 밤〉은 그 자체로 시간을 이상한 방식으로 접어낸다. 영상은 ‘딜레이’를 자막 텍스트와 음성으로 반복하면서 시작한다. 지연이라는 문제를 다르게 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간단한 장치인데, 정말 영상의 전개가 지연되어서 ‘왜 시작을 안 하지’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연을 지연이라고 말하면서 그 개념을 형식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가속과 지연뿐 아니라 주름과 바위, 산화와 불, 사이보그와 신체 등을 이상하게 연결하며 어떤 개념적 도약을 만든다. 예컨대 사이보그 타이츠를 입고 너무도 인간적으로 춤을 추는 몸에서 포착되는 기이한 역설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을 상상해 보자.

염지혜〈한낮의 징후〉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7분 2024

〈마지막 밤〉 영상의 초반부, 이 작업의 주요 캐릭터의 얼굴이자 가면에 움푹 패인 주름은 오랜 시간 풍화로 만들어진 돌의 주름과 노골적으로 오버랩된다.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는 그 겹침은 살과 돌, 무른 것과 단단한 것, 산 것과 죽은 것, 껍질과 알맹이 등 서로 다른 개념과 이미지들 사이로 미끄러진다. 특히 하나의 작업에 국한되지 않고 전시라는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런 겹침은 홍이현숙의 인수봉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그것보다 가깝게는 〈마지막 밤〉 영상이 설치된 공간의 앞뒤로 놓인 회화 작업 〈불 습작〉 연작이 만들어내는 연결도 흥미롭다. 시간과 주름이라는 문제에서 단채널 영상과 회화의 매체성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염지혜가 만들어낸 이 성좌에서 회화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을 따라 펼쳐지지 않고, 그 자체로 압축되어 접혀있는 이미지처럼 보인다.

〈한낮의 징후〉도 실제 촬영한 무빙이미지와 스틸이미지를 몽타주하면서 내용뿐만 아니라 영상에 형식적 차원에서 속도와 시간이라는 문제를 다루기에 〈마지막 밤〉과 통한다. 나아가 가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감속, 역행, 퇴행, 분해, 물구나무종 등을 직접 언급하는데, 무엇보다 여기에 엘 그레코의 16세기 매너리즘 회화 이미지를 충돌시키는 점이 눈에 띈다. 마녀사냥과 과학혁명이 교차하던 16세기, 그리고 발전과 진보를 거듭하던 르네상스 미술이 어떤 정체를 만난 순간으로서의 매너리즘. 그것을 표상하는 엘 그레코의 이미지는 20세기 미래주의나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통해 근대적 시간성의 형성을 성찰하는 것만큼이나 미술사를 경유하여 시간을 이상하게 접어낸다. 마침 영상 작업 옆에 비상계단으로 나가는 작은 문이 있고, 그 너머에〈징후 습작〉이 한 점 걸려 있다. 무언가 전시가 될 만한 공간이 아니지만, 그곳에 침대에 누워 있는 인물처럼 보이는 그 이미지는 이상하게 눈길을 끈다. 무기력하면서도 어떤 힘을 품고 있다. 그것도 전시장과 전시장이 아닌 경계의 비상구 앞에서. 가속의 끝은 그냥 파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염지혜는 잊지 않고, 비상구에 빛을 비춘다. 그때 ‘아포칼립스’는 ‘감춰진 것을 드러내다’라는 어원을 가진다는 것이 영상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또 하나의 겹침.

사실 이런 희망의 순간은 전시장 곳곳에서 솟아오른다. 염지혜는 영상의 마지막에 희미한 글씨로 “절망에서 구원을 바라며”라는 글자를 새겨 넣기도 했다. 홍이현숙은 프로타주 작업의 하단을 아직 열을 받지 않은 검은색으로 남겨 두었다. 딱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높이 정도를. 이렇게 홍이현숙과 염지혜의 돌과 밤은 수많은 시적, 이미지적 미끄러짐을 경유하여 파국과 희망 사이를 연결해 내기도 한다. 돌과 밤이라는 개념이자 이미지는 홍이현숙과 염지혜라는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표상하면서 동시에 작업과 전시를 통해 얽혀있는 다층적인 변증법적 상태 그 자체를 나타낸다. 전시장 한편에는 ‘타이틀 매치’라는 맥락에 어울리지 않게 둘의 협업 작업이 전시되기도 했다. 각자 텍스트를 번갈아가면서 읽는 일종의 목소리 몽타주 작업인데, 헤드폰을 쓰고 들으면 두 목소리가 왼쪽 오른쪽을 오가며 말과 글이 이미지처럼 그려진다. 경쟁을 한참 넘어선 접힘과 겹침이 또다시 발견된다. 돌과 밤은 그렇게 각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기도 하고 밤이기도 한, 두 명의 작가, 하나의 전시. 그리고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곳을 통해 연결된, 연결될 모든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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